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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0장 예레미야의 영적침체의 극복

LNCK 2024. 10. 3. 12:2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75747

 

예레미야의 영적침체의 극복      렘20:1~9          2008년        <영적침체>

 

오늘 본문 말씀은 예레미야의 12편의 예언 설교 가운데 이제 8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예레미야의 8번째 설교는, 신비한 환상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 평범한 일상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렘18장 19장, 20장이, 예레미야의 8번째 설교인데, 
18장에서는,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에 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그 토기장이의 집에서, 토기장이의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어요. 

토기장이가 녹로에서 진흙을 돌리며, 이렇게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다시 무너뜨리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일상을 통해서, 자신에 대하여서 말씀(계시)을 하셨습니다. 

19장에서는, 하나님은 그에게 하시드 문 곁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보내셨어요. 19:2
그곳은 예루살렘 성의 쓰레기 하치장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많은 것들이 깨어져 있고, 계속해서 불이 타오르는 곳이었죠.

늘 모든 것들이 버려지고, 깨지고, 불타오르고 있는 그 일상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 거역한 자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어요. 

그 쓰레기 하치장에서 모든 것들이 산산히 깨어지고 
모든 것들이 계속 꺼지지 않는 불가운데 타는 것처럼,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인생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서,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통해 말씀하셨어요. 

20장 오늘 본문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목해 보고 계시는 
예레미야의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그 예레미야의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

 

서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성경은 고도로 정직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위인전의 경우 사람의 단점은 가리우고 장점만 과대포장 합니다.

 

그러나 성경속의 인물은 그가 위인일지라도 잘못한 것을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요나, 노아,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의 실수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직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렘20:7~12절에서, 예레미야는 자기의 본심을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고 있습니다.

사람에게가 아닌 하나님께만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은밀히 털어놓은 본심을 만천하에 성경으로 공개해 놓으셨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절망감, 혼란, 영혼 안에 있는 쓴 뿌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20:14~15절에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그는 너무 절망감이 심하여, 이렇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17~18절에도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예레미야는 자기 인생을 고생(trouble), 슬픔(sorrow), 수욕(shame) 이라는 세 단어로 말합니다.

이걸 가리켜 depression(우울증) 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심각한 depression을 겪고 있습니다.

 

depression은 의기소침, 우울증, 혹은 영적침체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depression을 불경기라고 번역하는데

great depression은 경제공황을 말합니다.

 

2008년도 10월 현재 전 세계는 각가지 depression을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8년 설교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로 주가 하락, 환율 상승의 경제위기입니다.

 

주식투자로 5조의 손실을 입은 사람도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depression입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의 이 심각한 depression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1. 영적침체의 원인

 

예레미야는 참으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이 어찌하여 이처럼 극심한 depression을 겪고

자기 생일조차 저주하는 사람이 되었는가?그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세상이 그를 거부(rejection)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고,

함께 섞여 사는 존재인데 언제, 어디서나 소외 당하니 결국 depression을 겪게 된 것입니다.

 

왜 예레미야는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했는가요?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전하라 하신 메시지를 그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메시지의 핵심은 8절에 나오는

강포(violence)와 멸망(destruction), 두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축복의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의 침략을 받게 되고 폭력을 당하게 될 것이며

결국 유다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예레미야가 이와같은 메시지를 거듭 전할 때의 성전 총관리자는 바스훌 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의 경찰청장과 같은 직책입니다.

성전의 질서를 지키는 경찰청장이 예레미야를 잡아서 때렸습니다.

 

본문 2절에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 채웠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처럼 하나님이 증거하라는 메시지를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매맞고 목에 나무로 된 칼을 차게 되니,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그의 심정을 눌러 결국 우줄증이라 할 정도의 depression을 겪게 된 것입니다.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풀어줍니다.

