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성전 뜰 설교 렘26장 여러 설교 정리
<본문 개요>
예레미야의 성전 뜰 설교 (1-7절)
제사장, 선지자, 백성들의 반응 (8-15절)
방백들의 예레미야 변호 (16-24절)
렘1장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소명 장이고,
2~25장까지는 왜 유다 백성들이 나라가 망하는 지경까지 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예레미야의 설교죠.
26~45장은 예루살렘 함락 전후와 바벨론 포로 전후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 입니다.
◑1. 예레미야의 성전 뜰 설교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경고함
본문이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로 시작되는데, :1
유다의 18대 임금이었던 여호야김이 등극한 해에 있었던 일입니다. B.C. 609
오늘 본문 1-7절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난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인,
성전 뜰에서 행한 설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앞서 렘7~10장에 성전 앞에서 예레미야가 설교한 적이 있었죠.
이번에는 ‘성전 뜰’입니다.
이 설교 때문에, 예레미야가 핍박을 받는 직접적 계기가 됩니다.)
26: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2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받는 말씀을 전하는데,
한 마디도 빼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해 주기를 요청할 때에
“지금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고, 그래서 전하는 그 말이 굉장히 중요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상황이 굉장히 심각함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가장 큰 유혹은 ‘말씀을 가감해서 설교하는’ 일입니다.
사람인지라, 자기가 전하기 싫은 메시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씀을 전할 때 가감하지 않았습니다.
행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거리낌 없이’라는 말은, 자기 기호에 따라서 취사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은, 위 구절을, 자기 목회 신조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고
설교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말씀이라면
설교하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계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레미야는, ‘가감 없이’ 말씀을 증거한 결과,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8, 11
그러나 만약 말씀을 ‘빼고, 편집해서’ 가르친다면... 거짓선지자가 되고 맙니다.
오늘날 가끔 ‘설교할 내용이 별로 없다’고 하소연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 주제를 거론하면, A집사가 눈에 밟히고
저 주제를 얘기하면, B집사가 상처 받을 것 같고...
그래서 이 말도 빼고, 저 말도 빼다 보면... 할 말이 별로 남지 않는 거죠.
방송인들도 ‘모두가 상처 받지 않는 뉴스를 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합니다.
어떤 뉴스가 방송을 타다 보면, 어쨌든 소수라도 그 뉴스 때문에
마음이 어렵고, 상처 받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 거죠.
그래서 뉴스를 아예 보지 않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상처를 주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뜻을 돌이키면, 하나님도 그 뜻을 돌이키시리라’가 그 목적이었습니다. :2
진심과 진심은 통하는 법입니다.
설교자가, 누구를 상처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선포한다면
듣는 청중들도 그 진심을 알고서, 상처받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상처받는 청중이 있다면,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입니다. *피해의식
한 번 뒤로 후퇴하면, 그 뒤로 계속 후퇴하고 양보하게 됩니다.
한 번 단호하게 승리하면, 그 후로도 계속 승리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겁이 나서 ‘설교 못 하는 내용’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7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와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의 말이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바로 성전 뜰(경내)에서 그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었던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 업무를 관장하던 자들이었으며,
그곳에 참석했던 백성들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앞서 무너진 실로 같이 될 것이다’라고 했으니,
그것도 적진(진짜 적은 아닙니다만) 한 가운데서, *성전 뜰에서
완전히 불에 휘발유를 끼얹은 격이 되었죠.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혹 유다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내리려던 재앙을 돌이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바뀝니다. ‘너희가 이제는 돌이켜도 소용없다.
그러니 바벨론 포로를 순순히 받아라’로 바뀝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아직 ‘너희가 돌아오면, 하나님도 돌이키시겠다’입니다.
