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프레션 연합기도회 / 여호와여 깨소서 | 이사야서 51:9-11
◈여호와여 깨소서 욘3:1~2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시면, 우리의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을 깨우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셔야지,
우리가, 사람이 하는 일이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거지,
사람의 일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특별히 한 나라의 부흥도 그렇고, 또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선교의 역사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깨우고 움직이는 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기도에 대한 내용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도는 여러분,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하는 건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런데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실감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기도는 여러분,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교회에서 이렇게 중보기도 팀이
담임목사님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는데
이렇게 각각의 장기 별로 맡아서 기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건 처음 봤는데,
그래서 제1 중보팀은 목사님의 위장을 위해서 기도하고,
제2 중보 팀은 뭐 폐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유가 있었어요. 목사님이 이제 암으로 쓰러지셔서 거의 돌아가실 뻔 하셨거든요.
그러고 난 다음에 교회가 '아이쿠 기도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구나'
그래서 시작한 거긴 한데, 뭐 너무 과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저는 거기 은혜가 있더라고요. 무슨 은혜냐 하면
'아 기도를 정말로 믿는 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목사님의 폐가 건강해지고, 위가 건강해지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믿는다는 뜻이잖아요.
그거를 정말 믿지 않으면 그렇게 기도 하겠습니까? 퉁 쳐서 기도하지!
그런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기도의 능력을 정말 믿는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도전이 되고, 은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저희 교회 중보 팀에게, 다른 건 다 빼 먹어도,
'나는 이렇게 장기 별로는 기도 안 해도 되니까
하여간 나의 영과 육의 건강을 해서 기도해 달라고...
그래서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충성되게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항상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금요예배 때마다 중보기도를 하는데
중보 팀장이 제 기도를 2주 이상 빼먹고 안 하잖아요.
그럼 제가 불러다가 막 뭐라고 그럽니다. '어떻게 내 기도를 안 할 수가 있느냐?'
저는 기도의 힘으로 산다고 하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늘을 움직이고, 기도는 하나님을 깨우고 움직이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한 건 아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미국 목사님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이 시애틀에서 목회 하시는데
이런 간증을 해 주시더라고요.
하루는 오후쯤 됐을 땐데, 퇴근 시간쯤 됐을 땐데
하나님이 계속 이렇게 '네 딸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셨대요.
그래서 딸을 위해서 중보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뭔지 모르겠는데 그게 부담이 돼 가지고 기도를 하셨대요.
그래서 앉아서 그 시집 간 딸인데, 딸이 결혼해서 미네소타에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딸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더래요.
그래서 계속 하여간 거의 뭐 한 시간 두 시간을 딸을 위해서 기도했답니다.
근데 기도가 끝나고 나서, 나중에 딸한테 전화가 왔는데
그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미네소타 에서 다리가 무너진 날이었어요.
한 십 몇 년 된 것 같은데, 하여간 다리가 무너진 날이었는데
그날 딸이 차를 몰고서 이제 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다리를 건너서 다닌 대요.
그런데 차를 몰고 오는데, 이상하게 그 다리로 안 가고, 다른 데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평상시에 다니지도 않는 데로 돌아서
다른 다리를 건너서 집으로 갔는데, 그때 다리가 무너졌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기도가 중요한 건 알아요. 그런데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기도는 여러분, 죽고 사는 문제인 줄 믿습니다.
얼마나 기도가 생명이 걸린 기도였으면,
다니엘은 자기를 죽인다고 하는 데도 기도를 멈추지 않지 않습니까?
사자굴에 집어 넣는다고 위협을 하는데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지요.
(사자굴에 던져지기 직전에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 에게는 어떤 인식이 있었냐면,
'아, 기도는 죽고 사는 거구나. 왕이 나를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나를 죽이고 살리는구나' 하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기도한 거 아니겠습니까!
네, 기도는 여러분, 죽고 사는 문제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부흥이 일어나고요.
기도할 때 선교지에 돌파가 일어나고요.
기도할 때 병이 치유가 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함께 하시고, 교회와 함께 하시고,
기도할 때 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모이신 여러분들을 보니까,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하여간 기도가 하나님의 손을 움직입니다.
