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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3장, 한 의로운 가지

LNCK 2024. 10. 2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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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76093

 

◈한 의로운 가지        렘23:1~8         2008년

 

예레미야 23장은 매우 암울한 시대 상황을 보여줍니다.

1~8절은 악한 왕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9~32절은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같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33~40끝절은 백성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의무로 여기는

                   모든 사람을 향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 설교는 1~8절을 다룹니다.

 

◑서론

 

구약시대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구원사건은 출애굽(Exodus)사건입니다.

애굽은 당시의 가장 최고의 강국이었고, 이스라엘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노예국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스럽게 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능력을 가지신 분이 계시다면

오로지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바로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를 나일강에 모두다 몰살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져 고속도로처럼 건너서,

걸어서 건너감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시편과 선지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애굽 왕을 물리치신 하나님께 찬송하라.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께 찬송하라.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라며 끊임없이 출애굽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여호와 이외에는 우리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여호와 이외에는 다른 신을 결단코 섬기지 않겠다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지나면서 그들은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다시 이방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진노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갑작스럽게 진노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느닷없이 심판부터 내리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한 번 잘못했다고 때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잘못해도 오래 참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오래 참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너희가 회개해라. 어찌하여 언약을 어기느냐? 언약을 다시 지켜라.

회개하면 심판을 거두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증거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하박국, 미가, 스바냐,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요엘.. 이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유다백성들을 향하여 회개하면 심판을 거두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역사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은 므낫세입니다.

이 므낫세의 악행을 지나시면서 하나님의 인내도 한계를 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도 오래 참으신다는 것이지

아주 끝까지 참으신다는 것은 아닌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시다가도 어느 한계를 넘어가면 그때는 안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해도 때는 늦습니다. 므낫세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인내도 한계를 넘어버렸습니다.

렘21:8절 이하의 말씀대로 이제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생명의 길이요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제 회개해도 됩니까?

‘안된다. 너무 늦었다(too late). 이제는 회개해도 소용없다. 바벨론은 올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멸망할 것이다. 너희가 유일하게 살 길이 있다면

바벨론에 항복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백성들 마음속에는 질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윗 왕조가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다윗왕조가 영원하리라는 하나님 말씀은 소용없는 말씀입니까?

다윗 왕조는 이대로 끝나고 영원히 망한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본문은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주는 것입니다.

“다윗 왕조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죽은 뿌리에서 싹이 나듯이

다윗왕조에서 한 의로운 가지가 나올 것이다.

극도로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빛나는 소망의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New Salvation)을 주실 것이다.

 

그 구원은 출애굽의 구원보다도 더 위대한 구원이 될 것이다.

이 구원은 한 사람 모세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인 다윗 왕가에서 나오는

한 의로운 가지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약속인 것입니다.

 

본문 23:7~8절에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이 약속은 물론 일부는 주전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사건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 약속의 실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북왕국의 회복까지는 포함하고 있지 않으므로!

 

결국 궁극적인 실현은 결국은 다윗왕조에서 나오는 한 의로운 가지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이것이 새로운 구원이며 출애굽보다도 더 위대한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1. 먼저 1-2절은 왜 why 이 “위대한 구원”이 필요한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23:1~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 가운데서도 훌륭한 지도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 지도자의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1-2절에 나오는 ‘목자’라는 말은 1차적으로는 정치적인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가장 직설적으로 말하면 ‘왕’이죠. 그 외 각료들.

 

그런데 당시가 제정일치 사회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종교지도자들도 당연히 포함되죠.

한 마디로 ‘사회 지도층들’입니다.

 

왕들 및 지도층들은 목자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양육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평과 정의, 이 두 가지를 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왕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명령을 이행하는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공평과 정의는 어림도 없고 도리어 양무리를 흩으며,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특히 유다 멸망 직전의 네 왕들의 스토리를 렘22장에서 간략히 보았는데,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입니다.

이 네 왕들은 모두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불신앙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애굽으로 노예로 끌려가고 (여호아하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여호야긴)

끌려가기도 전에 죽고 죽어서 성밖으로 내던져져 죽고 (여호야김)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을 뽑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2b절에 있는 대로 “양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족속 가운데 그래도 가장 훌륭한 족속을

하나님 보시기에 유대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역시 훌륭합니다.