여호야김 1년, BC 609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의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앞서 25장에서 살펴보았죠. 25:6~11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전하는 장소가 중요한데, ‘성전 뜰’이었죠.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찾은 것은 제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이전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 성전에 온 사람들에게,
악한 길에서 돌아오도록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잘못된 삶을 돌이키지 않고, ‘제사지상주의’,
즉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고치지 않아도 상관없고, ‘성전지상주의’, 성전에 올라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좋아하시고, 무조건 복을 내려주신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올라가셔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며 분노하셨습니다.
혹시 오늘날 우리 각자의 모습은 아닌지요?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6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성전 안에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셨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나는 ‘나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있습니까?
내가 돌이켜야 할 ‘나의 악한 길’은 무엇입니까?
그런 점을 지적해주는 ‘선지자’가 내게는 있습니까? *가장 가까이는 배우자
나는 혹시 그런 ‘선지자’를 핍박하지는 않습니까?
◑2. 예레미야가 살해 위협 앞에서도 담대함 (8-15절)
8~15절은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 선지자가 겪게 되는
살해의 위협과 위기 모면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8~9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붙잡고 말하기를 “넌 반드시 죽을 것이다” :8
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전하는 복음을 싫어했던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기로 결의한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 결의가 얼마나 강했던지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행23:12~13
종교지도자들과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결의를 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임재장소이신 성전을
파괴하지 않으실 것이고,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을 황폐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를 ‘신성모독 죄’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말했습니다.
▲10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마치 행21장에,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는 거짓 모함으로 인해
폭도로 변한 무리들에 의해 맞아 죽을 뻔 하였는데, *행21:30~32
마침 안토니아 요새에 있던 천부장이 출동해서, 바울을 구해준 장면과 비슷합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제사장과 백성들 무리들에게 잡혀서 맞아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8 그들은 예레미야를 당장 죽일 기세였습니다.
이때 구원군이 나타났는데, 바로 ‘유다의 고관들’이었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이었죠.
왕궁은 성전과 지근 거리에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관들이, 소동하는 소리를 듣고 모여서,
성문 곁에 앉았습니다.
‘성문’은 당시에 재판정으로 쓰이던 곳이었고
‘앉았다’는 것은, 심문이나 판결을 내리겠다는 뜻이죠.
어쨌든 일단 예레미야는, 무리들에게 잡혀서 맞아 죽을 위기는 넘긴 것이죠.
재판 받을 길이 열렸으니까요.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2-13 ‘예레미야가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가 들은 바 모든 말로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예언하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14-15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예레미야가...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12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예언은 스스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이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고,
자신은 바로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신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2
예레미야는 그런 팩트,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 백성들, 고관들 앞에서 ‘다들 수그려! Bend down’ 한 것입니다.
지금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즉 가장 신망있고 믿을 만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고관들 앞에서 ‘사형 죄’라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
:1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망령되이, 제 멋대로, 함부로, 망한다고) 예언하였음이라’
예레미야가 이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처음에 선지자로 소명 받을 때,
하나님이 그를 ‘너를 쇠기둥, 놋성벽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렘1:18
보장해 주셨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사명자는,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내적 확신이
예레미야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보면, 사명자들의 특징이 있는데 “담대함”입니다.
‘저 분이 어떻게 저토록 담대할 수 있을까?’
왜냐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적 권위 divine authority’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죠.
아무 일에나 나서서 담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는 사자처럼 담대한 것입니다.
주의 종이 아무 일에나 나서서 큰소리 쳤다가는... 끝장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시키신 일에, 그 범위 안에서 호령하고, 큰 소리 치면
세상이 벌벌 떠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큰 목소리는 이렇게 일단락 됩니다.
:15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오늘날 기독교 사역이, 교회 개척이 힘들다고 합니다.
1백개 교회를 개척하면... 몇 개만 개척에 성공하고, 나머지는 다 문을 닫는다고 하죠.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15
이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역자가 유능하고, 은사가 많고, 명문대를 나오고, 큰 교회에서 밀어주고...’
