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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 렘25:17~32 2008년
<렘25장의 내용 구조>
유다의 바벨론 포로 예언 (1-11절)
바벨론의 패망 예언 (12-14절)
열방의 패망 예언 (15-38절)
◑서론
예레미야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연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원년인 주전 605년입니다.
둘째로 여호야긴 왕이 일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해인 주전 597년입니다.
셋째로 시드기야 때에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해인 주전 587년입니다.
예레미야 25장이 기록된 역사적인 시점은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느브갓네살 원년’이라 함은 주전 605년입니다.
주전 605년에 일어난 사건을 예레미야 25장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전 627년에 19세의 나이로 소명을 받아
주전 587년 멸망할 때까지 40년간 예언했습니다.
주전 627년에 소명을 받았으니까, 주전 605년까지는 이미 23년 동안 예언했던 것입니다.
본문 렘25:3절에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13년부터 오늘까지 23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 하였으며”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제는 더 이상 회개해도 안 되는,
건너서는 안될 강을 건너버렸습니다.
그래서 주전 605년부터는 계속해서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약 10년 후에)
결국은 주전 597년 여호야긴 때 1차 포로로 끌려가고 (또 약 10년 후에)
주전 587년 시드기야 때 성전도 파괴되고 예루살렘도 완전히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25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Wrath of God)입니다.
옛날 헬라 철학자들인 견유학파나 스토아학파는 ‘신에게는 진노가 없다, 신은 분노가 없다,
신에게는 사랑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애굽의 철학자들은 신에게는 사랑도 없고 진노도 없으므로
신은 감정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진노의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즉, 하나님에게는 양면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시편이 150편까지 있는데 그 가운데 유일한 모세의 시가 시편 90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도 되심을 체험적으로 알았던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분노(Anger of God)요,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Wrath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그 대상과 강도에 있어서 구별됩니다.
분노는 강도가 약한 것이고, 진노는 강도가 강한 것입니다.
본문 렘25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도 나오고, 하나님의 분노도 나옵니다.
1~14절까지는 유다백성을 상대로 해서 하나님이 분노하셨다 하고,
15절 이하부터는 열국을 향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과 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예레미야 25장을 묵상하면서
유다백성을 향해서는 어찌하여 하나님이 분노(Anger)라는 단어를 썼고,
열국을 향해서는 진노(Wrath)라는 단어를 쓰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영국침례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존 길(John Gill)이라는 분이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분의 조직신학 책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를 구별하는 것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 Anger of God
하나님은 유다백성을 향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렘25:6~7절에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나의 노를 격동했다(You provoke My anger)” 할 때에 노는 분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분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분노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꼭 미워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창30:2절을 보게 되면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에게는 두 명의 처가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이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하니까
‘내가 자식 낳는 사람이냐’며 라헬을 향하여 분노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아내를 향하여 분노했습니다. 분노라는 것이 반드시 미움의 표시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니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향하여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미리암은 진밖에 쫓겨나 일주일 동안 문둥병 체험을 하다가 1주일 후에 나아서
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암을 향하여 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신32:51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은 신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가리켜서
물을 내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나, 반석을 두 번 때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그랬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분노하사 아론은 호르산에서 죽고, 모세는 느보산에서 죽어,
둘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도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왕을 향해서도 분노하셨습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간접살인 했을 때에
하나님이 다윗왕을 향하여 분노하심으로 너희 집안에서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끼리 싸우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아버지를 향하여 반역을 일으키는 일이 다윗의 집안에서 계속 일어났습니다.
또 솔로몬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 말년에
그만 이방여인을 사랑하여, 이방여인이 가지고 온 우상을 허락했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결국은 열 두 지파 가운데서 열 지파를 빼앗기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불순종하고 죄악에 계속 거하면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향한 분노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분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잘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잘못할 때마다 때리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잘못하면 그냥 놔두십니다. 두 번 잘못해도 그냥 놔두고
세 번 잘못해도 그냥 놔두고, 열 번 잘못해도 그냥 놔두십니다.
그러나 잘못이 쌓이고 쌓여 그 죄악의 양이 차면
그 때는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가 나타나기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는 사람은
죄를 거두시고 하나님의 분노를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출34:6절을 보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한 가지를 잘못했을 때마다 때리시는 분은 아니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 택한 자들을 향한 분노는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시편 30:5절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지금 눈물을 흘리는 성도가 계십니까? 그것은 잠깐입니다.
