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89) / 사도행전 27:1~26 / 풍랑 중에도 안심할 수 있는 이유 - YouTube
◈풍랑 속에서 안심할 수 있는 이유 행27:1~26
바울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까지 바울은 육로가 아니라 바다를 통해 가게 됩니다.
그 로마까지 가는 항해 과정이 행27장의 내용입니다.
한 장을 길게 할애해서 항해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누가가 이 여정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우리의 인생 여정이 긴 항해와 같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순풍이 불어 평탄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시로 부는 폭풍과 또 강풍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파선하는 것 같은 위기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항해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걸 우리는 본문의 바울의 항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바울의 항해 이야기는,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의 이야기이자,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이야기입니다.
◑1. 항해 길에 함께 하는 동역자들을 붙여주시는 하나님
27: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주어가 바울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같이 탔다는 표현이죠.
누가가 의사이니까, 아마 바울의 주치의로 함께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같이 탔다고 나옵니다. 27:2
그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이후로 이제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성경 곳곳에 나오는데요.
19: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에베소의 우상 제작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었죠.
그래서 바울을 붙잡으려 했는데, 바울을 찾아도 안 보이니까
대신에 바울과 같이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이방인이란 뜻, 아시아인과 다른 유럽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대신 붙들었습니다.
이렇게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위기 때 같이했던 사람이었죠.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끝내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 마게도냐와 아시아의 교회들의 대표 7명이 동행했는데,
그 중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대표한 사람이 아리스다고 였습니다.
이 아리스다고는 끝까지 바울 곁에 남아서, 로마까지 가는 배에 동행 합니다.
자 그런데 또 배만 같이 탄 게 아닙니다.
골로새서 4:10절을 보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로새서는 바울이 이제 로마감옥에 갇혀 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로마감옥에서 바울과 함께 갇힌 사람이 아리스다고 입니다.
가택연금이라서, 바울 곁에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
자 이 아리스다고가, 로마로 가는 바울의 뱃길에서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27:2
바울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곁에는 아리스다고 말고도, 누가도 함께 있습니다.
▲27: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바울이 탄 배가 가이사랴를 떠나 이튿날 시돈에 정박합니다.
시돈에서 바울은 친구(성도)들의 따뜻한 대접을 받습니다.
요즘도 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수를, 하루 외박 시켜주는 제도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바울도 '특별한 대우'를 백부장 율리오로부터 받은 것이죠.
그래서 시돈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지만,
믿음의 형제들이 그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홀로 가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인 누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그래서 바울은 이 항해의 여정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은 죽을 위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또 바다도 여러 번 건너야 했습니다.
제가 주석을 보니까, 그동안 바울이 총 11차례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망망대해 바다 위를, 바울은 떠다녀야 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참 외롭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이 항해 길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믿음의 동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필요한 동력자들을 붙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떠나는 인생의 항해 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의 항해를, 홀로 가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함께 가도록 하십니다.
때마다 필요한 동력자들을 붙여주심으로써, 이 항해를 함께 가도록 하십니다.
배를 타고 며칠을 오래 동안 가다 보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습니까?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은, 배멀미를 하게 되고요...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롭지 않도록, 또 낙심하지 않도록
항해의 길목마다 필요한 동력자들을, 기가 막히게 준비해 주십니다.
▲저(설교자)는 가족 중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홀로 신앙의 항해를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의 기도의 지원도 없었고요. 오히려 핍박을 했으니까요.
제가 신대원을 간다고 했을 때는,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습니다.
