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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 YouTube
◈조롱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눅22:63~23:12 2024.10.13.
오늘 눅22장을 마무리 하고 23장 앞부분을 살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세기의 재판' 정도가 아니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판,
즉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사형을 언도받으시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오늘과 다음 2주 동안에는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시는 내용들을 다루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눅22:63~65절까지는 <대제사장 뜰>입니다.
대제사장 뜰에서 대제사장 집을 지키는 경비병들과 종들에게 예수님이 조롱을 당하시고
또 맞으시는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22:66~71절까지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입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 사법기관인 곳, 여기서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는 내용이죠.
23:1~7절은 무대가 <빌라도 관저>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이어서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습니다.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권한은 로마 총독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23:8~12 또 갈릴리를 다스렸던 <헤롯 왕 앞에서>
서서 심문 받으시는 내용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살피게 되는데,
-예수님은 어떤 취급을 받으셨나? 조롱당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이 조롱당하신 예수님은 어떤 태도를 보여주셨는가?
-예수님을 고소하는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 그들이 범한 잘못은 무엇인가?
또 예수님을 결국 재판한 빌라도, 헤롯은 어떤 잘못을 범했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대제사장의 뜰에서
앞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성전 경비병들은
'대제사장의 뜰'로 예수님을 데려갔습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22:54
▲22: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대제사장은 거의 제정일치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죠.
그 관저를 지키는 유대 군인들이 있었는데, '성전 경비병'입니다.
이들이 대제사장의 명을 받고서, 예수님을 체포한 주범들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63
'희롱하다' mock
헬라어로로 이 단어는, 한 사람을 중간에 두고 주위를 춤추듯이 막 도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거죠.
낄낄 웃으며 놀리듯이 조롱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또 폭력적으로 바뀌어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때린 다음 64절을 보면, 때리면서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질문합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4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5
여기서 '욕했다'라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blaspheming
이것이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겪으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은, 구약에 특별히 이사야서 후반부에
'고난받는 종'의 이야기가 예언되어져 있는데, 그것의 성취이죠.
사50:5~6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고난받는 종'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어서 어떻게 하느냐? '내가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가지도 않았습니다.'
또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고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고
모욕과 침뱉는 그런 일을 당해도 나는 내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50:6
여러분 지금 '고난받는 종'이 조롱과 멸시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분은 기꺼이 순종할 것이다. 묵묵히 순종하며 갈 것이다' 라고 예언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이 예언에 순종해서 반응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때리고 욕하는 자를 향해서, 예수님은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복하면서 욕하지도 않으셨고, 예수님은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변호를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감당을 하셨습니다.
또 사53: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위 예언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습니다. 침묵하시게 됩니다.
이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성취하시고, 살아내시게 됩니다. ☞ <침묵>
◑2. 산헤드린 공회에서
▲22: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날이 새었습니다. 이제 무대가 산헤드린 공회로 옮겨집니다.
백성의 장로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67절에 그들이 질문을 하는데, 누가복음은 두 개로 나누어 질문을 합니다.
두 질문 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계된 질문입니다.
▲22: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말을 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다' 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가복음의 본문을 마태복음, 마가복음과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는 것은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갑니다.
그 다음 중간에 이 사건, '공회 앞에 질문을 받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공회 앞에서 대답하시는 내용은
무엇을 배경으로 해서 봐야 되느냐? 바로 베드로의 부인입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진리를 그분은 시인하시게 됩니다.
그걸 시인하시게 되면, 예수님은 신성모독으로 정죄를 받고, 결국 죽으시게 되는데도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고, 시인을 하셨는데,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죠. 자기의 목숨을 구할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22: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이 말씀은 좀 어렵지만,
구약의 그리스도를 예언한 두 개의 유명한 구절이 결합된 말씀입니다.
1) 단7:13~14절에서, '인자'를 가져오셨고요.
예수님이 자신을 설명할 때 '인자'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사용하셨죠.
그건 단7:13~14절을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표현을 쓰신 그 의도,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신약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단7장에 보면, '인자'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집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십니다.
그때 모든 백성 나라들,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만앙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겁니다.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권세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즉 그분은 영원한 왕이시고, 그 분은 왕중의 왕이 될 것이다... 를 다니엘이 예언했죠.