하룻밤만 지나도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시103:9절에도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분노하실지라도 더디게 분노하실 뿐만 아니라
그 분노를 영원히 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전 605년부터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바벨론에 조공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 기간은 70년에 국한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5: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남유다와 주변국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하나님이 사랑하는 유다백성들을 분노하고 징계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신다 할지라도
영원히 포로로 살다가 포로로 망하게 하시지는 않으시고
70년이 지나면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70년 동안 하나님의 분노를 당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유다 백성들을 협박하고 조롱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더니 꼴좋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며 조롱합니다.
25:10절에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사람이 사는 데는 소리가 있어야 됩니다.
집안에 들어갔는데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아무소리 없고,
가족들이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일어나서도 만나도 아무소리 안 하는 적막강산 집안은
사랑도, 재미도, 애정도, 기쁨도 없는 집안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 소리가 있어야 됩니다. 웃는 소리가 좀 나야 되는 것입니다.
밥 먹는 소리, 김치찌개 끓는 소리, 노랫가락 소리도 나야 됩니다.
어떤 분은 개신교가 시끄럽다고 합니다.
자기네는 조용한데 기도를 왜 그렇게 시끄럽게 하냐고 합니다.
그런데 죽었으니까 조용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소리가 없습니다.
살아있으면 왜 조용합니까? 교회와도 웃는 소리, 얘기 나누는 소리, 찬양하는 소리가 나야 됩니다.
소리도 나야 되고 빛도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소리가 사라지고 어두움이 찾아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옥은 안간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다백성들에게는 성전도. 말씀도. 말씀을 전하는 종들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들었으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는 자가 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분노하시고
바벨론에 포로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도, 빨리 회개하고 돌이키고, 그걸 차곡차곡 쌓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가 중요한 것이고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제거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음 받아 순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제거하는 길입니다.
25:1~14절까지는 유다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분노는 70년이면 끝날 것이라 했습니다.
◑2.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Wrath of God
본문 25:15절 이하 끝38절까지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옵니다.
15~16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냈기 때문이니라 하시기로”
하나님의 진노는, 크고 열렬한 노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29:24절에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뇨 이같이 크고 열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뇨”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진노의 대상은 15절에 보면 모든 나라 모든 백성이라 그랬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백성으로 마시게 하라고 해서 그 당시에 존재하던 모든 나라의 이름이
다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북방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로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세삭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고 그랬습니다.
세삭 왕은 바벨론 왕을 가리키는 은어입니다. *아래 절별해석 참조
그러므로 15~16절은 왕이 반역자들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에게 ‘진노의 잔’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마시라 취하라 토하라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추한 모습이 많지만, 가장 추한 모습은 술 취해 비틀거리고 가다가 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한 자리에 미끄러져져 넘어지고 뭉개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지저분합니까?
모든 나라, 모든 백성이 그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사약을 마셨으므로)
본문 28절에 “그들이 만일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
하나님이 진노의 잔을 내리시면
“나는 불교 신자인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진노의 잔을 내리냐?
나는 불교 신자라서 하나님의 진노에 상관이 없다.”
“나는 회교신자인데 왜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진노의 잔을 내리시느냐?”
라고 하소연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외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No Exception, No Escape).
▲역사상 하나님의 진노는 여러 번 나타났고, 장래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첫 번째 진노는 에덴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단 한 번의 죄로 아담의 온 후손, 온 인류는 죄와 사망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아담과 하와는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 빠뜨렸습니다.
그 한 번의 죄로 온 인류가 사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번성하여 땅에 차기 시작했습니다.
창6: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는 가끔 악해도, 가끔은 착하고 그러는데, 노아 당시 사람들은 항상 악했습니다.
마음, 생각이 24시간 365일 항상 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내가 잘못 만들었네. 이 인간들을 쓸어버려야 되겠다.”