◑기도에는 크게 사실은 두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근데 사람들이, 이 기도에 대한 구분을 잘 못하고
그냥 퉁 쳐서 기도라고 생각하는데, 엄밀하게 보면 두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뭐냐면 하나님과 대화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대화'라고 할 때는, 크게 두 종류의 대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친밀한 대화가 있고요.
그러니까 친구나 가족과 함께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아니면 직장에서 보고 하기 위한 대화가 있죠. *중보기도
그러니까 이런 대화가 같은 대화이긴 하지만, 조금 성격이 다르지요.
하나님과의 대화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왕이시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과,
-왕하고 대화하는 건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은 친밀한 대화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대화이고요.
그래서 기도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친밀함으로 하는 기도가 있고요.
-또 왕에게 아뢰는 보고, 왕에게 하소연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걸 보통 우리가 중보기도라고 부르죠.
그래서 이 두 종류의 기도는, 상호 호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한 종류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기도로 대체되는 것 같진 않아요.
네, 그래서 친밀함에 이르는 기도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죠?
▲여러분 사람을 알 때 어떻게 알아요? 대화를 많이 해야지 알게 되는 거잖아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지 알게 되지요.
제가 저희 집사람을 압니다. 잘 알아요. 근데 어떻게 알까요?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죠. 뭐 아내에 대한 인적 사항을 다 뽑아가지고 외우고,
뭐 DNA 염기 서열을 다 외우고... 그래서 집사람을 아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아내를 잘 아는 것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아는 거죠.
함께 보낸 시간과, 함께 나눈 말들을 통해서
집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잖아요.
그러면 보통 집 사람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저녁 준비하는 거를, 탁 들어가서 아내의 뒷 모습을 보잖아요.
그러면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요.
'아, 오늘은 그냥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구겨져 있는 게 좋겠구나'
아니면 '마루에 나와서 활개를 쳐도 안전하겠구나'
이런 게 그냥 뒷모습만 딱 보는 순간 읽혀져요.
서로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냥 읽혀집니다. 이거 어떻게 읽힐까요?
뭐 미묘한 뭔가가 있겠죠.
뭐 예를 들어서 칼질을 할 때, 이렇게 기분이 안 좋거나 그러면
뭐 힘이 좀 더 들어가서 어깨가 조금 올라간다든지 할 텐데
그걸 제가 캐치하는 거죠. 어떻게 캐치 합니까?
오랜 시간을 아내와 함께 보냈기 때문에 아는 거죠.
그러니까 이거는 저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저만 이렇게 아내를 딱 보는 순간에 '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구나'
대충 읽게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친밀함을 통해서 아는 거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도 저는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초자연적인 은사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부수적인 거고요.
은사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는, 굉장히 부수적인 겁니다.
아주 지엽적인 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친밀함을 통해서 듣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그냥 알아요.
그러니까 이게 직관적인 지식인데,
제가 집 사람하고 한 마디를 하지 않아도, 딱 가서 눈빛만 보면
'아이쿠 지금 무슨 생각하는구나' 적어도 대충 읽듯이,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보낸 사람,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사람은, 직관적으로 알아요.
'아 지금 하나님이 이거 싫어하시는구나'
'아 이거는 하나님 기뻐하시는구나!' 직관적으로 다 알아요.
만약 이거를 모른다면, 그 이유는,
주님과 함께 보낸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가, 그냥 (자동적으로) 읽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친밀함에 이르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친밀함에 이르는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정직함이고, 두 번째는 오랜 시간을 머무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기도의 열쇠입니다.
'정직함'은 뭐냐 하면,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할 때도
뭐를 감추고 이렇게 자기 속 얘기를 잘 안 하고 그러면,
많은 시간 서로 대화를 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가 참 어려워요.
그 사람과 친밀함이 형성되려면, 정직하게 얘기를 해야 돼요. 정직하게!
기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서울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담임 목사님이 임영수 목사님이셨는데,
그 분이 기도에 대해서 하셨던 설교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40년은 된 것 같은데...
그 내용이 뭐였냐 하면 '기도는 여러분, 내 안에 누구에게도 하기 싫고,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것을,
하나님 앞에 끄집어 내면서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맞아요. 그게 기도의 본질입니다.
내 안에 누구한테도 얘기하기 싫고, 누구한테도 보여주기 싫은 것,
그것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쏟아내면서... 기도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위선하는 기도를 하면 안 돼요.