미국에서도 보면 몇 안되는 유대인들이 미국의 돈을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을 장악하고 있고, 미국 정치는 유대인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세계 금융을 유대인들이 움직입니다. 유대인들이 한번 돈을 풀면 돈이 풀리고

돈을 거두면 금융위기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세계경제를 갖고 놉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독특한 백성으로 머리좋고 똑똑하고 훌륭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뽑았으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한 종이 다윗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훌륭한 족속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마음에 합한 종 다윗을 뽑아서

그 집안에게 왕권을 맡겼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최고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최고수준이 결국은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 정도 수준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은 아무리 수준이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지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실패요 불가능이라는 것을

오랫동안의 역사적인 실험결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구원 말고 인간에게는 새로운 구원(New Salvation)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다윗에서 나오는 한 의로운 가지에 의한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 3-4절은 이 “새로운 구원”은 어떤 방식으로 올 것이냐 하는 문제 how 를 다룹니다.

 

23:3~4절에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 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새로운 구원은 어떤 방식으로 오느냐?

인간의 활동이나 노력으로는 결코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I myself)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하나님이 내가 내 자신이 하리라 그런 말씀입니다.

새로운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면 다윗왕가가 왜 실패 했는냐 이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자신이 새로운 구원역사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구원의 대상은 누구냐? 남은 자 (the remnant) 라 그랬습니다. :3

구약성경은 언제나 남은 자를 구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택한자를 구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남은자나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택자는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시느냐? 영원전부터 창세전부터 사랑하시고 택하신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온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를 원하시는데

인간이 싫어하고 반대해서 하나님이 못 구원하신다는 것은 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반대하면 못하십니까?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 창세 전부터 택한 자가 있으시고

그 택한 자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자신의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이 3~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구원의 결과는 무엇이냐?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 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3~4

 

새로운 구원의 결과는 양들의 남은 자가 우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 우리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0장의 예수님의 말씀을 구약의 언어로 듣는 것입니다.

요10:16절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은 유대인 가운데도 남은자를 거두어 우리로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중에도 남은자가 있습니다. 그들도 구원하여 우리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어로 “pen"라고 합니다.

목자가 울타리를 쳐놓고 양들을 돌보는 안전한 목장을 가리켜 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전하고 아름답고 이리나 늑대가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목자장이 있고 그 밑에 작은 목자들이 수시로 양들을 돌보는 곳입니다.

이 우리 안에서 양들은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새로운 구원의 결과는 하나님이 남은 자를 구원하여 교회를 이루시고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대목자장이 되시고

작은 목자들을 세워 교회를 양육하고 돌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구약의 언어로 신약의 교회시대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3~4절은 하나님이 남은자를 구원하여 우리를 만드시겠다는 참으로 놀라운 약속입니다.

 

◑3. 5-6절은 “누구를 통하여 through whom”

새로운 구원이 이루어 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 의로운 가지 Christ 를 통해서 입니다.

 

본문 5~6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behold)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다윗의 왕가가 생명이 없고 끊어져 버린 것 같아도

그 뿌리에서 싹이 나오고 한 가지가 나올 것을 보라는 말입니다.

나무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거기서 다시 싹이나고 가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지는 보통가지가 아니라 한 의로운 가지(a righteous branch)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왕은 다윗의 후손이요 다윗왕가에서 나올 것이며

다른 왕들이 실패한 것이나 이 왕은 성공할 왕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왕이며 이상적인 왕이며 완전한 왕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왕은 무엇을 이루느냐

6절에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사실 주전 539년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온 것은 유다이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 민족과 지파에 관계없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은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일인 것입니다.

 

그 구원은 의로운 가지가 주시는 의로써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의라” :6

 

이 의로운 가지는 누구냐? 예수그리스도이심은 명약관화합니다.

이것은 마귀도 부정 못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무수히 증거되는 예수님의 이름은 “다윗의 자손 예수”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의로운 가지가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첫째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완전히 의로운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의(perfect righteousness)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active obedience)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그러는데 잘못된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으면 우리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받을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받을 의가 없는데 누가 천국에 갑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은 입으셨으되 죄는 없으십니다.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위하여

그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죄값을 대신 치루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자는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느냐?

이것이 역사에 존재하는 최고의 거래인 것입니다.

 

첫째로, 믿는 자의 죄는 십자가로 옮겨져 예수님의 형벌에 의해 죄값이 다 치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자는 모든 죄의 사함을 받게 됩니다.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함 받아, 지옥갈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죄짓는 것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수준이지

지옥 가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성의 문제지 지옥, 천국, 기본구원에 관련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완전한 의”는 믿는자에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옮겨져서 믿는 자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은혜스럽고 사랑스러운 거래입니까? *법적인 의, 실질적 의는 아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양들아 너희의 죄를 내게 달라.

