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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

LNCK 2024. 10. 11. 19:24

설교본문 색인                 사도행전             <회심>       
사도행전 강해 (88)  /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 - YouTube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          행26:1~23            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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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변호입니다. 
오늘 변호를 끝으로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변호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마지막 바울의 변호는 아그립바 왕 옆에서 열립니다.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 총독을 문안하기 위해 찾아왔던 왕입니다. 

그때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로부터 바울의 얘기를 듣게 됩니다. 
바울의 얘기를 들은 아그립바 왕은, 직접 바울의 말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왕 앞에 선 바울은 자기를 변호합니다. 사실 변호이기보다는 간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구조를 보면, 간증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간증, 변증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 만나기 전  :4~12
두 번째 예수님 만났을 때  :13~18
세 번째 예수님을 만난 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23

그러니까 바울의 관심은 자기 변호보다는, 사실 복음을 전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구원받은 간증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울의 간증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표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들어도 들어도 너무나 중요한 내용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교회라는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듣기에 참 두려운 말씀이죠. 
또한 한편으로 참 불편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이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그 기회가 또다시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복된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구원의 시간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더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진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무엇인가요? 

◑먼저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아닌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는 <혈통과 배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바울의 변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구원받기 이전의 모습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이 말은 '나는 정통 유대인 배경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내 스스로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인정하는 바라'고 말합니다. 

사실 바울은 정통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자랐습니다. 
빌3:5절에, 이런 바울의 배경이 더 자세히 나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3:5

엄청난 혈통적 스펙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은, 율법대로 8일 만에 할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베냐민 지파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자랑할만한 혈통입니다. 

이스라엘이 르호보암 때, 남왕국, 북왕국으로 분열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앗수르 침략 때 혼혈정책으로, 북왕국 10지파는 이방인들과 피가 섞여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일단 10지파는, 순수 혈통이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혼혈이 된 겁니다. 

그렇지만 남왕국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순수혈통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유다 지파와 또 베냐민 지파의 자랑이요, 자부심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사울이었죠. 사울이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가 유업으로 할당받은 지역이, 예루살렘 근처 지역입니다. 
예루살렘이면, 성전이 있는 곳 아닙니까? 유대인들의 센터에 해당하죠. 
그게 바로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한 혈통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바울이 이어서 말하는 겁니다.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니요.' 
나는 정통 중에 정통이라는 얘기입니다. 순수 진짜 유대인이라는 얘기인 거죠. 

더군다나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은 유대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파였죠. 
그런데 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 혈통적 스펙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스펙입니다. 
대단한 스펙을 가진 거죠. 유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바울은 100점짜리 신자입니다. 
날때부터 정통 유대인의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인으로 자랐습니다. 
순수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유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바울은 하나님 나라 입주에 있어서 영순위 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기에 가장 적합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뭐라고 했죠? 
'나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배설물이란, 똥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데 있어서, 자기의 혈통 배경이, 유대교적 전통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혈통과 배경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저는 몇 대째 기독교 집안입니다.' 
자랑하듯이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좋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당연히 구원을 따놓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아시죠? 왜 모태신앙이라고 부릅니까? 너무나 잘 알려진 우스갯소리인데요. 
못해서 모태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도 못해, 순종도 못해, 전도도 못해... 다 못해서 모태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태신앙이라는 혈통과 배경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목사의 자녀입니다. 저의 삼촌도 목사이고, 
저희 아버지 형제도 다 목사이고, 외가 쪽의 누구도 목사이고...' 
이렇게 자기 배경을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좋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영적인 복이죠. 복음을 들을 기회가 그만큼 많으니까요. 

그러나 혈통과 배경이, 여러분을 참된 그리스도인 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요1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혈통으로는, 가문의 배경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지는 혈통과 배경이, 참된 그리스도의 증거가 아닙니다. 

▲2. 두 번째, 참된 그리스도의 증거가 아닌 것은 바로 <종교 생활> 

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유대교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에세네파, 바리새파 등 여러 분파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리새파가 가장 엄한 분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그 바리새파였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종교 생활도 아주 철저했다는 의미입니다. 종교 모범생이었던 거죠. 

