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f33D5MAzaMs
◈마포삼열 선교사의 생애 ☞ 한국교회사의 인물들
馬布三悅, Samuel A. Moffet, 사무엘 마펫 1864~1939
1백여 년 전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작고 미개한 나라에
벽안(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 땅에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내 던졌습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을 위로 하며
또 고난에 함께 동참하며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들은 굳이 이 땅에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 하나로 이 땅에 와서
복음 때문에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날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들어서고, 어떤 비난의 소리가 쏟아져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복음을 증가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내한 선교사들의 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초기의 개척 선교사로서, 미지의 한국 땅에서 오직 말씀을 전하며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살려야 한다는 열정과 사명감으로
26세의 나이로 한국의 건너와, 45년 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 교회의 아버지, 그는 마포삼열 선교사 입니다.
♣사명의 땅 한국
한국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해지는 사무의 오스틴 마펫, 마포삼열은
1864년 미국 인디애나 주 매디슨 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좀 자유분방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신앙을 배웠으며,
11세 때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하노버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마친 뒤, 그의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특별한 소명감을 자각하고, 자신의 일생을 자연 과학을 연구하는데 투자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 낸
맥코믹 대학에 1885년 입학하였습니다. *21세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 와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 베어드 선교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신학교를 마친 뒤 마포삼열은, 주님을 알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 중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습니다.
마펫 선교사가 한국에 올 당시는, 조선에 선교를 하러 간다는 사실은
곧 죽으러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때의 한국은 정말 오지였고, 또 미개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에 땅으로 인식하고,
한국 백성과 한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을 설명한 백과사전의 기사를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한국은 중국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왕국이며,
깊은 산 숲 속에는 호랑이, 곰 등이 득실대고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며, 도전적인 데다 해적과 같고
일부다처제가 일반화 되어 있다.
또한 부패한 불교가 왕성한 종교적 나라이다.
외국인의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최초의 선교사였던 의사 알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거리 거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파리, 모기, 날파리 들이 떼를 지어 득실거리고 있으며
더러운 개천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파리, 빈대, 벼룩이 없는 집이 없다.
천연두, 매독, 회충 등은 흔해 빠진 병이없고,
종기나 무좀같은 피부병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려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희생으로 한국 땅을 일꾼 선교의 개척자
사무엘 마펫은 1889.04.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혈혈단신으로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 한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후에 결혼하게 된 부인 알리스 피셔는 한국에서 순교 했습니다.
마펫은 한 마디로 소명감이 투철하고,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앙을 지닌
성경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복음 전도를 개시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결심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외에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만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결심했다."
처음 6개월 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1890년 그해 8월에 평양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초기 교인 최치량의 주막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평양 중심지인 널다리골 기와집 한 채를 사들였습니다.
이 집이 평양 최초로 설립된 '널다리 교회'가 되었습니다.
후에 장대현 교회로 개칭, 발전하였습니다.
1893년 10월, 마포삼열이 한국에 온 지 3년 9개월 만에 평양 교회개척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척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 명의 도시였으면, 복음의 불모지 였습니다.
마포삼열은 한석진과 함께 최치량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관 주인 최치량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여색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포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마포삼열은 석 달 동안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사랑방 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깡패 청년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로 돌을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기가 생겨, 다시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습니다.
날아간 돌은 마포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 청년을 향해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포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 초대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이며,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된 이기풍 목사입니다.
마포삼열은 평양 선교의 개척자 답게, 모든 어려움을
관용과 아량 그리고 인내로 이겨 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점차 많은 이들로부터 '마포 목사'로 불리며 존경과 칭송을 받게 되었고
전도 활동의 성과도 점차로 나아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마포 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 개척 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 수가 7만 명에 이르고
세례 교인 수만 해도 25,7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할 때에는, 1천여 교회가 서게 되었으니
이는 어떤 세계 선교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포 삼열은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19.03.17.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기사 내용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외양으로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한국에 와 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 삼열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 복종하듯이 마포의 말을 잘 듣는다.
이 곳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 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이를 통해 삼일운동 당시, 마포 삼열이 지닌 한국인에 대한 공감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포 삼열은 한국인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는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고자, 한국 고유의 예법을 익히고, 한국 음식을 즐겨 먹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한국인처럼 친밀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교역자 양성을 선교 목표로
마포 삼열은 1901년 평양에서 한국인 교육자 양성에 뜻을 두어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고,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 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04~1924 교장 역임)
처음에는 두 명의 신학생으로 시작하여
1907년에,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등이 최초로 목사 연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숭실학교를 설립하여 1918~1928년까지 교장으로 시무하였습니다.
일제의 압력에 신사참배를 하면서라도 학교를 유지해야 한다는 학생과 교직원들과
지역 유지들 앞에서
'저는 신사참배하며 학교 운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위해서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1936년경부터 일제 신사참배 강요 시작
마포 삼열은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 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1919년에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당시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 가는 소완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위기였던 일제 말기에 있어서
한결 같은 자세로 신앙의 지조와 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마포 삼열은 1939년 신사 참배 거부 등으로, 일제의 암살 위협을 잠시 피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10월 24일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하고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의 북서 지역 개척자로서
특히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장본인 입니다.
그는 또한 한국 장로 교회에 초석을 놓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육과 문화 발전에도 많은 공언을 하였습니다.
특히 신학 교육, 즉 목회자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또한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을 자기 민족 처럼 사랑했습니다.
한국인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말씀에 대한 특출한 사명감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며 이 땅의 복음을 전하며 한 평생을 산 마포 삼열,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그러한 정신은 진실로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