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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제자의 책임 렘26장 1-9 2008년
서론
제가 가끔 보는 “우리 아이가 변했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때 쓰고 울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아동 심리 전문가가 조언해주고
부모가 몇 주만 제대로 교육시키면 완전히 변하여 고분고분해
부모의 뜻에 순종하고 훌륭한 아이로 변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저런 아이도 저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동심리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때로는 엄하게 하고 때로는 격려합니다.
즉, 채찍과 당근의 방법을 동원해 가면서 아이의 의지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도 이와 비슷합니다.
유다백성들의 의지는 대단히 완악했습니다.
그런데 이 완악한 의지를 가진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특수교육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이 유다백성들을 교육시킨 특수교육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 1절에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예레미야 26장의 내용이 기록된 시점이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입니다.
여호야김의 아버지 요시야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만
아들 여호야김은 대단히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렘26:20~23절에 또다른 선지자 우리아라고 하는 사람이 예레미야와 동일한 메시지를
증거 했습니다. 이 사람을 죽이려고 애굽까지 좇아가서 잡아다가 죽인 사람이
여호야김입니다. 이처럼 선지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레미야 36장을 보면 예레미야의 예언들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작은 칼로
조각조각 잘라 불속에 던져버린 인물이 바로 여호야김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호야김의 즉위 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전 609년입니다.
보통 정권이 바뀌게 되면 전임자 시절에 잘나가던 사람들도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 조심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야는 그런 시절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증거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증거한 메시지는 6절입니다.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실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 성막을 세워둔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나중게 결국 폐허가 되고 말았죠. 주1)
이처럼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아무리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고 법궤가 있다 할지라도
성막이 있고 법궤가 있었던 실로가 망한 것처럼
예루살렘도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야김 왕 즉위 초, 정권이 바뀐 첫해에 이런 메시지를 가감 없이 증거 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의 증거를 듣고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메시지를 증거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목숨 걸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증거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고 순종시킨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된 사람은 자기의 뜻과 고집을 꺾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1. 죄악 상태의 인간 의지
그런데 그 반대로 유다백성들은 자기의 뜻을 고집했습니다.
고집이 셌고 완악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혀 순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유다백성들에게 삼청교육대 교육과 같은 특수교육을 시작한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교회를 예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기 전에는 죄악된 모든 인간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지는 완악한 의지였습니다.
본문 26:4~5절에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유다백성들은 고집이 쌨고 완고하고 완악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않겠다.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은 “싫습니다. 안합니다. 못합니다.”로 이것이 그들의 3대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의지였습니다.
반항적 의지를 갖고 언제나 악을 향해 있었습니다.
앞서 13:23절에도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악한 너희가 선을 행하려면 흑인이 피부가 변하는 일이 얼어나면 너희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표범의 반점이 빠지는 일이 있다면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너희 의지는 언제나 악을 향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18:12절에도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말을 해도 자기들이 악한 것은 압니다.
악한 마음에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는 의지가 선하지 않고 악을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 의지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의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항복하라 하셔도 그들은 바벨론에 대항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갑니다.
죄인들의 의지가 모든 면의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이유는
그들의 의지가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신자들은 그 의지가 마귀의 노예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가 16세기 초에 기록한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대표학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오늘날도 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인간의 의지론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스럽고 능력이 있어 자기 스스로 선행을 하여
스스로 업적을 쌓아서 그 업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업적이 모자란 사람은 천국은 못가고 연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 이후의 개신교는 그런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죄와 마귀의 노예 되어있고
스스로의 의지의 능력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롬6:17절에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 믿기 전에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요8: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아비가 마귀이므로 우리는 마귀의 자식이요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자유의지론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르틴 루터,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노예의지론을 따릅니다.
죄인 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고, 죄와 마귀의 노예 되어 있으며
스스로의 의지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으며, 믿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게 된 것이 다 잘될 때 믿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어려운 시절에 교회 나오도록 인도해 주셔서 믿게 됐습니까?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개입이 없이는 사람은 자기 완악한 의지를 꺾지 않는 존재입니다.
◑2. 고집된 의지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방법입니다.
▲1. 외적인 방법은 우리를 조금 고통스럽게 해 그 고통을 못 이겨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 좀 거친 방법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섭리라는 어려운 말을 쓰지만
사실은 우리를 좀 괴롭게 해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도 바벨론 포로생활이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고집된 의지가 꺾였습니다.
렘27장에 보면 하나님이 쓰신 외적인 방법을 바벨론 왕의 멍에라고 표현했습니다.
약한 농부가 고집된 황소를 가지고 어떻게 농사를 짓습니까?
그것은 황소의 목에 멍에가 메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집된 황소는 목에 멍에를 멥니다. 처음에는 멍에가 익숙치 않아 반항을 하지만
반항해봐야 자기 목만 부러져 아프지 소용없습니다.
반항을 해도 결국은 자기만 아프고 괴로우니 견딜 수 없어서 결국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멍에를 목에 메고 하나님 앞에 나오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 멍에가 곧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반항하지 마시고
고집된 의지를 꺾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렘27:12절에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과 백성은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살리이다”
왕과 백성은 목으로 멍에를 메십시오. 그러면 살 것이라 한 것입니다.
멍에를 메더라도 고집된 의지를 꺾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애3:27절에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젊을 때에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고집된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평생을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고집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젊을 때 멍에를 메고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복된 인생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랫동안 신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보면
젊을 때 와서 신학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물론 늦게 공부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만, 젊을 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젊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어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믿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멍에를 메게 하셔서 우리를 예수께로 이끌어 오십니다.
