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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1장, 왕에게 항복하라

LNCK 2024. 10. 16. 18:3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삶의 통찰력

 

왕에게 항복하라            렘21장                    여러 설교 정리

 

앞서 1~20장까지는 심판에 대한 일반적인 예언이 지속되었습니다.

본 장부터는 심판에 대한 특별한 개인적인 예언들이 나옵니다.

본 장은 그 도입부입니다. 본장은 시드기야를 향한 예언입니다. :11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현실적으로 다가온 바벨론의 침입을 맞이하면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그에 대해 예레미야는 두 길, 곧 생명 길과 사망 길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이 징계의 도구로 사용한 바벨론을 대항하지 말고, 투항할 것을 권고합니다.

 

내용구조는

-시드기야의 요구와 하나님의 응답   1-7절,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8-14절

 

◑1. 시드기야의 요구와 하나님의 응답       21:1~7

 

시드기야 왕은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옹립된 왕입니다.

 

그러나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반바벨론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겔17:15

그로 인하여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예루살렘을 침략했습니다. B.C.588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침략을 받자 당황하여 자신이 투옥시켰던 예레미야에게 32:2

바스훌과 스바냐를 특사로 보냈습니다.

 

'바스훌'은 20:1-6에 언급된 바스훌과 동명이인 이며,

본문의 바스훌은 후에 예레미야를 반대하고 처형하려고 합니다. 38:1~13

 

'스바냐'는 훗날 예레미야를 찾아오게 되고, 37:3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않아서 비난당한 유사(관리)로 언급됩니다. 29:25-27

 

시드기야 왕은 바스훌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침략해 왔으니,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느부갓네살이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약 1세기 전 B.C.701년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포위했을 때

이사야가 기도했고, 하나님이 기사를 행하여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왕하19:35-36, 사37:36-37

 

시드기야는 그 기사를 능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번에도 하나님이 기사를 행하여, 느부갓네살 왕을 물리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2

 

예레미야가 그렇게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예언했을 때에는 듣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 가두고 핍박하더니

이제 그 예언이 이루어져 멸망을 보게 되니, 위급하여 그제야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왕에게 바벨론 군대를 대항하여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다 군대가 약한 무기로 바벨론 군대의 강한 무기를 상대로 맞서 싸우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무기들도 뒤로 돌릴 것이고

바벨론 군대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4

 

6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보내시고 :6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7

 

그래서 모두 그들의 칼에 죽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깐데 또 까는 식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분노하여 바벨론 군대를 통해 심판하고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긍휼을 베풀 때가 지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2.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21:8~14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왕이 보낸 바스훌과 스바냐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8

 

생명의 길’은 ..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여 사는 것이고 :9

그렇다면 ‘사망의 길’은.. 자연히 항복하지 않는 길을 말합니다.

 

생명의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망의 길’은, 하나님의 심판을 끝까지 대항하는 것입니다.

 

10절에 여호와의 심판은 이렇게 작정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

 

이제 남유다가 택할 생명의 길, 즉 사는 길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심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그럴려면, 조금이라도 피해를 더 줄이기 위해서는..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9

 

예루살렘이 골짜기 위에 반석처럼 견고하게 서 있어서, 당시에 공략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래 골짜기에서 가파른 길, 표고차 100미터의 길을 올라가야 예루살렘 성에 도달합니다.

비교적 방어하기에 좋은 지형이었죠. 애당초 다윗이 여부스 족속에게 예루살렘 성을

빼앗을 때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유다는, 어떤 대적이 와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13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심판을 작정하셨으므로

바벨론을 통해 그 성을 점령하고 불을 놓게 한다는 것입니다. :10

 

이렇게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유는

1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12절에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당시에 재판이 주로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곧 날이 더워지니까요.

 

어쨌든 유다 왕들이, 판결 곧 재판을 정의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압박당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2

 

이렇듯 성경은 ‘공의’를 아주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살아가면서 ‘공의’를 별로 게의치 않습니다만

성경에, 특히 성경의 선지서에 ‘공의의 시행’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그 중의 한 구절이죠.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남유다를 버리실 만큼,

‘너희가 바벨론에 항복해서 차라리 죽지 말고 살아라’ 하실 만큼,

자기 자녀를 내어버리듯이, 이스라엘을 내다 버리십니다.

 

그렇게 진노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어서 그러셨나요?