풀려나면서 선지자는 바스훌에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본문 3절에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바스훌이라 하는 의미는 '세력을 확장할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너의 세력은 앞으로 확장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름은 마골밋사빕이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골밋사빕은 “사방에서 테러가 온다(terror from every side)”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방의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너에게 두려움이 밀려닥치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왜냐면 너는 거짓 예언을 했고, 너의 거짓예언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온 유다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사람뿐 아니라

보물도 다 빼앗기고 포로되어 바벨론에서 죽어 묻힐 것이라.”

이렇게 예레미야가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의로운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소외당했습니다.

사람들이 거부하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depression이 온 것입니다.

 

▲둘째로는 관계(Relationship)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세 종류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수들과의 관계입니다. 10절 전반에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원수들이 사방에서 비방과 협박을 합니다. “네가 먼저 고소하면 우리도 너를 고소하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근거 없는 비방이라도 자꾸 듣고,

빈총이라도 자꾸 맞으면 맞는 자리가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원수들이 자꾸 비방하고 사방에서 협박하니

예레미야에게 depression이 오게 된 것입니다.

 

-친구들과의 관계입니다. 10절 후반에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음녀가 유혹하여 죄악에 빠뜨리듯이, 예레미야를 유혹해서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배신합니다.

 

10절의 공동번역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

 

새번역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예레미야의 친한 벗이 예레미야를 유혹합니다. 예레미야가 말을 실수하게 해서

그가 당국에 붙잡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래 절별해석 10절 참조

 

-가장 심각한 문제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7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나를 권유하셨습니다. 권유하셨다는 말은 “속이셨다(deceived)”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나를 속여 선지자가 되면 좋은줄 알고 되었더니

비방당하고 조롱거리가 되니 주께서 나를 속이신 것이 아닙니까?”라며

하나님이 자꾸 자기를 속였다고 여러 번 얘기 했습니다.

 

15:18b절에서도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라며 동일한 불평을 했습니다.

신기루처럼 “물이 있구나” 해서 가보면 없는 속이는 시내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거부(Rejection), 관계(Relationship)의 어려움으로 겪게된

예레미야의 depression은 하나님을 향하여 의심의 경지를 넘어

불신앙 그리고 심지어는 신성모독의 변두리까지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영적침체를 통한 교훈

 

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지경이 된 것을 감추지 않으시고

성경에 기록해 만천하에 읽도록 하셨는가요? 그 교훈은 무엇인가요?

 

▲첫째, 위대한 신앙적 인물들도 때로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위인들도 때로는 심각한 depression을 겪었습니다.

 

모세가 이백만 대군을 이끌고 광야로 갔습니다.

그때에도 모세를 칭찬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도 먹고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어 정력이 좋았는데

만나만으로는 힘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민11장에서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내가 누구관대 이백만명에게 고기를 먹입니까?

차라리 죽여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민11:15절에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처럼 위대한 사람이 이 정도로 심각한 depression에 빠졌습니다.

 

엘리야도 동일한 depression을 겪었습니다. 갈멜산의 영적인 대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모두 합하여 850명을 물리치고 승리한 엘리야입니다.

그 당시 왕이였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너도 내일 죽을 것이다. 너를 내가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도망갔습니다.

 

정신없이 도망가던 길에 광야 로뎀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왕상19:4

이 정도로 예레미야도 depression에 빠졌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수없이 시편에서 반복적으로 말했습니다.

 

선지자 요나도 그랬습니다. 요나가 나중에 하나님께 본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럴 줄 알았는데 내 원수가 이렇게 망하지 않는 꼴을 보니

차라리 내가 죽는게 났겠다.”고 토로합니다.

 

위대한 바울도 때로 depression을 겪었고

심지어는 막14:34절에 보니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도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위인들은 공통적으로 때로는 심각한 depression을 겪었습니다.

