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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 선교사

LNCK 2024. 10. 12. 22:36

<세계 교회사의 인물들>      <한국교회사의 인물들>        에비슨 선교사

https://www.kich.org/news/articleView.html?idxno=10300

 

에비슨 선교사

Oliver R. Avison 올리버 에이비슨, 1860-1956, 어비신 魚丕信, 

 

출신 및 소속: 캐나다 / 북장로교

한국선교기간: 1892.6월 – 1935.11월

 

에비슨 연대표 주1)

 

에비슨 가족사항 주2)

 

▲1. 성장 과정

 

애비슨 Avison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주 웨스트라이딩의 작은 마을

재거 그린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감리교도이자 모직공장의 직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신대륙으로 이민을 결심한다.

 

Avison이 6살이 되던 1866년 2월, 그의 가족은 영국을 떠나 미국을 거쳐

캐나다 온타리오의 웨스턴에 정착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의 가족은 여러 차례 이사를 했으며,

공립학교에 다니던 11살의 Avison은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결단으로 다시 학업에 전념한 그는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76년 알몬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퍼스의 사범학교에서 수학한 Avison은

1878년 1월부터 3년간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2. 토론토 의대에서의 의학수업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그의 학구열은 멈추지 않았다.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지속하던 Avison은

토론토대학에 입학하여 교수가 되겠단 마음을 품고,

이를 위해 1880년 후반부터 스미스 폴스의 한 약국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화학, 식물학, 약물학, 제조 공정 뿐 아니라 의사 처방을 제조하는 자격 또한

얻게 되었다. 1881년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대학에 입학하여

1884년 6월 수석으로 졸업한 Avison은 약학교의 식물학 교수로 초청받는다.

 

계속해서 학업의 길을 선택한 그는 1884년 가을 토론토 의과대학에 편입한다.

뛰어난 성적으로 촉망받는 의학도로 인정받은 Avison은

학생 신분으로 본교의 약리학 강의까지 맡았다.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885년 7월 28일 그가 초등학교 교사 지원 시

처음 만났던 Jennie Barnes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25세

 

Avison은 학업뿐 아니라 학교 내에서 신앙활동에도 힘썼다.

몇몇 학우들과 금주회를 조직했으며, 훗날 함께 한국 선교사로 동역하게 되는

로버트 하디와 함께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초교파적인

기독교청년회(YMCA)를 결성하여 기독학생들의 단합을 위해 앞장섰다.

 

▲3. 젋은 나이에 촉망받는 의사요 대학교수로 성공한 삶을 누리다.

1887년 의대 졸업과 동시에 약리학 교수로 임용된 Avison은

토론토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하여 의사와 교수로 분주하게 생활한다.

그런 와중에도 의과대학 YMCA에서 계속 활동했으며,

토론토시 기독교청년회 중앙회의 의학임원이자 이사로 섬겼다.

 

또한 교회에서도 평신도 전도사로 성경공부를 인도했으며,

매주일 작은 개척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도왔다.

그리고 도시 빈민 구제사업에도 힘쓰는 등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활동들을 감당한다.

 

또한 Avison의 병원은 점차 명성을 얻어 토론토 최상류층 사람들이 주 고객이 됐으며,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교수로서 첫 해가 지났을 때,

대학시험위원회의 시험관으로 지명되는 등 남 부럽지 않은 명예와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4. 선교사로 헌신 다짐과 조선으로 입국까지

그러던 중 Avison은 토론토 의학대학 시절 함께 YMCA를 섬겼으며,

한국선교사로 활동 중이던 하디(원산 부흥의 주역)를 위한 후원활동과 선교잡지 발행에 참여한다.

이를 계기로 Avison 부부는 선교사로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선교사로 나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18929월 하순, 한국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잠시 안식년 휴가 차 미국으로 돌아온 언더우드가

토론토에서 열린 학생 선교 자원 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집회에 연사로 초청받는다.

이때 그를 초청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 Avison이었다.

 

언더우드와의 만남은 그가 조선선교를 결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언더우드는 Avison에게 조선선교사로 올 것을 권면했을 뿐 아니라,

그와 상의 한마디 없이 뉴욕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Avison의 이름을 올렸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조선선교사 파송 요청을 수락한 Avison은

어렸을 때부터 몸담았던 감리교회에서 장로교회로 교적을 옮긴다.

개업의와 의대교수라는 명예와 경제적인 안락함을 뒤로 한 채

Avison 부부는 세 자녀와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1893년 6월 밴쿠버를 떠나 약 2주 간의 항해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이들 가족은

1893년 7월 16일 주일 오후에 부산에 도착함으로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는다.

