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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음을 읽다

LNCK 2024. 10. 21. 17:3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리더쉽, 목회자

https://www.youtube.com/watch?v=6vXat8wKVpE

바울의 마음을 읽다         행20:17~27      2024.10.20    

오늘은 바울의 에베소 교회와의 고별설교를 좀 다루려고 합니다. 
'밀레도의 작별'이라고도 알려진 사건이죠.

이제 바울의 선교 여행이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진행이 되는데, 
3차선교여행의 막바지이에요.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기 직전에, 에베소 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내서 마지막 작별인사 겸 설교를 하는 거죠. 
그리고 교회를 부탁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명 문장이에요.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말씀을 살펴 보겠는데, 
자, 바울은 신학자이면서...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바울은 놀라운 신학자 입니다. 
그리고 또 목회자이고, 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정말 모든 부분에 탁월한 그런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에베소에서 삼 년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사역했던 곳들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이 에베소 교회이고,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애정을 많이 쏟았습니다. 
이제 그 교회와 이별을 해야 되는 때가 온 것이죠. 

여러분 목회자들은, 성도 와의 이별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목회지를 옮길 때, 그 힘든 것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 교육전도사 때도 그랬고, 
제가 또 호주에서도 한국으로 옮겨올 때도 그렇고, 
이건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마 이제 바울도, 에베소 교회와 작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기의 속내를 솔직하게 좀 털어놓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20:18 '(장로들이 밀레도로) 오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이렇게 바울은 이제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 왔는지, 어떻게 시간을 사용했는지,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투명한 겁니다. 
뭐 이게 감춰져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떤 목회를 했는가를 이제 알리는 대목이 19절에 나옵니다.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여기 세 단어가 눈에 띄는데 첫 번째는 겸손, 두 번째는 눈물, 세 번째는 인내입니다. 
이것들은 목회에 핵심적인 것입니다. 

◑1. 첫 번째로 바울은, 그의 목회에는 <눈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서에 '눈물'을 여러 번 언급합니다. 
이 눈물의 의미가 뭘까요? 

여러분, 바울서신을 보면, 에베소서, 골로새서 이런 서신들을 읽어 보면 
바울은 굉장히 지적인 사람입니다. 이지적인 사람이고, 의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감성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눈물을 많이 얘기해요. 
그런데 왜 바울이 눈물을 언급한 것일까요?

여러분, 목회는 참 독특한 겁니다. 성도들과의 관계가 특별하게 형성이 되는 거죠. 
고후2:4절에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많은 눈물로 너희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썼다는 겁니다. 

빌3:18절에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본문31절에도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 바울에게 눈물의 의미는 뭘까요? 
바울은 단순히 교회를 관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를 운영, 조직체를 운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교회를 하나의 조직체로 본다면, 뭐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뭐, 체계를 갖추고, 시스템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돌리고, 효율성을 높이고,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숫자가 불어나도록 도모하는 거죠.
그런 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요.

거기에 또 필요하면 세상적인 경영 시스템도 가지고 오고... 
더 효율적이고 더 놀라운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이런 운영, 경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바울은, 목회를 경영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관리를 하거나, 경영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표를 이루기 위한, (사람이) 수단과 방법이 될 수 있는 거죠. 
이 교회라고 하는 큰 조직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 체제를 유지해 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거죠. 

바울은 소위 목회전문가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프로페셔널' 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많이 씁니다. 
요즘은 전문가(프로페셔널) 시대입니다. 

목회자가 공부를 하면서, 여러가지 목회적인 전문성을 갖춰야 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전문가로서 아주 프로페셔널한 그런 사역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즉, 일은 참 잘하는데 '영혼이 없는' 사역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설교가 단순히 직업적인 지식 전달이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능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과 목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하지 않는 목회에는, 눈물이 나올 수가 없죠. 
일을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목회란 '두렵고 떨리는' 일인 것입니다. 
설교를 해도 마찬가지죠. 저는 늘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만, 설교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어떤 분은 제 속도 모르고 "목사님 (강단에) 서시면 (설교가) 나오죠?" 이러더라고요. 
서면 안 나옵니다. 준비를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한 주 일만 지나면, 뭐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든지.. 늘 설교준비를 해야 됩니다. 

