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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 Rodgers Atwebembeire

LNCK 2024. 10. 6. 15:2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시121~150

Longing for God's Shalom Pt.14 - Psalm 133 - Psalms Of Ascent I  (youtube.com)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시133:1~3      

Longing for Shalom: Psalm 133                 영어로 보기

 

Rodgers Atwebembeire / Uganda

 

※아프리카 사역자의 설교를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 설교를 아프리카에  소개하는 일을, 작게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심정으로요!         

 

◑도입

 

시133:1~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편은 우리가 시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시편이라고 부르는 시편 중 하나입니다.

지난주에 시편 132편을 본 것처럼, 짧은 메시지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사실, 메시지가 짧을수록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시편 13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세 구절로 짧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 들어오는 시작부터 천국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삶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를 드러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주제이며, 진정한 성경적 예배의 중심에 있는 주제, 즉 연합이라는 주제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시편 132편을 보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여행자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모인 그들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임재에 휩싸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찬양과 경이로움으로 소리를 높여 찬양했습니다.

 

시편 132편은 전능하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성도들의 회중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가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따라서 시편 132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다룬 반면,

시편 133편은 사람들이 서로 관계에 있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수평적 관점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서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서로가 주님 때문에, 주님에 의해,

주님을 통해, 그리고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였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어떻게 서로 연합합니까?

 

시편 132편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안으로 옮겨지듯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시편 133편은 그리스도인이나 성도들이 서로 동거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때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성도가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 어떤 모습입니까?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편을 마무리할 때쯤  *시120~134편

우리는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집에 도착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끈으로 묶인 연합 안에서 하나님의 공동체에 도달하게 됩니다.

 

◑133: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 시 133편에서 시편 기자는 신자들의 여정에는

개별화되고 자립적인 (개인주의적인) 기독교가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는 개인으로서 예수를 믿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하면서

우리 중 누구도 함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입니다.

 

사실 이 시편에서 말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함께 여행할 때

더 나은 천국으로 여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의 비밀과 신비는 단지 어떤 신학을 믿는다거나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신자들이 다양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치 unity 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정체성의 중심에 있습니다.

 

,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132편

더욱이 서로간의 수평적 관계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본문 133편

본문 시133편이 그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시편 133편은 천국으로 가는 순례의 여행 중, 우리에게 연합된 하나님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수직적 관계 뿐만 아니라

수평적으로 연합하고, 그분의 백성의 공동체나 모임에 함께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는... 즉 수평적 관계도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 시온산을 향하는 여행을 떠났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른 부족,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문화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는 한 가지의 공통된 목표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집에 가서,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함께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 향하는 같이 형제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 이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교회, 모든 신앙의 회중이 그런 자세와 태도로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연합하는 것이 왜 매우 놀라운 일입니까?

이 시편 뒤에 숨은 비밀은 제가 연합의 신비와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기 전까지는

이 시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합심하여 30초라도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시편 기자가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때, 하나님의 백성은 1년에 세 번 집을 떠나 예루살렘,

시온 산에 도착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함께 모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매우 다양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 외에는 서로 매우 다릅니다.

 

이들 부족은 서로 다른 행동을 하고, 서로 다른 관계를 맺고, 때로는

부족 간 갈등이나 내부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출신지에서 예루살렘에 모여 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한 노래를 부르고, 한 기도를 드린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한자리에 모여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들을 보며

“사람이 이같이 연합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냐?”고 놀라워합니다. 133:1

그가 “참으로 좋고 즐겁구나!”라고 외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 자신도 놀랐다. 그 자신도 12지파에서 온 사람들이 1년 내내 함께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일년 중 3번씩이나 모인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리고 배경의 차이, 나이의 차이, 성별의 차이, 문화적 차이, 개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 앞에서 하나로 모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것은 미스터리입니다.

 

매우 놀랍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함께 모여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번 교회로서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함께 모일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 연합의 경이로움,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 안에서 연합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눈을 들어 여호와를 향하며 두려워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이 영원한 심판과 멸망에 빠져드는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이제는 영생을 주시는 주님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그들은 거기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거기에 있고,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거기에 없다는 큰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맙소사, 당신도 그렇습니까? 우리는 함께 도둑질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강 근처 그 거리에서 함께 누군가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나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놀라운 시편에서 발견하는

일치의 신비이자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로 시편을 시작합니다.