그러면 나는 나의 의를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께 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는 우리가 선행을 해서 이룩한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옮겨와서

전가되어서 받은 의입니다.

이것이 죄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라고 하는 복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 죄짓는 것을 뻔히 아는데 의인은 무슨 의인이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이 의로운 행위를 해야 의인이 된다고 하는 그런 기본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의 의는

밖에서 온 것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의가 전가 받은 사람은, 반드시 의로운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없으면, 받은 구원을 의심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의 의가 옮겨와서 된 것입니다.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질적으로 내가 의로운 행위를 해서 의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옮겨서 법적으로 심판할 때에

우리를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법적인 의(forensic righteousness)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의는 실질적인 의가 아닙니다.

“실질적인 의로써 천국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나니

영원히 없고 아무도 없도다.” 가톨릭 신도들과 불교 신도들은 자기들의 의로써

천국을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잘못된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서울시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부산이 나온다고 하는 잘못된 원리와 같습니다.

 

북쪽으로 가면 갈수록 부산에서 멀어지면 멀어지지 부산에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의는 외래적인 의요, 전가된 의요, 법적인 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우리의 의, 여호와 우리의 의” 히브리어로 “여호와 찌드케누”가 되는 것입니다.

 

롬3:26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고,

 

고전1:30절에도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갈3:27절에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이렇게 의가 전가 받은 사람은, 반드시 의로운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없으면, 받은 구원을 의심해 봐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은 천국의 예복이요 이 예복이 없는 자는 천국에 못들어가고

혹시나 어쩌다 들어가도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의의 예복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결론

 

결국 우리는 노예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힘으로 구원얻을 소망이 없고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남은 자, 성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의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를 따르느니라”는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음성은 이런 음성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그리고 내 딸아.

내게 너의 죄와 너의 고민과 너의 질병을 다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너의 죄를 다 달라 너의 고민도 다 달라.너의 질병도 다 달라.

내가 너에게 의를 주리라 행복을 주리라. 그리고 치료를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죽지만 영원토록 영생하는 치료를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완전한 치료입니다.

감기나 병을 조금 낫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치료입니다.

병에 다시는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게 하는

완전한 치료의 몸을 우리는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음성만큼 사랑의 음성이 어디 있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찌드케누” “하나님은 나의 의요, 예수님은 나의 의”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시며

또한 이 확신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적용 / 선한 목자, 의의 왕 .................................................

20181010새벽 / 선한 목자, 의의 왕 / 렘23장1~8절 - YouTube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 버리면

그가 구원 받기 전에 모습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께 아무 쓸모 없는 인생,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 되어서

또 자아를 추구하며 살다가,

결국은 자기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고통으로 빠지게 된다... 라는 이야기를

예레미야서는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이야기가 매우 비참한 이야기인 것은,

그리고 아주 심각한 이야기인 것은

 

한 인생을 구원 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인생을 구원 하신 하나님께 붙어 있는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고통 속에 빠졌다' 라는 개인적인 아픔 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겠다 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려서 부터의 그 악한 습관을 버리지도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반역하며, 여전히 하나님 없었던 인생처럼 살아가던 그 인생이

결국은 다시 고통 속으로 빠졌다... 하는 것은

 

한 개인이 '아, 하나님을 믿어도 고통을 받는구나' 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패 와도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 하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셨는데

결국은 멸망 시켜야 될 만큼, (유다의 바벨론 포로처럼)

그에게 줄 것은 고통 밖에 없을 만큼..

하나님은 연약한 분이신가?

 

이런 하나님의 측면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은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실패와도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매우 절망적인 것이죠.

'하나님은 이집트의 바로로부터 우리를 끄집어 내실 수 있는 능력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없으신 분이구나'

 

'아~ 자기로 부터, 자기 자신의 악함이나,

그 악한 습관으로부터는 건져 내실 능력이 없으신 분인가 보다...'

 

'그래서 결국은 때려서 멸망시킬 수 밖에 없는.. 그런 연약하신 분인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의 삶 과도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교회의 일원으로 들어오고,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도 하는데,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전혀 변화 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아주 절망적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아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방황하던 인간을

교회 안에 앉혀 놓을 수 있는 능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 앉아 있는 그 인간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 내실 능력은 없는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와~ 저 사람 참 안 됐다' 이런 생각도 하지만,

동시에 '와 하나님은 뭐 하시지?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지?

겨우 이렇게 밖에 하실 수 없는 분인가?'