지난 주간에는 제가 미국을 갔다왔는데, 뭐 미국에 가든, 뭐 비행기를 타든, 
뭐 어디를 가든 계속 설교를 준비하고 있어야 돼요. 

금요철야도 인도해야 되고, 주일설교도 해야 되고 
또 곳곳에 강의를 해야 되는데... 그래서 늘 준비를 해야 돼요. 

여러분 '전문가'라는 말은, 그 분야에 익숙하다는 거죠. 숙련됐다는 거잖아요. 
그 분야에는 '눈감고도 한다'는 거잖아요.

그러나 목회는 그럴 수가 없어요. 
언제나 초보자처럼...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언제나 간절함으로... 

여러분 우리의 능력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도우시지 않으면, 제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아무리 성경에 통달했다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가 아니면 
말씀이 (능력있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제 잘했다고 오늘 잘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전에 설교를 잘했으니까, 전에 목회를 잘했으니까.. 지금도 잘한다' 그런 보장이 없습니다. 
성령이 도우시지 않으면, 잘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전문가는, 그 방면에 전문가가 되면... 하면 할수록 숙련 되죠. 
뭐 수많은 일을 하다 보면, 그게 이제는 정말 도가 튼다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목회는 그게 안 됩니다. 

여러분 '전문성'이 라고 얘기할 때는, 인위성이 많이 강조됩니다... 
여러분, 목회에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은, "비인격화 혹은 탈인격화"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물량화에 빠지는 순간, 비인격화가 일어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주목하지 못하는 교회가 되는 거죠.

특히 우리 교회와 같이 큰 교회는, 이런 물량주의에 빠져들 위험성이 매우 매우 매우 높습니다. 
사실 저는 두려고 떨림으로 목회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교구를 만드는 이유,
교구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커요. 
우리 교회 내에 21교구가 있지만, 한 교구만 해도 큰 교회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한 두 사람의 목회자가, 그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그 필요를 채워주는 목회를 할 수 있을까? ... 불가능한 구조예요. 

그러니까 뭘 만들어요? 사랑방을 만들어요.
'사랑방 목자'야 말로, 우리 교회가 하나의 제도화된 교회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건강성을 지켜나가는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거기에는 사람의 이름을 알고, 서로의 이름을 알고, 서로의 필요를 알고 
서로의 기도 제목을 알고... 

그저께도 금요철야를 마치고 이제 기도제목들이 막 올라와요. 
제가 이제 뒤에 들어가서 이제 한 시간 여 기도를 하는데 
기도 제목들이 막 올라오는데, 어떤 사랑방 목자가 
자기 사랑방에 속해 있는 성도의 기도 제목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슴이 아픈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 제목을 이제 (단톡에) 올려 놓은 거예요. 

담임목사의 기도를 부탁한 거죠. 근데 제가 그걸 보면서 너무 감사한 거죠. 
제가 그 사정들을 일일이 다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랑방 식구가 돌봄을 받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 지금 바울은 그냥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이끌어가는 
경영, 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의 이름을 알고, 그 분의 필요를 알고, 그 분의 영적인 니즈를 채워주는 것,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을 동원하는 게 아니고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니즈를 채워주는 목회를 한다는 게
이게 우리 교회가 바라보고 추구하는 거지만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어려운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교회 사랑방 목자는, 그 사명이 너무 너무 귀한 거죠. 

여러분, 바울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성도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빌1:8에 이런 표현이 나와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대충 목회를 한 사람이 아니라, 바울은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사역을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는 세상의 조직체와 달라요. 
그런 면에서, 교회에 주어진 모든 직분은,
사실은 그 직분이 교회를 효율적인 어떤 조직체로 운영하기 위해서 주어진 직분이 아니고, 
교회의 모든 직분을 영혼을 섬기는 목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내 주변에 연약한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큰 비전을 제시하고, 업적을 만들어가고 쌓아가고 이루어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핵심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공동체 안에 가득해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은 쉬워요. 근데 '사랑'은 어려워요. 
정말 사랑하기로 한다면, 그건 어려운 일인 거예요. 