위선적 기도가 뭐냐 하면
제가 교회에서 청년들한테 기도를 가르칠 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저희 아들이 둘이 있는데, 나이 차이가 좀 커요. 11살 차이 입니다.
저희 막내가 지금 대학생인데, 어렸을 때 10살 쯤 됐을 때
집에 들어오면 한 열 살짜리 애가 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열 살짜리 애가 집에 들어오면 배고프니까 '엄마, 나 밥 줘!' 그러고 들어오겠죠.
그럼 엄마가 '아휴, 조금만 기다려!' 그러면,
애가 '못 참아, 못 참아' 막 이러겠죠. 그럼 귀엽단 말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애가 어느 날 집에 들어오더니, 정중한 목소리가
'어머님, 소자가 배가 몹시 고픈데, 밥이 있으면 좀 주시고, 없으면 할 수 없고요.'
그러면 엄마는 '야, 너 어디 아프냐?'하고 걱정하겠지요.
여러분, 기도는 영적인 언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영적인 나이를 속이고, 넘어설 수 없어요.
내 영적인 나이가 5살이잖아요. 그러면 5살짜리 기도를 해야 되고요.
영적인 나이가 10살이면, 10살짜리 기도를 해야지,
5살짜리가 10살짜리 기도를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이제 잘못된 기도입니다.
▲예를 들어서, 청년들이 저희 교회에 많으니까, 축구 하면 완전히 미칩니다.
청년들은 축구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국가끼리 A매치 하는 날이거나, 월드컵 본선 할 때는
청년들의 모든 관심이 축구에 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손흥민이 어떨까, 이강인이 어떨까?' 막 이러고 있거든요.
근데 그날 (경기 중계가 있는 날) 아침에 이제 기도 모임을 하잖아요.
기도 모임을 하는데, 모여가지고 이제 무슨 기도를 하냐면,
북한의 인권을 위해서 기도하고,
뭐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물론 그런 기도 해야죠.
그런데 '솔직히 여러분들이 지금 제일 원하는 게 뭐야?'
축구해서 이기는 거거든요.
그럼 그거 기도 해야지... 북한 인권, 시리아 난민.. 이런 기도가 잘 안 나오는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의 영적인 나이를 자꾸 속이는 거예요.
내 영적인 나이가 5살이에요.
그래서 그냥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축구에서 이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기도하는 게 정상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좀 찝찝하기는 하죠.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가 브라질 하고 축구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 달라고 하면, 또 브라질에 있는 교회는
브라질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곤란 하실 거 아니에요.
'이런 거 기도 해도 되나?' 그래서 찝찝하기는 하죠.
그러면 솔직하게 기도하면 되는 거죠.
'하나님, 이걸(축구를) 제가 기도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사실 좀 찝찝합니다.
그래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이겁니다.
이기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제 마음을 좀 바꿔 주시든지...'
어쨌든 이렇게 진솔하게 기도하면서 우리가 성장을 하는 건데,
그것을 그냥 아닌 척하고, 나는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척하고,
딴 거 기도하고 있으면... 거기에 뭐 내면의 성장이 일어날까요?
기도는 여러분, 하여간 정직해야 됩니다. 하여간 정직해야 돼요.
내가 가장 원하는 걸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셔야 돼요.
내가 가장 원하는 걸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지 않으면, 기도를 배우지 못합니다.
기도가 재미가 없어져요. 왜요?
내가 원하지도 않는 걸 가지고 기도하는데, 뭐 기도가 재밌겠습니까?
그리고 응답을 받아도, 자기가 응답 받은 것도 몰라요.
왜요? 자기가 관심 없는 거를 기도하면!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기도하라니까
청년이 열심히 북한의 어떤 문제를 놓고, 정치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니면,
나중에 그 일이 어떻게 됐는지, 찾아보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뉴스에 이렇게 나겠죠. 그게 어떻게 어떻게 됐다고.
그러면 진짜 원해서 기도한 사람은 '와 기도응답이다' 그러고 감사하지만
그냥 원하지도 않는데 형식적으로 기도했던 사람은
그게 응답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기도응답을 경험하지 못하는데, 기도가 재미 있겠습니까?
기도는 응답을 경험해야 재밌어 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기도를 배우지 못해요. 기도가 계속 겉돌고...
그냥 하여간 기도가 성장하지 않아요.
