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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2장, 물질적 풍요와 영적 반항 렘22:13-30 2008년
서론
오늘은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의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네 왕 가운데 특별히 여호야김의 스토리를 생각하면서
물질적인 부요가 주는 위험을 경계하고자 합니다.
여호아하스 22:10~12절
여호야김 13~23절
여호야긴 24~30절
시드기야 22:1절
◑1. 유다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왕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증거했습니다.
렘21:11~12절에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들과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공평(equity)과 정의(justice)입니다.
지도자들이 이 두 가지를 시행하지 않으면
왕들보다 더 높으신 하늘의 하나님이 이 악한 지도자들에게 진노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본문 렘22:2~5절에도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집 문으로 들어 오게 되리라마는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공평과 정의, 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준행하게 되면 유다 왕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며
백성들도 성문 안에 들어 올 때에 병거와 말을 타고 들어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행하지 아니하면 왕들은 끊어질 것이며
너의 집은 멸망 당하고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유다멸망 직전의 네 왕
유다가 멸망한 주전 587년 직전의 네 왕들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공평과 정의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유다 멸망 직전의 네 왕은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 바로 앞의 왕인 요시야는
유다 역사 가운데 종교개혁을 행한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왕하23:25절에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우상을 타파하고 공평과 정의를 시행한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전무후무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유다 역사의 마르틴 루터요
존 칼빈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시야 왕은 8살 때 등극해 31년간 치리하던 중
39세 되던 해에 애굽왕이었던 바로느고 와의 므깃도 전투에서 사망했습니다.
1) 여호아하스 *10~12절
그 후 애굽왕 바로느고는 요시야의 넷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넷째 아들이라는 것을 보면 형들을 제치고 왕이 된 재주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아하스는 23살에 왕으로 세워져 석 달을 치리하는 동안에 아버지의 모범을
배우지 못하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악한 열조를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겔19:3절에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여호아하스를 젊은 사자(young lion)라고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움켜지는 것만 배워 한번 움켜쥐면 안 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형인 여호야김과 시드기야를 밀쳐내고 왕위를 차지할 만큼
형제간에 예의도, 우의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재위에 있은지 석 달 만에
애굽으로 끌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22:10~12절까지는 여호아하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가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여호아하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 오지 못하고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시야의 아들 살룸이 여호아하스입니다.
살룸은 본래 자기 이름이고, 여호아하스가 왕이 된 후의 이름입니다.
석 달 동안 왕으로서 움켜지기만 배운 젊은 사자처럼 못된 짓을 하다가
(젊은 사자가 공격성이 강하다고 하죠. 자기가 리더가 되기 위해 가족들도 다 공격하죠)
결국은 애굽으로 끌려가 고향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2) 여호야김 *13~23절
여호아하스 다음 왕이 여호야김입니다. 여호야김은 여호아하스보다 형이였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있어서는 자기 아우에게 밀렸던 뭔가 모자란 데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친애굽파로, 여호아하스가 애굽에 노예로 끌려간 후
애굽왕에 의해 25세 되던 주전 609년에 왕이 되어 11년간 통치했습니다.
왕이 된지 3~4년이 후인 주전 605년에 바벨론에 새로운 느브갓네살 왕이 일어났습니다.
느브갓네살은 통치 원년에 바벨론의 힘을 모두 모아 당시 중동의 패권을 잡았던 애굽을 격파했습니다.
이 전쟁을 가리켜 “갈그미스 전투”라 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전에는 애굽의 속국이었지만
이제 패권이 바벨론에게 넘어가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김도 애굽을 섬기다가 이제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바벨론을 섬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김을 폐위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조공 바치던 대로 이제는 바벨론에 바치게 하고
성전에 있는 모든 그릇들을 탈취하며 다니엘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단1:1~2절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왕위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으나 바벨론에 3년 동안 조공을 바치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을 대적한 채 3년간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전 598년 느브갓네살은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야김을 사로잡아 포로로 끌고 가고자 했으나
백성들도 여호야김을 미워하자 결국 예루살렘 성 밖에 던져 죽였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주 못된 인간은 왕이었다해도 창 밖 이나 성 밖에 던져 죽였습니다.