여러분들, 사랑하면 감정적 소모가 있게 되는 거죠., 
왜 여러분 자녀들 때문에 힘들어 하십니까?
사랑하니까 그런거죠.
그 사랑에는, 자기 감정을 쏟게 돼 있단 말이에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에요? 

여러분, 무관심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거잖아요. 
사랑은 어려운 거예요. 사랑하니까 울 일이 생기는 거잖아요. 
스킬이나 방법이 아니고... 사랑인 거예요. 사랑하면 눈물이 생겨요.

그래서 바울을 사역을 하되, 가슴으로 하고, 진정성을 가지고 했다는 거죠. 
이것은 목회자인  뿐만 아니라 
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또 믿음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그걸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바울은 <겸손한> 목회자 였다는 거예요.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자신의 목회를 회상하며, 겸손을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 입니다. 

유명한 앤드류 머레이가 쓴 <겸손>이라는 책을 보면, 
그리스도 인의 첫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두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세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리스도 인과 교만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교만해 지는 거예요. 

근데 바울이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겸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은 지금 자신이 주목을 받는 걸 원하지 않는 거예요.

그의 초점은 오직 참 목자되신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기 원한다는 거죠. 

여러분, 목회를 하다 보면 찾아오는 유혹이 있어요. 
사람들에게 주목 받고 싶어하는 거예요. 
'와, 우리 목사님 대단한 분이다!' 

'(나는) 얼마나 탁월한가?'
이렇게 주목 받고 싶은 유혹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성도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하느냐? 
사람이 아니에요, 목사가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바울은 열심을 다해 사역을 했습니다.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정말 바울이야말로 주목을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시선의 쏠리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오직 그리스도에게! 

여러분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작게 여기는 걸 말하지 않아요. 
진정한 겸손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진정한 겸손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제대로 발견할 때 나오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화자찬에 빠지기가 쉬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대단한 교회인가!' 

가끔 우리 교인들 가운데 '애교심' 즉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많으셔서 그렇긴 한데,
다른 교회 목사님을 만나가지고 막 우리 교회 자랑을 오래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듣는 사람의 기를 막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목사님, 목회를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교회를 자랑한다는 거죠.

자랑을 해서도 안 되지만, 그런 식의 자랑은 더더욱 안 됩니다. 
우리가 뭐 잘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교회가 뭐 대단한 거예요? 우리가 이룬 업적이 뭐 대단한 게 있는 가요? 

여러분 우리 교회를 자랑하지 마시고, 대신에 그리스도를 자랑하셔야 돼요. 
이번에 우리가 <금철 컨퍼런스>를 하는데, 

'우리 교회에 멋진 게 (금철이) 있는데 한 번 와서 보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준비하는 팀들에게도 제가 늘 얘기합니다. '겸손하게 섬기시라고!'
한국 교회에 기도의 불이 붓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겸손히 섬기는 거지, 
'우리 교회가 대단한데, 와서 보라!' 이건 교만입니다.

여러분, 가장 위험한 것은 성공이죠. 
실패를 통해 오는 시험 보다, 성공을 통한 시험이 항상 강력한 것입니다. 

성공하면, 교만은 언제든지 고개를 들고,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있고 교만은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거예요. 

수고를 하고 난 다음이... 여러분 위험합니다. 수고할 때는 괜찮아요. 
근데 수고를 하고 난 다음, 헌신하고 난 다음... 나를 드러내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는 그 자체로 영광입니다. 
그게 그 수고를 통하여 뭘 더 얻으려고 하는... 더 주목 받고, 인정받고, 
지지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드러내고, 나를 자랑하는 누를 범하지 않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사역은 그런대로 해요. 
근데 문제는, 수고하고 난 다음, 그 안에 있는 내면에 일어나는 그 인간적 욕망을 
올바르게 다루어야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을 들여다 봐야 돼요. 
가장 무서운 변질은 뭡니까?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린 스스로 자랑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받은 은혜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게 교회입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설교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그게 될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되고,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 분만 높임을 받아야 된다는 거죠. 

