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품었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 YouTube
◈희망을 품었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행22:30~23:11 2024.11.10.
◑사도 바울도 완벽한 인격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유독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서 화끈한 분들, 또 그 성격 때문에 열정적으로 일하는 분도 있지만
사고 치기 쉽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 둘이 만나면 위험하죠. 불꽃이 튀기고 전쟁이 붙기도 합니다.
내가 성격이 굉장히 급한 데도, 아직도 큰 사고 안 치고 살았다면
주위에 좋은 사람이 있어서 그럴 겁니다.
완충 해주고 참아 주고 하는 온유한 사람들 때문인 거죠.
오늘 본문에 보면, 성질이 대단히 급한 두 사람의 만남이 나옵니다.
행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공회(산헤드린)는, 유대인들의 국회 같은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지만, 당시에 나름대로 자치를 하고 있었죠.
바울이 국회 같은 곳에 소환되었습니다.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이 딱 한 마디 하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입을 치라'고 명합니다.
재판정에서 이러면 안 되죠. 지금 재판 중이잖아요.
사정을 다 들어보고 판결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데,
시작부터 '그냥 때려라!' 그러는 거예요. 대단히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2
근데 그 다음에 성질 급한 사람이 또 한 사람 더 있어요. 바울이 발끈 합니다.
23:3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맞는 말이에요. 맞는 말인데 너무 강하고, 너무 발끈하는 반응이죠.
'회칠한 담이여!' 이거 굉장한 모욕입니다.
그래서 3절이 많은 주석가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 바울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이게 바울이 좀 잘못한 거 아닌가?'
그래서 바울을 이해해 주려고 하는 주석가도 많은데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점은,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위인전은 그렇죠. 일단 누가 위인이 되고 나면, 위인의 반열에 오르고 나면,
그의 어려서부터 모든 일들이 다 아주 이상적으로 윤색이 되죠. 포토샵 하듯이요.
그래서 위인전에 그려진 그 사람은, 본래의 그 사람 모습이 아닌 경우가 많아요.
여러분, 이순신 장군은 어려서부터 늘 정의롭고 욕맹했을까요.?
세종대왕은 젊은 시절부터 늘 지혜롭고 품위있게 늙었을까요?
제가 교수 하던 시절에, 애가 어릴 때에, 차를 몰고 온 가족이 전국을 많이 다녔습니다.
거의 주말마다 다른 지역에 가서, 집회, 세미나, 강의하고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딸을 고속도로에서 키운다' 할 정도였어요.
자연히 휴게소를 자주 들르게 되었죠.
휴게소에 가면, 책을 파는 코너도 있습니다.
거기 진열되어 있는 책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아이템이 뭔지를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창입니다.
그때 휴게소마다 막 깔려있던 책이
당시에 한국인으로서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신 분의 위인전 같은 책들이었습니다.
만화, 아이들 위인전 등 뭐 엄청나게 만났습니다.
제가 서서 책을 조금 펼쳐 보니까, 와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이런 분이 세상에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에요.
모두가 추앙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대통령 후보까지 됐잖아요.
그래서 귀국했는데, 몇 주를 못 견디고,
'아, 우리가 위인전에서 알았던 그 분은 아니구나'
나름대로 남다른 훌륭한 면이 많이 있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여러분 성경은, 어떤 인간도 위인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포토샵 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은 '바울 위인전'이 아니에요.
바울은 사실 처음부터 성질이 대단히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생각에 '아니다' 그러면 참지 못해요. 바로 행동에 나섭니다.
성도들을 죽이러 다녔잖아요. 그런데 예수 믿고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아요.
오늘 이 말씀을 보면, 23:3
'어휴, 아직 성질이 살아있네.. 그 성질 완전히 다 죽은 건 아니네..'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 'I am under construction,
나는 아직 인간이 덜 되었습니다. 나는 공사중입니다!' 라는 말이죠.