특별히 바울은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가말리엘 밑에서 배웠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신학교에서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지식적으로 학문적으로 많이 배웠다는 의미겠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실천적인 면에서도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 증거가 빌3:6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거기서 바울은 '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평했습니다. 
그만큼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나 교회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는 얘기입니다. 
교회 행사나 봉사의 자리마다, 항상 자기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대충대충 다니는 교인이 아니었다는 거죠. 
아주 철저하게 종교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졌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열심이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의 지식과 종교 생활, 종교 활동이,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는 커녕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가 본문 26:9~11절의 내용인데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여러분 이 내용은, 앞서 우리가 이미 다 살펴본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물론 잘못된 지식이었던 거죠. 

그리고 종교적인 열심도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을, 누구보다 가장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종교적인 열심이나 종교 생활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거듭나지 않아도 종교 생활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아도요. 봉사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아도, 종교성이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아도, 교회에 와서는 얼마든지 우리가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사역하면서 종종 그런 케이스를 봐왔습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그랬지 않습니까? 
마르틴 루터는 중세의 신부였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부였죠. 

가톨릭 신부로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또 신도들이 죄를 고백하는 고해 성사를 듣는 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말씀을 전하면서도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 
'자기의 노력과 의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요구하는 하나님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정말 복음이 믿어지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목사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종교생활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내 신앙은, 혹시 혈통과 배경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활동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사람은 주일날 예배는 잘 들여요. 저 사람은 교회 봉사도 참 열심히 해요. 
저 사람은 새벽기도도 열심히 해요.' 
그런 것들에 여러분들의 믿음의 근거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들은 구원받기 전에도 나에게 있었던 모습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때의 나는 구원받지 않았는데. 그것들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1. 첫 번째 <참된 그리스도인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다른 말로,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바울이 구원을 받은 것은, 혈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종교적인 열심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바울은,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였죠. 
그런 바울을 주님이, 전격적으로, 은혜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게 아니라, 주님이 바울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 얘기가 13~18절의 내용인데요. 
(이 내용도 우리가 이미 살펴봤던 내용입니다. 그래서 따로 설명드리진 않겠습니다.)

26:13~18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을 예수님이 찾아오신 간증인데요. 
그렇게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 그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구원 받게 되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만남이 있는 거죠. 아담이 범죄한 자리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애굽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갔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찾아와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주어는 누구입니까? 
구원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주권, 이니셔티브를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모세를, 
하나님이 다윗을, 하나님이 바울을, 
하나님이 그렇게 저와 여러분을 찾아와 만나 주시는 사건,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죠.

▲2. 그러면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구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이 눈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는데요. 행9장에 보면, 주님을 만난 바울에게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이 가려져서 사흘동안 안 보였다가, 다시 떠졌던 사건입니다.  9:9

여러분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바울의 머리에 안수를 했을 때 
바울의 눈이 이제 다시 떠지지 않습니까? 보였던 거죠. 
바울의 눈이 새롭게 떠졌습니다. 

여러분 이건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 전에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줄 알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죄를 보지를 못했고요. 하나님 나라를 보지를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 전에 영적인 소경이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바울은 비로소 눈이 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기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다 말했지만, 주님을 핍박했던 자입니다. 
그랬던 바울이 이제는 그 주님이야말로 
구약이 약속했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보지를 못했던 자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사도행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주구장창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바울을 찾아와 주시자 바울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그의 눈이 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바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는 모두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증거가 본문 18절에 있는데요.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위 구절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은, 바울을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눈이 떠졌죠. 또 바울을 보내시면서 '그 눈을 뜨게 하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울을 보내시면서 하시겠다는 일이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눈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눈뜨임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떠짐 말입니다. 
눈이 떠졌기 때문에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죄를 죄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여러분 교회를 다녀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비참한 죄인인지를 모릅니다.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진짜 누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정말 필요로 하겠습니까? 자기가 그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죠. 
그분은 대속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내가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이 고백 없이는 예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모든 신자가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비참한 고백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애통하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이 떠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죄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찾아오신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찾아오신 사람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주님이 그 눈을 뜨게 하여, 그의 영적 눈이 떠지기 때문입니다. 