‘보라,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보고 놀라고 멈추어 서서 놀라라.

멈춰 서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을 주목하라. 이 말은 참으로 선하도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그만하고 살펴보십시오. 형제가 연합하여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보십시오."

 

형제자매들이 연합하여 함께 연합하는 것이 놀라운 일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여러분과 저 같은 죄인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가 이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들이 하기 가장 어려운 일은 연합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가끔 죄인들이 모여서 악을 행하거나 주님 앞에 악과 악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합은 자기 중심적이고 일시적이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들에게서도 연합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우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원을 돌보기로 헌신한

하나님의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타락 후에 죄가 들어오자 아담은 전에 여자에게 칭송하여 이르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라 하였더니, 나중에는 하와를 원망하고 탓합니다.

죄가 거의 없었던 에덴동산 때부터, 부부의 하나됨은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가 하나됨은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신실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을 보십시오. 그들은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친척과 하나됨도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자신의 친형, 즉 쌍둥이 형과 헤어질 뿐만 아니라 도망가기 전에

축복을 훔치기도 합니다.

 

요셉과 그의 형들이 아버지 앞에서 받는 은혜 때문에

그를 미워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를 낯선 이방인에게 팔아넘기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결과 요셉은 결국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다윗 왕가에 대해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그의 자녀들이 서로 싸우고, 한 형제(압살롬)가 다른 형제(암논)를 살해합니다.

한 형제(암논)가 자신의 여동생(다말)을 성폭행했습니다.

또 다른 형제(압살롬)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하나님이 주신 왕좌에서 잠시 동안 아버지 다윗을 폐위시킵니다.

 

이렇듯 연합, 통일은 이루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만약 연합이 되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주권적으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연합은 놀라운 일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 전반에 걸쳐 그분이 다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

 

나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묘사하는 사사기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연합을 이루시는지,

즉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연합을 이루시는 것에 놀랐습니다.

 

▲사사기의 주요 주제는 언제나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입니다.

분열된 나라, 전쟁 중인 나라, 무모함과 절망으로 가득 찬 나라,

그러나 그 속에서도 다음 구절을 들어보십시오.

 

삿20: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와 길르앗 땅에서 나오매 회중이

미스바에서 한 사람으로 여호와 앞에 모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마치 한 사람처럼 연합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미스바에서 주님 앞에 한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삿20장의 배경 정황이,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기 위해서 11지파가 함께 모인 것입니다.

한 사람처럼 함께 모이기는 했으나, 그 목적이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인지... 분별을 요합니다.)

 

8절에 “이에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 장막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하매” 그들이 한마음으로 일어났습니다.

 

같은 장 11절에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한 사람으로 함께. 이제 이 통일성은 성경에서 가장 분열적인 이야기인 사사기에서 발견되며,

누구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자기 눈에 즐거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과 주권으로 그 나라와 여러 지파를 하나로 모으셨고,

그들이 한 사람으로서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연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합이 유지되려면 주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가운데서만 진정한 연합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궤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보이고 전달되는 장소로 그들이 함께 모일 때

시편 기자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

이런 하나됨은 사람들이 모일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성막 주위에 사람들이 모일 때, 하나님 앞에 모일 때.

이런 연합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아갈 때까지 우리는 일치의 신비와 기적에 대해 전혀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2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참여하도록 부르신 일치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예를 사용합니다.

 

1) 첫째로, 그는 이 연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것은 아론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그의 수염에 이르고 옷깃까지 흐르는 보배로운 기름 같으니라.”

 

2) 두 번째 그림에서 그는 “이러한 연합은 헐몬 산의 이슬이 시온 산으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133:3

 

이제 잠시 시간을 내어 이 두 가지 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시편 기자가 이 두 가지 예를 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주석가는 신자 사이의 연합의 선함과 즐거움을 귀한 ‘관유’(번제 때 쓰는 기름)에 비유하면서

시편 기자는 이 연합을 특별하고 기분 좋은 향기를 발산하는 것으로 묘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관유에서 피어나는 향기, 향수 냄새는... 거룩한 분위기를 조성했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러한 연합을 거룩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 이유는, 관유는 거룩한 곳에만 바르거나 붓기 때문입니다.