예수님은 69절에서
'앞으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는 일,
즉 내가 왕중의 왕으로서, 영원한 왕으로 세워지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이다' :69b
이것은 시110: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바로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할 때, 이 구절을 이미 한번 사용하셨습니다. 눅20:41~44
정리를 하면, 예수님은 바로 이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누군가 하면
1)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실 만왕의 왕이신 인자시고,
2) 나는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답변하셨습니다.
그때 지도자들의 반응을 한번 보시죠.
그들은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 들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자기 귀를 의심하는 거죠.
그래서 70절에 한 번 더 질문합니다.
▲22: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산헤드린 공회에서, 공회원들이
'네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재차 컨펌하는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새번역이 더 알기 쉽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그라고 여러분이 말하고 있소."
▲22: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이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증언을 들었다,
이건 신성모독의 죄고, 사형에 처해야 될 무서운 죄다.
그 증거를 우리는 자신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공회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것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장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하나님을 믿었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내가 바로 그니라' 라고 시인을 해도,
오히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혀를 차면서 이제 그를 죽이기로 모색합니다.
◑3. 빌라도 앞에서
23: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공회원(유대교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하는 내용을 보면,
앞서 자기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심문의 내용과 좀 차이가 있습니다.
앞서는, '신성 모독을 범한 자로서 사형에 처해야 된다' 해놓고는,
실상 빌라도한테 고발할 때는 내용이 뭐죠? 3가지입니다.
1) '이 사람은 백성을 미혹하고'
이 말은, 지금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는 이 백성들을 선동해서
로마에 대해서 저항하도록 부추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2) '또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금한 사람이다' 이것도 거짓말이죠.
앞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세금 논쟁이 붙었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는데,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치 말라고 했다'고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3)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여러분, 이건 자칭 왕으로 떠들고 다닌다,
즉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모는 겁니다.
로마를 향해 반란이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위험한 존재라는 고발입니다.
▲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요한복음의 병행구절을 보면 *요18:28-38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조금 더 풍부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누가는 그냥 한 가지만 소개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 때 예수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여러분, 빌라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
그런데 빌라도도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도가 뭔 줄 알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은 소위 정치적으로 무장 봉기를 부추기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의 지난 행적들을 볼 때, 그게 아님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보좌진들이 그런 내용을 귀띔해 주었을 것입니다.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그러자 이 말을 들었던 유대교 지도자 무리들은 더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23: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무슨 뜻이죠? '갈릴리부터 시작해서 이곳 예루살렘까지 와 가지고
백성들로 하여금 로마를 향해 소요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강하게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이때 빌라도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
이들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이거 좋은 방법이 있네!'
▲23: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이때 갈릴리를 다스리던 왕은 분봉왕 헤롯이었습니다. 주1)
세례요한을 죽인 인물이죠. 마14:10
그런데 헤롯이 마침 유월절 절기였기 때문에, 에루살렘에 와 있었던 거죠.
그래서 빌라도는, 그가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예수님을 넘기게 됩니다. :7
헤롯이 예수님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그것을 기초로 자기가 판결을 내리면, 자기 부담이 줄어들게 되죠.
◑4. 헤롯 앞에서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지금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뭔가 하면,
그가 행하시는 기적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헤롯 안디바는, 이런 기대 속에서 여러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답변은 뭡니까?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애들 말로 하면, 예수님은 헤롯을 개무시하셨어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대답할 가치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신 거죠.
지금 '기적'을 언급할 장소가 아니었던 거죠.
▲23: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그 와중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예수님을 헤롯 안디바에게 고발합니다.
▲23: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헤롯은 분노하고 보복합니다.
그게 업신여김과 희롱으로 나타나죠.
다시 한번 '희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둘러서서 놀리고 모욕하며.. 깔깔대며 웃었다는 거죠.
또 '빛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보내게 됩니다.
빛난 옷이란, 왕이 입는 옷입니다. 다른 구절엔 '자색 옷'이라고 나옵니다. 막15:17
'왕이 입는 옷'을 예수님께 입혀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자칭 왕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께 대한 조롱인 거죠.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적용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참 이렇게 조롱과 멸시, 폭력을 당하시기도 하셨고
공회 앞에서, 또 빌라도와 헤롯 앞에 서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1.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기를 짓밟고 조롱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벧전3:9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신분 가지고, 그들을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자신을 변호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합리화 시키려고 노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죠?
하나님의 뜻, 세상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조롱과 멸시를,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욕하거나 위협하거나 자신을 변호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예수님은 묵묵히 인내하시며 감내하셨습니다.
