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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하게 거침없이

LNCK 2024. 10. 30. 11:1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사도행전 강해 (93) / 사도행전 28:16~31 / 담대하게 거침없이 - YouTube

 

담대하게 거침없이            행28:16~31          2024.01.14.   

오늘은 드디어 사도행전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제가 교회 홈페이지를 찾아보니까, 2021.10.03.일에 사도행전 첫 설교를 했더라고요. 
오늘이 2024.01.14.인데, 보니까 2년 넘게 사도행전으로 주일설교를 했습니다. 
횟수로는 93회에 걸쳐 설교를 했습니다.   *절기 때 제외
그동안 묵묵히 따라와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행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 Unhappy Ending

오늘은 드디어 마지막 시간인데요. 오늘은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배경은 이제 로마 입니다.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로마에서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끝나면 좋겠습니까? 
마지막 장면이니까, 좀 멋지고 화려하게 끝나면 좋지 않겠습니까? 

보통 영화나 드라마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 장면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초중반까지 재미가 있어도, 마지막 장면이 엉뚱하게 끝나면 
그렇게 허탈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기억나는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요. 
너무나 전개나 내용이 재미있어서, 결말을 기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방영분이 어떻게 끝날까? 
결국 주인공이 복수를 하게 될까? 
마지막에는 통쾌하고 시원하게 복수를 하는 장면으로 끝날까? 
또 주인공의 사랑은 결국 어떻게 이어질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마지막 회를 기다리며 숨 죽여 봤습니다. 
어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이야기가 꿈이었다'는 엔딩으로 끝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느낀 허무감, 허탈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배신감까지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결말을 보려고 내가 재방송까지 챙겨서 봤나?' 
아 그때는 작가도 너무 밉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시청자를 우롱할 수 있나? 
지금까지 열심히 시청해 온 게, 이 모든 게 꿈이었다니... 
이렇게 결론을 퉁치고 마쳐야 하는가?' 
지금도 그걸 생각나면 이제 화가 나는데요. 
그때 '시청자 게시판'이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자 그처럼 드라마나 영화는, 이제 결론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또 감독이나 작가들이, 이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결론인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사도행전의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인데요. 

보통 영화의 감독이라면, 행28장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끝낼까요?
어떻게 해야 감동과 진한 여운을 남겨줄 수 있을까요? 
3가지 시나리오가 있을 것 같습니다. 

1)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마지막이 끝나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이 그동안 얼마나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까? 
또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까? 

그 위험을 뚫고서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서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하는 장면으로 끝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고 
또 독자들의 박수가 터져 나오겠습니까! 

더군다나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7:24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마지막 장면이, 바울이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으로 끝나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시나리오는, 행28장을 바울의 순교 장면으로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굉장히 감동적이고, 강한 여운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누가가 사도행전을 쓸 때는, 이미 사도바울이 순교한 뒤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지금, 바울이 순교한 사실을 다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바울의 순교를, 28장 마지막에 기록했으면 어땠을까요?
지금까지 복음을 위하여 누구보다 헌신한 노 사도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죽는 마지막 순교 장면으로, 28장을 마친다면 어땠을까요? 

사도행전을 읽는 성도들에게, 더 큰 은혜와, 더 큰 울림과 
도전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시나리오는, 행28장을 '로마의 부흥'으로 끝내는 시나리오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였죠. 로마 제국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세계의 수도이자, 온 세상의 교두보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로마가, 복음으로 부흥 되는 장면으로, 행28장이 끝나면 
또 얼마나 흥분되겠습니까? 

나중에 역사를 보면, 실제로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되지 않습니까. 
그 장면으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마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사도행전을 읽는 우리 독자들은 얼마나 통쾌하고, 또 도전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끝납니까?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끝납니다. 
위 세 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도 선택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뭔가 시원한 반전을 기대했는데, 
우리 기대와는 다르게, 밋밋하고 초라하게
사도행전의 마지막 회가 끝나고 있습니다. 

28:16절을 한 번 보십시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을 지키는 한 군인과 따로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나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구금되었다는 뜻입니다. 가택연금 형식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바울이 셋집을 구하고, 그 집에서
바울은 이 집에서 로마 군인 한 명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외출도 자유롭지 못 했겠죠. 