그래서 영어단어에는 “성 밖에 던져 죽이기(defenestration)”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밖에 던져 죽임당한 여호야김을 애통해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나귀 신세가 되어 결국 시체가 굴러다니는 비참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야김에 대해서 좋은 평가가 하나도 없이 오로지 비난 일색입니다.
3) 여호야긴 *24~30절
여호야김이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됐습니다.
22:24~25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찌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8~30a절에도 “이 사람 고니야는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 갔는고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찌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고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야긴을 깨진 그릇(despised, broken pot)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그릇이었고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은 얼마나 가련한 인생입니까?
여호야긴은 뭘 해도 하는 것마다 망합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고니야 혹은 여고냐 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긴은 그가 왕이 된 후의 이름입니다. 18세에 왕이 되어 석 달을 치리했습니다.
석 달을 치리한 왕이 여호아하스와 여호아긴 두 명입니다.
석 달 동안 치리하다 결국은 느브갓네살에 무조건 항복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여호야긴 시대에 유다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모든 훌륭한 인물들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 다 끌려가고
이제 유다 땅에는 농사나 짓고 사는 천한 백성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랜 유배생활 후에 석방됩니다. 왕하25:27
4) 시드기야 *1절 (이 예언은 시드기야 때 선포된 것으로 추정)
그래서 바벨론왕은 요시야의 아들이요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는 21살에 왕이 되어 11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게 느브갓네살에 반역함으로
결국 주전 587년 유다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자기 목전에서 죽는 것을 봐야했고
그 후 두 눈이 뽑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게 되었습니다.
역대하36:12절에 보면 시드기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가르쳐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한
참으로 겸손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직전 네 명의 왕들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이처럼 모두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들의 치리 기간은 석 달, 11년, 석 달, 11년 입니다. 이렇게 반복되었습니다.
◑3. 여호야김의 죄악
오늘은 특별히 우리가 읽은 본문 13~23절 중에서 여호야김의 죄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역대하 36:8절을 보면 여호야김이 한 짓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가증한 일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행한 가증한 일 중 특별히 물질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물질에 관해 두 가지가 잘못됐습니다.
▲첫째, “불의와 불공평”으로 재물을 취득했습니다.
본문 렘22:13~15절에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11년 동안 여호야김이 한 일은 왕궁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해서 지었습니다.
방뿐 아니라 다락방까지 지었습니다.
다락방은 원래 좁은 방인데도 아주 광대하게 지었습니다.
다락방을 지어놓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에다가 백향목(cedar)을 입히고 붉은색(vermilion)으로 칠해
번쩍번쩍하게 만든화려한 집에서 자기의 왕된 권위를 찾으려했습니다.
왕된 권위가 화려한 집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니 여호야김의 눈과 마음은 탐남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로
가득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보면 그가 진실한지 아닌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진실하지 않고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들은 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에 탐심이 가득하고 마음에는 압박과 강포와 피흘림이 가득합니다. 여호야김이 그랬습니다.
왕이 집을 짓는 것이 죄면 솔로몬은 성전 짓는데 7년, 왕궁 짓는데 13년,
합하여 20년 동안 건축했으므로 솔로몬이 최고 죄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집을 짓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집을 지어도 공평과 정의로 지으라는 말입니다.
왕궁을 짓는데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 했더니, 여호야김은 거꾸로 불의로 집을 세우고
불공평으로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권력으로 국민을 압제하고 불의로 집을 짓고
불공평으로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또한 불공평과 불의로 재물을 획득했습니다.
여호야김은 물질에 관하여 탐욕스러웠고 이기적이었으며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물질로 부요하고 형통한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부자가 되려면 공평과 정의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5b~16절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야김의 아비는 종교개혁가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도 먹고 마시기를 잘했습니다.
부요와 형통을 누렸다는 말입니다.
“여호야김 네가 먹느냐? 네 아버지 요시야도 먹었다. 여호야김 네가 마시느냐?
네 아버지 요시야도 마셨다. 네가 잘 먹느냐? 네 아버지도 잘 먹었다. 네가 잘 마시냐?
네 아버지도 잘 마셨다. 그러나 네 아버지는 공평과 의를 행하며 먹고 마셨느니라.
그런데 너는 불공평과 불의로 먹고 마시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물질적인 형통과 부요를 누려도 공평과 의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요시야식의 부요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부요를 누려도 불공평과 불의로 누렸습니다.