이것을 여러분 바울은 어떻게 소개를 하느냐?
딤전6:13절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딤전6장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는 편지의 마무리입니다.
그의 마지막 결론적인 가르침은 뭔가 하면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직전에 바울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당당하게 선한 증언을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살기등등한 유대교 지도자들, 공회 앞에서,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그분은 선한 증언을 하신 분이십니다.
협박, 욕하지 않으시고, 선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심문을 받고 계시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욕하거나 위협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인내하셨고
적극적으로는 선한 증언을 하셨고
자기 꾀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셨습니다.
△제가 참 이 말씀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저는 목회를 하면서 아마 좀 죄송하지만
목회자들이 아마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는 뭔가 하면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무시를 당하는 것!
그런데 저는 처음 신학교에 들어가서,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전도사를 했을 때
그때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는데,
제가 목회를 하면서는 저한테는 너무 귀한 예방주사를 한 번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부 전도사를 하고, 1년 정도가 됐을 때,
그때는 설교를 하기 전에, 내수동교회는 꼭 간증하면서 특송하는 순서가 있었어요.
이어서 제가 설교를 하는데,
설교하기 전에, 한 형제가 앞에 나와서 대놓고 저를 욕을 했습니다.
그래서 막 첫째 주에 욕을 하고 나서, 그 후에 제가 설교를 했는데
그것도 제 마음을 통제해서, 또 그 형제와 좀 화해하고, 오해를 풀고,
이렇게 좋게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 다음 주일에, 저와 대화 가운데 발견한 새로운 건수를 갖고, 또 저를 욕을 했어요.
앞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저를 비난하니까
한 달 동안 예배가 제대로 되지도 않았고
정말 온갖 오물을 제가 사실은 다 뒤집어 썼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내수동교회 대학부가 참 큰 위험에 빠지나?'
'목회자인 나도 여기서 시작도 한 번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끝이 나나?'
이렇게 참 마음이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 제가 정말 죽어도 안 하는 게 금식인데,
그때 처음으로 금식을 3일을 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금식을 했어요.
그러니까 제 얼굴이 엉망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존경했던 선배가 저보고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그럴 때 그 선배가 이야기 해줬어요.
'야, 네 같은 (미숙한) 놈이 대학부 전도사 하는데, 문제 생기는 게 당연하지...'
'빨리 가서 밥 먹어라!' 이러더라고요.
제가 그 선배 말을 듣고 바로 빨리 가서 밥을 먹었어요.
저는 그때 제 인생에 있어서, 그런 공개적 모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했죠)
목회 환경이 평온할 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평온했던 그 순간은 특별한 은혜였고,
지금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
'이거는 내 수준에 맞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저는 그때 깊이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싸우고 싶은 생각이 안 나요.
'아, 이거 내 수준에 맞는구나'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고,
상대방에 대해서, 또한 이 상황에 대해서 좀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한 증언을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또 지금 이 상황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 안에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제가 고백하고, 선한 증언을 하고
이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 저 자신을 맡기고... 이렇게 대처하게 됐습니다.
그러고나서 한 달이 지나고, 정말 참 이 문제가 다 잘 마무리가 됐습니다.
그때 제가 맞았던 예방주사가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 귀한 교훈이 됐습니다.
여러분 교회라고 해서, 제가 항상 좋은 소리만 듣겠습니까?
저도 여러 가지 힘들었던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 설 때마다... 이 말씀이죠.
'하나님 제가 욕을 욕으로 갚거나, 또 위협을 따라서 위협하거나 하지 않고,
나를 방어하려고 합리화시키거나 이렇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 제가 묵묵히 잘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런 모욕은 내 수준에 맞는 거다..
하고 그냥 묵묵히 잘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향해, 상대방들을 향해
선한 증언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선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 제 삶을, 또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주님께 맡깁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를 통해
그 어려웠던 시간들을 극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에 한두 번은
예수님이 서셨던 조롱과 멸시의 자리에 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 같았던 세상이, 갑자기 등을 돌려서
온 세상이 나를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꼭 기억하시죠.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므로,
그때 침묵하며, 묵묵히 잘 인내하고
여러분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과 상대방을 향하여
고통을 주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하여도 선한 증언을 하고
인생을 내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의 인생을 맡겨드리면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그 길을 바꾸어서
부활과 영광의 길로 바꾸어 주십니다.