또 바울의 손에는, 자신을 감시하는 군인의 손목과 연결된 
쇠사슬이 묶여져 있었을 것입니다. 
엡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보십시오.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의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여전히 바울이 셋집에 머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누가는 바울이 구금된 곳을, 셋집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셋집은, 바울 자신이 월세처럼, 세를 내고 거하는 집이라는 뜻이겠죠. 
이 당시 로마에도 임대 주택이 있었습니다. 
그 임대 주택에, 월세를 내고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월세를 내었을까요? 
어떻게 바울이 그 경비를 마련을 했을까요? 

아마 바울은 이제 다른 교회들로 부터 지원을 받았을 겁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도왔다는 증거가 빌4장에 나오는데요.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렇게 빌립보 교회로부터 받은 경비를 가지고, 바울은 셋집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바울은 구금된 상태로 끝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묶였던 바울은 풀려 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태 (2년) 라는 시간 동안, 바울은 셋집에 감금된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이제 사도행전의 결론 부분, 마지막 회잖아요. 
그러면 바울이 풀려나야 좀 시원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자유롭게 로마 시내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끝이 나야 
해피엔딩 아닙니까? 

그래야 우리가 편하게 이 책을 덮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사도행전의 끝까지 풀려나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결말과 같습니다. 
무력한 바울, 무능력한 바울, 답답한 결말! 
그게 사도행전 마지막 회의 모습입니다.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로마, 그런데 기대만큼 결과가 없어 보입니다

바울은 셋집에 감금되었으니까, 진짜 감옥보다는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집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자기 셋집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선교 패턴 기억하시나요? 
바울은 어디를 가나, 가장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았습니다. 

유대인 회당을 거점으로 이제 복음을 전했었죠. 이 패턴이 로마에서도 반복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자기 셋집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자 바울이 전했던 메시지가 23절에 나오는데요. 

28: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자 바울이 전했던 이제 두 가지 핵심 메시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에 대하여 권했다' 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 
이게 바울이 로마에서 전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는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그 나라를 가지고 오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지 않습니까. 
왕이 오셨기 때문에, 그 나라도 함께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가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그분의 나라가, 그분의 통치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자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자 그런데 여러분,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토록 바울이 가고 싶었던 로마이지 않습니까? 

바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가기 원하셨던 곳이 로마 아닙니까. 
그런데 그 로마에서 바울의 첫 사역, 어떻게 되었습니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 했습니다.

28: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은 소수 였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유대인들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었습니다. 
나머지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큰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거죠. 

그렇게 고생해서 들어간 그 로마에서, 그렇게 가기를 원했던 로마에서! 
그렇게 하나님이 가라고 보내던 그 로마에서!

여러분 이게,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누가는 하필, 사도행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신,
그 마지막 단락에, 이런 성공하지 못한 스토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기대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마지막 회 이야기가 좀 실망스럽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은, 구금됐던 바울이 풀려난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역 이야기도 해피 엔딩이 아닙니다.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결말이 어떠십니까? 좀 맥이 빠지지 않습니까? 
이 장면을 기록한 누가에게, 독자들이 좀 서운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의 책임은 아니죠.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가 쓴 책이니까요. 
성령님께 좀 서운하지 않습니까? 
왜 사도행전의 결말을 이렇게 끝내시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결말을 '미완성 곡'이라고 부릅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같이 사도행전은 미완성의 결말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행전은 미완성 (교향곡)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독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완성된 결론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제가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이야기가 아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이야기다!'

여러분 이거는 꼭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교회를 다스리는 그분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승천하신 주님이 지금도 
사도들을 통해서 이 땅에서 교회를 다스리셨던 것 같이 
그분의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이야기가.. 사도행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관심은 '사도들이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탁월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웅담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자 그걸 우리는 사도행전 안에서 늘 조심해야 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에게는 많은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에게는 어떤 연약함이 있었습니까? 

바울은 바나바와 대판 싸웠습니다. 마가를 선교지에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그 사소한 문제로 대판 싸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 따로 선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선으로 바꾸어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이 갈라서는 바람에, 한 개였던 선교팀을 주님이 두 개로 개편을 시켰습니다. 
덕분에 이방인 선교도 두 배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연약함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어서 
선교를 더 빠르게 확장을 시켰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또 어떤 연약함이 있었습니까? 치명적인 연약함이 있었죠.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보자기에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들어 있었죠. 