해서 홍수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40주 40야 비가 온 세상을 덮어 모든 사람들이 물먹고 비참하게 죽고
오로지 노아의 방주에 탔던 노아와 그 여덟 식구들만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은 물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시고
이제 물로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며 저 하늘에 무지개를 두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8장~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악이 심히 중하고 동성애가 극심하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비를 내렸습니다.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황불비를 맞아 완전히 멸망하고 오직 롯과 두 딸만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딸은 “이제 우리는 후손을 잇기가 다 틀렸다”해서
아버지로 더불어 자식을 낳아 그 두 후손이 모압과 암몬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내 백성을 가게 하라”하는 명령을 거절하다가
피, 개구리, 이, 파리, 전염병, 독종, 우박, 메뚜기, 어두움, 장자 죽음 등의
열 가지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14장에 결국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완전히 빠져 모두 몰살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종종 하나님의 분노를 넘어서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출32장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기도하고 있을 때에
밑에서는 백성들이 악한 여론을 가지고 모세의 형 아론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 우리를 인도한 모세는 어딜 갔는지 모르겠고
우리를 인도한 여호와의 신을 금으로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론이 금을 가지고 오라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더니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모세야, 이 사람들 다 진멸하고너로 인하여 큰 나라를 다시 이루겠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해서
출애굽해서 여기 시내산까지 히브리 족속을 끌고 와서, 결국 죽였다고 할 것 아닙니까?”
라고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러면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마셔라.”해서 가루로 만들어 마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여호와의 편에 설 사람과 반대편에 설 사람은 나와라.”고 말합니다.
레위 자손들이 여호와의 편에 서고, 반대 편에 3천 명이 섰습니다.
그리고 레위자손이 칼을 들고 3천 명을 다 죽였습니다.
여호와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요, 참된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민16장을 보면 고라, 다단, 아비람, 온 이렇게 네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거스렸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만 지도자가 될 수가 있느냐?”하면서, 우리도 지도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라 자손을 산채로
땅이 갈라져 지진이 나서 그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렘24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예언할 때, 유다백성들도 두 그룹으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에 순종해서 바벨론에 항복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간 사람들은
극상품의 무화과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분노하시지만
70년이 지나면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예루살렘에 남아있거나
애굽으로 피신간 사람들은 극히 악한 무화과이므로
그들을 향해서는 칼과 기근과 염병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무화과에는 하나님이 분노만 하셨을 뿐이지만,
악한 무화과에게는 하나님이 진노의 잔을 부으신 것입니다.
또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총칭으로써의 음녀 바벨론과 적그리스도를
향하여 일곱 대접의 심판을 부으신다고 계시록16~17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 홍수 사건으로 물로 한번 망했지만
다시 불로 망할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불이 원자폭탄이 될지, 어느 항성이 와서 부딪쳐 큰 폭발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말하기를 이 세상은 불로 망할 것이며,
하나님이 진노를 부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최고의 진노는 사후 불못의 심판입니다.
구약의 힌놈의 골짜기, 신약의 게헨나 라고 하는 지옥에 떨어지는 심판인 것입니다.
계시록20:10절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귀는 불과 유황 불못에 떨어질 것입니다. 악령들, 귀신들이 거기 함께 떨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괴롭힐 때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계시록 21:8절에도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 우상 숭배자들, 마귀와 악령들이 떨어지는
그 불못에 다 떨어져 영영토록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3.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대신 드신 그리스도
유다 사람이 아닌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될 존재입니다.
왕이 내리는 사약을 마셔야 될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엡2: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Children of Wrath 진노의 대상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셔야 할 진노의 잔,
그 사약을 대신 마셔주신 것입니다. 그 잔이 십자가 형벌의 잔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막14:36절에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잔을 옮겨달라고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실 수가 없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내리는 진노의 잔을 지금 마시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가셔서 죽으시고
우리 대신 진노의 잔을 드시고 그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자와, 믿는 않는 불신자들은 동일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 진노의 잔을 직접 마셔야 되는 것입니다.
왕이 사약을 내렸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그 사약의 잔을 직접 자기가 마셔야 되는 것입니다.
진노의 잔이 무슨 보약이라도 됩니까? 이것을 왜 직접 마시려 하십니까?
믿는 자는 그 진노의 잔을, 왕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이 대신 마셔주신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셔야 될 진노의 잔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마셔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시려고 보니까 한 방울도 안 남았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잔을 마실 필요가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시는 줄 아십니까?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여 우리가 받아야 될 사약을 대신 마시게 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현재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고
장래 하나님의 진노에서도 완전히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옥가기도 다 망하기도 다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서 다 걷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살전5: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 믿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되는 것을 가리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살전1:10절에도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진)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러나 비극적인 말씀도 있습니다. 요3: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중에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를 머리에 얹고 다니시는 분이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시고 구원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의 진노도 피하시고, 장차 올 진노도 피하시기 바랍니다.