그리스도만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는... 
이 은혜를 붙잡고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세 번째, 그는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19     

바울은 인내로 목회했습니다. 목회 여정은 한 마디로 고난의 여정이에요. 
바울은 수많은 모함과 핍박, 시련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어요. 
여러분 목양은 힘든 겁니다. 

목양이라는 하늘의 일인데, 땅에서 그것을 펼쳐 가는 게 목양인데,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을, 사람에게 맡기신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겁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이 일을 감당해 나갈 때, 어려운 것은 당연한 거죠. 
여러분 목양(양떼를 침)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목회'라는 말도 쓰지만 '목양'이라는 말을 쓸 때, 양 치는 목자와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양을 치는 목자들은 굉장히 하드 잡입니다. 험한 직종 입니다. 
목사란 험한 직종이에요. 

요즘은 이게 좀 변질 되어서, 막 대우받고 칭송 받는 자리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목자'는 굉장히 힘든 직업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야 되죠. 병든 양을 치료해 줘야 되죠. 
맹수들이 있으면 그냥 밤새 지켜야 되죠. 
그리고 목초지가 많지 않은 팔레스틴의 척박한 땅에서, 
목초지를 끊임없이 찾아내서 풀을 먹여야 되죠.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양도 별의별 양이 다 있습니다. 고집 센 양도 있습니다. 
시23편에 보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할 때,

지팡이는 맹수들을 쫓고 할 때 쓰는 거지만, 
막대기는 고집 센 양들을 목을 딱 걸어가지고 뉘일(제압할) 때 쓰는 거예요.  주1)

여러분, 목양은 당연히 어려운 겁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절망감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악성 루머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제가 젊은 목사님들을 멘토링을 하는데, 만나서 얘기해 보면요. 
사표를 써놓고 목회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책상서랍에 써 놨대요. '이번 주에 꺼낼까, 다음 주에 꺼낼까?' 
이러면서 목회를 한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길이든, 우리의 목회의 길이든, 
인내가 필요하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왜 인내해야 되죠? 
우리의 약속의 소망을 이루는 길이 인내이기 때문문입니다. 

그래서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힘들고 어렵다고.. 원망 불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
힘들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말고, '가나안을 바라보자' 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로서는 이룰 수 없는 구원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이미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 승리를 믿고 
마치 약속어음을 받은 것처럼 확신하고, 
장래에 주어질 그 영광이 멀리 있지만, 믿음으로 그 약속을 견뎌내고 인내함으로 
마지막 그 영광의 자리에 갈 때까지, 인내로 소망을 이루는 믿음이 여러분들에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 바울은 거리낌 없이 전하는 목회자 였습니다. 
20:20절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 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이 말은, 바울이 사심 없이 사역을 했다는 겁니다. 
이게 목회자의 면모 다운 면모죠. '거리낌 없이!'  *publicly, openly, 주저하지 않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유익한 게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용기있게 가르쳤다는 거죠.

중략

▲범사에 본을 보인 바울
20:33~35a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바울은 텐트 메이킹을 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초기 교회에 상황 속에서 
바울이 가능한 자기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이 시험 받지 않도록 애를 쓰고, 
그 일을 위해서 돈까지 벌었다는 거예요. 왜요? 

복음을 받는 사람들이 메신저가 문제가 있어서, 
메세지 자체가 거부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처신을늘  조심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26~27절에도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복음 전도자로서 깨끗한 삶을, 그가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거죠.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내적 동기를 언제나 살펴보고,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하지만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주거나, 거리끼는 일이 된다면,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의 직장 속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리스도 인이라면,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거리끼는 게 생기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인으로 우리가 드러 났다면,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삶으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우리의 삶이 일치되는 은혜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4. 바울은 <사명>의 사람이었어요.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너무 멋있는 구절 이잖아요. 아, 너무 놀라운 말씀이죠. 
이렇게 바울은 사명의 사람이었어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여기서 '사명'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소명 이라는 단어와 사명 이라는 단어가 조금 차이가 있어요. 