바울도 그럴까요? 네, 그렇습니다. 되어가는 중이에요.
빌3장에 보면, 바울 스스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열심히 달려가는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했습니다.
물론 우리 같은 사람들 수준에서 보면, 바울은 정말 훌륭한.. 까마득히 멀리 있어서
거의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바울에게도 뭔가를 배워야 할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래 참음, 온유함' 이죠.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권위는 본질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쪽을 보면, 이런 면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인데,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처신이 가벼운가?'
'이런 사람도 대제사장 대접 해줘야 되나?'
그런 고민이 이 본문에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사람도 대제사장이라고 존중해 줘야 하나요?
여러분, 이런 고민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목사가 목사같아야 존중해 주지...' 하는 쪽이 있고요.
반대로 '아, 그래도 목사님이니까 존중해야 됩니다' 하는 쪽이 있습니다.
집에서도 '아버지가 아버지 같아야, 아버지 대접을 하지...'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래도 부모님이니까 마땅히 대접해야지...' 하는 쪽도 있습니다.
과거에 국민들도 '임금이 임금 같아야 대접을 하지...' 하던 시절이 있었죠.
로마제국도, 통치자 때문에 내홍을 많이 겪었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요즘 수상이나 대통령은 선거때마다 바꿀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당시 로마 황제는, 20년이고 30년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버텨야 했습니다.
그것이 로마 제국의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이런 고민이 있는데, 사실 성경은 이것을
어느 한 쪽으로 딱 (답을) 정해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로마 황제는 네로 였습니다.
이즈음 까지만 해도 네로가 그런 대로 괜찮았습니다. 아주 흉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로마대화재 후, 이어진 기독교 박해 후)
이미 그가 얼마나 악명 높은 황제였는지, 이미 판명이 났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네로는 황제직에서 반란으로 쫓겨났고 죽었죠.
그 후에 수많은 황제들이 암살되고, 축출 되고 그랬습니다.
그 후에 심지어 '네 황제의 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AD 69년 한 해 동안에만,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안 등 4명의 황제가
잇따라 등극한 해였죠. 베스파시안이 등장해서 다시 안정기가 왔죠.
(*베스파시안 : 예루살렘 포위 공격 중에 황제가 되어 급히 귀국, 콜로세움 건축자)
황제가 바뀔 때마다 피 비린내 나는, 그냥 로마가 완전히 피로 물듭니다.
그러니까 '황제가 황제 같지 않으면 갈아 치워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공유되기 시작하자,
그러고 보니까 갈아 치울 인간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 인간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마음에 안 들고 위험하고...'
리더십에 대한 로마인들의 고민 가운데 이런 용어가 있었습니다.
'포테스타스' 라는 말이 있어요. 라틴어로 권력이고, Power
'아우토리타스'는 라틴어로 권위입니다. Authority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그 후에 나는 권위에 있어서는 내 동료들을 능가했지만
권력에 있어서는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여러분 세계 모든 정치인 중에서,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천재라고 일컫는 아우구스투스가 그랬어요.
'나는 권력을 확장하는 데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권위를 세워가는 데, 즉 도덕적 권위를 세워가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알았던 거죠. '통치자, 지도자의 덕목은
포테스타스 Power 이 아니라, 아우토리타스 Authority 가 중요하다' 그걸 알았습니다.
진정한 힘은, 무력과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법적 권력이 아니라,
(도덕적) 권위에서 나오는 영향력이라는 거죠.
예수님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아무 포테스타스, 아무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우토리타스 면에서는, 높은 권위가 있는 분이셨죠.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함일러라' 마7:29
'권위'는 헬라어로 '엑소시아' 입니다. 에크(out of)+우시아(본질)
영어로 out of the essence, 본질로 부터 나오는 것이 권위 라는 것입니다.