 

라는 그런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사실 이것은 매우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하나님이 없어서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의 눈물 보다,

사실 교회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 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야 되는 이 선지자의 눈물이,

사실은 더 구슬픈 것입니다.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집트에서 건져 내시기 해도,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여보셨는데,

하나님의 그 능력은 거기까지 밖에 안 되시는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이집트의 역사랑

별반 내용이 다르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남유다의 삶이, 애굽 사람들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죠.

 

오늘날 교회를 바라 보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바라 보면서도 마찬가지죠.

 

'아,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건 전적인 은혜다.' 맨날 이 이야기만 해요.

'와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십니까?'

맨날 그 이야기만 해요. 그 뒤로 성화되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별반 다를 거 없고,

겨우 주일 날 예배드리는 것이 다 이고,

예수 믿은 게, 겨우 이것 밖에 안 되는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와 하나님은 교회에 사람을 앉혀 놓을 수는 있어도,

그 앉아 있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실 수는 없는가?'

 

'믿은지 10년, 20년이 지나도, 하나님은 그렇게 밖에 하실 수 없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

본문 남유다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죠.

 

사실 오늘 이 본문 말씀까지 오면서

계속해서 예레미야의 이 선포를 통하여서

'아,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게 하지 못 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그러나 순간 순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 하십니다.

 

23:3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 자신을 주어로 사용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내 양떼에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지방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리니'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지 못하는 분도 아니요,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냥 멸망을 시키고 끝 내시는 분이 아니라

여전히 주어로 나타나면서

'내가 내 양떼에 남은 것', 그러니까 남은 자들이 있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한 번 택한 백성은 놓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몰려 갔던 지방(바벨론)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것은, 우리가 처음 구원 받았던 그 자리인

이집트로 몰아내시거나 거기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어떤 (성숙한)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또한 뭐라고 얘기하시는 가 하면,

'그곳에서 모아서 다시 우리 pen 로 돌아오게 한다'라고 하십니다.  :3

 

이 과정, 그러니까 어떤 곳으로 쫓아내렸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데,

사실은 칠십 년이 걸렸죠.

 

먼저는 그들의 그 악한 습관, 어려서부터 고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게 못하는 그 악한 습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 습관을 가지고서 어떻게 합니까?

 

그 기간 동안 결국은 그것을 고치게 하시고,

먼저는 무너뜨리시고, 깨뜨리시고, 그들에게 징벌, 징계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러나 그냥 무너뜨리는 것이 끝이 아니고,

결국은 고치신다는 거예요.

 

그의 마음을 고치시고,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이집트가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장소로 데리고 가셔서

그들을 때리시고, 그들을 정신을 차리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고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난 이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나는 구원해 낸 너희를 고치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녹록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바라 보십시오.

처음 구원 받기 전에 우리의 상태도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 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게 안 느껴져요.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북쪽 저 멀리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셔서

거기서 뭔가를 하고 계시는... 그런 다룸을 받는 인생이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냥 이집트로 다시 보내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나를 구원 하실 때의 그 역사 보다 더 어쩌면 더 열심히

나를 고치고, 바꾸시고, 새롭게 하시려고 일하고 계시며

 

▲우리를 애굽 아니라 바벨론 으로 데리고 가신다.. 라고 얘기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의 날에 유다를 구원할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아요.  (*회복을 의미)

 

근데 여기까지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여기까지만 읽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써요. :6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자,

그리고 하나님이 일 하셔서 여수룬으로 만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할 것이라고 얘기합니까?

'평안히 살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6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평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그냥 아무 뜻 없이 그냥

'이 사람에게 고통이 있는데 평안하게 하겠다'라는 뜻이 아니라

 

'평안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날에 하신다' 라는 말입니다.  *주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셨을 때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 하셨고

그 분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또 뭘 하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하나님의 선택에 합당한 사람으로 평안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지금도 만들어 가신다.. 라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한 성화

 

즉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 자신(옛 자아)으로 부터도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요.

우리의 악한 습관으로 부터도 우리를 건지는 분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로 부터도 건지 실 뿐만 아니라,  *칭의

그 죄의 영향력 으로 부터도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성화 

우리를 변화시키는 분이시다.. 라는 뜻이죠.

 

▲그 결과 이렇게 됩니다.