 

출30장을 읽어 보면 이 기름(관유)이 어떻게 특별한지,

그리고 왜 이 기름이 특히 아론에게 사용되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출30:23~3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릏시되) 너는 상등 향품을 가지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가지고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너는 그것을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이며 등잔대와 그 기구이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이는 너희 대대로 나의 거룩한 관유니라 하라

보통 사람의 몸에 부어서는 안 되며, 이와 같은 다른 것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거룩하니 너희에게도 거룩하리라. 누구든지 이와 같은 것을 합성하거나

타인에게 바르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하라'  출30:31~33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관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부은 기름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기름은 신성한 것입니다. 이 기름에는 성화(거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어지는 사람을 구별합니다.

 

이 기름은 제사장에게 넉넉히 부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물이 머리에서 수염으로, 심지어 옷까지 흐르는 이유입니다.

 

한 방울이었다면 그렇게 멀리 흐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풍성히 부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을 구별하는 것은 거룩한 기름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에게 신선하고 향기로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는 제사장을 특별한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으로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연합하여 함께 살 때

그들의 연합은 그 귀한 기름의 독특함, 신성함, 상쾌한 특성에 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적어도 시편 기자가 여러분이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이 기름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들의 연합은

대제사장 외에는 누구에게도 부어지지 않는 관유에 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기름이 흘러내리면서 대제사장이 달던 흉패가 달린

아론의 가슴 쪽으로 흘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흉패에는 이스라엘 12지파들의 이름이 돌들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은 아론이 흉패를 달 때 그 가슴에 새겨진

이스라엘 12지파들을 향해 흘러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사장의 머리와 수염에서 옷까지 흐르는 기름이

이스라엘 지파들에게도 흐른다는 것은

거룩하고 은혜로운 기름이 (성령의 기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12지파 사이에 늘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지파의 교제사이에, 이런 기름부음이 늘 흐르고 있는 게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정말로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은

이런 거룩한 기름이

교회, 즉 리스도의 몸의 모든 부분(지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함께 살 때 갖게 되는 연합에서 나옵니다. 우와!

 

◑133: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둘째, 그는 이것을 헐몬에서 시온 산으로 흐르는 이슬에 비유했습니다.

헐몬산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고, 시온산은 이스라엘 남쪽에 있습니다.

헐몬산은 해발 약 9,000피트로 매우 높은 산이고, 시온산은 약 2,400피트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비해 헐몬산은 시온산보다 약 4배나 높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헐몬 산이 더 높았기 때문에 꼭대기는 추웠고,

그것은 눈 덮인 산이라는 것을 의미했고, 거기에서 많은 이슬이 흘러 내려갔고,

그 아래로 요단강과 같은 강들이 만들어지면서, 아래로 계속 남쪽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즉 헐몬에서 발원한 물은, 이스라엘 12지파 사이를 두루 흘러 적시며 남으로 흘러갔죠.

 

이제 이스라엘은 사막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슬이 산에서 떨어져서 물길을 형성하고 결국 도시의 나머지 부분으로 흘러가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큰 기적이자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헐몬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스라엘의 뜨겁고 건조한 사막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으며 하나님의 섭리이자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말을 사용합니다.

 

먼저 헐몬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산 주변의 사막 지역에 절실히 필요한 이슬이나 물을 내려 주시고 계십니다.

두 산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신자들이 함께 살면서 실천하는 연합을 생각할 때,

헐몬의 이슬이, 헐몬산의 수자원이, (이슬도 내리지만, 만년설에서 녹는 물도 흐르죠) 

그 놀랍고 상쾌하고 기름지게 하며 생명을 주는 물이

헐몬의 이슬처럼, 시온산까지 이스라엘 전역을 관통해서 흘러내리는...

