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16) / 로마서 5:1~2 / 이신칭의의 결과 - YouTube
◈이신칭의의 결과 로마서 5:1~2 2024.06.02.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장은 하나의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앞 단락의 결과를 보여줄 때 사용하는 접속사입니다.
로마서 4장의 주제는 이신칭의 였습니다.
그리고 5장은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롬5장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신칭의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예 성경책에 소제목을 이렇게 달아놓은 성경책도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결과' 이것이 5장의 주제입니다.
이신칭의의 결과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로마서를 10년 넘게 설교 하셨습니다.
그분은 로마서 중에 제일 중요한 내용이 5장에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의 핵심이 5장이라고 했습니다.
5장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이신칭의의 결과'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
◑1. 이신칭의의 결과는, 첫 번째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이신칭의죠.
그 결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즉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신칭의의 결과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첫 번째로 말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결과를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고 말합니다. 또 병도 낫는다고 말합니다.
자녀도 잘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이나, 건강이나, 성공..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별로 와닿지 않으십니까?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 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이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복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누군가의 호의를 받으려면, 그 사람과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싸운 상태로는, 그의 호의 favor 를 받을 수 없습니다.
화해를 해야만 호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하나님과 먼저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복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첫 번째 결과입니다.
여기서 '화평'은, 히브리어로는 샬롬,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평=평강=평화는 다 같은 말입니다.
▲화평, 평강, 평화는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가 해소된 화해의 상태입니다.
좀 더 실감나게 말하면, 전쟁이 끝난 화해의 상태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전에 하나님과 어떤 관계 였습니까?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전쟁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였습니다.
롬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였습니다.
원수를 향하는 마음에는 증오와 적대감만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전쟁을 치르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서로가 못 죽여서 안달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증오와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에 믿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전쟁의 상태였습니다.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유발하는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밖에 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인 우리에게 주실 것은, 진노와 심판 밖에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1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던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변화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건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과 화평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여전히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밖에 받을 게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우리가 뭘 해도요... 하나님의 미움이 대상, 증오의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아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원수가 한 명 있습니다.
학교에서 제 아들을 막 때리고, 심하게 폭행하고, 왕따를 시키는
원수 같은 놈이 한 명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원수가 저희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같이 살면서 보니까, 그 원수가 밥을 잘 먹습니다. 편식도 안 하고 잘 먹습니다.
자, 그러면 그 원수 같은 아이가 예뻐 보이겠습니까? 미워 보이겠죠.
그 애가 밥을 잘 먹으면.. 미워 보일 것입니다.
'아, 저 놈은 남을 괴롭히면서, 밥이 술술 넘어가나 보네... 참 뻔뻔하다...
양심도 없는 놈이네...' 하면서 속으로 엄청 미워할 겁니다.
자, 그러면 반대로, 이 애가 만약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는 예뻐 보일까요. 아뇨, 더 미워 보이겠죠.
'아니, 차려준 정성이 있는데, 밥도 먹지를 않네... 정말 예의가 없고 버릇이 없네...
그러니 다른 애들을 괴롭히지... 천하에 나쁜 놈...' 하고 속으로 미워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원수 같은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면 어떨까요?
공부를 잘해도 미워할 겁니다.
'야, 남을 괴롭히는데, 공부 잘하면 뭐 하냐?
공부 잘한 거 가지고 장래에 나쁜 짓이나 할 텐데...' 그래서 공부를 잘해도 미워할 겁니다.
반대로 공부를 못하면 예뻐 보일까요? 아니죠. 그래도 미울 겁니다.
'역시 나쁜 짓만 하더니, 공부도 못 하는 군!' 공부를 못 해도 미워할 겁니다.
공부를 잘 해도 밉고, 못 해도 믿습니다.
그러니까 그 애의 존재 자체가 그냥 밉습니다.
원수니까요. 화해를 안 했으니까요. 뭘 해도 밉습니다.
▲그러나 내 자녀는 뭘 해도 밉지가 않습니다.
뭘 해도 오히려 사랑스럽습니다.
저희 둘째가 요즘 부모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제가 누누히 얘기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러니까 누구를 깨물면 안 된다'
하고 자주 다그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저한테 짜증도 자주 냅니다.