 

△역사상으로 위대한 신앙인들도 상당수 depression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예레미야를 비난하는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저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교회를 개척할 때

하루에 라면 두 개로 끼니를 잇고 있던 중, 어느 날 웬 사람이 쫄면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추장을 풀어 끓였더니 냄새가 구수 하더랍니다.

오늘 점심은 쫄면을 실컷 먹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한참하고 눈을 떠 보니

쫄면 색깔이 원래보다 더 빨갛더랍니다. 이게 왜 더 빨게 졌나하고 보니

기도하는 중에 코피가 나 쫄면에 떨어져 빨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먹었답니다.

그리고 그 제자가 “코피 빠진 쫄면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목회를 얘기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들도 때로는 depression을 많이 겪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영적 침체(depression)’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영적침체에 빠질 때는 자기 영혼을 그냥두지 말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 하는고 내 속에서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내 영혼아 깨어라”하며 자기 영혼을 자꾸 깨우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찰스 스펄전 목사님도 통풍(gout)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통풍은 요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요산은 심장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이 요산을 멀리 밀어내 발가락 끝으로 가게 합니다.

그 결과 발가락 끝에 요산이 쌓여 아픈 병이 통풍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영적으로도 매우 침체되고

강대상에 올라갈 때마다 심각하게 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신앙적 인물들도 때로는 심각한 depression을 겪었습니다.

 

저는 목회하다가 눌리고 depression이 오면

고향의 어렸을 때 놀던 장소로 가서 바다를 보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depression을 기록해 놓은 목적은

신앙의 위인들도 이런 것을 겪는 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depression, 우울증, 영적침체, 이런 것은 불신앙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죄는 아닙니다.

 

미국의 한 부흥강사가 설교를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생애 단 한번도 depression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손들라 하니

십여 만 명 중 단 한 명도 안 들었답니다.

 

영적으로 침체된 사람, 이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지는 사람에게

그것은 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슬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

그것은 죄라고 말하는 사람은 잔인한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슬픔당한 가정을 위로는 못해줄망정

“그것은 죄라” 말하는 사람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그렇게 잔인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레미야가 영적 침체와 우울증을 겪었다.. 라는데 주안점이 있지 않고,

예레미야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 그것에 본문의 주안점이 있습니다.

20:9~13절이 특히 그렇습니다.

 

9절을 보면, 이런 험한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예레미야도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이런 험한 꼴을 당하니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도 않고, 예언도 말하지 아니하리라'

즉 저들이 예언을 듣지도 않고, 
더욱이 하나님도 나를 이 고난에서 건져내시지도 않는데... 
나는 늘 이렇게 얻어 맞기도 하면서, 육신과 영혼의 고통을 당하니까 
'이거 예언활동, 때려 치워 버리자'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거죠. 사람인지라!

잠시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예레미야는 이런 자기 심정을 토로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이런 시계추의 진자 운동처럼 왔다갔다 하는 갈등 속에서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그가 드디어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말하는 거죠.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20:14~15

이렇게 그의 삶은 고통과, 그의 마음 속에는 갈등과, 
여러 가지 절망과 침체 ... 이것이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일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처음에는 토기장이의 일상 (18장),
흰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있었던 일상 (19장) 들을 통해서 교훈을 주셨는데,
본문 하나님의 사람인 예레미야의 일상 (20장)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무슨 교훈을 주시고 계실까요?

예레미야는 실제로 마음에, 영혼에 심한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근데 그에게는 또 육체적 고통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자기를 감금 하기도 하고, 또 먹을 것을 주지 않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많은 고통들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박해를 받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돼요.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그러니까 그가 사역을 40년을 계속 했는데, 
그 가운데 최소 30년 이상은,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일상 속에서 
'이만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들이 있다' 
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상 속에서 예레미야가 얼마나 잘 버티고 있는가? 
자신을 잘 지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데요.