그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없으면, 사역의 성공은..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야의 죽음과 미가 선지자의 예 (16~24절)
밧세바의 남편은 ‘우리아’이고, *Uriah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는 ‘우리야’입니다. *Urijah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절별 해석’을 참조하세요.
.....................................
◑절별 해석
26: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야김의 즉위 연도는 B.C. 609년 9월경에서 B.C. 608년 4월경 곧 니산월 사이가 된다.
한편, 혹자는 이 예언이 전달된 때가 이상과 같이 여호야김 치세 초였기 때문에,
이 예언이 이곳에 위치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서는 기록 의도상
연대순에 충실히 따르지 않고 있으므로 그러한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26: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한 말도 감(減)하지 말라'
7절까지에서 언급된 성전 설교의 개요는
만약 이 백성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언약의 율법을 준수한다면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여호와께서 중지시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철저한 파멸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서서 예언을 선포한 '여호와의 집 뜰'이란
성전 내부의 마당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7:2에는 그가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설교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그는 금식일이나 절기에 백성들이 모여들었던 바깥뜰과 안뜰의 경계 지역 근처에
서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 말도 감하지 말라'고 하는 표현은
예언의 엄중성을 시사함과 아울러, 그 예언 선포에 따르는 핍박을 암시한다.
'감하다'에 해당하는 '가라'는 종종 수염을 깎아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48:37).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적대감을 보일 것이고 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며,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 중 어떤 부분을 가감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26: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그들이 듣고...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여기서는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한번 더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고 있다.
'뜻을 돌이키다'라는 뜻의 동사 '나함'은 '뉘우치다', '동정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로서
18:8에서도 쓰였다. 그리고 '재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는 재앙과
그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악행이란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26:4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이 부분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절들은 7:13의 내용과 거의 같다.
여기서 잠시 본장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적 상황을 언급하고 넘어가자.
여호야김의 등극은 B.C. 609년 가을이나 늦은 여름으로서,
그의 형제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붙잡혀 감으로써(왕하 23:32-34) 가능했었다.
유다에서는 대체로 왕의 치세를 왕의 통치 원년이 다 채워지고 난 다음의 니산월부터 계수하였다.
따라서 이 기사는 예레미야의 전기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 중에 첫번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본장은 산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전 설교와 예레미야의 체포 등의 사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또 그렇게 거부됨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심판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본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지만,
포로기가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26:5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백성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참된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알리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귀는 달콤한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에서 현혹되었다.
27-29장에는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뚜렷한 대조가 잘 제시되어있다.
한편, 언약의 요구 사항은 율법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7:5, 6에는 특정 율법들이 명시되고 있으며, 백성들을 향하여 순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왕하17:15 참조).
여호와께서 자기 종들, 곧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필경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26:6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성전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실로의 옛 성소가 파괴된 것과 같이 파괴되고 말 것이란 내용이다(삼상 4장).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이 심판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법궤가 있던 실로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라 하더라도 파괴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실로는 B.C. 1075년경 블레셋의 침입으로 무너졌던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삼상 4장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시78:60, 61 참조).
실로는 훗날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시 무너졌다.
예레미야 당시에는 그 폐허만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파멸을 예상시켜 주는 생생한 본보기였던 셈이다.
'저줏거리'로 번역된 '켈랄라'는 '가볍다'는 뜻의 형용사'칼랄'에서 유래한 말로서
'비방', '조소' 혹은 '저주'를 뜻한다. 한편, 성전을 가리켜 저줏거리가 된다고 하는 설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언사였으며,
신성 모독이나 참람한 말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선지자의 말은 총체적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신성 모독으로 고소받기에 이르렀다.
26:7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와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의 말이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바로 성전 경내에서 그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었던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 업무를 관장하던 자들이었으며,
그곳에 참석했던 백성들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26:8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제사장들과...그를 붙잡고 이르되'
9절에 근거해서 보면, 백성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의 선동에 의해 예레미야에게 달려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자신의 발언 내용으로 인해서 중대한 범법 행위로 체포되고 고소당하였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고 하는 표현은 원어로 '모트 타무트'인데,
출21-23장 내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 '모트 유마트'란 말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어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는 말이다.