'어떻게 이 길을 가야 하나? 어떻게 항해를 해야 하나?' 참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지나오면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홀로 항해를 하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믿음의 동력자들을 기가 막히게, 때마다 붙여 주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아 그때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때 그 누군가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여러분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건 당연한 얘기죠.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가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감동으로
바울을 도울 사람을 같이 붙여 주셔서, 풍랑 이는 항해 길을, 믿음으로 함께가게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다 동일한 고백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폴 투르니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참 기가 막힌 명언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끝까지 그리스도 인으로 믿음의 항해를 마치는 것,
이 일은 결코 혼자서는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랑 많은 뱃길을 떠나는 바울이 낙심하지 않도록,
누가와 아리스다고 두 사람을 붙여서 함께 가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싸인을 못 알아차리는 사람들
본문에 보면, 이 배에 인솔자는 아구스도 대의 백부장 율리오 라고 말합니다.
'아구스도 대'는 황제의 부대 라는 뜻입니다.
이 부대의 책임자가 백부장 율리오 였습니다.
이 율리오의 인솔 하에, 이제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 경로가 오늘 본문에 자세히 나오는데요.
우리가 글로 읽으면 좀 복잡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도를 준비해 봤는데요.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출발하는데, 배 이름이 아드라뭇데노 입니다. 27:2
이 배는 로마로 가는 배가 아닙니다. 직항이 아니고 나중에 무리에서 환승하게 됩니다.
이 배가 시돈이라는 항구에 도착합니다. :3
시돈에서 구브로 해안을 지나서, 소아시아 해안을 거쳐서 무라 시의 항구에 도착합니다. :5
여기서 이제 배를 바꿔 탑니다. 로마로 가는 큰 배로 바꿔 탑니다. :6
그 배의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라는 배입니다. :6
이 배는 곡식을 운반하는 곡물선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실어나르는 배입니다.
왜 곡식을 이집트로 부터 로마에 실어 날랐느냐면,
당시 로마는 제국의 수도이었죠.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해서, 거기 곡창지대의 풍부한 양식을 공출해서
로마로 실어날랐던 거죠.
그러니까 이 배의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라는 말은 27:6
이 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하였거나, 알렉산드리아에 선적을 둔 배라는 뜻이죠.
뒤에 보면, 이 배에 276명이 탔다고 나옵니다. :37
곡물을 가득 싣고, 또 276명이나 탈 정도면, 당시로서는 매우 큰 배였던 거죠.
이 배를 타고, 무라에서 로마로 가게 됩니다.
▲자 그런데 자 이 때부터, 항해가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신앙의 항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순풍에 돛 단듯이 평탄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맞바람이 불 때가 있죠.
7절과 8절에 보면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간신히' 라는 표현입니다.
27: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맞바람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또 간신히 이제 항해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무리에서 니도 섬 맞은 편에 간신히 도착합니다. :7
무라에서 니도까지는, 하루걸리는 길이랍니다.
그런데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도착했다'고 말합니다. :7
그만큼 맞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는 거죠.
그리고 니도 에서 간신히 그레데 섬의 미항에 도착합니다. :8 *아름다운 항구, Fair Havens
여기서 바울은 더 이상의 항해를 반대합니다. 왜 반대를 했을까요?
그 이유가 9절에 나오는데요.
27: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금식하는 절기'란, 유대인의 대속죄일을 말합니다.
이 절기는 음력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매년 날짜가 바뀝니다.
그런데 이 때를 양력으로 계산하면, 대략 9~10월 정도에 해당합니다.
이 때에는 겨울이 시작되는 때인데, 지중해의 겨울은 태풍과 폭풍이 자주 부는 때입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항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파선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죠.
폭풍 외에도 짙은 구름과 안개 때문에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늦어도 11월 초순에는 항해를 마쳐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11월 11일이 지나면, 지중해 항해가 금지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너무 늦은 겁니다. 10월 중순이니까, 곧 항해가 봉쇄 되는 시점입니다.
(*이 때를 AD 59년으로 보는데, 그 때 대속죄일이 10월 중순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항해를 하루 이틀만에 하는 게 아니고, *오늘날의 비행기가 아닙니다.
