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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언더우드 가문

LNCK 2024. 10. 5. 18:41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언더우드 가문 - YouTube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언더우드 가문                 언더우드 > <한국교회사의 인물들>

 

청년 언더우드는 조선에 선교하러 온 것 때문에

약혼했던 약혼녀와 파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언더우드 와 함께 들어온 아펜젤러는    *1885.04.05.

결혼을 해서 그 아내와 함께 조선에 들어왔는데

언더우드는 혼자 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죠.   *당시 26세 (1859~1916)

 

한국에서 5년이 지나서 31살이 된 언더우드에게, 멋진 여인이 나타납니다.

릴리어스 호튼 입니다. 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

 

 

릴리어스 호튼은 시카고 의과대학을 나왔어요.

1888년에 우리나라 <제중원>에서 산부인과 의료선교사로 활동을 했습니다.

 

릴리어스 호튼과 언더우드는 8살 차이였어요. 호튼이 연상의 여인이었죠.

이 두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되고,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어집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인 것 같아요.

 

릴리어스 호튼은,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선교의 일들을 열심히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 상황도 알 수 있고,

역사적인 정보들도 얻을 수 있고,

특히 기독교 선교의 모든 상황들에 대한 귀한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된 거예요.

 

로제타 셔우드 홀(홀부인)이 그렇게 일기를 써서,

당시 한국의 상황과 선교의 상황을 알려주었듯이

릴리어스 호튼도, 많은 글들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알려 주었는데요.

 

그 릴리어스 호튼이 쓴 책 중에 <상투쟁이들과 함께 한 십오 년>이라는 책이 있어요.

*영어제목 :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이란 제목으로 2008년에 번역, 출간됨

 

"거칠고 검은 그들의 긴 머리털은 빗질 하지 않아 엉망진창 이었는데

더러는 한 가닥으로 땋아 내리기도 했으나

거의가 머리 꼭대기에 (상투를) 올려서 되는 대로 매듭을 묶어 놓았다.

나는 바로 이 사람들과 함께 일하러 왔다.

내 사랑하는 조국(미국)의 숲과 교회가 있는 언덕 대신,

내가 택한 곳은 바로 이 나라였다."

 

본래 릴리어스 호튼은, 혼자 평생 독신으로 살려고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조선 땅에 옮겨 심어진 나무'라고 자신을 표현한 언더우드와

평생 혼자 살겠다고 한 여인 호튼!

 

여덟 살 연상의 여인 임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 와 호튼에게는

믿음의 동력자로서 전혀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1889년, 우리나라에서 결혼하게 되어집니다.

여러분들 조선에서 결혼하고 난 다음에, 어디로 신혼여행을 갔겠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네 나라 미국이나, 아니면 더 멋진 장소로 신혼여행을 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언더우드 와 호튼은, 결혼하자 마자 신혼여행을, 한국 전도여행으로 떠납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간 것처럼,

언더우드 와 호튼은 '우리 같이 전도 여행을 갑시다' 하고 떠나요.

 

 

그런데 이 일이 왜 대단하냐면, 당시에 한국의 지방은

남자들도 가기 어려운 그런 지역들이었습니다.

하물며 외국인 여성이 그 지방을 돌아다닌다고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 와 호튼 두 사람은,

'우리 둘이 결혼함으로써 더 많이 쓰임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선교 여행이 일종의 시험이 될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여성도 전도하러 조선의 전국을 다닐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한다는 뜻이죠.

당시 조선의 서울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전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는 그 시험대에

자신을 던졌다는 얘기예요.

 

두 분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다녔습니다.

그 곳은 당시에 서양 사람들을 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서양 여성이 등장하자, 구경꾼들이 가는 곳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는 밤이면 '서양 부부가 밤에 어떻게 자는가'를 훔쳐보며

신기한 동물 보듯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불편함도 감수하면서, 신혼부부가 다닌 선교 여행은

두 달 동안 거리로 1,600 Km 였다는 거예요.

차도 없던 시절에, 선교를 위해서

신혼 여행을 전도 여행으로 떠난 것입니다.