▲2. 예수님은 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빌라도의 질문을 받으실 때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거다'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세우신 인자요, 그리스도시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유대인의 참된 왕이신 것을 담대하게 증언하셨습니다.
쪼그라든 베드로와 달리, 예수님은 담대하게 증언하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데, 비겁함이 없으셨습니다.
△대제사장, 빌라도, 헤롯 앞에서도 증거하신 예수님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에 반대하며 정치 투쟁을 벌이다가 8 년간이나
옥고를 치른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 마틴 니뮐러 목사였습니다.
이 분이 전쟁이 끝난 후 책을 한 권 썼는데 전쟁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에 대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책이어서 독일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분이 이런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니뮐러 목사가 어느 날 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은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모두가 심판을 받기 위해 한 줄로 죽 늘어서 있었고,
니뮐러 목사 자신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니뮐러 목사가 그렇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 등 뒤에서 나지막히 탄식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했습니다.”
니뮐러 목사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그 소리를 지른 자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목사님은 아찔했습니다. 그를 미워하여 그의 통치에 반대하여 투쟁은 했지만,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사랑하고 전도했던 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니뮐러 목사는 불현듯, 그렇다면 제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만의 책임이 아니라,
목사이면서도 그를 전도하지 못한 바로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뮐러 목사는 이 꿈을 한 번만 꾼 것이 아니라 매일 밤 똑같은 꿈을
무려 일곱 번씩이나 꾸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니뮐러야, 네가 8년 동안 히틀러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판하며 저항만 했지,
그 동안 한 번이라도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느냐?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너와 한 형제임을 알지 못했느냐?
어찌하여 복음으로 사랑하지 못했느냐?”
니뮐러 목사가 이 음성을 듣고 히틀러가 저질렀던 전쟁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통곡으로 쓴 책이 바로 <전쟁 책임 고백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 이웃에 살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님, 저는 복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그 예수 믿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피값은 누가 치루어야 하겠습니까?
△르완다 내전 중 담대한 증언 일화 주2)
▲3. 또 하나 여러분, 왜 이렇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빌라도가 '그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었더라' 했죠.
여러분 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는가요?
악착같이 제거하려고 했는가요?
빌라도가 알았습니다. '시기심 때문이었다!'
여러분 이 세상을 고통에 빠뜨리고, 교회를 고통에 빠뜨리고,
가정을 고통에 빠뜨리는 그 중심에는 무엇이 있느냐? 시기심이 있습니다.
천사의 얼굴을 한 사람들의 그 시기심 때문에
교회가 죽어가고,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여러분과 제가, 이 시기심과 치열하게 싸워서
시기심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사랑과 존경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그런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 <시기, 질투>
▲4. 또 하나, 여러분 빌라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죄인 것을 알았지만, 결국 그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는 헤롯에게 넘겨버립니다.
다음 주에 또 다룰 텐데, 바로 빌라도는 비겁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비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잘못인 줄 알면서도, 눈앞에 있는 유익 때문에
여러분 결국 그 옳은 마음을 내려놓고, 유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비겁함 때문에
우리는 매주일 모일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매주일마다 신앙고백할 때, 본디오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난에 빠뜨린 가장 중요한 책임을 친 사람으로요.
이것이 바로 비겁함의 대가죠.
▲5. 헤롯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는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기적을 보기 원하는 그의 호기심,
예수님이 그를 무시했을 때, 그는 예수님을 향해 보복하면서
조롱하고 희롱하고 '그래, 네가 왕이지!' 빛난 옷 입혀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거죠.
성도들 가운데도 헤롯처럼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호기심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나의 야망을 성취시켜줄 수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응을 보이시지 않죠.
그러면 어떻게 되나? 이런 사람은 더 예수님을 향해 적대적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향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
그때는 분노할 때가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내면을 한번 살펴야 될 때인 거죠.
자리에 일어나셔서 한 번 같이 기도 드릴 때
우리도 한 번 정도는 예수님처럼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때 예수님처럼 묵묵히 인내하며 하나님과 또 상대방을 향해
선한 증언(말)을 하고,
예수님께 인생을 맡길 수 있는 십자가의 길 걸어가게 해주십시오.
여전히 내 속에 뿌리 잡혀있는 시기심과 비겁함과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이기심을 내려놓게 해주시고
주님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께 무릎 꿇고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말씀 기억하면서 함께 한번 기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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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B.C.4-A.D.39까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분봉왕 안티파스를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빌라도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헤롯은 오래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했으며
그가 관연 누구인지 알고자 했었다(눅238, 눅9:7-9).