▲기도는 여러분 '말'이거든요. 계속 언어처럼 성장해 가야 되는데,
이게 성장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걸 가지고 기도 하셔야 돼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됩니다. 주1)
저희 집에 큰 아들이 있습니다. 지금 서른 살이에요.
근데 이 녀석이 어느 날 에 집에 들어오더니 '엄마 밥 줘!'
'조금만 기다려라!'
'못 참어!'
이것도 곤란하지 않겠어요? 나이가 서른 살인데,
서른 살이면 서른 살 답게 얘기를 해야지
얘가 뭐 다섯 살짜리 언어로 기도하고 있으면 곤란하겠지요.
우리가 여러분 20살 짜리 기도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나이에 맞게 기도해야 되는데
영적인 나이가 성장해 가야 되는 거죠.
영적으로 성장해서 그런 기도를 하게 돼야 되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월드컵 축구 결승전이 있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보다도 북한을 위한, 또 시리아 난민들을 위한 기도가 더 간절해지는...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죠.
그러니까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장해 가야 되는 거지,
자기 내면은 성장하지 않았는데, 기도만 이런 기도를 하고 있으면,
그게 이제 위선적인 기도가 되는 거지요.
하여간 기도를 통해서 성장해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고요.
▲그렇게 기도가 성장해 가려면, 뭐가 있어야 되냐면
많은 시간 기도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조건 양 quantity 입니다.
얼마나 길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한 시간 기도하는 사람은 딱 한 시간 기도한 것만큼 살고요.
두 시간 기도하는 사람은 딱 두 시간 기도한 것만큼 살고요.
세 시간 기도한 사람은 딱 세 시간 기도한 것만큼 삽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도만큼 정확한 과학은 본 적이 없어요.
기도만큼 정확한 과학은 본 적이 없어요. 속일 수가 없어요. 속일 수가 없어요.
네, 많은 시간 기도 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그것이 우리로 성장하게 만들어요. 영적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친밀함이 이르는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5:22~23
▲반면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이 중보기도는 좀 달라요.
중보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우리가 내면이 성장하는 것 같진 않아요.
중보기도를 많이 하잖아요? 그러면 은사들이 개발이 되더라고요.
기도의 은사들이 개발이 됩니다.
그래서 친밀함에 이르는 기도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면, *내적
중보기도는 성령의 은사들을 받게 하는... *외적
그래서 보통 중보기도는 이제 크게 부르짖어 기도하지요.
중보기도의 본질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뭐라고 결정 하셨냐면
모든 권한을 사람에게 위임 하셨어요.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라 그러셨거든요.
물론 그게 이제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약속을 좀 보류하셨긴 하셨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뭔가를 행하실 때는
반드시 누가 있어야 되냐면, 동의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맞습니다. 하나님! 그 일을 행하셔야 됩니다.'
코싸이너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코싸이너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집행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도 동의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 일이 집행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문자적으로 함께 싸인하는 자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요나서입니다.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부흥을 결정 하십니다.
그러면 그냥 부흥을 일으키시면 되는데, 요나를 찾아 오시잖아요.
그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이제 외치라'고 하시죠.
그런데 요나가 마음에 안 듭니다.
아마 요나가 항변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십니까?
니느웨가 흥하면 우리는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그로부터 이어지는 요나서는, 도망가는 요나를 집중해서 좇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스토킹에 대한 얘기입니다.
배를 타면 배로 좇아오시고, 바다로 가면 바다로 좇아오셔서
드디어 요나를 붙잡아서 이제 '물고문'을 시작하십니다.
뭐 고래쯤 됐겠죠.
근데 저희가 어릴 적에 주일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명상하고 묵상하고 있다가 회개하는 걸로 배웠지만,
현실적으로 물고기 뱃속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데가 아닙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진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면, 이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거죠.
뭐 고래 위장이 거의 물바다 였을 것입니다. 물고기와 해초가 막 돌아다니고요.
그리고 강력한 소화액 때문에, 고생이 심했을 거예요.
또 고래가 이제 물을 흡입하잖아요. 그러면 요나는 꼬르륵 잠겼을 거에요.
그러면 질식해서 죽는 거죠.
그러다가 고래는 또 숨을 쉬어야 되니까 물을 빼지 않습니까? 물이 쫙 나와요.
그러면은 공기가 들어오면서 수면이 내려갔을 겁니다.