 

돌림 병이 도는 곳에서는, 의사 출신인 호튼을 중심으로 의료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열심히 선교 책자를 나눠주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부부가 압록강에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땅에 '여성도 지방을 다니며 전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4대에 걸쳐 한국에서 헌신한 신촌 원씨 가문

 

언더우드는 대를 이어가면서 자그만치 4대가 120년 동안 우리나라를 섬기는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이 되었습니다. 신촌 원씨 가문을 만들게 된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언더우드 가문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언더우드 가문' 이라고 얘기를 해요.

 

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 했을까요?

고종이 언더우드 에게 원두우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아내 릴리어스 호튼도, 우리나라 식 이름으로 원호돈 으로 불렸어요.

 

그 선교 여행 때 임신했던 첫 번째 아이, 그 아이의 이름은 우리나라 말로 원한경,

그리고 그 2대 원한경이 또 자손을 낳아서 3대 원일한, 4대 원한광.

 

하나님에 의해서 옮겨진 나무 한 그루,

근데 그 옮겨진 나무 한 그루가 4세대를 뛰어넘으면서 우리나라를 섬기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세대학교 라는 교육의 거목을 만들어 내는데 평생을 바친

그 존경스러운 언더우드 가문!

 

3대손인 원일한에게 사람들이 물었어요

'왜 이렇게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서 섬기고 사냐?' 그러니까

 

그러자 그는 '우리는 한국에 사는 게 너무 당연한데,

아버지 때도 그렇게 보고 자랐고, 할아버지 때도 그렇게 보고 자랐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늘 보고 살았기 때문에... 3대인 저도 당연합니다'

 

▲26세에 한국에 혼자 몸으로 들어와서,

죽을 때까지 30년 이상을 사역한 언더우드,

그가 56세가 되었을 때, 몸이 너무 나빠져서, 미국에 요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더 악화가 돼서 거의 죽어갈 때, 아내와 나눈 대화가 있습니다.

'여보, 내가 한국에 갈 수 있을까?'

'어딜 간다고요?'

 

'내가 아무래도 죽을 것 같은데.. 내가 한국에 가서 죽어야 되는데...'

더 건강해지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57세 때 미국 땅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죠.

 

그래서 그 아내 호튼과 아들 원한경은

아버지의 유해를 한국에 옮겨와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 안장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뒤에도, 아내 호튼 과 그 아들 원한경은

한국 땅에서 그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선교를 계속 하면서 살다가

우리 땅에서 죽어서, 우리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2대 / 원한경

첫 아들인 원한경의 이야기를 보시면,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자랐어요. 이제 공부를 해야 되기 때문에,

뉴욕에 가서 교육학을 전공했습니다.

 

호튼 여사와 아들 원한경

 

그리고는 아버지 언더우드 처럼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서 한국에 들어와요.

언더우드가 죽기 전에 일구고 시작한 연희전문 학교에서, 그는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연희전문학교가 나중에 연세대학으로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하는 일을

2대 원한경이 하게 됩니다.

 

원한경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한국 문화를 너무 사랑했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국학>을 만들어 냈었어요.

 

이유는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1919년 삼일운동 이후에, 그 삼일운동한 사람들을

제암리 교회 안에 집어넣고 불태우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다 무차별적으로 총으로 쏘아 죽인 그 학살 사건이 있었을 때,

원한경은 이 사실을 외신에, 또 해외 교회 기관들에 알렸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이 압박을 하면 '나는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당당히 맞서면서, 일제시대 때 한국어를 지켜내고,

그 한국어 학자들도 보호하는 일을 했습니다.

 

결국 미운털이 바뀌게 되어서,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출국되어 미국에 보내졌죠.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원한경은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해방 이후 미군정 때, 미군 하지 장군의 고문까지도 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1949년에, 원한경의 아내는 좌익 청년에 의해서 피살당해서 죽게 됩니다.

 

그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외국인들은 다 한국을 떠나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지만,

오히려 원한경은 그의 아들들 3명과 함께 자진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전쟁 이후에는 부산까지 내려가서, 거기서 사람들을 구호하는 사업들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순직을 하였습니다.