주식투자해서 돈을 조금 잃은 것은 진노도 아닙니다.
중국의 어떤 영화배우가 돈을 실컷 벌어 보니까 나중에 귀찮기만 하고 별 볼일 없다고
사회에 다 줬습니다. 조금 잃고 따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내게서 없어졌다.”
이것을 확신하시고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니까 “누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고 가르치더냐?”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피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는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죄짓고 또 죄짓고 한다면
결국은 죄가 쌓이고 쌓여 불량이 차게 되면, 하나님의 분노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도 혈과 육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에서도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버리고 예수님 피로 씻고 기도하여 다시 바른길 따라 살다가
또다시 죄를 지면 또다시 씻고 바른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만 죄 짓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계속하여 씻고 벗어나
거룩함을 이뤄 살기를 바랍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누가 가벼운 것이라 하겠습니까?
유다백성들은 그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시고
하나님의 분노에서도 벗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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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참고자료)
25: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 년'
여호야김 통치 제4년은 B.C. 605년으로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등극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치고(왕하 24:1, 7)
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침입함으로써 유다는 바야흐로 포로로 잡혀가는 수난사를 맞기에 이르렀다(단 1:1-5).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이러한 수난이 유다의 끝없는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해 초래되었음과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막바지에 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25:2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레미야가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자신은 이를 대언하는 자임을 자신있게 밝히고자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25:3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5: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요시야의 십 삼 년' 1:2에 따르면 이 해는 예레미야가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던 때로
B.C. 627년에 해당한다. '부지런히 일렀으나'의 문자적 번역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쉬켐) 일렀으나'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말씀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이렇게 열심히 전파하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종들을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런히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25: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거하리니'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호소하였던 내용이다(겔 14:6).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된바 있는 이 땅에서 계속 살려고 한다면,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그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은
바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데 달려 있었다.
25:6 너희는 다른 신을 따라다니며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야기시킨 가장 근본적이고도 치명적인 죄악인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우상 숭배는 제1계명에 대한 파기를 의미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가증스러운 범죄이다.
한편 본문은 다분히 경멸조, 비난조의 표현으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사용되었다(사 37:19, 미 5:13).
25:7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유다 백성이 당하는 고통은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밝힌다.
그들은 유익을 위해 우상을 만들었으나 도리어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나의 노를 격동하여'라는 말은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패역의 길을 걸어갔음을 암시한다.
25: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25:9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포화 상태에 이른 죄악으로 인해 여호와의 심판이 선포되는 내용이다.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북방 모든 민족'을 유다 멸망에 일조한 대적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보고
이러한 일반적인 표현과 특정인 느부갓네살이 같이 언급되는 것은
예레미야의 원래 말(북방 모든 족속)에다 구체적인 특정인(느부갓네살)의 등장을 목격한
자기 후대에 이를 첨가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북방 모든 민족'이란 다양하게 이해되는데, 이에 대한 견해로는
1) 느부갓네살과 동맹을 맺은 민족들
2) 바벨론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들
3)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바벨론인들 등이 있다
이중 문맥상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본다.
또 느부갓네살이 '내 종'(에베드), 즉 여호와의 종이라 지칭된 것은(27:6, 43:10),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과
그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막중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위함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사 44:28, 45:1에는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켜,
'나의 목자',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라고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70인역에는 느부갓네살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데,
아마 번역자는 이교도 왕을 가리켜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수도 있다.
한편 이 '종'이란 용어는 고대 근동에서는 군주와 봉신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문맥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특히 조약 문서에서는 규범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봉신은 군주를 위해 자기 군대를 바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느부갓네살은 자신도 모르게 여호와의 봉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자로 사용되었다 하겠다.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바벨론의 침략과 약탈로 말미암아 당하게 될 유다의 국내적 혼란상이 묘사되고 있다.
유다 백성은 끔찍한 환난으로 인해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삶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 채
캄캄한 좌절의 늪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25: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칠십 년'이라는 기간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유다 백성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제1차 포로로 잡혀갈 때(B.C 605년)로부터
고레스의 칙령으로 귀환하던 해(B.C. 537년)까지의 기간
2)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던 해(B.C. 586년)로부터
성전이 재건되던 해(B.C. 516년)까지의 기간
3) 예루살렘 함락 때(B.C. 586년)로부터 제1차 귀환이 이루어진 해(B.C. 537년)까지
4) 느부갓네살의 통치가 시작되던 때(B.C. 605년)로부터
바벨론이 망한 때(B.C. 539년)까지의 기간.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적으로 지적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듯이 보인다.