이로 볼때 예레미야는 자신을 체포한 자들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26:9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고소의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즉 성전이 실로와 같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황무지처럼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이 예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했다고 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죄명이었다.
고소자들은 예레미야가 말한 예언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예레미야는 이중의 범죄를 범한 것이 된다.
즉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해서 참람한 것을 말했으며,
또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거짓된 유언 비어를 퍼뜨렸던 셈이다.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모여드니라'에 해당하는 '카할'은 보통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의례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하며
때로는 전쟁 때문에 소집되는 것과 또 어떤 공통의 적이 있어 그를 응징하기 위해
군중이 에워싸는 것을 의미할 때도 쓰였다. 성전 경내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군중들이 대단히 분노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6:10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유다 방백들이 이 일을 듣고' 유다 방백들이라 함은 왕의 궁정 관리들이나
측근 참모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왕궁은 성전에 인접해 있었다.
이들은 소요 소식을 듣고 급히 조사하러 나왔으며,
그들 스스로 재판관의 위치에 앉아 심문하였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적절한 재판과정을 거치게 되었드며, 분노한 군중의 손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 대문 입구에' 재판은 보통 성문에서 열렸다(창 23:10-20, 룻 4:1, 잠 31:23).
왕의 관리들은 새문 어귀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이 문이 어떤 문인지를 정확히 알 길은 없고 다만 그것이 윗문에 있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20:2).
26:1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
'이 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니' 기소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재판관으로 행사하던 방백들에게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틀림없이 고소의 내용을 자세히 고하였을 것이고
예레미야에게서 들은 말은 하나도 빠뜨리지않고 말했을 것이다.
26:12 예레미야가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가 들은 바 모든 말로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예언하게 하셨느니라
'예레미야가...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예언은 스스로 꾸며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직접적이고도 가장 적절하게 변호한 담대성을 보여준다.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미 선포한 바 있는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기소자들에게 동정을 구하려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자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26:1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뜻을 돌이키시리라'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심판이 중지될 수도 있다는
조건적인 요소이다. 오직 회개만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회개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보내려고 작정하셨던 심판과 재앙을 돌이킬 것이다.
18:1-12에도 이런 조건적 원리가 선언되어 있는 바,
이런 원리는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돌이킬 생각을 하지않았다.
한편 '고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야타브'는 '선을 행하다', '은총을 입다'는 뜻도 내포한다.
26:14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하려니와
26:15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극한 위기의 순간에 예레미야의 담대한 신앙은 더욱 돋보이고 있다.
그는 범죄자들과 타협하거나 그들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여호와의 말씀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는 길을 택하고자 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자신의 생명이 대적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가 반드시 치르어질 것 또한 분명히 믿고 있었다(마 27:24, 25, 행 5:28).
26:16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왕의 관리들은 분노한 군중들을 뒤로 물리치고 선지자의 변호의 말을 받아들였으며,
종교 지도자들의 견해와 반대되는 위치에 섰다.
이 같은 평결을 얻어낸 것은 그 이후에 벌어지게 될 몇몇 장로들의
예레미야 지지 발언 때문이라기보다는
거침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종교적인 일에 가장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진리를 대적하는 반면,
오히려 정부 고관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진리를 두둔하고 나서는 광경은 매우 역설적이라 하겠다.
26:17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19절까지는 이 사건을 지켜보던 장로 몇 사람이
예레미야를 웅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훌륭한 변호였다.
변론은 이들의 지지발언으로 인해서 완벽하게 결말지어진다.
어떤 이는 선지자의 변호를 맡았던 자가 아히감(24절)이라고 생각한다.
