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횃불
언더우드 서거 1백주년 기념 영상, 연세대학교 제작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학교도 없고, 의원도 없고, 멸시와 천대만 있는 이 땅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소설 <양화진> 의 언더우드 기도문 중에서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 항으로 한 척의 배가 들어옵니다.
그 배에는, 불모의 땅 조선을 위해 평생토록 헌신하고
죽어서까지도 조선을 사랑한 이방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한국 최초의 기독교 복음 선교사 언더우드 였습니다.
언더우드는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워내는 것만이
가난하고 약한 조선의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할 것이오" -친구 헐버트와의 대화 중에서
언더우드는 알렌의 청원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제중원 의학교가 시작되자,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서울 거리에 버려진 고아와 사생아들을 모아 '고아 학당'을 시작하였습니다.
"배가 고파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려 했다.
언더우드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를 데려가 간호하고 교육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변갑이' 였다"
변갑이는 항일독립운동가이자 파리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참석한
우사 尤史 김규식 선생이었습니다.
또 한 명의 항일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또한
이 고아학당 곧 언더우드 학당 출신이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워 조선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언더우드의 의지가 실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괴소문과 멸시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좌절하지 않고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며
조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놓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방역의 공로를 치하하여 고종이 언더우드에게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고 합니다.
1989년 언더우드와 릴리어스 결혼식 때, 민비는 축의금으로 1백만 푼을 보내주었는데,
이것은 당시 약 4백 달러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주1
1889년 3월, 명성왕후의 주치의 이었던 릴리어스 호튼 여사와 결혼한 언더우드는
신혼여행 마저도 전도여행으로 하였습니다.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그들은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 사람들을 위한 성경 번역 작업에도 몰두하였습니다.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어 문법> <한영사전> <영한사전> 등을 발간하였습니다.
'기독교 (성경) 때문에 한글이 살았고,
한글 때문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되었다' - 국어학자 최현배
언더우드는 기독교 잡지와 신문 등, 많은 문서들을 발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스도 신문>은 각 지역의 교회에 도움을 주기 위한 신문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 필요한 정보 또한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1897 언더우드 간행
이는 조선인 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언더우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Underwood 를 '불동가리', '넓은 날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어는 젊은 한국인의 편지 내용 중에서
언더우드는 선교를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아픈 몸을 돌아볼 새 없이 전국 곳곳을 다니며 세례를 주고,
교회 설립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언더우드 정동 자택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총 21개의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한국은, 아시아에서 굳건하게 기독교가 자리 잡은
선교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조선을 위해 헌신하던 언더우드는
결국 병을 얻어 미국으로 안식년을 가게 됩니다.
이때도 언더우드는 한국을 위한 모금 활동에 나섭니다.
이렇게 모금 된 거금 17만 달러는 조선을 위해 쓰였습니다.
질병조차도 언더우드의 지극한 조선 사랑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언더우드는,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합니다.
마침내 1915년 4월 <조선 크리스천 칼리지>를 개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언더우드는 이 대학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 전인,
1916년 10월 12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사후 이 학교는, 그의 영원한 동역자 에비슨의 노력으로
1917년 4월 7일, <연희 전문학교> 재단법인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여행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아내 릴리어스가 "여보, 어디로요? 한국으로요?" 라고 묻자
그가 얼굴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천 전날 밤 언더우드 부부의 대화 중에서
언더우드의 유해는 그가 사랑하던 한국 땅에 곧바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가족들은, 언더우드의 유해를 한국으로 옮기는 비용까지
새문안교회 영신학교를 위해 기부니다.
그의 유해는 1999년에야 서울 양화진 묘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언더우드 가족도, 한국에 대한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언더우드의 형인 존 T. 언더우드 또한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학교 부지 매입금을 기부했습니다.
언더우드의 가족들 또한 언더우드 만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교육이 발전하기 바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지극한 한국 사람은,
그의 직계 후손들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세 원한경 박사는 삼일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 등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 하면서, 조선의 독립 운동을 도왔습니다.
결국 1941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교장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3세 원일한, 원득한, 원재한은 자진해서 한국 전쟁에 참전합니다.
특히 훗날 한국에서 일생을 보낸 원일한 박사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국 해군 대위로
정전 협정 당시에는 유엔군 수석 통역 장교로 활약합니다.
4세 원한광 박사는 30년간 한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교육과 사회 발전에 공헌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어린이 두 명을 입양해 키우면서
선조 부터 내려온 한국 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였습니다.
또 한 명의 4세 원한석은 지금까지도 한국에 머물며
한국 경제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학교도 없고, 의원도 없고, 멸시와 천대만 있는 이 땅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위 언더우드의 기도문처럼 대한민국은 이제 은총의 땅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헌신과 사랑으로, 한국 최고의 명문 사학 연세 대학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연세 대학교는 언더우드 가의 헌신과 사랑의 정신을 세계로 전파하기 위해
제2, 제3의 언더우드를 키워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연세대학교는 앞으로 미래 백 년 동안에도
존중하고 존경받는 대학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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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 소중한 날(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결혼하는 날) 아침에 조랑말들의 방울소리가
우리 앞마당에서 들려왔다. 나는 곧 그 앙증맞은 짐승들의 긴 행렬이 중전마마의 선물을
잔뜩 싣고 도착한 것을 알았다. 자그마치 현금 백만냥이었다.
꼭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때에는 2,500냥에서 3,000냥이 1달러쯤 되었기 때문에, 그 돈은 너그러운
조선 왕비께서 손쉽게 주실만한, 또 선교사 한 사람이 쉽게 처리할만한 액수였다.
두 분 마마께서는 우리의 혼례에 나인 네댓 사람을 보내 주었다.
군대에서는 아주 계급이 높은 한규설 장군이 대표로 왔고, 내각에서는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며 두 분 마마께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민영환이 참석했다.” -릴리어스 언더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