그래서 제가 아빠이기 때문에, 아빠의 권위를 가지고 혼낼 때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아들이 저를 쳐다봅니다. 그리고서는 살짝 웃습니다.
자 그때 제가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저는 화를 내야 합니다. 단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얼굴 표정이 무장해제가 돼버립니다.
저도 같이 웃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아빠다. 나는 지금 훈계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 순간은 화를 내야 한다. 웃으면 안 된다...'
그런데 제 얼굴은 저도 모르게 이미 무장해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미운 짓을 해도, 너무 너무 이쁜 겁니다.
왜냐하면 제 아들 이니까요. 그냥 존재 자체가 너무 예쁜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신칭의의 첫 번째 결과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가 누리는 평화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변화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우리가 숨만 쉬어도, 뭘 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뭘 해도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걸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 엡2:3
하나님과 원수니까요. 화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가 숨만 쉬어도 예뻐하십니다.
여러분이 뭘 해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예뻐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구약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스바냐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즐거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이신칭의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자, 우리말 성경에는 '누리자'라는 권유형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누리자' 라는 권유형이 아니라
'누리고 있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평서형입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 진술.
여러분 이 말의 뉘앙스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 상태가 이미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휴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전 협정이 아닙니다.
전쟁이 다 끝났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화평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 이루어진 일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 관계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 그 사랑의 시선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도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자, 그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나를 사랑하실까?'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찝찝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이런 나를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마치 나를 진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8: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남아 있는 죄 때문에 넘어집니다. 실수도 합니다.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자 그러나 그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향해 쏟아 부어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이미 2천 년 전에 다 쏟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쏟아 부어야 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미 법 집행이, 심판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은
진노의 시선이 아니라, 사랑의 시선입니다. 이 시선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화평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완료입니다. 번복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이 시선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의 시선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제는 마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를 바라 보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바라보시는 것처럼
그 시선이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복음이 주는 놀라운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며 사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우리 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1
아니 '누리게 되었느니라'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첫 번째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2. 두 번째 이신칭의의 결과는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러분 2절이 바로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이 부분이, 사실 읽을 때마다 이해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저는 아리송했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찾아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고,
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훨씬 이해가 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누리는 두 번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감을 얻고, 그 은혜 안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이신칭의의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과의 화평 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케 된 자는 어떤 삶을 누립니다?
(두번째 결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감을 얻고, 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여기 '들어감' 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로 프로사고게, 즉 '왕의 보자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의미합니다. *access, apporach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세 구절 다 같은 단어
그냥 일반적으로 어디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왕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의미합니다.
즉, 왕이 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자 앞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도 놀라운 변화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무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약의 성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악은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지성소, 성소, 뜰(마당) 입니다.
뜰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입니다.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이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1년에 1번 대속죄일에만, 어린 양의 피를 잡아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높고 두꺼운 휘장이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두 가지의 장치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허리에 묶는 끈, 또 하나는 옷에 단 방울 입니다.
생사를 확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들어갔다가 자칫 죽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딸랑딸랑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허리에 묶인 끈을 당겨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지요.
이렇 듯 대제사장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누리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자,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들어가는 길이 완전히 열리게 되었습니다.
※롬5:2절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명확하게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들어감, 프로사고게'가 '왕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의미합니다. *access
그리고 5:2의 '서 있는 we stand' 도,
'왕의 보좌 앞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돌아가신 순간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바로 그 시간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 졌습니다.
마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이제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놀라운 특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러분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입니다. 일 년에 한 번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우리가 은혜가 필요하면, 언제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대통령도, 함부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을 만나려면, 그 밑에 비서실의 모든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전화를 한 번 연결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 분은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지금도 말씀 만으로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는 그 분께 언제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주일의 종교'가 아닙니다.
주일에만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일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매일의 종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운전대를 붙잡고 운전을 하다가도 '아버지'하고 부르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부르는 모든 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두 번째 결과입니다.
자유롭게, 담대하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이례적인 출입이 아닙니다. 항구적인 출입입니다.
언제든지 들어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제한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본문 2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안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은혜 안에 서 있는 자입니다.
은혜 안에 서 있다는 말은, 은혜의 통치 아래에 살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새번역
여러분 참 놀라운 선언 아닙니까? 여러분 감히 우리에게 은혜라니요?