부정한 짐승은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환상을 보고서도, 이방인에게 가기를 꺼려 했습니다. 
아직도 베드로는, 유대주의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그 로드맵은 땅끝 아닙니까?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그러나 베드로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유대주의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방인 선교에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설득하시고 보내셔서 
이방인 고넬료 라는 사람을 구원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관심은, 사도들의 어떠함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능력과 탁월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들이 언약했고, 오늘날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천하신 주님이 그들을 통하여 여전히 일하고 계셨고, 
그 주님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설교의 주제

그 이야기의 흐름대로 오늘 결말이 끝납니다. 
그 이야기의 중심 흐름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 마지막 회(사도행전의 결말)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시나리오가 되었다.. 라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그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라도 그대로 되었다면, 
모든 초점이 예수님이 아니라, 바울로 끝났을 것입니다. 

1) 첫 번째 시나리오 대로,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서 
멋있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으로 끝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바울에게 큰 박수를 보냈을 겁니다. 
'와~ 바울은 멋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도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전한다. 
바울처럼 우리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자!' 이렇게 바울의 이야기로 끝났을 겁니다. 

2) 두 번째 시나리오대로 끝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는 장면으로 끝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바울을 동경했을 겁니다. 
바울을 더 우상시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의 순교 장면이, 성경 어느 곳에도 기록 되지 않습니다. 

3) 세 번째 시나리오 대로, '로마에 들어간 바울로 인하여 로마가 부흥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사도행전이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시나 바울을 높였을 겁니다

'역시 바울은 다르다.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로마, 저 거대한 제국의 수도마저도 
바울은 변화를 시키는구나.. 역시 바울은 능력이 있다. 바울은 탁월하다.' 하고 
바울을 흠모했을 것입니다. 

자 그럴수록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의 이야기로 사도행전은 끝났을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사도행전의 마지막 이야기는, 정말 엉뚱하게 끝나는 것입니다. 
자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사도행전의 결말은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탁월함과 능력을 보아라. 바울은 우리와 다르다'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능력을 사모하라' 그렇게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존재이다'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바울을 사용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사도행전을 끝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결말을 다시 보십시오.
오늘 바울은 감금된 상태로 로마에 있습니다. 

바울은 무력하고 무능하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자유롭게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가택연금으로 묶여 있는 사람이, 뭘 더 얼마나 사역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열매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묶여 있는 상태 때문에, 복음은 방해 받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묶여 있는 동안에 썼던 편지가 있습니다. 

그 편지를 우리는 '옥중서신' 이라고 부릅니다. Captivity Epistles
감옥에서 쓴 편지라는 뜻이죠. 

이때 감옥에서 바울이 쓴 편지가, 신약성경 안에 총 4권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바울이 가택연금으로 묶여 있는 동안, 주님은 바울을 통하여 편지를 쓰게 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통하여, 주님은 교회들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자 그게 묶여 있던 바울을 통하여, 주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비록 바울은 묶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묶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딤후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자 그렇다면 이것은, 누가 일했다는 증거 입니까? 
사슬에 묶여 있는 바울입니까? 아니죠. 
바울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갇혀 있지만, 바울을 로마로 보내던 주님은 
여전히 묶이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은, 그 분에 의하여 여전히 전파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바울은 묶여있지만, 살아계신 주님은 묶일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이 땅에서 다스리던 것 같이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걸, 묶여 있는 바울을 통해, 오히려 생생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복음은 방해 받지 않는다! 
교회는 망하지 않는다. 무엇도 그 분의 통치를 막을 수 없다!'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의 결말 입니다. 

그러니까 포커스가 바울이 아니라, 
끝까지 '승천하여 다스리시는 주님'께 맞춰져 있는 거죠

▲뿐만 아니라 이때 바울이 셋집에서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네시모 인데요. 그는 빌레몬의 종이었죠. 

그때 오네시모는 빌레몬으로부터 잘못을 하고 도망친 종이었습니다.
그 종을 바울이 셋집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들은 오네시모는 예수를 믿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쓴 서신이
빌레몬서 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울이 셋집에 갇혀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만남은 누가 계획한 만남입니까? 
묶여 있는 바울은 당연히 아니겠죠. 
묶여 있는 바울이 아니라, 매이지 않으신 주님이 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셋집에 감금 되었을 때 쓴 서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위 구절에서 보듯이, '나의 매임'이라고 말합니다. 