바람에 의지하거나, 노를 저어서 가던 시절이었는데, 로마까지는 1달 이상이 걸린다고 볼 때,
지금은 바다가 잔잔하다 하더라도, 두 주간이 지나면 바다가 달라지는 거죠.
자 그래서 바울이 항해를 만류니다. 지금까지도 배가 간신히 왔으니까요.
바울은 만약 항해를 강행할 경우 일어날 세 가지 일을 경고합니다.
27: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화물을 잃을 것이다.
-배를 잃을 것이다.
-생명도 잃을 수 있다.
그러니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바울은 제안합니다.
그러나 이 배에 선주와 선장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27: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선장과 선주는 이제 그레데 섬의 또 다른 항구인 뵈닉스 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왜냐면 미항은 항구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작다보니까 겨울을 보내기가 불편했습니다. 이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자 또 하나 여기에는 숨은 동기가 있었습니다.
뵈닉스 까지 가게 되면 선장과 선주가 돈을 더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겨울에는 항해가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일종의 생명 수당이 붙었습니다. 그게 꽤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겨울 항해를 강행하는 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거죠.
-미항보다는 뵈닉스가 겨울을 지나기에 편안하다.
-돈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 지도를 보면, 미항에서 뵈닉스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약 46 Km 거리라고 합니다. 하루 만에도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선장과 선주는 뵈닉스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백부장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이때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어 주었습니다. :11
왜냐하면 여론이 뵈닉스로 가기를 더 원했기 때문입니다.
자 왜 여론이 압도적으로 뵈닉스로 가기를 원했을까요?
아무래도 대도시, 큰 항구가 숙박시설, 식당, 위락시설이 더 많았겠죠.
그리고 마침 그 날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이 시대는 배가 전부 바람으로 항해하던 시기입니다.
바람을 보니까, 뵈닉스 쪽으로 부는 겁니다.
'이 날씨면, 뵈닉스로 가는 건 식은죽 먹기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만류를 뒤로하고, 항해를 강행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유라굴로를 만났죠.
▲그런데 이 바울의 항해가, 우리의 신앙의 항해와 비슷합니다.
우리도 신앙의 항해를 하다 보면,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따라 결정합니까?
혹시 우리도, 본문의 세 가지 조건이 우선시 되지는 않습니까?
돈, 육신의 편안함, 사람들의 여론.
이 세 가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세 가지가 오늘도 세상을 움직이는 메커니즘 아닙니까?
그러나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자 지금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싸인들이 있었습니다.
맞바람이 불었습니다. :7~8절에 '간신히'라는 말이 두 번 나왔듯이
지금 간신히 미항에 도착한 것입니다.
지금 잠시 남풍이 순하게 불고 있기는 하지만, :13
이 맞바람이 그친 게 아닙니다.
맞바람은 '항해를 그만 멈춰라' 하는 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 선주, 선장은.. 그 하나님의 싸인을 무시하고
돈과, 육신의 안락함을 따라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캐더린 마샬이 쓴 <기도의 모험>이라는 책에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데, 그렇게 평안한 성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이분이 어려운 문제에 앞에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마음에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그런 응답을 주시더래요.
지금 자기는 조급해 죽겠고, 당장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응답은 천하태평 같이 그냥 '기다리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니까,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염려하지 않고 그냥 기다렸대요.
근데 한 3일 정도가 지나니까, 그 문제가 많던 것들이 그냥 싹 해결이 되어버린 거예요.
'참 신기하다..'
근데 그때 딱 깨달아지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무덤에 3일 동안을 계셨어요. 그때는 진짜 다 암울한 것 같아요.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무덤에 묻히셨어요. 이제 끝난 거죠.
그 암울한 3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부활하신 거예요.
이분이 엄청난 영적인 진리를 깨달은 겁니다.
'아, 주님의 부활 역사 전에 3일 동안의 죽음의 기간이 있었구나'
그때는 그냥 대책 없이 기다려야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된거에요.