23:7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으로 맹세를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들의 입 속에서 계속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그리고 그들이 증거 했던 하나님은

'그저 나를 이집트에서 속량해주신 하나님' 이 정도로만 계속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를 건지셨는데,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우리를, 여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북쪽 땅 바벨론으로 데리고 가셨고,

거기에서 칠십년 기간 동안 우리를 고치시고, 때리고, 바꾸시고 하셔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이제 어떤 하나님을 맹세한다고 얘기합니까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이다'

라고 것을 맹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죠. :8

 

우리 신앙 생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

건짐받았지만 여전히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악한 습관과

여전히 나를 추구하는 이 강력한 옛 자아, *바벨론에서 건지신 하나님

이 옛 자아에서 벗어나는 싸움을 계속해 나가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필요하면 바벨론에 보내셔서라도, 그 싸움을 이기게 하신다는 거죠.

 

죄와의 싸움은 예수께서 하셨어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죄는, 사단은 이미 박살이 났어요.

근데 이제 무슨 싸움이 남아 있는 것입니까?

 

그 죄와의 관계를 끊어 낸 우리가 *칭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그 승리에 합당하도록

나 자신, 옛 자아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드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

 

그런데 우리가 그 싸움을 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버린 채, 나 자신을 추구하면서,

또 다시 그 옛 죄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때려서라도, 매질을 해서라도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합니다.

 

주의 지팡이가 양들의 머리를 때려서, 잘못된 길을 가면

양들의 머리를 때려서 정신을 바짝 들게 하고,

주의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해서,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갑자기 몸의 고통이 찾아오는 바벨론 으로 끌려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관계적 문제로,

어떤 사람은 정신의 문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우리 각자의 바벨론으로 하나님께서는 데리고 가셔서

막대기로 우리를 치셔서,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때리고 난 이 후에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세워진 그 왕은

그의 날들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이심과 동시에

 

죄의 능력으로 부터, 죄의 권세로부터,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보내주신 그리스도 이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객관적인(일반적인) 죄로 부터 용서를 주셨다면 *칭의

이제 그 분이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끊임없이 죄의 영향력으로 부터도 우리를 건지고 계십니다. *성화

즉 그 분은 바벨론에서 우리를 데리고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를 바라보면서, 혹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혹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어떤 탄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큰 은 혜를 받았다고 자기 입으로도 고백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도 얘기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 밖에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그 절망...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결국은 내 양떼의 남은 것을 몰아 내셨다고,

그리고 몰려갔던 곳에서 돌아오게 하셔서,

8절에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벨론에 영원히 두시는 것도 아니요,

그들을 고치고 바꾸셔서

자기 땅에, 하나님의 땅에 살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우리로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만약에, 어떤 청소년이 제 앞에서 잘못된 일을 반복해서 한다고 한다면,

그냥 내버려 둘 수 밖에 없고, 내버려 둘 거예요. 왜요?

내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제 자녀가, 계속해서 죄를 반복 한다면

저는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나쁜 습관을 반드시 고칠 거예요.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 하도록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면서 우리 각자를 만들어가실 거예요.

 

그러지만 또 하나 기억하셔야 될 것은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고,

 

그들을 때리는 것만이 아니라, 고치시고, 바꾸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모습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성화시키셔서

결국은 그들에게 가나안에 돌아와 평안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론은 칭의와 성화, 동전의 양면처럼 둘 다 고려해야 됩니다.

보통 칭의 한 쪽만 고려하는데, 그것은 지폐의 한 면은 온전하나, 뒷면이 백지인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칭의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성화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으면, 자기가 받은 칭의를 의심해 봐야 합니다.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사람은, 억지로, 율법적으로 성화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속에 거하신 성령님이, 그를 성화의 삶으로 지속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2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목자에게(르임)'

다른 곳에서도 이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유다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원문상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왕을 포함하여 그의 주변에서 불의와패역의 길로 인도하는 조언이나 정책을 제시했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한편 히브리어 본문에는 '화 있으리라'는 말이 문두에 놓여 있는데,

이 말은 왕을 비롯한 지도층의 죄악에 대한 단순한 단죄와 비난의 정도를 넘어서는

심판 선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유다의 마지막 네왕의 죄악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절의 목자들에는 이스라엘 양무리를 흩어지게하는 일차적 책임이 있는 이들

왕들이 우선적으로 포함될 것이다.

 

23: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우리는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우두머리들이 범죄했을 때

그 악한 영향력이 백성들에게 미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귀족들의 범죄와 우상 숭배로 인하여

민족 전체가 파국을 맞게 되었으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파카드'인데, 본 어구에서 번역된 바와 같이 '돌보아주다',

'보살피다'란 뜻이 제 일차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말이 언어 유희에 의해 본절 후반부에서 다시 한번 쓰이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보응하리라'고 번역하였다.

두 번째 의미는 '책임을 묻다', '처벌하다'란 뜻이다.