눈이 떠지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둠 가운데에 살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예수 없이 살았던 그 전에 모든 삶이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살았는데, 그게 사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눈이 떠지니까, 영적인 게 보이는 거죠. 
그 사람은 반드시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보이니까요. 죄를 더 이상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가 흉측하게 느껴지니까요. 죄를 버리고 돌이키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와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죄를 버리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 한마디로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본문 18절에서는 이렇게 한 줄로 설명합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 이전의 죄악된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 이건 예수 믿은 후에 소속(시민권)이 바뀌는 거죠.

'죄사함과' ... 회개를 통해, 죄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무거운 죄짐에서 놓여
       깃털같이 가볍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믿어' ... 이건 믿음이죠. 
               그래서 회개와 믿음을 합쳐서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 즉 천국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이 18절의 변화를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도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영적인 눈이 뜨여져 있으십니까? 
눈이 떠졌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영적인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Amazing Grace 찬송가는 이렇게 찬양하죠.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예수 없이 살았던 그 동안의 삶들이, 
어둠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이제 눈이 떠졌기 때문에 
과거에 '내 마음대로 살았다'고 자백하게 되었습니까?

그런 지난 날들이, 사실은 내 의지가 아니라 
내가 사탄의 종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눈이 떠졌기 때문에,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여러분의 죄를 
날마다 죄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눈뜬 바울과 같이, 여러분의 눈 또한 떠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이 이 땅에 없습니다.' 
그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십니까? 

그래서 눈뜬 바울과 같이, 날마다 그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며 사십니까? 

죄에 대해 눈이 떠졌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죄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 가운데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계십니까? 

그래서 날마다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리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눈이 떠졌기 때문에, 이런 참된 회심의 역사가 있으십니까? 
눈이 떠졌기 때문에, 바울과 같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기 때문에, 그동안 세상 나라만을 위하여 살았던 
여러분의 삶을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보이기 때문에, 이 땅을 나그네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가 보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심판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런 눈떠짐의 은혜가 있으십니까? 

주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이런 눈떠짐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영적인 눈이 떠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가장 많이 행하신 표적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었죠)

이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야만, 18절이 가르쳐주는 대로 
여러분은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이 18절의 고백이, 여러분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이어서 구원받은 사람의 세 번째 증거가 있습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이후로 살게 됩니다. 

잠시 정리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는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 오십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눈 떠짐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제 삶의 방향과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자원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증거가 16절에 나오는데요.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6절은,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이, 바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를 종과 증인으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위에 언급된 한 표현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우리가 캐치하면 참 좋은데요. 

14절에 보면,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은 
이전에 예수를 모르던 바울의 삶을 한마디로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었다'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새번역)'고 하십니다. 
 It is hard for you to kick against the goads.

 


가시채란, 짐승을 몰기 위해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입니다. (가시덩어리 식물 아님)
막대기 끝에다가 쇠조각이나, 뼛조각을 달아놓아서, 뾰족하게 했습니다. 
그 막대기를 가지고 가축을 모는 거죠. 왜냐하면 가축이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가축을 몰고 밭을 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축이, 주인이 가려는 방향으로 가고 싶지 않으면, 
고집을 부리고 뒷발(길)질을 하는 겁니다. 그리로는 가지 않겠다는 거죠. 

그럴 때 주인이 가시채를 가지고, 가축을 이렇게 모는 겁니다. 
그러면 뒷발길질(발뒤꿈치로 가시채를 차는 것)을 할수록, 즉 고집을 부릴수록, 
가축은 더 가시채에 찔리게 되는 거죠. 고통만 더 커지는 거죠.       

바울의 삶이, 한마디로 이런 삶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섬긴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삶이었다는 겁니다. 
자기의 고집을 부리며 뒷발질하는 삶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는 거죠. 
그러나 주님을 만난 바울, 눈떠짐을 경험한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후에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바울은 전적으로 주님을 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종처럼 살았습니다. 

로마서 14:7~8절에 그 증거가 있는데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던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 전까지 바울은 자기를 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뒷발질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8

이게 바울의 달라진 고백인 거죠. 주님이 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를 사용할 권리가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인 거죠. 

물론 예수를 믿어도, 우리가 잠시 뒷발질 할 때가 있습니다. 고집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죠? 그러나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고집보다 더 세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는 거죠. 
주님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맞고 즉시 돌이키는 은혜가, 거듭난 신자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계14장에서는 성도의 정체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계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가검진을 해봤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맞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거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