첫 번째의 경우는 바벨론에게 유다가 종속된 기간을 의미하는 역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각각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고 네 번째 견해는 12절과의 문맥적 지지를 받는다.
25: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유다의 죄악에 대해 적용되었던 하나님의 원칙은 바벨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바벨론은 자신의 특별한 장점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지만,
그 역시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에 처해지고 마는 것이다(50:11-13, 사 13:19).
이러한 예언은 B.C.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바벨론 정복을 통해 성취되었는데,
'영영히 황무케하되'라는 표현은 다분히 종말론적 의미를 암시한다 하겠다.
25:13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70인역(LXX)은 '이 책'이란 말로서 이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그 이후 부분으로 46-51장의 내용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15-38절에 대한 제목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25:14 그리하여 여러 민족과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들을 섬기게 할 것이나 나는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그들(바벨론 인들)로 자기 역군을 삼으리라'
이는 고레스 통치 하에서 조공을 바치던 여러 왕들을 포함한 페르시아인들과 메대인들을 지칭한다.
그들이 한때 바벨론의 지배 하에 있었으나 이제는 역으로 바벨론인들을
역군(役軍)로 부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25: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진노의 잔'이라는 비유적 표현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옛 성례적 전통에 그 근원이 있는 듯하다. 즉, 이 임박한 심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독한 음료를 마시게 하여
만일 그에게 죄가 있을 경우에는 그 독한 음료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던 관습과
관계되었을 것이다(민5:11-31).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이를 처형대상이 되는 죄수를 안정시키기 위해 마시게 하였던
마취제와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진노의 잔'은 하나님의 분노를 상징하고 있는데
49:12과 51:7에도 이에 대한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본장 내에서 하나님의 진노란 주제가 27-29절에서 더욱 발전되어 서술되고 있다.
25:16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냈기 때문이니라 하시기로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주석가들은 본절을 27절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꼭 그렇게 보아야 할 증거는 없다. 한편 술취한듯이 비틀거리는 이미지는
심판을 요청하는 죄악된 상태에 대한 상징으로도 쓰였다(13:12-14, 사19:14, 28:7-13).
25:17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그 잔을 받아서 모든 나라로 마시게'
예레미야는 이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보내는 곳으로 가 모든 열방들에게 그 잔을 나누어 준다.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그의 중요한 임무중에 하나였다.
이 잔은 여호와께서 보내실 징벌을 뜻하는데, 그들은 이 잔을 받고 비틀거리게 될 것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27절).
여호와의 징벌을 받게될 나라들의 명단이 다음절에서부터 열거된다.
46-51장에 언급된 모든 나라들이 이곳에 포함되며, 다만 다메섹만이 누락되어 있다.
25:18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고관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비웃음과 저주를 당함이 오늘과 같으니라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특이한 사실은 예루살렘과 유다 각 성읍들에 사는 여호와의 백성이 심판을 받게되는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29절참조).
심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용어들은 본서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들이다.
끝부분의 '오늘날과 같으리라'는 어구는 이 글이 기록될 당시에
이 심판의 양상들 중에 얼마가 분명하게 나타났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25:19 또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모든 백성과
25:20 모든 섞여 사는 민족들과 우스 땅의 모든 왕과 블레셋 사람의 땅 모든 왕과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과 아스돗의 나머지 사람들과
본 절의 역사적 상황을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본 단락 처음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은
여호와김 통치 4년, 곧 느부갓네살 통치 원년, 곧 B.C. 605년이었다(1절).
이 해에 애굽은 갈그미스에서 패하였으며 갈대아인들의 추격을 받아 남쪽으로 달아났다.
B.C. 605년 8월에 느부갓네살은 자기 부친의사망 소식을 듣고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B.C. 604년 말경에 갈대아 군대는 다시 팔레스틴 평원으로 침입해 들어왔으며
아스글론을 파멸시켰다(47:5-7).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재빠르게 진행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파국이 임박했으며 70년간을 바벨론에 노예로 있게 될 것을 선포하였다(11절).