마치 신약의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을 '저가 예레미야와 같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죠. 마16:14

본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예레미야가 박해속에서도 자신을 잘 지키고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라는 것을 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되면, 예레미야는, 자기를 치는 사람들로 인해서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실 마음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합니까? 
10절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자기가 넘어지기만 바라고, 
사람들은 자기를 조롱하고 때리고 하는 가운데서도 

'그러 하오나' 여기서부터가 중요해요. 
아래 11~13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꿋꿋이 믿음에 계속 서 있습니다.

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여러분 지금 예레미야의 일상 속에서 이런 기도와, 
이러한 믿음의 고백과 이러한 찬양은, 사실 보통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거예요.

성령님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사명의 길을 계속 걷도록, 도우시고 힘을 주시는 거죠. 매일 매일!  

 

◑3. 영적침체를 벗어나는 두 가지 길

 

첫째, 하나님께 계속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keep on speaking to God).

예레미야는 아무리 눌려 있어도 하나님께는 계속해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예레미야가 가진 생각이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하나님께 자기의 생각을 말씀드리는 일을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20:7~12절은 예레미야가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속이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온통 비방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방에 두려움(마골밋사빕)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호와께 저의 사정을 아뢰었사오니

나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자기 마음에 일어난 생각을 아뢴 것입니다.

 

원수에게 복수해달라는 생각이 옳은 생각이냐 그른 생각이냐,

하나님이 자기를 속이셨다는 게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냥 품고 있지 말고 하나님께 계속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을 중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미사여구나 반복하고 관습적인 표현을 암송하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진솔한 생각을 아뢰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버지, 저는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 아버지 저는 기도하고 싶지만

기도할 언어도 생각이 안 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입술도 벌릴 기력이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아뢰십시오.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을 중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말하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살 길이요 기도가 돌파구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시32:4~6

 

셀라는 “거기서 정지하고 들어봐라(stop and hear)”는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지었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죄를 숨긴다고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허물이 있으면 “하나님, 제가 이런 허물이 있습니다.”

절망이 있으면 “하나님, 제가 이것을 절망하고 있습니다.”

좌절이 있으면 “하나님, 제가 이렇게 좌절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업을 했는데 지금 여기서 쓰러져서 되겠습니까?

내가 지금 마음에 좌절이 됩니다. depression이 왔습니다.”하고

슬픔이 있으면 슬픔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이 살 길입니다.

어려운 시절에는 하나님께 계속 말씀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keep on hearing from God).

어려울 때는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설교를 들으십시오.

지금은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기를 중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원수가 나를 이렇게 합니다. 저 원수에게 복수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라도 아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복수할 테니 너는 하지 마라.” 그러십니다.

 

“복수는 내가 하는 것이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속이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속인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예레미야에게 편한 사역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까? 아닙니다.

 

1:10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받은 사명은 여섯 가지 동사인데, 그 가운데 네 가지가 부정적입니다.

예레미야의 생애가 반대가 없는 평안한 생애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1;19절에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이 너를 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이기게 하겠다.

그들이 이기지 못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아, 그렇구나. 원수가 아무리 나를 죽이려 해도 나는 안 죽는구나.

나는 지지 않는구나.”하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예레미야는 이 depression을 탈출해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20:11절에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예레미야는 이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그는 지지 않고 승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중심에 불붙는 불이 되어 계속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9절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서 불이 되어서 선지자를 그만 두겠다고 하고 싶어도

말씀 때문에 그렇게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삼대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것을 암송하고 다녀야 합니다.