우리는 돈 많이 벌고 부자로 형통하게 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부요해도 여호야김 식의 부요가 아니라
요시야식의 부요를 누리는 것이 우리 성도의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야김 식이 아니라
요시야식의 형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물질적 부요로 인해 영적 반항심을 가졌습니다.
본문 21절에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가 평안할 때에”는 KJV에 “in your prosperity(네가 물질적으로 번영할 때에)”
저는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안현필 선생님의 “기초오력일체”라는 책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했습니다.
그 책은 단어와 영국 속담을 많이 외우게 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그 속담 가운데 “역경은 인간을 만들지만 순경은 괴물을 만들어 낸다
adversity makes man but prosperity makes monster”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어린 시절 아버지 요시야 왕 덕분에 물질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을 다 마시며, 입고 싶은 것을 다 입고,
놀고 싶은 것을 다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풍요로움 가운데 여호야김은 인간이 안 되고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리라.”는 못된 결심을 했습니다. :21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는 영적인 반항심을 습관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싹수가 노란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으로 싹수가 노란 사람은
“그는 천한 파기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그릇이라. 그는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렘36장에 가면 여호야김의 영적 반항심이 극치에 달하게 됩니다.
여호야김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감옥에 잡아넣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계속 주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서기관 바룩을 불러 “나한테 계시가 계속오니
너는 두루마리에다 먹으로 써라.”고 했습니다.
바룩이 먹으로 두루마리에 “유다 왕들이 죄를 회개치 않으면 바벨론에 포로 될 것이다”는
내용을 기록해 여호야김 왕에게 갖다 주면
여호야김의 신하인 여후디가 낭독을 합니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은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 옷을 찢어 겸비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작은 칼로 두루마리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화롯불에 던져버렸습니다.
이 영혼 속에 얼마나 사악한 반항심이 가득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 죽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숨겨 주시니 여호야김이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여호야김 자신만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시고
이번에는 여호야김을 향한 저주의 내용을 첨가하게 하셨습니다.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시체가 낮에 더우면 어떻고 밤에 추우면 어떻겠습니까만
이것은 제대로 매장도 못받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그는 죽어도 아무도 애곡하는 자가 없고 성 밖에 던져져서 머리가 깨져 죽고
비참하게 그 시신은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죽은 나귀처럼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여호야김의 죄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물질의 부요를 추구하되불의한 방식으로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물질적으로 번영하자 영적으로 하나님에게 반항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도 저주를 받고, 나라도 멸망을 받았습니다.
미국 사회나 한국 사회나 물질적인 부요는 영적인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먹고 살만 하니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이 표면화되고 노골화되었습니다.
마약, 성적 부패, 동성연애, 도덕적인 타락, 영적인 나태가 만연해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먹고 살만 하니, 주5일 근무제로 금요일 오후가 되면 놀러갑니다.
교회에 안 오고, 산과 바다에 가고 골프 치러 갑니다.
골프 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주일에 하나님을 멀리하면 안 됩니다.
돈이 없으면 동성연애나 마약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할 텐데, 돈이 많으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미국유학 시절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
“애들이 마약만 안 먹어도 자녀교육에 성공한 것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야김의 결국을 보고 배워야 되는 시대가 온 줄로 믿습니다.
부요를 누려도 깨끗한 요시야 식의 부요를 추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부요해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고 이 부요가 어찌하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일 것인가 생각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면 그것으로 감사도 표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너무나 없는 것을 보시면 “내가 실컷 줬더니 아무 감사가 없구나.”하고 섭섭해 하십니다.
신8:12~14a절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 말씀은 모세가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더 부요하고 번영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부요와 번영 가운데
하나님을 더 알고 영광 돌리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적용
오늘 본문은 주로 mainly 남유다의
-17대 왕이었던 살룸이라고도 하고 여호아하스 에게 선포된 메시지와,
-그 다음에 이어서 왕이 되었던 18대 왕 여호야김에게 선포되었던 메시지입니다.
본문은 20대 왕 시드기야를 먼저 이야기하고
먼저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에게 먼저 말씀을 선포했던 것을 배치해놓고,
그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에 대한 메시지를, 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 선포되었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체성,
즉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 나라의 일꾼, 청지기로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어떠한 상급을 얻게 되고,
반대로 그와 같이 살아가지 않는다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벌과 상에 대해서> 적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먼저 <여호아하스가 받은 벌>부터 살펴보죠.