그러나 여호와의 분노의 잔은, 이제 이스라엘을 지나서 열방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열방들이 그 잔을 마신 후에는, 바벨론에게로 그 잔이 넘어갈 것이다(26절).
'애굽 왕 바로와 모든 잡족과'
이는 바로느고를 가리킨다. 그는 주변 나라들을 부추켜 반바벨론 동맹을 결성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한편, 본절에는 바로와 함께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 방백들 또 그 백성,
그리고 애굽에 살던 잡족들이 한께 열거되고 있다.
이 잡족들이라는 것은 바로의 통치하에서 애굽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말한다.
또한 본절의 우스땅은 욥의 고향이기도 하였던 곳으로서(욥1:1),
팔레스틴 동쪽 어디에 있었던 것 같다.
애4:21에는 우스가 에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스글론과 아스돗의 남은 자'
블레셋 다섯 성읍은 아스글론, 에그론, 가사, 아스돗, 가드인데,
가드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읍이 다 언급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이 즈음 가드는 이미 멸망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암 1:6이하 참조).
현대 고고학은 아스글론과 가사 그리고 아스돗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리스 역사가 헤도로투스에 따르면
아스돗은 바로 삼메티우스 1세(PharaohPsammeticus I, B.C. 663-609년) 때
오랜 포위 공격 끝에 결국 정복되고 무너졌다고 한다.
'아스돗의 남은 자'란 어구가 이 사건에 대한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25:21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25:22 두로의 모든 왕과 시돈의 모든 왕과 바다 건너쪽 섬의 왕들과
에돔, 모압, 암몬 등의 나라들(48:1-49:22)과 두로와 시돈의 왕들 그리고 그들의 식민지들은
모두 바벨론에 항거했으며(27:1-3) 느부갓네살에 의해 고초를 겪게 된다.
'바다 저편 섬의 왕들과'
이는 두로와 시돈의 식민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바다'라 함은 지중해를 가리키며,
'바다 저편 섬의 왕들'이란 표현은 해변 지역의 왕들 또는 바다와 인접한 지역의 왕들
이라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25:23 드단과 데마와 부스와 살쩍을 깎은 모든 자와
드단은 아브라함이 그둘라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창 25:3).
그리고 데마는 아라비아 북부에 살았던 이스마엘의 아들들 중에 형제인 나홀의 자손으로서
우스의 형제이며 아라비아 사막에 거주하였다(창 22:21).
부스의 정확한 지역은 고대의 도시명은 족장들의 인명과 대체로 동일하였다.
한편, 털을 모지게 깎은 (모든)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추체 페아'란 말의 정확한 의미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그들의 머리털의 모서리를 깎은 자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사막의 몇몇 아랍족들 중에서 볼 수 있는 관습에 근거한 해석이다.
이외에도 한가지 설득력 있는 해석은 '사막의 변두리를 유랑하는 자들'인데,
NEB가 이런 해석을 취하고 있다(9:26, 49:32 참조).
25:24 아라비아의 모든 왕과 광야에서 섞여 사는 민족들의 모든 왕과
원문상 '광야에 거하는'이란 말로 끝맺고 있는데,
이는 23절과 본절을 요약하는 표현이라 볼 수 있다.
25:25 시므리의 모든 왕과 엘람의 모든 왕과 메대의 모든 왕과
'시므리의 모든 왕과'
'시므리'란 이름은 민 25:14, 왕상 16:9-20, 왕하9:31, 대상2:6, 8:36, 9:42 등에도 나오지만
그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쩌면 시므리는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서 난 시므란과 관련될지도 모른다(창 25:2).
시므란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 사이에서 살았다.
25:26 북쪽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
세계의 모든 열국들 다음으로 잔을 마시게 될 최후의 왕은 세삭 왕인데(51:41 참조),
이 '세삭'이란 '바벨론'에 대한 히브리어 알파벳 철자의 위치를 뒤에서부터 세어 만들어진
암호와 같은 명칭으로서, 바벨론을 가리키고 있다.
아마도 바벨론을 이렇게 암호로 표기한 것은
그 당시, 즉 이 글이 기록될 당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런 철자법은 소위 아트바스(Atbash)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 자인 '알렙'의 위치에 알파벳 마지막 자인 '타우'를 대입하고,
그리고 두 번째 글자 ‘베트’에, 끝에서 두번째인 '쉰'을 대입하여서
전체를 이런 식으로 순서를 뒤바꾸어 놓는 것을 말한다.
