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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3:13~18, 요14:30 2007.01.14.
터키 남쪽 지중해 연안을 가로질러서 토로스 산맥이 있는데
이 높은 산맥은 독수리들의 서식처로 아주 유명하다고 합니다.
산맥을 넘어가는 골목을 지켰다가 새들을 잡아먹는 지혜 있는 독수리 떼가
그곳에 가득 모여 있다고 합니다.
이 독수리들은 두루미를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잘 잡아먹는데,
그 이유는 두루미가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날면서도 뭘 그렇게 조잘대는지 계속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니기 때문에
독수리들이 가만히 있다가 소리만 나면 훌쩍 올라가서 잡아먹는 거란 말이에요.
원래 두루미들은 떠드는 속성이 있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아주 노련한 두루미는 언제나 침묵을 합니다.
떠들지 않고 조용하게 산맥을 넘어갑니다.
그 비결은 비상하기 전에 입에 돌을 하나 물고 떠나는데 있습니다.
돌을 물고 있으니까 지껄일 수가 없어요. 뭐라고 시끄럽게 얘기할 수도 없어요.
이 돌을 물고 산 넘어갈 때까지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산 넘어 간 다음에
돌을 뱉어 버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입니까?
귀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입을 자주 열면 언제나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아마도 말을 많이 하다보면 후회스러운 말이 많습니다.
'그 말을 안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후회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말을 아낍니다.
깊이 생각하여 말하고, 후회 없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이해는 할 수 없으나 사랑할 수는 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완전히 사랑할 수도 있다."
글쎄올시다. 여러분, 한평생 같이 사는 남편 이해하십니까?
몇 십 년을 같이 살아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사랑합니다.
한평생 살아온 아내 그 이해하겠습니까?
이 여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언제나 문제가 생기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결론이 뭐냐 하면, 참으로 사랑하면 이해하게 됩니다. 다 이해가 됩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이 의지로 바뀔 때
내게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하는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또 이해는 하는데 가슴이 움직이지를 않아요. 이거 다 문제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저 이해되기만을 기다렸다가는 세상 다 끝나요.
또 가슴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한평생 다 갑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빌리 그레이어 목사님은 그의 설교 중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Little man - 작은 자아가 셋이 있다.
그 하나가 Intelligence- 지혜, 지식, 지능이요.
또 하나가 Emotion – 감성이요.
또 하나가 Will – 의지다.
이 세 가지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
내게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 바른 인격, 바른 행복, 바른 용기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따로따로예요.
의지가 따로 된다면 이것은 불행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은 의지로 결정을 해야 되는데, 그 의지가 그냥 억지로 하는 의지가 아니고
그의 이해와 그의 뜨거운 사랑이 합쳐져서 오는 의지,
조금도 의심을 받지 않는 그런 이해
그것이 진정한 용기요 행복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라는 독일의 유명한 젊은 순교자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순교 직전에 옥중에서 쓰신 편지를 묶은 「옥중 서신」은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이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때로는 기도하고 묵상하고 감격했던 그런 책입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 내가 누구 손에 있습니까? 그는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치당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상황, 이 콘텍스트 속에 우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상황적 동물이 아닙니다. 환경의 동물의 아닙니다. 환경의 산물도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이라고 하는 이 사건들, 이 잡다한 사건들,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고 하는 이 큰 둘레 속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현실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8:12절에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이 처한 그 절박한 현실, 예수님의 눈앞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빌라도 법정이 있습니다. 많은 사건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으로,
내게 주신 선물로 이렇게 느끼고 이렇게 이해하고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기서 십자가를 지는 용기가 나오게 됩니다.
▲본회퍼는 다시 이어서 말합니다.
"그런고로 악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연약함이다.
의도적인 죄는 악마적인데 반하여, 연약함으로 인한 죄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여러분, 악마적인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인간적인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줄도 알고 다 알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마지막 결론은 인간인고로 뭐 간혹 이런 말하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간사한 인간적 변명입니까?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연약함’은 가장 인간적인 가장 무서운 죄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동양의 지혜인 논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로가 물었습니다. "군자는 용기를 숭상합니까?"
공자는 대답합니다. "군자는 정의를 숭상한다.
군자가 용기는 있으되 정의가 없으면 난동이 되고,
소인이 용기가 있으되 정의가 없으면 도적이 된다."
확실히 명언입니다.
여러분, 옳다고는 하면서 용기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에요.
◑본문 해석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사람으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지만
워낙 인물이 출중하고 지혜가 있어서 발탁되어
바벨론 그 큰 대국에서 중요하게 쓰임받는... 요샛말로 말하면 장관이에요.
바벨론의 방백이 되어 있던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벨론 사람들이 그를 시기질투해서 많은 문제로 저들을 괴롭힙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은 지금 신상을 만들어 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은 정치적으로 왕이지만
도덕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존경까지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 신상을 떡 만들어 놓고 신에게 절하듯이 절하라.
사람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고 신에게 절하는 것 같은 경배를 하라.
경배하면 살려주고, 안하면 죽인다. 뭐 이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용해서 옆에서 질투하는 방백들이 저들을 고소하게 됐고
마지막 결정적인 시간에 왔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합니다.
'혹 실수로 절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만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에 엎드려 절을 하라.
그러면 살려주겠지만 절을 하지 안하면 저 긍휼히 타는 풀무 속에 집어넣어서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자 이거 어이없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거죠.
▲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지금 이 순간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이 모든 일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그 은총 속에,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현실을 하나님 안에 있는 것으로 소화하고 그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우연은 없어요. 인간의 어리석은 일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렇게 이들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이미 마음속에 단순한 결단이 있었습니다.