 

첫째, 사죄(forgiveness)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현재의 죄, 과거의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게 무슨 천국에 가나?”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우리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의 의의 옷을 덧입혀 주셔서

예수님의 의 때문에 그 의를 힘입어 그 의를 옷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칭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예수의 의의 예복을 입고 가야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의의 예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착한 사람입니다.”하고 가봐야 하나님께서

“너는 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왔냐?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화목(reconciliation)의 은혜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인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힘이 되어 우리를 도우시고 동행하며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사죄, 칭의, 화친의 삼대 복을 받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많은 환란도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중에 환란, 슬픔을 전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16:33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여기가 우리의 본국이 아니라

적성국가에 잠깐 여행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가지 어려움, 슬픔, 환란, depression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성국가에 혼자 보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8:20

 

환란, 슬픔, depression이 와도 아뢸 하나님이 안 계신 사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불쌍하고 가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아뢸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도와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사업하다 어려워도 절망하지 마시고, 또 마음이 슬퍼도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이기게 하겠다는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다 주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하나님께 아뢰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환경을 바꿔준 것도,

그의 소명을 바꿔 준 것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야 선지자 하기 힘드냐?

그러면 땅 줄 테니까 농부해라.” 혹은 “가게차려 줄 테니까 장사해라.”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함께 하셔서 오십년의 예언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인류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을 가리켜 대예언자라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 땅에서는 고통을 겪었어도 천국에서는 빛나는 스타가 된 것입니다.

 

미국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님께서

“너의 상처를 별로 바꾸라(turn your scar into star)”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scar”는 얼굴에 난 칼자국 같은 상처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으시면 그것을 천국의 빛나는 별 star 로 바꾸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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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20: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바스훌은 성전내의 질서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에 '열방의 감시자'로 임명되었다(1:10).

그런데 역설적으로 성전의 '감독'이 하나님의 '감독'을 방해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편, 본서에는 바스훌이라 이름한 관리가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

하나는 이곳에 언급된 바스훌로서

38:1에 언급되고 있는 그다랴의 아비인 바스훌과 동일 인물인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사람은 21:1과 38:1에 언급되고 있는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그 사람이다.

이 이름의 기원은 애굽에 있었던 듯하다.

 

본절의 바스훌은 성전에서 예레미야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것을

그의 임무 중 하나로 맡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서기 바룩을 보내 두루마리를 읽게 했던 것 같다(36:5).

 

20: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맛소라 사본은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게 했다'라고 사역형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70인역(LXX)은 그가 직접 때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베냐민의 윗문' 37:13과 38:7에는 베냐민문이란 명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곳의 베냐민 윗문과 혼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이 문은 성전 경내에 이르는 문들중의 하나였던 것이 분명하며

요담이 지은 바 있는 '여호와 전의 윗문'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왕하 15 :35, 겔 9:2).

이 이름에서 우리는 이 문이 성전 북쪽 편에 있었을 것이며

베냐민 땅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0: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네 이름을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바스훌이 다음 날 아침 예레미야를 놓아주자

예레미야는 그에게 '마골밋사빕'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주었다.

이것은 '사방의 두려움 terror on every side'이란 뜻으로

6:25에는 북쪽의 무자비한 적을 가리키는 데 쓰였던 말이었다.

 

이 말은 10절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46:5, 49:29, 시 31:13, 애 2:22 등에서도 쓰였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이 '마골밋사빕'이란 이름은 바스훌이란 이름의 뜻과 언어 유희(wordplay)의 관계에 있었던 같다.

 

아무튼 이 새로운 이름이 명명된 것은 이 이름에 걸맞는 처지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

바스훌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하는 감독의 위치에 있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두려움이 그와 이 민족을 사로잡게 될 때 크고 두려운 심판에 처하게 될 것이다.

 

20: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칼로 죽이리라'

여기서 예레미야는 바스훌에게 붙여준 이 새 이름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여호와께서는 바스훌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그의 친구들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그 메시지를 거부하는 일에

앞장 섰던 바스훌과 같은 인물 때문에, 유다가 참경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의 새 이름은 결국 그에게 내리는 저주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져서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온 유다에 임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 와서는 북방의 적이 더 이상 모호한 존재로 명시되지 않고

바벨론 왕과 그 군대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20: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이 성의 모든 부와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붙이리니'

이 예언은 B.C. 597년 이전에 주어졌던 것이다.