(돌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뜻)

원래 목자의 임무는 양떼를 지키고 돌보는 것인데, 이들 이스라엘 자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히려 흩어지게 하고 몰아내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23:3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번성할 것이며'

여기서는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으는 장면이 등장한다.

1절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양떼를 모으는 일을 하는 자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천명하신다.

 

그 백성은 그릇된 목자들의 길을 좇음으로써 언약을 거부하였고

범민족적으로 반역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지만,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귀환의 은혜에 참여케 되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포로기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이 구절은 포로기의 신명기 사상을 가진 저자의 작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추방과 포로라고 하는 말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무턱대고 이 단락이

포로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포로 이후의 결실과 번영에 대한 내용은 포로기에도 있었지만

(겔 36장, 슥 8:9-13) 포로기 이전에도 흔히 등장한다(호 2:21-23, 암 9:11 등).

 

또한 이곳에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24장, 40-44장).

이 주제 역시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사 1:9, 37:4, 미4:7, 7:18).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본 단락이 포로기 이후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무모성을 보여준다.

 

23: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잃어버리다'(파카드)는말은 2절에서 언급되었던 히브리어 동사

'파카드'(돌아보다)에 대한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는 말로서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양떼는 보살핌을 받고 일일이 계수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축이 나지 아니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회복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포로 이전과 동일한 상황으로 되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나 이는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여호와로부터 임명받은 목자들이 그들을 충실하게 돌보아줄 것이고

또 그 땅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다 제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이후의 상황을 겨냥하지만

나아가 메시야 시대를 아울러 함축하고 있다.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이 구절은 다윗 혈통의 이상적인 왕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을 실현하게 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직접적인 언급으로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메시야에 관한 기사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의로운 가지'라고 하는 말은 훗날에 가서는 대망의 앙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정확한 어구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은 사 11:1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리고 '의로운 가지'(체마흐 차디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음가는

현재 왕위에 있는 시드기야란 이름과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시드기야 통치 초기에 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있다.

그리고 '때가 이르리니'란 말은 엄숙한 선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쓰였다.

 

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메시야 사상과 관련하여 구약과 후대 랍비 문헌에는 두 가지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가르침과

메시야 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5절에서는 메시야 개인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졌고

본절에서는 메시야 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사 11:1-5, 6-16 참조).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가 온갖 제한과 속박에서 해방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외부의 대적들이나 내적인 긴장이 그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 이스라엘 모든 가족들도 이상적인 왕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함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남북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이 앞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 주제는

렘30, 31장에서 더욱 자세히 언급된다.

 

한편, 본절 하반절에 언급된 이상적인 왕이 유다 역사에 등장한 일이 없기 때문에,

즉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로마인들의 예루살렘 파괴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기다리던 그런 메시야가 나타난 바 없으므로, 이는 주 예수께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는 메시야이며, 정의의 심판을 행하는 의로운 왕이시다.

 

23:7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본절과 그 다음절인 8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16:14, 15과 동일하다.

메시야와 그의 시대에 이루어질 일들을 묘사하는 문맥을 고려하건대,

본문의 내용은 단지 포로 귀환에만 국한시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23: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 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여태까지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왔으나

이제는 새로운 출애굽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여호와의 백성은 이상적인 왕이 통치를 시작하게 되면,

포로된 상태로 그냥 그대로 머물러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북쪽 땅에서, 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사 내어 쫓았던

그 모든 땅에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신약 시대에만 백성이 죄의 올무로부터 벗어나 교회에 편입될 사실을 예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고국으로 남은 자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장면은 사 11장과 겔 34, 37장 등에서도 나타난다.

 

23:9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

 

본절 이하에서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하며 경고하고 있다.

백성들은 미혹시키는 이 악한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선지자들도 경계한 바 있지만

(사28:7-13, 겔13:1-16, 미3:5-12)
특히 예레미야가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던 대상이다(2:8, 5:30,31 , 6:13,14, 8:10, 11,

14:13-15, 18:18-23, 26:8, 11, 27:1-16).

 

한편,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 간의 대치는 시드기야 시대에 가장 극심하였던 바,

이는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내 중심이 상하며'

유다는 완전히 타락해 있었고 여호와의 말씀은 조롱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으므로,

이런 사실이 그를 몹시도 괴롭혔음을 시사한다.

이는 그가 단순한 사색 차원이 아니라 극도의 혼란 속에서 어지러이 동요되고 있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나타낸다.

 

23:10 이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다고 하는 것은 그곳이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찼음을 말한다(5:7, 8).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 숭배는 풍요의 결실을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저주로 인하여 땅은 풍성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슬퍼하며 불모지가 되어 버렸다.