아뇨,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왕들이 (여기엔 사회지도층도 포함되겠죠)

공의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공의 시행’을 그렇게 무겁게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각자를, 멸망한 남유다처럼 다루실 것입니다.

 

◑적용

 

▲1.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나 작정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가급적 피해를 최소화하고, 줄이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는 자세입니다.

 

'불패 콤플렉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십대의 성장기 특히 남자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 현상을 말합니다.

패배를 수용할지 모르는 태도입니다.

 

이와 같은 정신적 심리적 현상은 남성으로서 성적 특징을 갖추기 시작하는

성장기의 남성에게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심리적 상태를 지속하는 사람의 경우 대개 성취욕이 강하고 추진력 또한 강한 편입니다.

그 점에서 보면 대개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어떤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패 콤플렉스'란 그렇게 긍정적인 뜻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는 법입니다.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고, 성공할 때가 있으면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불패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 어떤 경우든 성공한 사람이어야 하고, 어떤 경우든 중심이어야 하며,

어떤 경우든 군림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정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웃 나라가 과거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패 콤플렉스’가 국민 정서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어쩌면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었을 때, 빨리 항복했더라면

불벼락(원자탄)을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 나라는, 과거 역사상 한 번도 외국과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다는

‘불패 콤플렉스’에 빠져 있어서, 항복하지 않고 계속 전쟁을 끌어나가다가

더 큰 피해와 참극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왕 항복할 거면, 빨리 바벨론에 항복해라’는 것이죠.

그것이 오히려 ‘살 길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매맞으면 안 되지만, 잘못해서 매를 맞게 되었다면

순순히 맞는 것이 백 번 나에게 유리합니다.

‘주님, 제가 벌을 달게 받겠나이다’ 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10대 맞을 것도,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얘는 안 때려도 되는 구나...)

 

애2:10 ‘도성 시온의 장로들은 땅에 주저앉아 할 말을 잃고, 머리 위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둘렀다.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땅에 머리를 떨군다.’

 

이게 순순히 벌을 달게 받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너무 늦게 그 자세를 취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서 그랬던 것입니다.

 

▲2. 봉신이 주군을 배신하면, 엄청난 대가를 치릅니다.

 

본문은, 남유다가 완전 패망하기 약 2년 전 상황으로 여겨집니다.

BC 586년에 딱 망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 공격해 와서, 약 2년 정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거든요.

 

성을 포위해서 굶어죽이면서,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던 거죠.

예루살렘이 산꼭대기에 있어서, 공략도 쉽지 않았고요. :13

 

본문의 왕은,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 왕 개인에게 주어진 예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11

 

그러면 시드기야가 왜 심판을 받았습니까?

시드기야가 심판을 받은 외적인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가 바벨론 왕을 반역했기 때문이었어요.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 의해 세워진 유다 왕이었습니다. 왕하24:15

시드시야는 남 유다의 왕이었지만, 동시에 바벨론 왕의 봉신이였단 말입니다.

바벨론 왕과 종주권 계약을 맺은 봉신이었던 겁니다.

 

바벨론 왕은 모든 땅을 정복했고,

정복한 나라의 왕들이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종주권 언약을 맺어서,

그 봉신은 바벨론 왕을 주군으로 모시고

대신에 바벨론 왕은, 봉신들에게 보호를 약속하는 거예요.

 

그런데 시드기야가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언약을 맺어 놓고

자기의 주군을 배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바벨론 왕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고 쳐들어 와서

결국 그들을 무너뜨렸다는 거예요.

이게 당시 상황의 외적인 이유였어요.

 

△그런데 시드기야가 심판을 받았던 진짜 이유, 영저인 이유는 무엇이죠?

그가 하나님, 하늘의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유다 왕들은, 다윗 왕 때부터, 하나님과 주종 관계를 맺었던 자들이었죠.

‘다윗 언약’이라고 부르죠. *삼하7장

 

그래서 다윗의 집안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충성하면,

하나님은 그 왕위를 끊이지 않고 보호해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적용’하면서, 시드기야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 각자 또한 하나님의 봉신입니다.

시드기야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요, 왕입니다.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벧전2:9

왕도 되고, 제사장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했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맹세했던 자였어요.

 

그렇지만 봉신이 주군을 배신, 배반하면

시드기야처럼 되는 거죠. 결말이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나중에 자기 두 눈이 뽑히고, 렘39:8

자기 아들들도 자기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죠.

 

봉신이 주군을 배반하면, 그런 비참한 결과가 따르는데,

그건 원래부터 ‘종주권 조약’에 명시된 것이라서, 억울하다고 하소연도 못 합니다.