바울이 받은 사명이 뭐예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는 거죠. 
그 일을 위하여 나는 달려 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명을 받은 사람은 우물쭈물 하지 않아요. 주저하지 않아요.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땅을 위해 살지 않아요. 

바울은 사명을 위해 살고, 사명을 위해 죽었어요. 
여러분 사명을 사실은 모두가 다 받았어요. 두 종류가 있어요. 
-그 사명을 발견하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주셨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사람이 있죠.

이 사명을 받은 날이, 그의 인생을 분수령처럼 가르는 날이죠. 
본문의 바울의 그 고백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 복음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 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러분 바울에게 생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근데 자기 생명 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대단한 선포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을 가지고도 바꿔도 아깝지 않을, 
더 놀라운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기 생명을 바칠 만한 걸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생명을 바칠 만한 무슨 일(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에요. 

여러분, 서울에 가시면, 꼭 양화진 선교사들의 묘지에 가셔야 돼요. 
이 조선 땅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이 묘소와 묘비들이 안치되어 있죠.

거기에 어느 묘비에 이렇게 써 놨습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 해도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 루비 캔드릭

1907년에, 구한말, 조선의 조선에 도착한 지 9개월 만에 
그러니까 그때가 1908년, 이 조선 땅이 흑암 속에 있을 때, 
일제의 무서운 힘이 밀어 닥치고 있던 그 때에
24세라는 어린 나이로 이 조선 땅에 온 지 9개월 만에, 25세에 과로사로 죽습니다.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인 루비 캔드릭이,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이에요. 

그가 죽기 직전에 쓴 편지를 보면, 눈물겨워요.
자기 조국의 땅에, 자기 바닥에 뿌려진 그 씨앗이, 
이제는 꽃이 피어 마당에 꽃들이 피어 날 것을 
향수에 젖어서 그리워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복음에 눈 뜨고, 복음의 진소를 발견한 사람들에게만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움, 광휘로움을 목격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만일 나에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 한국에 주고 싶습니다.)

이 비문은 그녀가 텍사스 엡윗청년회에 보낸 편지 속 글인데, 
이 편지를 읽은 많은 청년들이 한국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발견한 복음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복음을,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의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이 사명감! 이게 바울 뿐입니까? 
바로 이 루비 캔드릭 선교사를 포함해서,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명이 끝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과제죠. '내 생명을 어디에 바칠 것인가?' 

여러분, 내가 나의 생명을, 내 사명을 위해 바치지 않으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에 내 생명이 던져질 수도 있어요. 

단순히 살기 위해서... 살아 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얼마나 여러분, 그게 힘든 거예요?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사는 삶의 목적,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즉 사명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그걸 지금 발견한 거죠. 

그래서 그걸 발견 하니까, 이제는 내가 그냥 그냥 걸어갈 수도 없는 거예요. 
'내가 달려갈 길'이라는 거예요. 
내가 전력 질주한다는 거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 복음의 능력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이 로마에 들어가면, 그 로마의 심장부를 뒤집어 놓으면, 
로마 제국도 복음 앞에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믿었기 때문에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두나미스 가 된다는 사실을 믿고 
'나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에 대한 환상과 확신을 가지고 
그가 달려간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1차, 2차, 3차선교여행의 여정을 보면 
그가 생명을 바친 사도 라는 걸 알게 돼요. 

그는 말로만 사역한 사람이 아니라, 환란과 숱한 반대와 모함을 
인내로 뚫고 지나간 사명자 였습니다. 

그래서 22~23절을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지금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은, 죽음의 길일 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는 후퇴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슨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주님이 자기를 부르신 자리로, 사명의 자리로 들어가고 있는 거죠. 