(1892년 9월, 언더우드 와의 만남 후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5. 제중원 사역을 비롯한 1차 한국선교 사역(1893. 11 – 1899. 3)

약 1달 간 부산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운 Avison은 그해 8월 말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다.

이때 서울로 향하던 배 안에서 제중원의 설립자인 알렌 선교사를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 알렌은 고종의 명을 받아서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무역박람회에

조선 대표들과 함께 안내자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Avison은 알렌의 요청으로 1893년 11월 1일부터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사역을 시작한다.

당시 제중원은 그를 도울 인력이 부족했으며,

조선인 주사들이 운영비를 착복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있었다.

 

Avison은 먼저 꾸준히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힘썼으며,

환자들을 위한 병원 서비스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뉴욕 선교본부와 미국 공사관에 요청하여 제중원의 조선인 인력 감축 및

간호사 충원, 건물수리 등 제중원의 대대적인 변화에 혼신을 다했다.

 

그 결과 제중원은 안정을 찾았으며,

1894년 11월 5일 이후 조선 정부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로 관할권이 이양된다.

 

Avison은 왕실이나 고위층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의료사역을

헌신적으로 감당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콜레라 퇴치 사역에 앞장선다.

 

정부의 요청으로 선교사들과 간호부들을 중심으로 위생부를 조직한 그는

콜레라 환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방역에 힘썼으며,

미신과 비위생에 대한 포스터와 전단지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천민 중의 천민으로 여겨진 백정 박성춘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그의 발진티푸스를 치료해주었다.

나아가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유길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백정들에 대한 차별이 공식적으로 근절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종의 주치의로서 왕의 신변보호의 역할까지 감당했다.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을 위해 언더우드,

게일 헐버트 등의 선교사들과 매일 밤 2명씩 불침번을 섰으며,

1895년 11월 28일 춘생문 사건 때에도 그는 왕의 곁을 지켰다.

이처럼 Avison은 다양한 모습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6. 세브란스 병원 설립과 사역

내한 초기 6년 간 다양한 모습의 선교사역 감당으로 건강이 악화된 Avison 부부는

1899년 3월 1차 조선 선교를 마치고 캐나다로 귀국한다.

선교기간동안 서울에 최신식 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안식년 기간 동안 이를 위해 활발히 활동한다.

 

Avison의 친구인 건축가 고든(Gordon, H. B)이

새로운 병원의 설계도를 제공하는 등 점차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1900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해외선교대회의 강사로 초청받은 그는

“Comity in Medical missions”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여기서 그는 조선 선교보고를 하면서 새로운 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때 Avison의 연설을 듣고 큰 감동을 받은 강철회사 사업가이자 거부 세브란스(Severance, L. H)는

병원 설립기금으로 1만 5천 달러를 기부하였다.

또한 북장로교 선교본부에서도 1만 달러를 후원하였다.

 

이를 힘입어 1903923일 남대문 밖 남산 기슭 복숭아골 대지에 세브란스병원이 완공되었다.

이후 세브란스는 추가로 3만 달러를 기부하여 1912년에 확대 증축된 세브란스병원은

북장로교를 비롯한 6개의 선교부에서 초교파적으로 운영된다.

 

▲7. 한국 의학교육의 선구자

의료선교를 감당하면서 의료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은 Avison은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의료인 양성을 위해 애썼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1900년 9월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여

1901년부터 7명의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학교육을 시작한다.

 

또한 황해도 장연군 출신의 김필순을 고용하여 한국어 번역 의학교재 집필을 시작으로

해부학, 화학, 생리학, 약물학 등 다양한 의학교과서를 자신이 직접 번역하였다.

 

7년간의 이론과 실습을 겸한 긴 교육과정 끝에

190863일 첫 한국인 의사들이 배출되었으며,

이듬해인 1909세브란스의학교로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는다.

 

1908년부터 1934Avison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352명의 의사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여성들의 효율적인 진료를 위해 간호사 양성의 중요성을 깨달은 Avison

1906년 쉴즈(Shields, E. L)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 안에 간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간호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산파간호부 양성소로 명칭을 바뀌었으며,

1934Avison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15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8. 연희전문학교 사역

언더우드와 함께 기독교종합대학 설립에 앞장 선 대표적인 선교사가 Avison이었다.

내한 선교사들 간의 오랜 논쟁 끝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와

서울 주재 장로교 선교사들, 남북 감리교 및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가 중심이 되어

조선기독교대학이 19154월 초에 개교한다.