 

하나님 백성인 우리 각자가 주군을 배신하면, ‘종주권 조약’에 의거

엄청난 벌을 받게 되는데, 그게 신28:15절 이하에 나오는 ‘저주 조항’입니다.

신명기 28장 전체가 ‘종주권 조약’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드기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봉신이요, 종이라는 말입니다.

 

사단의 땅, 영토이었던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피로, 우리를 건져내셨고, 종으로 삼으셨단 말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나의 주인입니다’ 라고 주군 맹세를 했단 말입니다.

 

신약시대에 우리는 ‘주님 Lord’ 이라고 부르잖아요.

바로 주군이라는 뜻입니다.        ☞ <주 되심 Lordship>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자 Savior 로는 믿는데,

자기 삶을 다 바쳐서 헌신해야 할 주님 Lord 로는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심각한 왜곡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정 구원받은 자라면, 시드기야처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주님 Lord’로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주권 조약에 의거, 자기 백성들을 무한책임으로 지켜주시죠. 신28:1~14

 

▲3. 본문에 나타난 시드기야의 결정적 잘못은

그가 통치자로서, 왕으로서 ‘정당한 공의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게 그가 심판 받은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21:11~12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며’

당시에 왕은 주로 ‘아침’에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시원할 때에,

일찍 그 날의 중요한 재판을 시행한 것입니다.

재판은 매일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결국 시드기야 왕이, 재판을 공의롭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바벨론 왕의 심판을 자취하게 된 것이죠.

 

▲30년 전에, 기독교 실업인 모임(CBMC)에 제가 강사로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하 펀글)

한국 재계의 유명 인사들,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모인 자리였습니다.

당시 경험 없던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성경 본문을 잘 못 택했습니다.

 

그분들의 바램은, ‘내가 하나님의 축복받은 실업인 장로가 되었는데

그것을 추켜세워 달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제가 야고보서를 본문으로 택하니까

‘너희가 떼먹은 임금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한 것은 죄이고...’

 

그 때 장로님들이 강의 후에 식사할 때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홍 목사,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지.. 정직해서 사업이 되는 줄 알아?”

 

매 번 기독교 실업인 모임(CBMC) 설교를 마치고 나서,

조찬 식사시간에 나는 똑같은 질책을 들었습니다.

실업인들은 제 연속 강의가 빨리 끝나기를, 총무에게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놀랍게도, 젊은 기독교 실업인들이 말씀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노력들을 곁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 순종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망해 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교인도 아니지만,

저는 그 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조용히 중보기도 합니다.

 

경제정의가 이 땅에 아름답게 구현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를 행하며...” 대로 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길게 가면... 결국 하나님 말씀의 원칙대로 행하는 자가 승리할 것입니다.

당장은 망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게 결국은 승리하는 길이요,

타협하는 길은, 당장은 잘 풀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게 결국은 망하는 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전에 과기처 장관도 하셨고 청와대 경제 수석도 역임하신 구본영 씨가

우리 교회에 나오시길레, “어떻게 교회 나오시게 되었습니까?” 물었더니

 

“저는 목사님의 교회에 다니는 김인수 장로와 사무실을 같이 씁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답답하고 딱딱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반듯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지 정말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하는 것을 모두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교회까지 이렇게 따라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동네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의를 행하며...”의 길이다. 이런 고백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독일의 천재물리학자인 베르너 하이젠버거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약관 27세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31세 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서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반 나치적이고, 친유대적이었던 하이젠버거는,

나치의 탄압 속에서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1939년도에 하이젠버거는 미국 시카고 대학의 초청을 받아서,

시카고 대학에서 수개월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그때 그의 학문적 재능과 인품에 감동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미국 망명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하고,

대서양을 건너서 히틀러 치하의 조국 독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당시 그는 이렇게 직접 밝혔습니다.

‘독일을 엄습하고 있는 죽음의 폭풍 속에서,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사는 사람만 독일을 바르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념으로 독일로 되돌아간 아이젠버거는

폰 바이체커와 함께 우라늄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히틀러로부터 원자탄을 제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우라늄 프로젝트에 관한 한,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음에도,

독일이 미국에 원자탄 제조에 뒤지게 된 것은,

하이젠버거 같은 사람이, 고의적으로 그 계발을 지연시켰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이젠버거는 단 하루라도 더 빨리 히틀러 정권이 붕괴하는 것이,

독일과 세계를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원자탄 계발을 지연시켰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이젠버거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무자비한 히틀러의 광란의 폭압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자기 삶의 자리에서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건 사람이었기에,

그는 원자탄 계발을 지연시킴으로써, 독일을 지키고 살렸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원자탄 재앙으로부터 유럽인도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하이젠버거 교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자신의 온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하이젠버거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위대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요?