좀 살았다 싶으면 또 물이 차서 들어옵니다...
그래서 삼일을 요나는 물고문을 당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요나서 3장에 넘어가는데
거기 보면 요나가 기도를 합니다.
요나가 딱 기도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요나를 뱉어내게 하세요.
그것도 육지 가까운 곳에서!
그러니까 물고기 뱃속에 집어 넣었을 때,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표가 뭐였다는 거예요?
물론 최종적인 목표는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건데,
일차적인 목표는 요나의 기도였다는 것이죠.
요나의 기도를 받아 내기 원하셨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했을까요?
조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누군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집행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군가 기도할 사람이 필요한데... 이게 구약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아직 쓰여지기 전이고, 성령도 임하시기 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유대인들 밖에 없는데
유대인들 중에서도 선지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는 때였단 말이에요.
만약 오늘 날이었다면 좀 달랐을 거예요.
오늘 날은 '요나야, 네가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근데 요나가 안 가겠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찾으시면 돼요.
그런데 당시는 그런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요나 말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때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붙잡고 끝까지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고 이어지는 요나서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요. 그래서 이제 회개하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요나가 그렇게 열심히 외쳤을까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요.
왜냐면 요나서 4장에 가보면, 니느웨가 진짜 회개하고 나니까
요나가 뒤집어지잖아요. '하나님,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걸로 보아서 그렇게 열심히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안 봐도 비디오예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사람들 잘 안 다니는 곳, 뒷골목,
그런 곳에 다니면서 '회개해라... 아님 말고... 회개해라... 아님 말고'
이러고 다녔을 거예요.
그러니까 4장에 그런 반응이 나오죠. '하나님,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온 간증도 했을 거예요.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그 간증이 요나의 회개 선포 메시지에
진정성을 더 보태주었을 거예요. 니느웨의 반응을 보면...)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요나가 외친지 반나절이 안 돼서
니느웨의 왕부터 짐승까지 회개하고 금식하기 시작합니다.
*니느웨는 현재의 모술 또는 그 근처라고 하죠.
요나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부흥은 여러분, 하나님께 문제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한 순간에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예요.
진짜 문제는... 기도할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기도할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기도할 사람만 찾으면, 부흥은 여러분, 순식간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조국의 부흥을 여러분 원하십니까?
한국은 정말 처참합니다. 한국 교회의 상황은, 뭐 여기 미국의 이민교회도 비슷하겠지만,
정말 처참합니다.
한 세대에 부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먼 과거의 얘기고요.
지금 이 세대는....
제가 청년 집회에 가서 한 번 청년들한테 제 간증을 하면서
'저는 부흥에 끝물을 맛보면서 자랐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이제 부흥의 때였거든요.
그렇게 간증을 했더니
청년 사역하는 전도사가,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그가 기도회 인도하러 올라가서,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목사님은 부흥의 끝물이라도 보셨죠?
우리는 부흥이라고 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뭔지 모릅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계속 침체되어 있었고요.
그러니 한국 사회가 여러분 어떤 줄 아세요?
중고등학교 십 대들 사이에서는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얘기하면
사이비 취급 받습니다. 정말로!
무슨 옛날에 통일교 신자 바라보고 이러듯이,
크리스찬 이라고 하면 사이비 취급을 받 받아요.
그렇게 자란 아이들입니다.
부흥이 다시 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조국에 부흥이 임해야 되고,
미국 땅에도 부흥이 임해야 되고,
여기도 사실은 처참하지 않습니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보면, 참 처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부흥은 여러분,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어요.
제가 부흥을 이제 갈망하면서, 부흥에 대한 것을 연구해 본 적이 있어요.
교회사를 이렇게 연구해 보면서 '부흥의 전조 증상이 뭘까?'
'부흥이 오기 전에 어떤 일이 있을까?' 하는 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부흥의 전조 증상들을 열심히 연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근데 아주 놀라운 결과를 내리게 됐는데,
'부흥은 전조 증상이 없다'는 거예요. 부흥은 전조 증상이 없어요.
그냥 어느 날 Suddenly 갑자기 임하더라고요.
굳이 전조 증상이 있다면, 기도하는 사람들!
이거 하나 딱 있고요.
누군가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요.
웨일즈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 그 젊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에반 로버츠가
주 앞에 금식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잖아요.
기도하는 사람!