은혜의 통치 아래의 산다니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진노 아래 살아가던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신칭의로, 믿음으로) 은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치의 영역이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진노의 영역에서 은혜의 영역 안으로
다스림을 받는 영역이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먹고, 은혜를 마시고, 은혜를 보고, 은혜를 만나고,
은혜를 만지고, 은혜를 공유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대적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던 우리가, 은혜의 통치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롬2: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자,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된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왕 노릇 합니까?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즉 은혜가 다스립니다.
롬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 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 아래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신칭의의 첫 번째의 결과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케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이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날마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는 구원의 은혜 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은혜입니다.
또 우리의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일상의 은혜 입니다.
그 은혜들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며 살게 되는 자들,
진노의 통치 아래가 아니라,
은혜의 통치 아래에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
그것이 이신칭의의 두 번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 감을 얻었으며, 그 은혜 안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3. 이어서 이신칭의 세 번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5:2b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참 놀라운 변화죠.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기 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랬는데요. 제가 다니던 대학교가 미션 스쿨이었습니다. *명지대
그때 제게 가장 힘들었던 수업이 채플이었습니다.
그래서 채플을 많이 빼먹어서, 하마터면 졸업도 못할 뻔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의무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한 시간 드리는 예배인데, 저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믿음이 없었으니까요.
예배가 너무 고통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불신자 학생들이 그랬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배가)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만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자리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면,
그들이 기뻐 하겠습니까, 즐거워 하겠습니까?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라고 하면... 즐거워 하겠습니까?
아니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힘겨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바깥에 나가서 노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된 자들에게는, 예배하는 자리가 기쁨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의 자리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달라진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믿기 전에는, 가장 힘겨운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학교 채플이었습니다.
그러나 믿게 된 이후에는, 정 반대가 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믿음이 딱 생기니까, 너무나 설교가 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은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
교회에 가는 그 길이 너무 설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분과 교제하는 시간이, 그분의 영광이,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떠한 세상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가 바라고 즐거워하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세 번째 결과입니다.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한다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장래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천국에서 온전히 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이러한 장래에 하나님을 뵈올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게 된 신자는, 죽어서 반드시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은혜 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이신칭의의 세 번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위 세 가지는 다 연결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결과에 공통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보자 앞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니다. 5:1
그렇기 때문에 이 '이신칭의의 결과들을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로 말미암아' 라면.. 이 결과들은 수시로 바뀔 것입니다.
내가 잘하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내가 잘못하면.. 화평을 누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 같은 게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선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신칭의의 3가지 결과는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취소되거나, 변경되거나,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용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vs '나로 말미암아'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확보되고 허락된 이 칭의의 결과를, 구원의 복을,
자꾸 '나로 말미암아'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일어난 칭의의 결과가,
자꾸 나로 말미암아 흔들립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믿음 없음입니다.
나의 상태, 나의 감정, 나의 기분, 나의 환경, 나의 처지 때문에
예수님이 이루어 주신 그 구원의 혜택, 이 칭의의 결과를 의심하고
자꾸 흔들리고 누리지 못합니다.
물론 여러분, 우리가 잘못하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제쳐두고
'나의 행함'을 가지고 흔들리면 안 됩니다.
자꾸 우리는 '나로 말미암아'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내가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는
그 채점표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를 해야'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잘한 짓을 가지고 나가려고 합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를 잘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안해 합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이 받아주실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실까?'
구원 받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로 말미암아' 가 아닙니다.
나의 어떠함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어졌다가, 다시 화평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가, 다시 막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어떠함 때문에 장래에 하나님을 뵐 소망이 생겼다가, 다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니다. 5:1
이 표현이 여러분 눈에 딱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가 여러분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기 때문에, 여러분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리고 장래에 천국에서 뵙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도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확보된 일입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취소되거나, 식어지거나,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얻게 된 이신칭의의 이 결과를, 날마다.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날마다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은혜를 구하고, 그분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특권 입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가는 인생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불안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분의 은혜가 다스리고, 그분의 은혜가 따라다니고, 나를 추적하는 인생인데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하나님을 온전히 뵙게 될 천국을
현재는 믿음으로 확신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 한 주를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리고 완성된
이 이신칭의 결과를, 믿음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