하나님이 왕들에게만 주신 게 아니에요.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정체성을 주셨어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청지기, 그분의 일꾼, '왕같은 제사장' 등
우리가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그러한 정체성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벌을 받게 되는가?'
먼저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맛보지 못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본문 렘22:11~12절을 보면, 여호아하스에게 선포되었던 메시지인데요.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위 구절에, 여호아하스의 죄가 뭔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겔19장에, 그에 대한 언급이 이렇게 나옵니다.
겔19:3~4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위 구절을 '여호아하스'로 보는 이유는,
'애굽 땅으로 끌려갔다'게 힌트죠.
그가 애굽으로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기 때문이죠. :12
'젊은 사자'의 특징이 뭔가요? 우리는 사자가 안 사는 곳이라서 잘 모릅니다만,
겔19: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에 왕래하며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젊은 사자란... 잘 물어뜯는다는 거죠. 자기가 사자 가족 중에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
숫사자, 아버지 사자, 어머니 사자, 형제 사자 다 물어뜯고, 자기가 '라이언 킹'이 되는 거죠.
실제로 그는 요아스의 4째 아들인데, 요아스를 뒤를 잇는 왕이 된 것은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승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걸 성경은 좋지 않은 표현으로 '젊은 사자'로 표현한 겁니다.
(참고로, 겔19:6절은 '젊은 사자'의 특징을 얘기한 거지, 여호아하스에 대한 구절은 아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끄집어 내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고,
이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나안)에 살게 하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여호아하스는,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정체성대로, 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음으로 인해서,
즉 젊은 사자같은 자기의 포악성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이집트로 끌려갔어요.
우리는 이집트로부터 구원받은 자들 아닙니까?
죄와 사망권세, 세상으로부터 건짐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렸어요.
그랬더니 그가 결국은 어떻게 되었냐면, 다시 세상(애굽)으로 끌려가 버렸단 말이에요.
그리고는 성경은 '그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한다' :12
다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거죠.
히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어서, 저와 여러분 안에도 있습니다.
본문의 남유다 말기 그때도 있었어요.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시작하신 이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시대에도 예루살렘 안에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완성되겠죠.
그들도,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나라에 지금 맛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땅은 여호아하스의 아버지 요시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있었던...
그래서 요하스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자기 아버지를 통해서 세워주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맛봤을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완전하진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있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거기에 계세요. 하나님께서 그 왕을 통해서 통치하세요.
그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에 있어요.
하나님의 이른비와 늦은비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거기에 있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거기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렸을 때에,
결국은 이집트로 끌려가서...
그곳은 자신의 열심으로 살아야 되는 나라요.
사단이 통치하는 나라요. 파라오가 통치하는 나라요.
압제와 고통이 있는 나라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나라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나라요.
그러한 곳으로 끌려가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
지금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렇게 아침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맛보고 있다는 증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을 버린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린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도 느끼지 못해요. 그분의 음성도 듣지 못해요.
그분의 축복도 느끼지 못해요.
그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아등바등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하루하루 고통 가운데서 견뎌야 되는, 그러한 자가 되어진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정체성을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은 가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2. 여호야김에 대한 경고
22:13~14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이 여호야김은,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지만, 25세에 젊어서 왕위에 오른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비싼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을 착취한 거예요.
위 구절에, 왕궁을 지으면서, 쉽게 말하면 돈을 쳐바른 거예요.
붉은 빛으로 칠하는 것은, 가장 비싼 염료를 쓴 거예요. 백향목도 가장 비싼 나무죠.
그런데 큰 집을 지어놓고, 거기다가 또 넓은 다락까지 만들면서 결국 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남유다)가 지금 멸망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큰 집을 짓고, 자기를 위한 삶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가장 비참한 인생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이웃을 위하여 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셨거든요. 그때 우리 인생이 가장 빛납니다. 가장 풍요해요.
그런데 여호야김은, 그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 그 상황 속에서
자기를 위하여 사는... 정말 가치 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를 위하여 돈을 쌓고, 나를 위하여 큰 돈을 아낌 없이 쓰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지갑을 닫는 것... 그게 벌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이에요.