본절에는 적들에게 빼앗기게 될 여러 종류의 전리품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네 가지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 말들에 이어 세 가지 동사가 쓰이면서 철저한 약탈의 의미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그것은 '붙이다, 탈취하다, 가져가다' 등이다. 이러한 말들로 보아 재앙의 참혹한 상황에는

사정 봐주는 일이 조금도 없을 것이란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20: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는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되어 옮기우리니'

바스훌 개인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내용은 그와 그의 가족이 바벨론으로 이주되어서

그곳에서 죽을 것이고 거짓 예언을 전달하면서 사귀어 왔던 친구들과

함께 거기서 묻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B.C.597년에 그가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성취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B.C. 597년 이후에는 마아세의 아들 스바냐가 그의 직책을 떠맡은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29:24, 26, 29).

 

바스훌은 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민족에 아무런 재앙에 해도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선지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14:13).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으며 죽어 마땅한 죄악을 범한 짓이었다(26, 28장 참조).

 

또한 본절에는 '거짓'이란 명사가 쓰이는데, 이 말의 원어는 '쉐케르'이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매우 많이 사용하였던 바(6:13, 7:4, 8:8, 9:3, 13:25 등)

이 말을 통해 예레미야는 중요한 뜻을 전달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즉 유다의 지도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제사장들 또 지혜있는 자들과 왕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거짓 예언이라는 깊은 오류에 빠져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이기셨으므로'

여기서 '권유하다'에 해당하는 '파타'는 '유혹하다', '속이다', '설득하다' 등의 뜻을 지니며,

출 22:16에는 이 단어가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신성 모독적인 어감을 피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설득하다', '부추기다' 등으로 약하게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속이다', '꾀다'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신성모독적 감정을 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소명 당시부터 그 소명을 감당하기 두려워했으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그 일에 전념하였으나(1:4-10)

점점 심각해오는 핍박의 양상을 맞아 다만 깊은 갈등에 사로잡혀

역설적 항변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15:18에서 여호와를 가리켜 ‘속이는 시내’라고 말한 사실과 일맥 상통한다.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치욕과 모욕거리가'

예레미야가 줄곧 외쳐왔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심판 선언이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한편 전반절의 '외치다'(자아크)란 동사와 '부르짖다'(카라)란 동사는

공격적이고 큰소리로 선언한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언약을 위반했다고 하는 비난과

예루살렘의 멸망 선포는 조소거리가 되었으며, 거센 반발과 핍박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더 거세어져가는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불과 같아서 속에다 담아둘 수가 없었다.

'답답하여'의 히브리어 '라아’는 '기진하다'의 뜻으로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고백하였다.

 

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이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저기 마골밋사빕이 지나간다'라고 수근거리며 비난했던 것을 가리킨다.

 

'마골밋사빕(사방의 두려움)'이란 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바스훌에게 붙여준 이름이었지만, 이제 예레미야의 별명이 되었다. *같은 히브리어

 

예레미야가 당했던 고뇌는 친한 벗들처럼 예레미야의 반대 편에 서서

그가 잘못된 길로 가기글 바랐던 데서 한층 심화되었다.

그들은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그때가서 그를 때려 잡자'라고 수군거렸다.

 

여기서 '유혹을 받아'라고 하는 동시에 7절 상반절에 언급된 '권유하다'란 말과 같은 히브리어(파타)이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미혹된 길에 빠져 반역죄로 몰아 붙일 수 있는 망언을 내뱉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단절감과 소외로 말미암는 이런 고독은

예레미야에게 참으로 처량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선지자의 절망과 낙심에 대한 묘사의 한가운데 이르러서

다소 문맥의 흐름과는 벗어난 듯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즉 여호와로부터 받은 소명조차도 회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회의와 갈등 속에 방황하다가 마침내 그의 신앙의 최종적인 영역에 도달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다시 여호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두려운 용사와 같고 또 자기와 함께하신다'라고 하는 고백은

시 24:8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박해자들이 강한 것 같아도

자기를 쓰러뜨릴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위기의 순간을 맞았을 때 예레미야는

1:18~19의 여호와의 약속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쇠기둥, 놋성벽

그는 이전의 위기 상황에서도 이 약속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힘을 얻은 적이 있다(15:20).