어떤 문제가 생기고 시험이 생기고 그러면, 진짜 주님께 맡기고 3일을 기다려요.
불평하는 은혜를 뒤집지도 않고, 반항하는 행동으로 뒤집지도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정말 맡기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제스처를 주실 때까지, 내게 어떤 싸인을 주실 때까지,
3일을 기다리면... 그러면 지나고 나면 정말 부활의 역사를 경험한다는 거죠.
'아, 주님이 역사하셨구나, 주님이 일하셨구나!'
그 내용이 그 책 속에 참 감동적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광야나 대양을 지날 때, 꼭 가져야 될 원칙이에요.
조급해하지도 말아야 되고, '언제 끝나나요? 언제 끝나 나요?' 보채지도 말아야 돼요.
하나님이 어떤 싸인을 주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되고,
또한 그 싸인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3. 쫓겨가다가.. 쫓겨가더니...
(네, 인생은 이렇게 쫓겨가는 삶입니다)
이 배가 어떻게 됐는지 한 번 보십시오.
얼마 되지 않아서, 정말 바울이 말한 대로, 위험을 만납니다.
유라굴로 라는 광풍을 만납니다. :14
유라굴로는, 유로스(동풍) + 아퀼로 (북풍)의 합성어입니다.
즉 '동북향의 바람' 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항해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 불어닥친 겁니다.
이 바람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성경은 '광풍'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배가, 바람에 밀려 정신 없이 표류합니다.
자 그런데 또 반복되는 표현이 있는데요.
누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 같아요.
15b절에 '쫓겨가다가'
17b절에도 '쫓겨가더니' 라고 나옵니다.
자 우리의 인생 길에도도 항해 하다 보면,
이런 광풍, 맞바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광풍이 불 때가 있습니다.
마치 미친 바람처럼 부는, 세상의 바람들이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의 바람, 뜨거운 사교육 열풍의 바람,
얼마 전에 보니까, 초등생 사이에서 '의대 열풍'이 분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초등학생이 아니라 부모들의 열풍이겠죠.
참 너무나도 지나친 사교육의 바람, 또 학벌 우선주의의 바람, 물질 만능 주의의 바람,
마치 미친 바람이 불 때가 있습니다.
자 그때 우리도 쫓겨 갈 수 있습니다.
'이걸 안 하면 뒤쳐지는 것 아닌가?'
'나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불안하고요. 조급하고요...
딱 오늘 본문의 그림 아닙니까? '쫓겨가다가... 쫓겨 가더니...' :15b, 17b
이게 정확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쫓겨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런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세상은 쫓겨서 살아갑니다. '쫓겨가다가.. 쫓겨가더니..'
27: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위 지도에서 가우다 섬을 찾아보세요.
뵈닉스 항구의 남 서쪽으로 떨어진 섬입니다.
이 섬을 향하여 배가 막 정신 없이 표류하는 겁니다.
'간신히 거루를 잡아'
거루는 구명 보트를 말합니다. *거룻배
만약 배가 깨지면, 이제 그거 타고 탈출을 하는 거죠.
자 배 뒤에 달고 다니던 구명보트가 떨어져나가면 큰 일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구명보트를 간신히 잡아서, 배(모선)에 끌어올려서, 단단히 묶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을 정도로, 지금 풍랑이 거세어졌다는 뜻이죠.
대체로 거룻배(구명보트)는 배고물에 매달아 끌고 다니지만, 거친 폭풍을 만나면
모선에 부딪혀 부서질 위험이 있으므로, 갑판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당시 상례였죠.
(요즘 배들은 아예 배에 싣고 다니죠)
27: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선체를 둘러 감고'
밧줄로 거룻배를 감았다는 것인지, 모선을 감았다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단 거룻배를 끌어올렸으면, 그게 흔들려서 배에 타격을 주지 않도록,
밧줄로 단단히 동여매어야 했을 것입니다. 거룻배와 모선이 하나가 되게 하는 거죠.