이렇게 하나님도 버렸고, 백성도 버렸던 여호야김이
왕이 되어서 몇 년 살았습니까?
여호야김이 이런 호의호식하는 삶을 겨우 몇 년 했어요? 겨우 11년 했습니다. 11년!
여러분은 11년 왕으로서 호의호식하면서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런 식으로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참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과거에 한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는데, 신앙이 식으니까, 자기를 위해 사는 거죠...
자기, 자기,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벌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벌이 무엇이냐면,
바로 의미 없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지도 못한 채
의미 없는 지금 현재를 살다가, 결국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8~19절을 보십시오. 여전히 여호야김에 대한 예언입니다.
얼마나 서글픈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거든요.
'그 사람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느냐?'는, 그 사람이 인생 전체를 말해주는 거예요.
여호야김 왕이 죽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슬프다고 울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요세푸스 역사가에 의하면 여호야김이 살해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잡혀서 살해를 당해서
매장당하지 못하고 그냥 예루살렘 밖으로 그 시체가 던져져서 밤낮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냥 잊혀지는 이름,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이름,
그 누구도 같이 있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름으로,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그러한 이름으로 죽어갔다...
그는 왕이었지만, 이렇게나 비참한 죽음으로 자기 인생을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25세에 왕이 되어, 고작 11년 통치하고 36세에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 가보면, 흥미롭게도 족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원래 족보는 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 이렇게 되죠.
근데 마1장의 족보는,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을 누락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요시야에서 - 여고냐(여호야긴)으로 연결됩니다.
'그의 형제들'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가 포함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들은 여호야긴의 삼촌들입니다.
어쨌든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이 누락되었거나,
아니면 '그의 형제들'에 포함되어, 투명인간 취급되어 버렸습니다.
여호야김은.. 족보에 기록하기도 껄끄러운, 그런 못된 인간이었다는 거죠.
과거 사람들은, 제대로 장례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큰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봤죠.
그러니 여호아하스, 여호야김이 제대로 장례되지 못하여.. 큰 저주 받은 걸로 보고,
마1장의 메시야 족보에도.. 당연히 누락시킨 것입니다. 참 비극적으로 슬픈 일이죠!
이게 남의 일이라서 그렇지,
만약 나 자신의 일이고, 나 자신의 역사라면,
이런 왕이 되어선 안 되는 거죠. 왕이 된 게 오히려 큰 저주였죠!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족보에서 세 왕의 이름을 지운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지우신 거죠. 하나님이 족보에 이름이 들지 못하게 하신 거죠!
왜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들의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족보 가운데서도
그를 지워버리셨다.. 잊혀진 이름이 되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 외 여호야김이 “불의와 불공평”으로 재물을 취했고,
물질적 부요로 인해 영적 반항심을 가졌던 것은, 위에서 설명했으므로 참조하세요.
▲3. 이 못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은
그들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요시야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시면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죽은 자'는 요시야를 뜻합니다.
사람들은 선왕이었던 요시야를 애도하며, 그를 위하여 울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요시야를 위해서 울지 말며' (그는 걱정하지 마라. 천국에 잘 있다)
대신에 '애굽에 잡혀 간 자(여호아하스)를 위해 울어라'
눅23:28절도 기억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왕하22: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요시야를 위해서 울지 말라..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 보았던 사람이고,
여호아하스를 위해서 울라..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맛 보거나/ 맛 보지 못하는 것은
장차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맛 보거나/ 맛 보지 못하는 운명의 예시 입니다.
요시야 왕 때, 성전을 대청소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요시야 왕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허락하세요.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책을 들고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예배 시간에 앉아있다고, 다 하나님의 나라 발견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아닙니다.
요시아는 율법책이 발견되어졌고, 거기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다가왔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실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왕하23:2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100%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요시야 때,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죠.
그래서 요시야는, 당시에 유월절도 안 지키고 있었는데,
남유다 나라에 유월절 절기를 회복시킵니다. 왕하23:21
하나님 나라의 회복인 거죠.
이어지는 24절도 보시면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요시야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맛보던 왕이었단 말입니다.
그 요시야 왕과, 그의 아들들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가 비교되고 있는 거죠.