뭐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섬기고 사람 앞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간단해요. 몇 번 뒤 바뀌어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이 몇 번 뒤 바뀌어도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는 간단한 Simple Mind 예요.
복잡하게 생각 안했어요. 이렇게 되면 내 처자는 어떻게 되나. 이런 생각 안 했어요.
바로 여기에 중대성이 있는 거예요.
오래 전입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복잡했을 때
많은 분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부끄러움을 당했어요.
그 때 신사참배를 한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하는 걸 뒤늦게 들었습니다.
'그저 신사 앞에 절하라 할 때, 안 됩니다로 끝났으면 좋은데
나 죽으면 어떻게 되나, 저 애들은 어떡하고...
이렇다 보니까 그만 신사 앞에 가서 꾸벅하고 말았다'는...
그리고 '일생을 이렇게 부끄럽게 살아야 했다'는 얘기입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여러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단순, Simplify 이게 길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저것 이것 다 생각하고 나면 행동할 수 없어요.
그래서 대체로 봐서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용기가 없어요.
이 생각, 저 생각하느라고.
그러나 오히려 좀 무식한 사람이 용기가 많아요. 왜? 우직하니까.
하나밖에 몰라요. 이걸 생각해요. 오히려 그쪽에 큰 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또 하나는 이 사람들은 정결합니다. 이건 양심적이고 신앙적이에요.
이런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 또 그것뿐입니까?
우상의 제물을 안 먹는다는 그런 정결함이 있었어요.
정결함에서 용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 용기가 솟아오르는 거예요.
독일의 문호 괴테가 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열쇠는 집중과 배제이다." 간단한 말입니다.
인생을 바로 사는 길은 집중, 무엇을 집중하느냐 하는 것이고,
하나를 잡으면서 나머지는 버려야 되는 배제가 바로 돼야 되요.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거 무슨 소리입니까? 버려야 된다는 말이에요.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말이에요.
살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리고야 바로 살 수 있어요.
어떤 손해도 각오해야 한다는 거예요.
손해 안 보고 얻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하나를 포기해야 되요. 하나님을 얻고 인간을 포기하고,
영생을 얻고 세상을 포기하고, 진리를 얻고 이익을 포기하고...
유대 사람으로 살고 유대 사람으로 죽고
결코 바벨론에 왕국에서의 영화 같은 거 그거 초개처럼 다 버렸어요.
미련이 없어요. 이 단순한 마음, 이 정결한 마음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용기 있게 했습니다.
벌써 헌신했어요. 하나님께 생명과 운명을 다 맡겨 버렸어요.
다 포기를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여기까지 온 것 감사하고.. 그 동안에 누린 것 감사하고..
단6:10절에 보면, 다니엘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이런 위험한 시간에도
감사의 기도를 했어요.
왜요? 더럽게 살지 않고 깨끗하게 죽은 것, 미련하게 살지 않고
이 바른 길로 세상을 끝내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대답은 감사합니다.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답할 가치도 없습니다. 얼마나 굉장합니까? 대답할 가치가 없어요. 말이 없습니다.
◑적용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야에, 십자가가 시간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올 것을 다 아시면서 하시는 말입니다.
‘세상 임금이 내게로 온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이 없다!’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14:30
하, 참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 구절을 가만히 읽어보면요. 어찌 이럴 수가 있어요?
지금 십자가가 눈앞에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여러분, 바로 이런 여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에요.
갈2:6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을 만나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은 나와 상관이 없고 인정해 주던 안 하던 칭찬해 주던 말든
나는 내 길을 갈 뿐이다. 그들은 나와 상관이 없다."
갈2: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여러분, 세상 여론에서 명성과 평판에 상을 주던 벌을 주던
칭찬을 하던 비난을 하던
이런 거 전부다 털어버리고 깨끗하게 살 수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는 길이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말이 없습니다. 침묵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대답이 없어서 빌라도는 벌벌 떱니다. 답답합니다.
십자가를 지운다는 대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변명도 없고 대답도 없습니다.
여러분, 아니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들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합니까?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에요.
결단이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고, 단순하구요. 깨끗합니다.
그러나 결단이 없는 사람은 복잡합니다. 손익계산 하느라고 바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이렇게 되면 내게 뭐 돌아오나,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아주 복잡합니다. 아주 시끄럽습니다.
순교자의 마음은 단순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38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어요.
너무 대단하고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 한다 그랬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런 쓸데없는 말, 생사가 문제가 되지만, 아니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 보세요. 그 용기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답을 너무 많이 해요. 뭐 신문을 보면서도 이놈 욕 하고, 저놈 비판하고,
이거 말도 안 되고, 이거 죽일 놈 살릴 놈 이러느라고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단순한 마음에 용기와 여유가 있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 속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계셔서 그는 풀무에서 살아남습니다.
그리함으로 느부갓네살이 이 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온 천하가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 큰 영광이 눈앞에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담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확실한 믿음의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되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고
자기 자신들도 영광스러운 그런 생을 누리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게 진정한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세상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나기에 조용히 기다리며
여유 있는 대화와 담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확실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곳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너무나 복잡한 세상에 삽니다.
이 복잡한 문제에 시달리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일들로 인해서
우리 마음과 생각도 혼돈에 빠집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은 왜 그리 하시는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지 여기까지 우리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아는
확실한 지식도 주시고, 확실한 믿음도 주시고, 주의 주신 경륜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언제나 세상을 향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여유 만만한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