그것은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면,

결국은 인도에 도착할 것이라는 그의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그 판단은 이미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이미 제기된 것이었습니다.

 

혹은 그의 용의주도한 탐험준비와 선박에 대한 그의 전문지식이

신대륙을 발견케 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당시 그런 사람은, 유럽 대륙에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의 위대성은, 이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대륙을 떠나,

배의 비축한 식량과 장비만으로는 결코 출발점으로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향해, 계속 항해한 결단과 용기였습니다.’

 

행동하는 하이젠버거이기에, 그만이 깨달을 수 있고,

언급할 수 있는 지적이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무리 야심만만하게 항해를 시작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가도, 자신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확신한 대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시 범선에 비축할 수 있는 식량과 장비만으로는

콜럼버스는 절대로 유럽 대륙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경우에 콜럼버스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의 길밖에 없었습니다.

망망대해 위에서, 속절없이 굶어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서쪽으로 가면, 동쪽에 있는 인도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쩌면 망망대해 위에서 속절없이 굶어죽을 지도 모르는 그 길을 향해,

인생의 배를 띄웠습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그 한사람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운 전기를 맞았습니다.

 

.......................................

 

 

◑절별 해석

 

21: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

 

21: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본문에서 시드기야는 B.C. 588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당황하여 예레미야를 부르고 있다. 그는 본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반바벨론파의 득세로 인하여 애굽, 암몬, 두로, 모압, 시돈 등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반란을 꾀하였다(겔 17:15).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다급해지자 그는 자신이 투옥시켰던(32:2) 예레미야에게

특사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등장하고 있는데,

20:1-6에 언급된 임멜의 아들 바스훌과는 동명 이인이다.

이곳의 바스훌은 더욱더 악랄하게 예레미야를 반대했었으며

훗날에 가서는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처형하려고도 하였었다(38:1-13).

 

그 뒤에 등장하는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본장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에게 왔지만, 훗날에도 예레미야를 찾아오게 된다.(37:3)

 

그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9:25-27에서 예레미야를 징책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는 유사(有司)로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께 간구하라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여기서 '간구하라'(다라쉬)고 하는 말은 여호와의 생각과 뜻을 찾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다양한 문맥에 산재해서 나타난다.

(창25:22, 출18:15, 신4:29, 삼상9:9, 사31:1, 호10:12 등)

 

시드기야는 그때로부터 약 1세기 전, 즉 B.C.701년 예루살렘이 산헤립과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위 당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왕하19:35 ,36, 사 37:36,37).

그때 여호와께서는 기사를 행하사 산헤립을 물러가게 했었다.

 

현 상황 역시 그때와 대단히 비슷한 상황으로서

어떤 기적이 없이는 도저히 극복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갈대아인들과 느부갓네살

(히브리어 음역은 '네부카드레차르'이며, 아카드어로는 나부-카두리-우추르임)이란 이름은

보다 완전한 형태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장에서만도 수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이 이름이 '네부카드네차르'로 쓰였다(27:6,8, 28:3,11, 29:1, 3 등).

그는 B.C. 605년에서 562년 사이에 바벨론을 통치했으며,

나보폴라살(B.C. 625-605년)의 아들이며 후계자였다.

 

21:3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2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의 왕과 또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대했으나 그들에게 주어지는 응답은 약간의 희망마저도

완전히 꺾어버리는 그러한 것이었다.

약한 병기를 가지고 강력한 갈대아 군대와 맞서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나마 있는 그 병기도 되돌려 버리실 것이고

침략자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

 

이제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함락을 들이키기 위한 하나님께로부터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범죄한 유다를 징벌할 목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유다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에 대한 원문의 해석은 다소 분명하지 않다.

이는 성 밖에서 갈대아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유다의 방위 군대가 침략자들과 더 이상 맞붙어 싸울 힘이 없어

다시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

그러나 이는 성안으로 들어오는 갈대아 군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함락 당시의 상황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21:5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든 손과 강한 팔 곧 ... 대노로'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치실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갈대아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든 손과 강한 팔'(베야드 네투야 우비즈로아 하자카)이란 표현은

32:21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형용사의 순서가 바뀐 형태로 나타나 있다.