우리는 선왕 요시야가 젊은 나이 39세에
애굽 왕과 전쟁하다가 전사했던 것을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 거예요? 데려가신 거예요.
험한 꼴 보지 않도록, 미리 천국에 데려가신 거예요.
요시야가 죽자마자 어떻게 됩니까? 바벨론의 너부갓네살 왕이 침략을 해요.
그래서 남유다가 약 20년에 걸쳐 초토화됩니다.
1차, 2차, 3차포로로 완전히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다가,
이런 험한 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천국에서 잘 있는데, 애통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
◑절별 해석
2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이 단락의 말씀 역시, 21장에 이어 시드기야 때에 작성되어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트'는 여기서 '궁전'을 뜻한다.
22:2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은 왕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도 전달된다.
'네 신하와 네 백성'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네 종들과 네 백성'이다.
그러나 이곳의 '종'이란 말은 왕의 신하들이나 관리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매일같이 궁궐문을 드나들었다고 함은
국사나 재판 등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21:12 참조).
한편, 클라크는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바벨론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도록
부추겼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2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이며
'공평'은 '체다카'인데,
이들은 대단히 중요한 용어로서 때로는 구약에서함께 연결되어 쓰이곤 한다.
이 두 용어는 모두 언약의 율법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미쉬파트'는 사사나 왕들이 시행하여야 할 언약 율법과 규례와 관련하여 주로 쓰였고,
'체다카'는 여호와의 규범과 표준에 맞추어 바르게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메시야께서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가지고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9:6).
왕과 모든 백성은 항상 모든 사실을 다 고려한 후 정의롭고 공평하개 행동할 것이
항상 요구되었다. 특히 왕이 하여야 하는 주요한 임무는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정의를 세우고 타인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이었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며'
이들 세 계층에 대한 보호는 언약 규정 조항의 일부였었다(출22:21-26, 23:9, 레19:33. 34, 신10:18).
왕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시내 언약 요구 사항을 충족 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다윗 언약(삼하7장)은 이런 관점에서 모세 언약과 그 근본적인 취지 면에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 지적은 재판상의 불공정이나 권력의 남용에 따른 무죄한 피흘림뿐만 아니라
도벳에서의 인신 제사와 관련된 극악한 관행도 가리키는 것 같다(7:31, 19:3-15).
22: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예레미야는 이제 왕가의 존속 여부가 어디에 달렸는지를 지적한다.
그것은 왕들의 여호와 율법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는 번영과 왕조의 존속을 의미한다.
22:5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이 집이 황무하리라'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거부했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에 기초를 둔 백성이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는 번영이 있을 수 없었다.
22:6 여호와께서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머리이나 내가 반드시 너로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을 만들 것이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본절과 다음 절은 시어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후 산문체 단락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여기 언급된 '길르앗'과 '레바논'은 숲이 울창한 것으로 유명했다.
왕의 궁전은 이들 지역에서 나온 목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때로는 '레바논 숲의 집'이라고 불리었다 한다(왕상 7:2, 사 22:8 참조).
그러나 그토록 웅대하고 위엄어린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한,
여호와는 그곳을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 레바논은 가장 기름지고 생산량이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들은 왕가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22:7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본절에서 바벨론 군대는 벌목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시74편은 바벨론 사람들이 도끼와 철퇴 등을 가지고 성전을 파괴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준비하리니'의 히브리어 '카다쉬'는 '성결하게 하다', '구별하다'는 뜻을 지니는바,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구별하심을 나타낸다.
22:8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
22:9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니라
이 두 구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체결할 당시 주셨던
경고의 말씀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신 29:24-26).
여기서 특별히 주의를 끄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한 결과 파멸에 이르자
도리어 이방인들의 지적과 조롱을 당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할 성도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경멸을 당하게될 뿐이다.
22: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여기서 단수로 표현되어 있는 죽은 자란 요시야를 가리킨다.
요시야는 BC 609년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9,30).
그리고 ‘잡혀간 자’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말한다.
그는 요시야가 죽자 그의 뒤를 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애굽의 바로느고에 폐위되고
석달 후 애굽으로 잡혀갔다(왕하23:31-35). 살룸(11절)은 그의 개인적 이름이었으며
그의 왕명은 여호아하스였다. 대상 3:15에 따르면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의 네 번째 아들이었고
그의 부친 사후 '국민'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대하 36:1).