그거 하나 빼고는 전조 증상이 없어요. 부흥은 그냥 갑자기 어느 날 일어나요.
맞아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부흥도 한 순간에 일으키셨잖아요. 한 순간에!
조국의 부흥도, 또 미국 땅의 부흥도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어요.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어요.
부흥은 하나님께 일도 아니에요.
정말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어요.
진짜 숙제는, 진짜 문제는.. 누가 기도할 것인가? 누가 기도 할 것인가?
거기에 달렸다고 믿습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좋으신 하나님, 저희가 부흥을 갈망하며 기도합니다.
죽어가는 조국 교회 가운데, 하나님, 다시 한 번 부흥을 허락하여 주시고,
다음 세대가 살아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 땅을 위해 다시 한 번 기도합니다.
이 땅 가운데 부흥이 다시 한 번 임하게 하여 주시고,
영혼들이 살아나며, 교회가 살아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또 선교지와 또 선교지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부흥이 과연 올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많은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선교사님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한 순간에 임하는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기도하는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
주1) 이렇게 영적으로 어릴 때는 자기 소원 중심으로 기도하다가,
몇 해 지나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자기 소원의 기도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큰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작은 일로 다투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깨달은게 하나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그런데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사명 받은 성도들이
'종갓집 며느리의 사명'을 가지고
그리고 일반 며느리들이 있지만,
종갓집 며느리는 얼마나 하는 일이 많아요.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해요?
그러니까 잡생각 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늘 말씀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전체를 보는 그림,
하나님 나라 전체를 담는 큰 그릇이 되면,
큰 일은, 큰일 자체가 정화 작용을 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에요.
큰 일을 하나님이 주시고, 큰 사명을 가지고 애를 쓰다 보면
나머지 부차적인 것들은, 하나님이 처리해 주시고,
그리고 정화 작용을 하고, 더 큰 단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마6:33
그런데 큰 사명과 꿈이 없이, 부차적이고도 지엽적인 작은 문제에 집중하면
그 자체가 힘듦과 어려움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렇잖아요. 부부싸움을 할 때에
'야 우리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제대로 우리 부부가 쓰임 받아 볼까?'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 구원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우리 부부가 더 애써볼까?'
그거 (큰 일) 갖고 싸우는 부부는 거의 없어요.
'네가 나를 존중 안 해줬다.'
'네가 나를 무시한다. 뭐 이렇게 밖에 안 해주나?'
순 이런 거 (작은 일) 갖고 다투다 보면, 그게 지옥을 경험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큰 일과 큰 사명을 감당하려는 큰 그릇이 되면
그 자체가 정화 작용을 갖는 것이에요. (부부싸움 안 합니다)
그런데 작은 일, 부차적인 지엽적인 문제들...
막 그거 갖고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다 보면,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이걸 제가 20년 동안 말씀을 드렸는데도, 아직까지 이걸 못 깨닫는 분들이 계세요.
♣저는 기도라고 하면, 의례히 내 어려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기도가 널뛰기 처럼 해요.
급하고 어렵고 힘들 때 간절히 기도가 되지요.
그런데 또 형편이 좀 괜찮아지면, 기도할 게 없는 겁니다.
많은 분들에게 '기도 하시죠!' 그러면
'저는 특별히 기도할 게 없어요.' 라고 답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게 기도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죠.
하나님은 제게 항상 기도해야 될 이유를 가르쳐 주셨어요.
마6:33절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입고 사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평생 그렇게 삽니다.
먹고 있고 사는 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다가 인생을 끝내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든지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살게 해 주셨어요.
그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모르는 분 없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대로 한 번도 안 살아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내 염려, 근심 거리를 주님께 맡겨 버리는 이 삶을
한 번도 제대로 안 살아본 거예요.
설교를 해도, 성경 공부를 해도.. 그때 뿐이고
그리고는 계속 먹을 거, 입을 거를 염려하고 근심 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매일 합심 기도>예요.
조금 강제성이 있어 보이긴 해도, 그래도 이 말씀대로 한 번 살아봐야 되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본 다음에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고 말도 해야 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진짜 복을 주셨는지... 그것도 말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래서 새벽기도회 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합심기도'를
항상 먼저 하고,
그리고 매일 밤 10시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 제목부터,
우리 민족과 한국 교회를 위한 기도 제목을 보내드려요.
같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