 

▲3대 원일한

2대 원한경의 아들, 언더우드 가문의 3대인 원일한은

역시 아버지처럼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할아버지 언더우드가 우리나라의 최초로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던 것처럼,

또한 그 아버지 원한경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온 것처럼,

원일한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서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1941년, 일본이 그때 가장 강렬하게 기독교를 탄압을 할 때

역시 원일한도 강제 추방을 당해요.

 

그러자 원일한은 바로 미 해군에 입대를 합니다.

그래서 일본과 미군이 싸우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자 마자, 역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1950년에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그러자 '내가 어떻게 한국을 도울 수 있을까?' 해서

다시 미 해군에 재 입대를 해요.

 

그래서 원일한은,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한국에서 배운 한국말 실력으로,

625때 미군과 한국군 사이에 통역하는 일을 유창하게 해 내는데,

특별히 1953년 정전 협정을 맺을 때, 바로 그 역사적인 현장에

통역을 맡은 이가, 원일한 이라는 언더우드의 3세대 후손이 해냅니다.

 

코카콜라 회사 사장은 '내 몸에는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다'고 하듯이

언더우드의 삼대 후손 원일한은 '내 몸에는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으면, 전쟁에 참전해서 우리나라에 오는,

그러한 멋진 한국을 사랑한 사람!

 

그리고 625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시 한국으로 복귀해서

윌리엄 린턴이 시작하는 대전의 한남 대학교,

그리고 대전의 기독교 학교인 배재 대학교 세우는 일에 헌신하고,

 

할아버지 언더우드 와 아버지의 원한경이 해 냈던

연세대학교 복구 사업을 일구어내는데 혼신을 다합니다.

 

그러다가 1980년에는, 518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한 사람이 원일한 이에요.

이것 때문에 전두환 정부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문 사람들은 추방을 계속 당해요. (1대, 2대, 3대 모두)

그런데 5공화국이 끝나자마자, 바로 원일한은 바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 한국 땅에서 죽을 때까지 연세대학을 가꾸고 일구어내는 일에 매진하게 됩니다.

 

이렇듯 언더우드 자손 삼 대에 이르기까지

이 가족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몸소 겪으면서

그 자손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 묻히면서

그 분들의 유해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4대 원한광

3대 원일한의 아들이며 언더우드 가문의 4대손인 원한광은

미국 여인과 결혼을 했지만, 한국의 버려진 아이 둘을 딸로 입양해서 키웁니다.

 

왼쪽이 원한광

 

그리고 한미교육위원 단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국제화를 위해 헌신했는데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거대한 나라가 된 이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한국을 알고 함께 어울릴 수 있게 하는 것이 한국의 국제화이다' 라고 하면서

한미교육위원 단장으로 엄청난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4대손 원한광이 우리나라를 떠날 때,

그들이 평생 살았던 언더우드 가옥을 기증했고,

우리나라에 문화재로 등록되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연세대학 교정에 가면, 언더우드 가의 집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집은 기념관으로 우리나라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2004년에 원한광이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증조부 였던 언더우드가 4가지 소망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셨습니다.

-기독교, 서양식 의료, 교육, 경제 발전

지금 한국에선 이 네 가지의 증조부 언더우드의 희망이 다 현실이 됐습니다.

 

한국에서 언더우드 가족이 해야 할 일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120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은 크게 발전했어요.

이제는 꼭 외국인이 남아서 일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금은 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오히려 미국으로, 세계로 나가서 활동하는 게 더 필요합니다.'

하면서 120년 동안 4대가 넘긴 신촌 원씨 가문의 섬김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1885~2004

 

가슴에 조선을 담은 언더우드 한 청년의 한국 사랑이,

그 아내를 만나게 되고, 그 아내와 함께 만들어진

아들 2대 원한경, 3대 원일한, 4대 원한광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고향으로 여긴 언더우드 가문의 이야기였습니다.

 

참 진정으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푸른 눈의 사람들,

언더우드 가문의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