여기에는 아마 백성들의 반애굽 성향과 같은 정치적 동인(動因)이 배후에 깔려있었을 것이다.
22:11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22:12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예레미야는 다른 그 어떤 왕보다 더욱 더 가혹하게 여호아하스를 단죄한다.
성경상의 기록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대하 36:1-4 참조)
여호아하스는 3개월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선왕(先王) 요시야와는 정반대의
패역한 정치를 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첫 번째 유다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22: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
유다 역대 왕들의 범죄와 그 결과를 논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여호아하스에 이어 여호야김의 패역상에로 초점을 모은다.
그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여호야김에 의해 건축된 화려한 건물들이었다.
그는 21:12과 3절에서 지적되었던 '체데크'(공평)와 '미쉬파트'(정의)에다
부정의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불변사 '로'를 첨가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 점을 강조한다.
NEB는 이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와 '부정한 수단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RSV는 '불의로'와 '부정으로'라고 번역한다.
아마 여호야김은 백성들의 무임 노동을 통하여 이 일을 완수하였을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예루살렘과 그 밖의 다른 곳에다 자신을 위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던 바가 있는데.
이것은 언약의 율법을 위반하는 중대한 범죄들 중의 하나였다(레19:13, 신24:14,15, 왕상5:13,14, 12:3,4).
왕의 의무는 바로 이 율법을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스스로 그것을 위반하는 죄를 지었던 것이다.
한편, 여호야김의 건축에 대해서 언급하면, 최근에 라맛라헬(Ramat Rahel)
B.C. 7세기 말경으로 보이는 세련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며
또 어쩌면 그것이 여호야김의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제5단계의 발굴은 B.C.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세련된 석조 건물로 만들어진
외벽과 대문 그리고 내부의 거대한 건물이 있는 이스라엘 후대의 성이 서 있었다.
여호야김은 왕위에 올랐을 때 겨우 25세밖에 되지 않았고 또 36세에 죽었던 바(왕하 23:36)
엄청나게 타락하고 자기 도취에 빠졌던 젊은 독재자였을 것이다.
22: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창을 만들고' '만들고'의 히브리어 '카라'는 일반적으로 '쪼개다'나 '찢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4:30에서는 '넓히다'나 '확장하다'란 뜻으로 쓰였다(한글 개역 성경은 눈을 크게 하기 위해
'그리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창을 넓히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22:15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22: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여호야김은 그의 아비 요시야와 대조되고 있다.
여호야김은 자신의 왕적 권위를 근사한 궁궐을 지음으로써 과시하고자 했다.
반대로 요시야는 왕으로서 지녀야할 진정한 가치 기준과 수행해야 할 책무를 바로 깨달았다.
그는 압제나 허장 성세라고 하는 불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공평과 정의를 먹고 마시는 음식처럼 소중히 여겼으므로(요 4:34 참조)
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설 줄 알았다. 요시야의 이러한 공평과 정의의 정치 철학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하고 진솔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가능했음은 물론이다(Feinberg).
22: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여기에는 여호야김의 악행이 통렬하게 지적된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이기적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으며(왕하24:3,4),
또 독재와 강탈에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3절 참조).
한편 무죄한 피를 흘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재판상의 부당한 판결을 통해 무죄한 자로 극형에 처해지게 넘겨준다는 의미.
2) 무죄한 자를 살해한다는 의미.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26:20-23에 언급된 바
선지자 우리야의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
22: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는 이 불경건한 통치자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이 선고되고 있다.
그것은 '슬프다'란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화로다'(호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히브리어 본문상으로는 네 번 등장한다. 그에게는 장례식장에 따르기 마련인 조의의 표시나
애곡마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참한 최후가 예고되고 있다(왕상13:30 참조)
22: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이 구절 끝 부분에는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약간의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다. 36:30에는 여호야김의 시체가 낮의 뙤약볕에 그리고
밤의 서리에 노출되어 내던져진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으나,
왕하24:6에는 '여호야김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의 장례가 정상적으로 치러졌음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열조와 함께 잔다'는 말은 죽음을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는 여호야김의 최후에 관한 정확한 언급이 나오지 않으므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곤란하나,
본문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를 믿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겠다.