그래서 이스라엘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청정하고 푸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연합을 하나님이 이슬을 주신 기적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답고 선한지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면 마치 그 기적의 이슬이 산 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고, 

그리고 이 이슬에서 나온 이 물은 어디에서나 생기를 주고, 사막의 열기로 인해

말라버린 주변 식물들에게 생명을 주고, 생명과 치유와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연합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인 연합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림으로 그리는 데 이 두 가지 예가 왜 매우 강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연합 가운데 그곳,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이 바로 그곳이라고 시편 기자가 바라는 곳은

헐몬의 이슬이 흐르기를 바라는 곳입니다.

 

바로 그 곳, 하나님의 백성이 연합하는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복과 영생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곳, 이 때 시온에 모였을 곳,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된 곳,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복을 명하셨다는 것,

하나님의 축복이 기름과 같다는 것 헐몬의 이슬이 흘러내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이 그의 백성에게 흘러내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축복은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여기 3절의 마지막 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예배와 연합과

하나님의 축복이 모두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이는 하나만 가질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하며,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기 위해 모인 다른 여러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해야 합니다.

 

어느 날, 이 연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주신 선물인 새 예루살렘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면서 사도 요한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7:9-10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내 앞에 서서 보좌 앞에 서서 어린양 앞에서.

그들은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그들은 함께 있었지만

다른 언어, 다른 부족,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모두 하나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치 unity 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교회로 구별되게 하는 연합입니다.

 

하나님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상징이 된 것은 바로 그 하나됨,

즉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될 때 세상은

그들이 그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들이 소리를 지르고, 노래하고, 밤을 새워 참석하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됨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행하고 방언을 말하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이 신자라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고, 평화의 띠로 하나됨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을 때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성도들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도전합니다. 

 

일치가 우리에게 흐르고, 우리 외부에서 흘러 우리에게 흐르는 하나님의 선물인 만큼,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물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모든 신자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연합하는 참된 공동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초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의 완전한 공동체가 우리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형제자매로서 영원한 기쁨을 위해 그분의 가족으로 이끄신다고 지적합니다.

 

▲시편 기자가 “거기서 하나님이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3

당연합니다. 일시적인 즐거움이 아닙니다.

일치를 향한 이 부르심은 사람들을 영원히 누릴 영생으로 인도하는 부르심입니다.

 

여러분이 이 놀랍고 신비롭고 기적적인 일치라는 주제를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총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일치와 평화와 일치의 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여러분을 너무나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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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인가, '우리'인가? (펀 글)

앞 장면 막9:14~29 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38

 

여기에서, 요한은 ‘우리’라는 말을 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보았고, *we

그는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고, *us

‘우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we

왜냐면 그는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요. *us

 

38절 한 구절에서 ‘우리’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개교회주의’나 ‘개교단주의’에 빗댈 수 있겠습니다.)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떼>들인 것이지,

<‘우리’의 양떼>가 아닌 것입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나머지 우리 모두는 그분의 양떼일 뿐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를 따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 :39

 

이렇게 말하면 ‘차별주의’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후진국에 갈수록 ‘교단/교파 국수주의’가 쎈 것 같습니다.

선진국에 갈수록 ‘교단/교파주의’ 장벽이 낮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 구절에서,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37

라고 하시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를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 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고후5:15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700년대 초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시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도록

촉구하는 의도의 책을 한 권 썼습니다. (펀 글)

 

그 책은, 제목이 좀 깁니다.

<기독교의 부흥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앞당기기 위한,

특별 기도회로 모이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만 아니라 실제로 연합해야 하는데,

그 연합을 독려하기 위한 나의 겸손한 제안> 입니다.

 

실제로 이 책의 제목에 나타난, 그 책을 쓴 목적은 성취되었습니다.

<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이 미국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났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 책이,

그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사용 받았던 것입니다.

 

그 후로도, 미국에서 2차, 3차 영적 대각성 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는데,

그런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선행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전과 다른, 특별한 기도모임’입니다.

 

그런 특별한 기도모임이 있은 후에, 영적 부흥이 일어난 것이지,

기도도 하지 않는데, 갑자기 영적 부흥과 대각성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특별 기도모임’이 있었다는 것은,

별로 놀랄만한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그리고 교회 역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패턴(즉,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7: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 말씀의 약속은, 교회 역사 내내, 부흥이 일어났던 세대에서

반복적으로 입증된 진리였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연합해서,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주님의 얼굴을 구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하셨고, 그 땅을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