 

이 땅에 좋은 결실을 허락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뿐이신 것이다(호2:5-8, 암4:4-9 참조).

 

23: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내 집'은 성전을 가리키는데, 제사장들은 그곳에서 이방 종교 의식과 부도덕한 관행들을

시행하여 오염시켜 놓았던 것이다(왕하 21:3-7, 23:4-7).

B.C.622년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성전과 그 경내에서 이교의 종교 의식들을

뿌리 뽑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609년 그가 전사하자 이러한 관행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시대에 다시 시행되었던 것이다.

 

겔 8장에는 그 당시 성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점이 잘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중심을 상하게 하고 그의 온 육체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23:12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어냄을 당하여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미끄러운 곳'이란 미끄럼길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은 파멸 상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종종 쓰인다(시 35:6, 73:18).

즉 앞에서 언급된 배도자들은 사악한 동기에 의해 스스로 이 길로 들어섰으며

이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23:13 내가 사마리아 선지자들 가운데 우매함을 보았나니 그들은 바알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고

 

'그들은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여기서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가 그들보다 더 악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우매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티플라'는 '범죄 행위', '위반되는 것'이란 뜻도 내포한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으며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

거짓 선지자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자들이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민족이 언약의 주이신 여호와께 전폭적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알고 있다.

 

23:14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범죄 행위가 지적되고 있다.

그들이 북왕국의 거짓 선지자들보다 더 악한 이유는, 그들이

1) 북왕국의 배도와 파멸의 과정을 목격했음에도 돌이킬 생각조차하지 않았으며

2)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도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또한

3) 그들의 타락상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될 정도로 노골적이며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행동과 삶으로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의 악한 일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격려하였다.

 

23: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선지자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쑥'(라아나)이란 '저주하다'는 뜻을 추측되는, 잘 사용되지 않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맛이 쓴 식물이다. 이 말과 함께 ‘독한 물’이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종종 이 두 낱말이 짝을 이루며 쓰인다(9:15).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임할 처벌의 고통이 쓰라리고 치명적이 될 것임을 나타낸다.

 

23: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들은 백성들에게 안전과 태평성대를 약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죄악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로 돌아설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더 적극적으로 죄악에 가담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멸망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것을 주된 본분으로 삼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생각, 즉 스스로 유도해 낸 생각을 예언이라고 주장하였다는 말이다.

 

23: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들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였지,

악과 범법 행위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는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무슨짓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뒷바라지 해주고 지켜 주실것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공의와 거룩함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계셨으므로

비록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언약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을 경시하고

거역하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수 없었다.

 

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이 구절은 누구도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한 자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여호와의 회의를 알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는

욥 15:8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수사 의문문이 아니며 예레미야 자신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평화를 외치는 자의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

그리고 '여호와의 회의'(베모드 야훼)란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참된 종들과 깊은 교제를

통해 진리를 계시해주시는 것과 연관지어 이해되어야 하겠다(암 3:7).

 

23:19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회리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악취를 풍기는 사막의 열풍을 말하는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권능과 심판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종종 등장한다(시 58:9).

 

한편 본절과 다음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30:23, 24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후대에 삽입된 내용이라고 주장하나,

문맥상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선지자가 같은 내용을 다른 상황에 적용하여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섣부르게 삽입론을 펴서는 안 될 것이다.

 

23:20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잠시 예레미야가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큰 박해를 받았으며

또한 그의 메시지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상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같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또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내버린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은 범죄에 따른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말일에(베아하리트 하야밈)란 말은 직역하면 '종말의 때에'란 뜻으로서

메시야 시대에 관한 서술로도 쓰이나 여기서는 단순히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23: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인 일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어낸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빌미로 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던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는 반면에

자신의 권위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아전인수격으로 적용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23: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참된 선지자의 표적들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세움받은 백성은

그에 합당하게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의 주된 사역은 그들이 죄악에 빠져있을 때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들을 하여금 죄악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23: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지 않느냐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우리들의 모든 행위를 다 보고 계시다.

하나님은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재해 계시고 우리들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계시며, 새들을 먹이시고 식물에게 옷을 입히신다.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숨길 수 없다)

본절의 질문은 앞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는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서

그 대답은 부정문을 유도하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갔던 일이 있으나,

하나님은 지역 신이 아니신 고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이 비록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며 그들의 모든 행위는 전부 하나님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3: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나님의 계시는 종종 꿈이나 환상을 통해 전달되었다.