1) 갈대아 연합군의 칩입 당시(왕하 24:2), 여호야김은 전사당하여 급히 매장되었으나
침략군들에 의해 그 시신이 훼손되었으리라는 견해.
2) 궁정에 반란이 일어나 바벨론 정책으로 돌아선 여호야김이 살해되고,
그 시신이 갈대아 연합군에게 내던져졌다는 견해.
3) 갈대아 연합군이 침략할 즈음에는 이미 여호야김이 죽어 매장된 뒤였으나,
침략군들이나 일부 유다인들에 의해 그 무덤이 파헤쳐졌으리라는 견해.
22:20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대화의 상대방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파국을 멀리 선포하고 슬퍼할 것을 명령받는다.
레바논은 유다의 북쪽 국경, 바산은 북동쪽 국경, 그리고 아바림은 남동쪽 국경으로서,
이들 지역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에 위치하여 유다 땅 전부를 관망할 수 잇는 높은 곳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란 패배한 유다의 정치적 동맹국들을 말한다(호 8:9 참조).
아마 이 애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27장에 언급된 반바벨론 반역을 기도하였던 서쪽의 여러 세력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느부갓네살은 B.C. 605년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격파한후 이들을 다 진압하였다(46:2-12).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스글론이 진압되었으며(47:2-7)
이어서 트랜스요르단 지역은 느부갓네살의 속국이 되었다(왕하 24:1, 2참조)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가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예루살렘 파국의 원인은 이 백성이
처음부터 여호와께 순종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2:31, 3:24, 25:7, 24-26, 11:7-10 참조).
이제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였다.
22:22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목자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실제로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B.C. 597년)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다(왕하 24:22-25:7).
그런 다음 예루살렘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또 그녀의 '악'으로 인하여 '욕'을 당할 것이다.
'악'의 히브리어 '라아'를 '재앙'으로 번역할 경우, 본절 하반절은 이렇게 번역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의 재앙으로 인하여 수치에 알맞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욕을 당할 것이다.'
22:23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예루살렘의 궁전과 각종 건물들에는
엄청난 양의 백향목 재목들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예루살렘 거민들이나 지도층 인사들을 가리킨다고 해석되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유다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도 문맥상 자연스럽다.
높은 가지 위에 깃들인 새처럼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였다(6, 7절, 21:13 참조).
22: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고나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할지라도'
'고니야'란 이름은 여호야긴에 대한 단축 명칭이다(52:31).
그의 또 다른 단축형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요고냐이다(24:1, 27:20, 28:4, 29:2).
한편, '인장 반지'란 것은 어떤 문서에 자신의 서명을 표할때 쓰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징세용 곡식과 기름을 수집하는 데 쓰였던 토기항아리들에는
두 개의 날개로 상징되는 왕의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또한 '왕에게 속함'이란 말과 징세가 이루어진 도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유다의 왕들은 여호와의 인장 반지로 쓰이는 여호와의 공식적인 대변자들로 간주되었다.
동일한 비유가 요호야김의 손자인 스룹바벨에게도 적용되었다(학 2:23).
그러나 고나야는 여호와의 인장 반지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함으로
더 이상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 존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22:25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2:26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22:27 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26절은 고니야와 그 모친인 느후스다가 함께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예언이다.
고니야가 왕으로 즉위할 때 불과 18세였으므로, 그모친인 느후스다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본문의 예언은 바벨론의 2차 침입으로 인해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24:8-16).
22:28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여기에는 버림받고 깨어진 그릇에 대한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서 언급된 깨어진 오지병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다(19:1-13).
백성들은 여고냐를 원했던 것 같으나(28:1-4 참조)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여고냐의 말로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예레미야는 본절에서 여고냐뿐만 아니라
그 자손까지 언급함으로써 다윗 왕가 자체에 대한 징벌을 암시하고자 했다.
22:29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22:3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세 차례에 걸쳐 '땅'을 호출함으로써 시작되는 본문은 징벌의 철저함과 엄숙성을 상기시킨다.
고니야가 무자할 것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그가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대상 3:17, 18).
그러나 여호야긴의 자손 중 다윗 왕위에 앉힐 자가 없었다는 점에서 무자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겠다.
그의 손자 스룹바벨(대상 3:19)은 포로 후에 총독의 직책으로 귀환하였지만 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