매어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제 자유롭게 다녔다면, 
이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자 그런데 감옥에 묶임으로, 그 감옥을 지키고 있는 시위대 에게 
복음이 들려지고, 구원받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바울을 지키던 한 군인이, 교대로 배치되었나 봅니다)  28:16

빌4: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여러분 너무나도 놀라운 고백인 거죠. 
바울이 '가이사의 집 몇 사람에게도 안부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집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감옥에서 전도해서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감옥(셋집) 안의 바울이, 시위대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다'고 말했죠. 빌1:13 
이때 가이사의 집, 로마 황제의 집까지 
그들을 통하여 거쳐 거쳐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시위대 중에, 가이사의 집안 식구들이 있었다는 거죠.
당시에 출세하려면, 이런 코스를 거쳐갔을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바울은 묶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매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걸 누가 주도하고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지금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자 그 이야기의 절정이, 사도행전의 결말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되, 결과는 주님께 맡긴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본문의 바울의 사역의 장면을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크게 성공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중에 믿는 사람들은 소수 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 교회로 치면, 거듭 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던 거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겁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입니까? 

바울은 뛰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바울은 우리보다. 탁월하게 않았다는 겁니다. 
바울은 여느 목사님들처럼, 혹은 저 같은 목사와 같이,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 바울의 모습에서는, 낙심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바울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쓰셔서 하시는 
그 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본문 26~27절의 내용입니다. 
28:26~27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사6:9~10절을 인용했습니다.
왜 이 말씀을 바울이 인용했을까요?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으나, 이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구약 이사야서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복음을 잘 전한다 해서,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잘하거나/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구원 받게 하고/ 누군가는 구원 받지 못하게 하는 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 나는 능력이 없나 보다. 그만 해야겠다. 
로마로 오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후에 이방인 에게 가서 곧장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방인 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구원하실 이방인이 있기 때문에 
나는 로마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그래서 본문 사도행전의 결말은 이렇게 끝납니다.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여기 바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 로마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이었을 겁니다.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여기 보면 자 두 가지 부사가 나옵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오늘 설교 제목이죠.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이 부사가 사실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동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부사로 끝납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아마 그리고 그 뒤에 수많은 느낌표(!)가 붙어 있었을 것입니다. 

'담대하게'     주1)  

 

'거침 없이'
제한 받지 않는다, 방해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묶여 있는 상태이죠. 
그러나 복음은 제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는 묶여 있지만 복음은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딤후2:9

이 복음은 주님이 주도 하시기 때문에 

이 복음은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전파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성령을 보내셔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바울의 묶임과 상관없이, 주님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연약함 속에 매여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자가 아니었죠. 
그러나 그의 연약함 때문에, 그의 사역은 제한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잘못 한다 하여, 그것 때문에 사역이 제한 받거나 
하나님의 일이 방해 받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왜냐면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거나/ 구원 받지 못할 지는 
바울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의 예정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낙심하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어떻게 끝나고 있습니까? 
'담대하게, 거침없이' 이 두 개의 부사로 끝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추적한 그랜트 오스번은, 
이 두 개의 부사를 가리켜서 '승리의 외침'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바울은 묶여져 있습니다. 
무력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고, 무능력해 보입니다. 

로마에서 시작한 선교 사역은 큰 열매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마지막 회는, 역설적으로 승리의 외침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일종의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거침 없이' 바울은 복음을 전했다는 
승리의 부사 adverb 로 끝나고 있습니다. 

왜하면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런 바울을 통해 여전히 로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바울은 묶여 있지만, 우리는 묶여 있을 수 있지만, 
연약하고, 실패할 수도 하지만 
승천하신 주님이 여전히 살아 계셔서, 지금도 하늘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통치는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라는 그 승리를 외치면서 
누가는 사도행전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행전의 결말은 
미완성 교향곡이 아니라, 완성된 교향곡과 같습니다. 

우리의 지휘자 되시는 주님이, 
여전히 오합지졸인 우리를, 또 교회를 지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사도행전을 통해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 
'승천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교회를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못남과 실패와, 
한탄과, 후회와, 자책과, 눈물과, 매임이 결코 방해 받지 않는다. 

 

결코 제한 받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망치지 못한다. 
너희들 때문에 복음이 방해 받지 않는다. 교회가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들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더 드러날 뿐이다'

'그 영광의 부르심에 서 있는 자들이, 너희들이다. 
그러니 거침없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라. 
너희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의 자리를 지켜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위하여 살아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낙심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를 끝까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자 그래서 끝까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왜 소망이고, 왜 희망이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묶여 있는 자와 같이, 연약하고, 한계가 많고, 
무능한 자들 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목사로서, 두려움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설교를 잘 못해서, 우리 교회 가운데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닌가?'
제가 가장 두려운 목회가 그거거든요. 
'우리 교회 안에 핵심이 일어나지 않는 목회!' 
정말 제가 그걸 두려워하거든요.