 

부교장으로 취임한 Avison, 이듬해 교장 언더우드의 소천 이후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1917년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연희전문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연세대학교 전신

 

1934년 은퇴할 때까지 18년 간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Avison은 자신이 설립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사후 1957년 1월에 양교 간의 통합으로 연세대학교로 재탄생한다.

 

▲9. 은퇴와 귀국

1934년 2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사임한 Avison은

양교에서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인들에게 리더십을 인계한 그는

이듬해 12월 2일 75세의 나이로 지난 42년간 자신의 젊음을 바친 한국 땅을 떠난다.

 

그가 서울을 떠날 때, 최소 800여명의 사람들이 Avison 부부를 환송하였다.

이후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 Avison은 아내 Jenny를 떠나보낸 지 20년 후인

1956년 96세로 미국 플로리다에서 소천하였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의 넷째 아들 Douglas도 아버지와 동일하게 의료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세브란스 소아과 교수, 병원장, 부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귀국 후 1952년 8월 캐나다에서 별세한다.

 

자신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19534월 서울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그의 형제들이자 1895년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Avison의 쌍둥이 딸이 함께 묻혀 있다.

 

 

♣사진 및 기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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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귀한 사진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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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애비슨 선교사 연대표

 

1860. 6. 30. 영국 요크셔주 웨스트라이딩 재거 그린 출생

 

1876. 캐나다 온타리오주 알몬트고등학교 졸업 후 퍼드의 사범학교 입학.

 

1877. 사범학교 졸업 후 스미스 폴스 허튼초등학교에서 교사로 3년 간 근무.

 

1879. 오타와 고등사범학교 졸업.

 

1880. 스미스 폴스의 약방에서 3년 간 도제 생활

 

1881. 토론토 온타리오약학대학 입학(3년 과정)

 

1884. 6. 약학대학 졸업 후 약대 식물학 강사 출강, 그해 가을 토론토대학 의과대학 편입

 

1885. 7. 28. 제니 반스와 결혼

 

1887. 6. 의과대학 졸업, 7월부터 토론토대학 의대 약리학 강사 출강, 토론토 시내에 개업.

 

1893. 2. 6.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

 

         7. 16. 부산 도착, 부산에서 어학공부

 

         8월. 서울 도착

 

         11. 1. 제중원 의사로 고종의 시의 겸직

 

1899. 제중원에서 의학교육 시작

 

3. 안식년 차 캐나다로 귀국

 

1900. 뉴욕에서 열린 세계해외선교대회에 연사로 참석. 이때 세브란스 와의 만남

 

1904. 9. 3. 세브란스 병원 준공 후 봉헌, 병원장 취임

 

1913-1934. 세브란스 병원장 사임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취임 및 봉직

 

1916-1934. 연희전문학교 교장, 결핵예방사업, 숭실, 연희전문학교 강의, 남대문교회 설립

 

1934. 3.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및 연희전문학교 명예교장 추대

 

1935. 12. 2. 43년 간의 선교사 활동 은퇴 후 아내 제니와 함께 귀국

 

1936. 아내 제니 소천.

 

1952. 8. 넷째 아들 더글라스 소천, 이듬해 4월 양화진 묘지 안장.

 

1956. 8. 29.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소천.

 

 

 

주2) 가족사항

 

아내 Avison, Kathleen Isabel Rawson(1898. 8. 10 - 1985. 8. 6 / 한국선교 1921. 3. 15 - 1939)

 

아들 Avison, Arthur G.(1886. 5. 13 – 1887. 6. 20)

 

아들 Avison, Lawrence Barnes(1887. 12. 22 – 1962. 4. 16)

 

딸 Avison, Lera Chalmers(1889. 10. 8 - 1969. 8. 28 / 한국선교 1911. 9. 9 - 1914)

 

아들 Avison, Gordon Wilberforce(1891. 9. 28 – 1967. 5. 30 / 한국선교 1915-1939)

 

아들 Avison, Douglas Bray(1893. 7. 22 – 1952. 8. 4 / 한국선교 1921. 3. 15 – 1939) / 양화진 안장

 

딸 Twin girls (unnamed) (1895-1895)

 

아들 Avison, William Raymond(1897. 6. 25 – 1957. 9. 3)

 

아들 Avison, Oliver Martin Underwood(1898. 8. 6 – 1970. 8. 6)

 

아들 Avison, Edward Severance(1905. 6. 28 – 1989.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