 

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이 구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11:20이 반복된 내용이다.

여기서 '폐부와 심장'이라고 하는 말은 '은밀하게 감추어져있는 생각'을 뜻한다.

 

한편 사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브'는 법정 용어로서 논쟁, 소송, 변론 등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그를 치려고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수집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10절, 18:18).

그러나 재판이 열리면 여호와께서 그의 변호사가 되어 주실 것이다.

 

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본절은 예레미야의 깊은 내적 고백이라는 문맥상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고

또 본 단락의 분위기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에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후대에 삽입된 찬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의 애가들도 종종 본문과 같은 신앙과 믿음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결론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시 6:8,9).

더군다나 본절의 용어는 예레미야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행악자의 손에서'란 표현은 15:21과 21:12 그리고 23:14 등에서도 나타나며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다'란 표현은 이곳과 23:14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후자의 표현은 본서 외에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고 있다.

 

한편, '가난한 자'(에비욘)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빈곤에 처한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신앙이 돈독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는 세상적으로 가난한 경건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해자의 위협을 받는 시련의 때에 한 사람을 지탱시켜 주는 것은

결코 재산이나 부가 아니라 영적 힘인 것이다.

 

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여기서 예레미야의 갈등과 고뇌가 극한에 치닫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낳아준 것에 대해 탄식한 때도 있었다(15:10).

그러나 그는 거기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지는 않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였을 뿐이다.

 

하나님이나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범법 행위였다(레 20:9, 24:10-16).

본절에서 선지자는 비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저주와 원망은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은 사실과 그가 출생하기 전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1:5).

 

한편, 소망과 믿음의 고백(11-13절)에 이어 곧바로 이처럼 침울하고 절망적인 탄식이

토로되는 것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구문의 위치 변경이 가해졌다고 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본절 이하가 바스훌의 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견해들은 지나친 추측에 근거하였을 뿐이다.

우리는 당시 예레미야가 직면했던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고려할 때,

이처럼 갑작스런 심리 상태의 전환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20:15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예레미야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하지 않고(부모를 저주하는 이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인 출 21:17 참조)

자기 아버지에게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해 준 그 사람에게 저주를 돌리고 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네가 생남하였다"라고 알려주었는데,

여기서 '아들'에 해당하는 '벤'은 때때로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만 '아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본절에서는 아들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카르',

즉 '남자 아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한편, 이스라엘 남자에게 있어서 아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통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딸들도 유산 상속에 참여하긴 했지만(민 27:8),

그래도 가문의 머리는 남자였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아버자가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였을것이 당연하다.

 

20: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이는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뒤집어 엎으신 성읍'들로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평원에 있던 다른 성읍들을 가리키는 말이다(23:14, 창19:24-28, 사1:9 참조).

 

예레미야는 극에 달한 낙심과 고뇌 가운데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한 자에게

소돔과 고모라에게 임했던 저주와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레미야가 이 사람에게 실제로 저주를 퍼붓고 싶어한다는 식의

문자적 해석을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차라리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강렬한 어조의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20: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이런 표현들은 특정 대상에 대해 실제적으로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포자기적 고통을 나타내기 위한 다분히 문학적 기교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절망이 얼마나 심각하고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어찌하여 내가 태어서 나와서' 이 구절은 예레미야의 고뇌의 시의 결론에 이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였던 자로서 어찌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심각한 탄식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이런 비탄의 부르짖음과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해

아무런 용담도 주시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당신의 약속과 뜻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회복하기를 침묵함으로써 기다리고자 하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