그것이 배의 항해를 안전하게 하는 조치였습니다.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스르디스'는, 수면 밑의 모래둔덕 입니다.
수심이 깊어지다가 이제 갑자기 수심이 낮아지는 지점에 있죠.
배가 모래둔덕에 걸리면, 배가 빠져나올 수가 없겠죠. Stuck 되죠.
(*토마스 선교사가 탄 제너널 셔먼 호가, 대동강에서 모래 둔덕에 얹혔다고 하죠)
그래서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연장을 내립니다. '연장'이 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만,
배의 깊이보다는 더 긴 닻 같은 것을 내려서, 계속 수심을 체크하는 거죠.
스르디스(모래 둔덕)에 배가 얹히지 않도록, 수심을 점검하면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더 나빠 집니다.
그래서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다 버립니다.
이 짐은 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서 실은 곡물을 말합니다.
배 자체와 사람의 생존에 위험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배에 실은 곡물을 다 버립니다. :18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이 배의 기구들을 선원들이 다 버립니다. :19
이미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니까, 좌초되지 않도록 이제 다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는 거죠.
이런 그들의 모습을, 누가는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18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0
지금까지 그렇게 애썼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기서 '구원'은, '풍랑이나 위기에서 구조'를 뜻합니다. 영혼 구원이 아니라요. *소조
당시에 이렇게 '구원'이란 말을 혼용해서 썼습니다.
▲풍랑을 만나면, 내가 가진 것을 다 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도 인생이란 항해에서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 그때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애쓰며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풍랑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20
우리는 인생의 풍랑을 만나기 전에, 바울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풍랑이 닥쳐올 것을 예감할 수 있어야 합뉘다.
깨어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알게 해 주십니다. 풍랑을 대비하게 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싸인은 '배가 간신히' 미항까지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바울은 깨어 있었으나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는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진 모든 것을 다 바다에 내어버리고, 던져버려야 하는 상황을 자초했습니댜.
우리는 이 사회에서,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다가올 풍랑에 대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사람
자 그렇다면 이런 인생의 항해 길을 떠나는 우리가
뭘 붙잡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을 오늘 바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7: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바울이 지금 사람들을 약 올리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제부터라도 좀 내 말을 들어 달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들어야 될 바울의 말은 무엇입니까?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여러분 지금 그리고 큰 풍랑이 조금이라도 잠잠하게 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대체 무엇을 근거로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근거가 23절부터 나오는데요.
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이 말했던 '안심하라'는 확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험란한 인생 항해'를 무엇을 가지고 안심하게 됩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건,
종교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따르는 삶은 종교적인 삶이 아닙니다.
이것만이 이 땅에서 가장 안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에는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세상 삶이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결국은 말씀의 원리대로 돌아갑니다.
짧게 보지 말고 조금만 길게 보면, 결국에는 말씀대로 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쫓기는'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세상은 광풍에 떠밀려
우리로 하여금 정신 없이 쫓겨 가게 만듭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요, 저것도 해야 되고요.
이것도 있어야 될 것 같고, 저것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자꾸 세상은 바람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정신없이 쫓겨가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쫓겨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광풍을 거슬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쫓기는 자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바람을 저항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여러분 그 삶은 틀림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사람을 통해, 바울과 같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또 하나 우리는 오늘 배에 탄 사람들과 같이
세 가지 기준이, 선택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욕심) / 육신의 편안함/ 사람들의 여론
여러분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십시오.
이 배에 싫었던 것들은, 풍랑이 일자, 몽땅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아까운 곡물들을 다 내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저마다 추구하고 좇아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들이, 내 위기의 순간에는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이렇게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입니다.
죽음이 닥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다 놔두고, 버리고 가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결국 말씀하신 그대로,
풍랑 이는 바다에서 그들의 생명을 건져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