'또 나의 부족함 때문에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서,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건 아닌가?' 
그런 두려움이 저에게는 매 순간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건강 검진을 일부 했는데요. 
그때 우울증 검사도 하더라고요. 

그때 몇 가지 질문 가운데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나 때문에 내 가족이 힘들게 살고, 
나 자신 때문에 내가 다니는 직장이나, 내가 하는 일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이제 서너 가지 찍는 답이 있는데요. 
1) 매일 그렇게 생각한다. 
2) 일주일에 서너 번 그렇게 생각한다. 
3) 일주일에 한두 번 생각한다. 
4)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순간 고민했습니다. '사실대로 써야 하나?' 
제가 나중에 알았는데요. 사람들이 솔직히 답을 안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회사에 제출해야 하는데, '우울증'이라고 결과가 나오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위를 조절해서 답을 단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사실 우리는 다 연약함을 느낍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였다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니라 바울 이었다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었거나, 
바울로 인하여 주님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묶여 있었고, 오히려 바울은 사역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꼭 있어야 되었던 일이 아니고, 
또 반대로 바울이 없으면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행전이 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안에서만 시작이 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마지막 회를 마치고 있습니다. 

자 그러니 바울이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통하여도 
얼마든지 되었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통하여 전파 되었을 복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어떠함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면, 
우리를 통해 시작하신 그 일을, 하나님이 마치시기 때문입니다. 
그 승리가 확보된 자리로, 우리는 이미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로서 너무나 부족하지만,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담대하게 거침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반드시 당신의 때에 구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연약하고, 문제가 있고, 죄가 많은 도구라고 할지라도 
그걸 알고 날마다 저의 부족함을 고백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물론 넘어지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저를 자라게 하시고, 변화시킬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죠. 
여러분의 연약함과 매임이, 여러분의 삶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오롯이 매인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바울이 감옥에서 (사슬에) 매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은 주님께 매여,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듯이 
여러분들도 주님께 매인 인생입니다. 

우리를 위하시는 그 분의 통치를,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승리가 확보된 자리로 부름을 받은 자들, 
그것이 교회이고, 예수께 묶인 성도의 놀라운 실존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승리의 외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이 승리의 외침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확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믿음으로 우리 또 한 주간을 살아냅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위하여 살아갑시다. 그 분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그 부르심의 자리를 믿음으로 걸어 갑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그 주님의 일하심과 그 주님의 승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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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담대하게'

여기서 살펴볼 키워드는 '담대하게, 거침없이' 입니다. 행28:31

with all openness, unhindered / NASB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굉장히 인상적인 말씀이죠.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이런 '담대함과 거침 없음'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심하게 되고, 선포를 주저할 때가 있죠.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이 있고,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경이 있고,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에게 교회가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가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있고, 하나님의 메세지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우리가 '담대함'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는 거죠.

 

에베소서 6:18~20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자신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데

기도 제목이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용기를 가지고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엡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어째서 바울 우리가 아는 가장 용감한 복음전파자인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내가 담대하게 용기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 요청을 했을까요?

 

본문 행28:31절에는 '담대하게 거침이 없었더라'고 했는데,

(그 로마에서 썼다고 여겨지는) 에베소서에는 '내게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해 줘요'

하고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당연한 거죠. 대부분의 시기에 바울은 복음선포에 담대했지만,

그래도 '담대함'이 또 필요했던 것입니다. 담대함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에베소 교인들이 기도해준 결과, 바울은 담대하고 거침없을 수 있었던 거죠.

 

예수님을 증거하는 담대함은, 우리가 타고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훈련이나 지식, 경험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시 복음선포에 있어서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포하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나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께서 압박을 받고 있다면,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본문에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1

with all openness, unhindered / NASB

복음을 전하되,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놓고, 공개적으로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장벽 없이!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바울은 감옥에 있었고, 한 군인의 감시를 받았고

어떻게 감옥(가택연금)에 갇힌 사람이, 장벽 없이 자유롭게 사역할 수 있단 말입니까?

거침없이 어떻게 사역할 수 있었습니까?

 

저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봤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삶을 관찰하고, 현실을 관찰하고, 사역을 관찰 했고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장벽만 쳐다보는데,

바울은 '막힌 곳에도 하나님은 길을 만드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고, 거침이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입니까?

장벽 속에 열린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갇힌 상황이니까, 그는 서신서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의 서신서 옥중서신은, 그가 자유롭게 선교할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정관 목사 사도행전 강해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