▲2. 내적인 방법도 쓰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완악한 고집을 꺾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11:19~20절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36:26~28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의 악하고 완고한 의지를 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부드러운 의지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못된 아이를 그 악한 뜻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나중에는 못 쓰는 아이가 됩니다.
고집대로 살고 장성해서도 고집대로 살다 결국은 가정생활도 파탄 나고
그 원망을 부모에게 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의 어렸을 때 악한 습관을 그냥 놔두지 않고 왜 안 고쳐 주셨는가?’ 하면서
원망하고 결국은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영원 전에 택하신 백성, 영원 창세전에 하나님이 사랑하신 백성,
은혜언약의 대상이 되는 백성들은 고집대로 사는 것을 그대로 놔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멍에를 그 목에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마음이 변하여 성령의 역사로 의지를 변화시켜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후3: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와 멸망과 마귀와 지옥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멍에로 이끄시고 성령으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 멍에 멘 자의 바른 자세
그러면 완악한 의지를 꺾기 위해서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멍에를 멘 유다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 목에 하나님의 멍에가 있다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두 가지를 해야 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됩니다.
삶에 고통이 임하고 내 영혼의 멍에가 왔다 하면 우선은 잠잠해야 합니다.
애3:28절에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시46:10절에도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삶에 고통이 와서 견딜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밖에 없을 때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잠잠하라는 것은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고 원망하며 요동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목에 멍에를 메고 흔들고 불평하며 요동하고 소리지르면 목이 부러집니다.
그것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하라는 것입니다.여러분 삶에 고통이 오셨습니까?
경제적인 멍에, 육신적인 멍에, 정신적인 멍에, 가족적인 멍에가 오셨습니까?
불평도 마시고 원망도 마시고 걱정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자기 삶과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자식 여럿이 죽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자식끼리 서로 죽이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시편 39:9~10절에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다윗 왕은 잠잠히 받았습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의 네 아들 중에 첫째, 둘째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내리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불이 나와서 타죽었습니다.
레10:3절 후반에 보면 “아론이 잠잠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두 아들이 죽었는데도 아론은 잠잠했습니다. 고통의 멍에가 오면 우선 불평, 원망, 요동,
근심, 걱정을 마시고 잠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멍에를 순순히 메고 가야 됩니다.
예레미야보다 100년 먼저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한 미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가서 6:9절에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매를 맞을 때는 순히 맞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매는 아버지가 자식을 교정하는 매입니다.
그러므로 악과 지옥과 멸망에서 돌이켜 악한 의지를 꺾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라고 하는
그런 사랑의 매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매는 잠잠하고 순순히 받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므로
우리가 유익하도록 매를 드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매를 맞을 때 요동치고 울며 난리치면 더 맞습니다.
삼상 3장에서 엘리 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을 통한 “너희 집안이 심판 받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겸손히 받아드립니다.
삼상3:18절에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것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의 후손들 가운데, 나중에 일부 회복됨을 봅니다)
자기 집이 망한다고, 집안에 어른이 없고 젊어서 다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도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는 선하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것이니이라”고 말을 합니다.
눅22:42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되는 멍에를 앞두고도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레미야나 예수님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뜻을 완전히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결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는 책임이 있습니다.
마11:29~30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람은 어차피 한 가지 멍에는 메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마귀가 주는 멍에를 멜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갈5: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보십시오. 다 멍에를 메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종류 중에 한 가지 멍에는 메고 삽니다.
하나는 마귀의 멍에를 메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의 멍에는 결국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그 사람을 죽이며 멸망시키고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멍에입니다. 불신자들의 목에는 그런 멍에가 메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목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가 메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대나라의 농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에서 농사를 지을 때 어미 소와 새끼소가 있습니다.
어미 소의 몸에다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를 메면 새끼소는 어떻게 하느냐?
농사짓는 것을 훈련하기 위해서, 어미 소가 멘 멍에에다 자기 목만 걸고 가는 것입니다.
새끼소는 따라가면서 속으로 ‘이 멍에라는 것이 쉽고 가벼운 것이구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힘은 어미 소가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끼소는 나중에 자기가 커서 멍에를 메도 이 멍에가 재미난 것이라면서
멍에를 메고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어린 소 훈련시키는 방법이 이렇습니다.
왜 새끼소가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은 진짜 멍에는 어미 소가 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가 저야 될 큰 멍에, 지옥의 멍에,
심판의 멍에를 대신 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메신 멍에의 우리 몫만 걸고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그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그 길은 살 길이요 천국길이요
그 길은 때로는 좀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바로 영생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의 고집된 의지를 꺾어야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여러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은
고집된 의지가 꺾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자기의 고집된 의지를 꺾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을 꺾고 주께서 메신 멍에에 우리의 목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살 길이고 복된 길이며 영생길입니다.
........................................
주1) 실로가 폐허가 된 이유
그런데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못된 짓을 자행했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러 오면 제물을 삼는 동안에 갈고리로 제물을 꿰어
자기 마음에 드는 고기를 끌어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자기들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을 마구 건드리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서쪽 해안에 있는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일으켜
전쟁이 나게 한 것입니다. 전쟁을 해보니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전쟁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막에서 들고 오자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해서 블레셋과의 전쟁인 에벤에셀 전쟁에 이 법궤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서 죽고 법궤는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두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넘어지고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이처럼 실로의 엘리 제사장 집안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실로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
1백여년 동안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만, 죄로 인해서 완전히 망한 곳이었습니다.
법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이 법궤는 다시는 실로로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7개월 동안 블레셋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들이 갖고 있다 보니 몸에 온갖 독종이 나고
피부병이 생겨 견디다 못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결국 벳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손으로 짚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다
결국 이 법궤는 벳세메스에 있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진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