주2) ♣르완다 학살 중에 나타난 14세의 영웅
여러분, 1994년 르완다에서 있었던 대학살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인구가 870만밖에 안 되는 나라인데,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져 80만 명이 죽었습니다.
투치족과 후투족이라는 르완다의 두 주요 종족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주로 후투족 사람들이, 투치족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벌써 15년 전 사건이라, 우리 기억 속에 많이 잊혀진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르완다에서 그렇게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르완다 국민의 80퍼센트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르완다는 동아프리카에서 부흥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나라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부흥이 있었고, 기독교인이 인구의 80%라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정말 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80% 라고 하는 것은 가톨릭과 앵글리칸 처치(영국 국교회),
기타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를 다 포함해서 80% 라는 것이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인구비율입니다.
그렇게 크리스천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80만 명이 죽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때
르완다의 크리스천들이 그걸 막는 역할을 하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수수방관하거나 학살을 조장 했다는 혐의 때문에
지금은 25% 정도의 사람만 교회에 나온다고 합니다.
25%라고 해도 한국보다 복음화율이 더 높기는 합니다만,
이런 안타까운 나라가 르완다입니다.
당시에 아나타즈 새롬바라고 하는 신부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분이 상당히 넓은 땅에 규모가 큰 성당을 세우고, 목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천여 명 되는 투치족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아서 이 성당에 숨어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새롬바는 반대쪽 부족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짐작컨대 이 사람은 양쪽 부족들이 갈등을 겪을 때
그 갈등의 한쪽에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피난처를 찾아 성당으로 온 이 2천명을 전부 죽였습니다.
기독교 성직자들임에도 이런 걸 조장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싸움을 조정하고 화해 분위기를 만든 게 아니라,
한쪽 편에 서서 자기도 화를 내는 사람이 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르완다 그리스도인들이 엄청 애를 쓰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이 르완다 땅에서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갈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설교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용서하라.. 그러면 학살을 당한 부족 사람들이
‘우리 목사는 저쪽을 편든다’고 의심할 판이니,
목사가 설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충대충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 가운데는 어느 한쪽, 후투족만 모이거나
투치족만 모이는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용서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해 애를 쓰고
씨름을 하는 모습들을.. 지금 르완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달 <크리스체니티 투데이>지에서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몇 년 전에 후투족 반군이 어느 학교에 침입을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후투 족은 이쪽에 서고,
투치족은 저쪽으로 서라 하여, 편을 갈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후투족 반군이니까,
이 사람들이 투치족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비록 아이들이지만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동안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린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갈라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 더 껴안으면서
“우리는 후투족도 없고 투치족도 없고, 전부 르완다 사람이예요”
하면서 아이들이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정신없는 어른들,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갈라서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때 14살짜리 여자아이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갈라서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죽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모두 르완다 사람입니다."
한 아이가 총을 들고 있는 어른들을 향해서 외치고는 아이들끼리 껴안았습니다.
그러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 자식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 아이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 가 버렸습니다.
그날 열네 명의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그 중 어른들을 향해 외쳤던 그 여자 아이도 죽었습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외쳤던 그 여자아이는
지금 르완다의 국민영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르완다는 지금 이런 쓰라린 상처를 안고
서로 용서하는 일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들도 많이 맺고 있습니다.
그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이루어지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바꿀 수 없고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십시다. 우리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또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르완다 내전 때, 르완다의 선교사님이 그 곳의 성도들과 함께 경험한 일입니다.
당시 르완다의 기독교인들은 반군들의 타겟이 되어 쫓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도망을 다니다가 결국 반군들에게 발각이 되어 모두 체포가 되었습니다.
반군들은 그들에게 예수를 부인하고 반군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자는
모두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보기로 그들 앞에서 한 남자의 팔과 다리와 목을 하나하나 잘라서
공포심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교회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반군들은 그 교회를 향해 기관총과 수류탄을 난사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처참한 고난입니다. 그 때 그 상황을 몰래 숨어 지켜보던 선교사님이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이런 상황도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그런데 그와 반대로 그 때 그들의 장렬한 죽음을 보며
그 현장에 있던 르완다 반군의 장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저러한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놓지 않는 그들의 하나님이 누구인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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