26:18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모세렛 사람 미가' 장로들은 유사한 판례로서 모레셋 사람 미가의 경우를 제시하였다(미 1:1, 3:12).
그 당시 왕이었던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과 비슷한 메시지를
미가 선지자로부터 들었지만, 그의 말을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호와를 두려워하였으며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였다.
아마 미가는 이사야와 더불어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짐작된다(왕하 18:3-6).
한편, '모레셋'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남동쪽 37Km 정도의 지점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이는 미 3:12의 인용인데, 미가 선지자의 말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선지자들의 신탁들이 보존되고 있었으며
또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시온이 밭같이 경작함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밭을 경작할때 땅을 뒤집어 엎듯이
시온이 철저히 유린 될 것임을 뜻한다.
26:19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하니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맛소라는 '그들'을 단수로 기록하고 있으나 70인역은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
번역이나 문맥의 흐름상 복수로 표현되는 것이 더 적적하다.
그러나 이를 단수로 표현하게 되면 히스기야를 백성의 공식적인 대표로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26:20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선지자 우리야의 경우가 소개되고 있다.
그도 역시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다소 유사한 내용의 말씀을 선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야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다의 멸망을 전한 선지자가
예레미야 혼자뿐만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8마일 가량 떨어진
기럇여아림 출신이었다.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아살 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기브온 네 성읍들 중의 하나였고(수 9:17),
기럇바알(수 18:14) 또는 바알라로도 알려져 있다(수 15:9).
법궤가 블레셋에서부터 되돌려졌을 때 그것은 기럇여아림에 보존되었으며
그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었다(삼상 7:1, 2, 삼하 6장).
26:21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우리야는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으로 달아났다.
이는 담대히 대적들 앞에 나선 예레미야에 비해 나약한 선지자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예레미야와는 달리 애굽으로 좇아온 자객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26:22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엘라단이란 사람이 애굽으로 달아난 우리야를 인도(引導)받기 위해 애굽으로 파견되었다.
B.C. 2천년대의 조약문에는 정치적 망명자를 인도하는 협정이 종종 삽입되곤 하였다.
느고가 B.C.609년에 여호야김을 왕위에 앉혔기 때문에
우리는 애굽과 유다 사이에 군주-봉신 조약같은 것이 맺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느고는 여호야김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왕하 23:34, 35).
어쨌든 정치적 망명자를 인도하는 것은 상호간에 협조하도록 되어있으며
국제법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한편, 애굽으로 파견된 악볼의 아들 엘라단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가 읽혀질 때
그것을 들은 관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워 없애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기도 했다(36:11-26).
엘라단은 또한 유다왕 여호야긴의 모친인 느후스다의 부친이었던 것 같다(왕하 24:8).
아마도 그는 우리야 문제에 대해서는 왕의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6:23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 오매...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우리야가 예루살렘으로 호송되자 여호야김은 그를 칼로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선지자가 처형되는 장면이 구약에는 우리야 외에 스가랴 선지자의 경우가
한 번 더 기록되어 있다(대하24:20-22).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보낸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또 예레미야 같은 사람을 핍박하였던 것 등으로 볼 때
비록 구약의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수많은 선지자들이 순교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렇게 순교하였을 것이다.
한편 우리야의 시체는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골짜기의 평민의 묘실에 던져졌다(왕하 23:6).
'평민의 묘실'이란 일종의 공동 묘지와 같은 곳으로짐작된다.
부유한 자들이나 명망있는 자들은 자신의 개인 무덤에 묻혔으나
빈천한 자들은 후미진 곳의 공동 무덤에 묻혔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야는 죽은 후에도 수치를 당하였던 셈이 된다.
26: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아마 예레미야는 아히감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우리야의 운명과 같은 끔찍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아히감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곳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의 부친이었던 것 같다(40:5).
예레미야가 비록 최고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긴하나
여전히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예레미야에 대한 편견은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히감의 보호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