25:27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내가 너희 가운데 보내는 칼 앞에서 마시며 취하여 토하고 엎드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라 하셨느니라
'너희는 마시라 취하라 토하라' 예레미야는 술취한 자의 상태를 점층법적으로 묘사하여
진노의 잔을 마신 자들이 희생 불능의 상태에 처하게 될 것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25:28 그들이 만일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마셔야 하리라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
지상 거민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다.
25:29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부터' 이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이 파멸의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선고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열방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이다.
25:30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포효하시고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내시며 그의 초장을 향하여 크게 부르시고 세상 모든 주민에 대하여 포도 밟는 자 같이 흥겹게 노래하시리라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부르시며 외치리니'
이는 그의 목소리가 거룩한 처소 곧 하늘에서 들려온다는 뜻이다(욜 3:16, 암1:2).
이런 표현 속에는 여호와께서 사자같이 부르짖고(호 11:10, 암 3:8),
천둥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하시고(출 19:16), 폭풍 중에 말씀하신다(23:19)는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의 부르짖는 소리의 효과를 고조하기 위해 그것이 포도 밟는 자들의 외침에
비유되고 있다. 이 크고 두려운 소리는 땅 끝까지 울려 퍼진다.
25:31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뭇 민족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내어 주셨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여기서는 또다시 소송 장면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죄인들을 고발하는 기소자 및 그들에게 판결을 선고하는 재판장으로 묘사된다.
'다투시며'의 히브리어 '리브'는 법정에서의 논쟁과 관련되어 자주 쓰이며,
'심판하시며'에 해당하는 '솨파트'는 '소송을 제기하다', '판결을 선고하다'는 뜻이다.
25:3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큰 바람이 땅 끝에서 일어날 것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재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는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다.
이는 재앙과 이를 야기시킨 죄악 및 그 재앙으로 말미암은 폐허의 결과를 함께 나타내는 말이다.
이 재앙은 광범위하게 임할 것이며, 마치 강력한 폭풍이 지구 먼 끝에서 불어오듯이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갈대아인들의 공격에 나라들이 하나씩
차례로 멸망할 것임을 가리킨다.
25:33 그 날에 여호와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고 시신을 거두어 주는 자도 없고 매장하여 주는 자도 없으리니 그들은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
이 구절은 산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심판의 효과를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
땅 위에 시신들이 딩굴고 있는 소름끼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25:34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 떼의 인도자들아 잿더미에서 뒹굴라 이는 너희가 도살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이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
25:35 목자들은 도망할 수 없겠고 양 떼의 인도자들은 도주할 수 없으리로다
목자들이나 양떼의 인도자들은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애곡하고, 재에서 뒹굴 것을 요청받고 있는데, 이는 슬픔과 굴욕에 대한 표인 것이다.
그릇에 해당하는 '켈리'를 70인역(LXX)은 '숫양'으로 번역했다(rams, RSV).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에처럼 번역해도 뜻이 잘 통한다(vessel, KJV , pottery, NIV).
한편, 클라크는 귀한 수정 그릇, 또는 마노 그릇이 깨어지는 것처럼,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임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25:36 목자들이 부르짖는 소리와 양 떼의 인도자들이 애곡하는 소리여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을 황폐하게 함이로다
'나 여호와가 황폐케 함이로다'
열방의 통치자들이 파멸로 인하여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제시된다.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에게 심판을 가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25:37 평화로운 목장들이 여호와의 진노하시는 열기 앞에서 적막하게 되리라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 여호와의 심판에는 그들의 평안한 목자들까지 포함되었다.
그 위에서 풀을 뜯던 목자들까지 모두 약탈자의 손에 넘어갔고
또 철저히 유린되고 황폐화될 것이므로 그 지역에 거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25:38 그가 젊은 사자 같이 그 굴에서 나오셨으니 그 호통치시는 분의 분노와 그의 극렬한
진노로 말미암아 그들의 땅이 폐허가 되리로다 하시니라
‘굴’이란 '숙소'나 '거처'를 뜻한다.
여기서는 사자의 굴을 뜻하는 것으로 봄이 좋겠다.
사자의 사냥감이 된 것처럼 그들의 당은 여호와의 불타는 진노와 칼 앞에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이는 또한 요단 강이 강둑으로 흘러 넘치는 것처럼
여호와의 분노가 노도와 같이 흘러넘침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