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KNhMDEbrSOA&list=PLd5P8hQOR9vEb0NSWun3Y4s0lsfsb4IBH
◈한국 장로교의 50년 쥬빌리 대회 (1934년 9월, 평양)
유관지 목사 / 북녘교회 연구원장
여러분 주보를 보면, 신문기사를 하나 복사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꼭 90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34.09.05. 동아일보 석간 2면 톱 기사입니다.
1934년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동아일보 신문기사 입니다. *1920년 창간
여기에 1934년 9월 당시 평양에서 있었던 <조선 장로교 50년 기념 쥬빌리 대회>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습니다.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에 노회, 부인회 (가 주최한) 각종 대회 개최
1만5천 교도 동원, 십자군의 열병식
면려 청년회, 평양 삼십 교회, 칠교, 신도 희년 기념 행렬 거행」 *2면 헤드라인
면려 청년회 .. 교회의 청년 단체들
평양 삼십 교회 .. 당시 평양에 장로교회가 30개, 감리교회가 12개, 또 성결교회도 있었죠)
칠교 .. 기독교 학교가 장로교에서 운영한 것이 숭실, 숭의학교,
감리교는 광성 학교, 지금 마포에 와 있죠. 정리 학교, 등 기독교 학교가 7개 있었죠.
신도 희년 기념 행렬 거행 .. 평양 시가시 퍼레이드를 했던 모양입니다.
왜 1934년을 '희년, 쥬빌리'라고 기념했냐면,
1884.09.22.일에 의료 선교사 알렌이 한국에 왔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6개월 전이었죠. 주1)
여러분 동아일보가 평양을 '조선의 예루살렘'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사의 표제(헤드라인)를 이렇게 제일 큰 활자로 그렇게 뽑았어요.
이게 2면 (사회면) 그 날 톱기사 입니다.
그래서 그 1884년을 조선 선교 첫 해로 보았고, 50년이 지난 1934년에 쥬빌리 대회를
평양에서 거행한 거죠. 동아일보가 그걸 '십자군의 열병식'이라고 보도했고요.
그 이듬 해인 1935년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지 50년 거행기념식을 했어요.
그때 그러니까 2년 동안 "조선 선교 50 년 대회"를 했어요. *1934, 1935
그걸 '희년'이라고 불렀어요. '쥬빌리 대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장로교의 쥬빌리 대회" 이렇게 잡았는데요.
그 동아일보 기사에 이렇게 써놨습니다.
장로교 모든 행사가 그때 평양에서 희년을 기념해서
조선예수교 장로회 23차 총회가 1934.09.07.~12. 일까지 열렸고,
"국내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총대 2백 명이 참석한다"라고 보도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그 중국 동북 지역에, 우리 동포 교회가 장로교회만 250개가 있었습니다.
그 외 침례교, 성결교회가 세운 교회들이 있었죠.
그거 다 그 북한의 교회들이 개척한 거예요. 북한의 교회들이 세운 거예요.
장로교 노회가 7개, 남만주 노회, 북만주 노회, 봉천(선양) 노회, 영구 노회, 안동 노회 ... 등
그거 다 그 북한 교회들이 만주에 가서 이렇게 설립하고 전도한 거예요.
여러분이 중국 대륙 동북 지역에 관광 가시면, 그것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 동아일보 기사에, 기독교인들의 평양 시내 퍼레이드를
"십자군 전위 부대"라고 썼습니다.
"십자군 전위 부대는 전부가 평양에 집결되었다.
장로교가 전부 다 평양에 집결되었다."
원래 당시에 장로교는 서울보다 평양이 교세가 더 강했습니다.
신학교도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평양에 있었죠. (*이렇게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 장로교가 확장된 것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공로이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노회를 조직할 때도 그 평양에서 제일 먼저 조직 되었고
1907년 장로교 첫 노회가 조직된 것을 기념해서,
평양 사람 이기풍 목사님을 1908년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고,
그 다음에 1912년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었는데, 그것도 평양에서 1차총회를 열었어요.
그 총회 조직을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 세 명을 보내는데
다 북한이 고향인 목사님들이에요.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그래서 그 동아일보 기사 끝에 보면 이렇게 돼어 있어요.
"아울러 이 선교 50주년을 축하해서
축하회, 환영회, 음악회, 전람회, (영어)웅변대회를 열고,
전 평양 시가가 이 대회 기분에 휩싸여 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이 무렵 평양의 모습입니다.
'전 평양 시가가 장로교 쥬빌리 대회 기분에 휩싸여 있다.'
누가 이거 보더니 하는 말이 '평양 안에 장로교가 있는 게 아니라, 장로교 안에 평양이 있었네!'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그 말을 듣고 '맞습니다!' 그랬어요.
실제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교인들과 기독교 학교 학생들, 1만 5천 명이
평양 시내에서 깃발을 들고,
이 기사에는 사진이 없어서 그 깃발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가 없는데
그 신문기사를 보면, 평양 시내를 퍼레이드한 코스가 쭉 나와 있어요.
그 행진하는 환경을 한 번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동아일보가 그걸 갖다가 뭐라고 불렀어요? '십자군의 열병식'
'십자군의 열병식!'
여러분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잖아요.
요즘 북한은 국경일이 되면 (북한은 '경축일'이라고 부르죠)
그 평양 시내 김일성 광장에서 열병식 하잖아요.
뭐 탱크 동원하고, 요즘은 야간 열병식도 하고 하는데,
그래도 실제적인 감동은, 1934년의 십자군의 열병식, 이것보다 못 할 거예요.
이것이 90년 전의 평양의 모습입니다.
선교 50년을 기념하는 쥬빌리 대회의 모습이었어요.
이거 보면서 우리가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런 날이 속히 다시 오게 하옵소서!' 하는 우리의 기도가 있어야 됩니다.
평양에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살펴보긴 하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했는데
함흥 기사를 찾아냈는데,
함흥에서는 그 해 12월 1일에 희년 대회를 했습니다.
함흥중앙교회에서 예배드리고...
함흥에 기독교 학교가 있었어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줄여서 영생여고보교
그 학교는 지금 수원에 와서 다시 설립해서, 수원에 있습니다.
"거기 운동장에 모여가지고 4천 명이 그 영생여고보교 악대를 앞세우고
함흥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 사진이 당시 동아일보에 두 컷이 실려 있습니다.
이게 90년 전 신문이기 때문에, 아주 흐려요.
그래도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 보니까, 다들 흰 옷을 입었어요.
제가 그걸 보고 '함흥에 12월 1일에 얼마나 추웠을까?' 그런데도 4천명이 그런 행렬을 했어요.
평양의 쥬빌리의 모습이 이랬고, 함흥의 쥬빌리의 모습이 이랬는데,
(쥬빌리가 2034년에 또 찾아옵니다. 전에 1984년에 여의도에서 했었죠)
이런 날이 북한에서 다시 이루어지도록 하는 날이 오기를,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되겠다...
이렇게 다짐하고 기도하는 쥬빌리언들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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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4월2일 부산항에 입항해 이틀을 머문 뒤 4월5일 오후3시 제물포항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