(창 37,41장, 민 12:6, 삼상28:6, 단 2:7, 욜 2:28, 슥 1:7-6:8)

 

하지만 본절의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받은 계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꿈꾼 사실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들의 편익을 취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일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비(似而非)나 이단은 많은 부분에서 참종교와 외형적인 면에서 유사한 면을 보이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하고 그 말씀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가감한다는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23: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거짓 선지자들은 나름대로 자기 예언의 근거와 기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조만간 그 거짓됨이 드러나고 만다는 말씀이다.

 

23:27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끼치는 해악(害惡)이 우상 숭배로 말미암은 것과 다름바 없는 것으로 거론된다.

한편 내 이름이란 단순한 칭호 이상의 의미, 곧 하나님의 인격과 본성을 함축하는 말이다.

 

23: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하나님의 진리와 거짓 선지자들의 꿈은 본질적으로 서로 달라서

엄격히 분리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하나님의 참된 메신저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주는 영의 양식이 되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말들은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며 도리어 해악만 끼칠 뿐이었다.

 

한편, 성경에 언급되는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들로는 시드기야(왕상 22:11, 12),

하나냐(28:1-17), 스마야(29:30-32), 바스훌(20:6), 노아댜(느 6:14), 이세벨(계 2:20) 등을 들 수 있겠다.

 

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본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된 불과 방망이는

공히 불법과 죄의 세력을 멸하는 파괴적인 힘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을 철저히 소각시키며(5:14참조),

인생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

그러므로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오직 철저한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23:30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23:31 여호와의 말씀이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23:3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세 절은 원문상 공히 '내가 에 대항하여 본다'(힌네 알)는 말로 시작되며,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상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한 죄이다(30절).

 

그들은 참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마치 자신을 통해 계시된 것처럼 착복,

도용했을 뿐만 아니라 인기에 편승하는 말을 교묘히 섞어 진리를 왜곡시켰다.

 

둘째는, 혀를 함부로 놀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죄이다(31절).

그들은 그들의 거짓 예언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거짓된 생각을 늘어놓았다.

 

셋째로는, 백성들을 미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한 죄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인기에만 편승하여

죄를 정확히 지적하거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결국 영적,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23:33 이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네게 물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인가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묻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요'

'엄중한 말씀'에 해당하는 '마사'는 '(짐을) 들어 올리다'는 뜻인 '나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말씀'(oracle, NIV) 혹은 '짐'(burden, KJV, RSV) 으로 번역된다.

거짓 선지자들의 꾐에 빠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배도의 길로 걸어감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마치 무거운 짐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RSV는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대답인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를

'너희가 짐이니라'(You are burden)고 옮겼다(LXX, Vulgate).

그리고 본절의 '마사'는 이렇듯 패역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무서운 심판의 신탁을 베푸신 것으로도 이해된다.

 

이런 측면을 중시한 고대 역본으로는 탈굼역(Targum)과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을 들 수 있다.

결국 본절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경멸조로 비웃는 말이라 하겠다.

 

23:34 또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선지자에게나 제사장에게나 백성에게는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안을 벌하리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벌하리라 하셨다'

본절 이하에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관해서는

명확한 규명이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정도의 뜻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1) 여호와의 심판 메시지에 대해 조롱조로 하는 말,

2)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짐스러운 존재이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메세지를 짐스럽다고 말하는 것,

3) 특히 거짓 선지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서(37절 참조),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의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 그들의 예언을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도용한 것 등이다.

 

23:35 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하고

23:36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 하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조롱조로 받지 말고, 겸허히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이라는 권면이 나타난다.

 

'망령되이 사용함'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파크'는 '변질시키다', '왜곡시키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 격으로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23:37 너는 또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허탄하고 망령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겸허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도리어 배척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즉 그것은 인생이 악한 정욕과 탐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완고해지기 때문이다.

 

23:38 너희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말씀을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니 너희는 말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였은즉

 

34절 주석을 참조하라.

 

23:39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버려

 

본절의 '잊어버리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솨'는 '잊어버리다', '제거하다'는 뜻이며

'엄중한 말씀'이라 번역된(38절) 히브리어 '마사'의 어근 '나사'와 그 음역이 유사하다는 측면

에서 언어 유희(word play)의 일면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한 대가로 그들은 징벌에 처해지고 마는 것이다.

 

23:40 너희는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파멸가 수치가 임할 수밖에 없음을 확정하는 구절이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에 통해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왕하 25:8-12).

한편, 수치(켈리마)는 치욕(헤르파)과 거의 같은 뜻이나 어감이 더 강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