여러분, 바울은 강심장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고전2:3절을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은 강심장이 아니에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할 수 있죠? 
바로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시고, 
그가 가진 믿음이, 그런 용기를 일으켜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매여 있다'고 말한 거죠.  :22
그의 모든 길을 이끄는 분은 성령이셨어요. 

그래서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성령의 강권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었어요. 

여러분 '사명'이라고 하니까, 나와 아주 먼 얘기처럼 듣고 계시는 분이 계실지 몰라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 복음은 나만의 복음이 아니에요. 
이 복음은 누구에겐가 전해야 될, 황홀한 영광스러운 복음입니다. 
한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엄청난 파워가 있는 이 복음을 
우리는 전해야 될 사명이 있어요. 
이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의 강권하심이 있으면, 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AD 67년에 두 번의 재판 끝에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순교를 당하죠! 

여러분, 로마에 혹시 여행을 가시면 
반드시 사도 바울의 순교 현장을 가보셔야 합니다. 
그는 사명을 위해 살다가 사명을 따라 죽었습니다. 가장 멋진 삶을 산 것이죠.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우리 모두 사명의 사람이 되시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받은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나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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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막대기와 지팡이
올리브는 가지가 몸통뿐만 아니라 뿌리에서도 뻗어납니다.
특히 뿌리에서 뻗아난 가지는 바로 묘목이 됩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를 봐야하는데요,
몸통에서 난가지를 '호테르'라고 부르고요, 뿌리에서 난 가지를 '네쩨르'라고 부릅니다.
이 두 단어가 함께 언급된 곳이 바로 이사야서 11장 1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호테르)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네쩨르)가 나서 결실한 것이요’ (이사야 11:1)

성경에서 말하는 '막대기'와 '지팡이'는 바로 올리브나무에서 나온 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즉 몸통에서 난 가지를 '막대기(호테르)'라고 부르며, 뿌리에서 난 가지를 '지팡이(네쩨르)'라고 부릅니다.

그럼 지팡이와 막대기를 어떻게 구분하는냐.
몸통에서 뻗어난 가지 호테르(막대기)는굵고 길이가 짧습니다.
호테르는 나무에서 떼어낼때 떼어낸 부분이 뭉퉁합니다.
그래서 허리춤에 꽂고 다니다가 이를 거꾸로 잡고 내리치면 도끼와 같이 무기가 됩니다.
마치 막대기 끝에 돌을 매단 것처럼요.
그래서 양을 공격하는 맹수들을 내리치는 무기(막대기)가 되는 것이죠.

반면 네쩨르(지팡이)는 곧고 길게 자랍니다.
이를 잘라내어 막대기로도 쓰이지만 이것이 바로 올리브나무의 묘목입니다.
길고 가벼워 양을 이리저리 툭툭 치면서 길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종아리를 치는 홰초리도 되구요.

결국 막대기(호테르)는 무기의 용도로 쓰이고, 지팡이(네째르)는 바른길로 인도하는 용도로 쓰입니다.
시편에서 말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그러니까 지팡이와 막대기를 굳이 구분하자면,

막대기는 짧고 굵직하고 뭉퉁해 무기처럼 사용되고((호테르),
지팡이는 얇고 길게 자라는 것입니다(네째르)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이 바로 이 네쩨르를 의미합니다.
올리브의 묘목이란 뜻이죠.
시편28: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묘목) 같으리로다
나사렛은 성지에서 올리브 묘목생산지로 유명하답니다.
그래서 붙여진 마을이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기독교인들을 히브리어로 '노쯔리' 또는 '노쯔림'이라고 부릅니다.
나사렛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출신이라, 예수님을 따르는 나사렛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네쩨르가 곁가지로 뻣어난 묘목이란 뜻이잖아요?
그런데 잘 보세요.
올리브나무 묘목의 마을 나사렛, 그리고 그 나사렛에서 새로운 종파가 생겼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종교란 뜻도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뻗어나와 독립된 종파 네쩨르(Off Shoot)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우리 기독교를 노쯔리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