 

구약에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을 치르실 때 주로 쓰였다(주로 모세 오경에서).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이 유다에 대하여 성전(聖戰)을 치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는 이른바 신명기와같은 고대 전통의 계승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등장하는 이런 어구를 자주 사용하였을 것이다.

 

21:6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큰 염병에 죽으리라'

성경에는 '염병'(데베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지만, 그 증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대체로 흑사병(pest), 장티푸스(typhus), 콜레라(cholera), 천연두(smallpox) 등이 성경에서

염병으로 지칭된 질병들로 짐작된다.

 

이 염병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던 병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이 병에 걸리면 거의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결과 염병의 형벌을

네 차례나 받았으며(민11:33, 14:37, 16:46, 25:9)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불순종에따른 하나님의 징벌로서 임할 염병에 대해

수차례 예언하고 있다(14:12, 24:10, 겔7:15, 12:16).

 

2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염병에서 살아남고 또 칼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왕들과 신하들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신하'에 해당하는 '에베드'는 원래 '종', '노예', '하인'을 뜻하나

여기서는 유다왕 시드기야를 보좌했던 근신(近臣)들을 말한다.

왕하25장을 참조하면 이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 역사적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할수 있다.

 

2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여기에서 일반 백성 전체에게 주어지는 간략한 서술이 언급되어 있다.

내용상 이것은 38:2, 3과 유사하다.

아마 예레미야는 같은 내용의 충고를 수차례 걸쳐 반복했었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선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었다.

이런 표현은 지혜 문학과 그밖의 다른 문헌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신30:15-20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가 표현되어 있는데,

그 선택의 주제는 언약에 대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것이다.

 

한편 본서는 산문과 운문으로 번갈아가며 표현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산문체이다. 어떤 학자들은 운문만이 예레미야 작품이고

산문체 서술들은 후기 신명기학파 저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곤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산문체를 예레미야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1:9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여기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은 향하여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적에게 항복하라는 이 같은 조언은 그의 정치적 동기를 의심하게끔 만들었고,

감상적 이미지를 띤 정치 지도자들에게 핍박의 명분을 제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반역자로 여겨지기도 했었다(28장).

그러나 B.C. 586년 이 민족이 멸망했을 때 그는 이곳에 남아 민족의 갱생을 위해 일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결코 개인적 이익을 탐하는 그런 매국노가 아니었던 것이다.

 

21: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예레미야가 주장하는 원리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불의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 민족을 버리셨다는 것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항복할 것을 권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미래의 갱생을 위하여

오히려 전일보하는 선택임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21:1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 '유다 왕의 집'이란 유다 왕가(王家)를 가리키며,

그 왕가의 기원을 연 다윗을 대조적으로 상기시키는 말이다(12절 참조).

그들의 선조 다윗은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공의롭게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이스라엘을 번영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열 왕국 시대의 대다수 왕들은 다윗과는 달리

불순종과 배도의 길을 멸망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21: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여기서는 왕의 근본적인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서술되고 있는데,

그것은 '공의'(미쉬파트)를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마다'(랍보케르)란 표현은 낮의 더위를 피해 아침 시간에

성문에서 열리던 소송 사건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왕들의 주요 임우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정의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이란 정의의 수호자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의무가 더욱 강조되었으며, 솔로몬은 하나님께 다른 그 무엇보다도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왕상 3:9).

 

21: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공동번역은 '계곡을 굽어보는 예루살렘아, 벌판에 우뚝 솟은 바위야'라고 번역하여

요새로서의 예루살렘의 지형적 이점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내었다.

 

유다 백성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예루살렘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분히 조소적인 표현으로서 그들의 자만을 꼬집고 있다.

 

한편 본절의 '너희'는 2인칭 단수 여성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도시나 성들은 흔히 그곳 주민들의 '어미'로 표현되었으며

그 주변의 마을들은 '딸들'로 불리었다(왕하 19:21, 사 37:22).

 

21:14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앞 구절과는 달리 여기서 '너희'2인칭 남성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수풀'(야아르)이란 명사에 대해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이 왕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근거로서 왕상7:2에 있는 '레바논 나무로 궁(레바논 수풀 궁)을 지었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아마 이 궁을 건축하는 데는 엄청난 백향목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예루살렘 혹은 유다의 온 땅을 암시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수풀을 불에 사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사 9:18,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