'권위 라는 것은 내가 폼 잡는다고, 뭐 연기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로부터 나온다' 라는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공회, 산헤드린은 국회 비슷한 곳인데
그래서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이 모였는데 권위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게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행5장에 산헤드린 나왔던 거 기억하십니까?
행5:33~34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그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듣고 크게 노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 굉장히 분노하고 흥분했던 상태입니다.
무슨 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그때 가말리엘이 등장합니다.
'(그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그가 험악한 공회 분위기를, 평화적으로 차분하게 잘 해결 하죠.
여러분 한 사람 가말리엘의 아우토리타스 authority가 있었기 때문에
그 권위 때문에, 산헤드린이 극단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원로 랍비 가말리엘이 죽자, 율법에 대한 존중도, 순결도, 경건도 함께 죽어버렸다'
한 명의 지도자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당시 유대인들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역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이라이트
당시에 산헤드린에 양대 계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미국 국회에도 민주당, 공화당의 양당이 있잖아요.
그렇듯이 산헤드린에도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종교지도자이자 동시에 정치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하죠.
'내가 이렇게 잡혀 있는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6
라고 말하자, 산헤드린이 두 파로 쫙 달라집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어죠. 그래서 부활을 언급하는 바울의 말을 듣고서,
호의적으로 반응했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두 계파 사이에 큰 분쟁이 생깁니다.
23:10절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산헤드린 공회 내에서 대단히 폭력적이고 긴박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죠.
앞서 에베소에서 군중들이 폭도로 번했는데,
그들이 모여서 뭐라고 웅성거리는데 '태반이나 왜 모였는지 몰랐더라' 하는
혼란스러운 군중들... 19:32
또 앞서 22장에 예루살렘의 군중들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그냥 사실도 잘 모르고 '드로비모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갔다더라'
뭐 이래 가지고, 막 사실 확인도 안 하고, '바울을 죽여라, 죽여라!' 흥분했던 거죠.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갑니다. 사람이 너무 많고, 그들은 군중이니까요.
'군중 심리'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본문은 산헤드린 공회 현장입니다. 여기는 달라야 되잖아요.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이 한데 모인 자리입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에요. 자기들을 주장에 의하면
대단히 영적이고 지성적인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품격있는 결과가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품격까지는 아니어도, 좀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야 되잖아요.
근데 결과는, 사람을 찢어놓을 것 같은 그런 엄청난 분쟁이 일어납니다.
재판 절차는 온데 간데 없고요.
바울이 산헤드린의 이 난동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얄팍하게 천박함을 보고,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바울 네가 로마에서 증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바울이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낙심할 때입니다.
그럴 땐 이제 우리가 사람인지라 비전이 흔들리는 거든요.
내가 어떻게해야 될지, 어디로 가야 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신의 입으로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했습니다. 19:21
바울은 밀레도와 가이사랴에서 '내가 결박당해도 예루살렘에 올라가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막 말리는 데도, 바울은 막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왔어요.
그 예루살렘 방문에 나름대로 그림이 있었고,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왔는데 사실은 실패한 것 같아요.
성전에서 폭동 속에서 잡혀 죽을 뻔 하고요.
찢겨 죽을 뻔 하면서 '야, 내가 이대로 죽는 건가? 이게 뭐지?' 싶었을 것입니다.
다음 날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이
'네가 로마에 가서도 증언해야 된다' 라고 확언해 주시는 거예요.
응답을 받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고, 인생의 인도함을 받을 때
한 번에 명확하게 딱 부러지게 응답이 오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이게 마치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수학 문제 풀 때 기억나십니까?
책 맨 뒤에 답은 있어요. 근데 그거 보고 '이게 답이다' 찾아내는 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문제 푸는 과정이 중요해요. 푸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름대로 궁리하고, 추측하고,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수학 문제 풀듯이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 이거 내가 잘못 가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잘못 선택했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 시행 착오를 겪어 가면서, 불안의 시간을 견디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가는 가운데.... 어느 시쯤에 오면 그게 분명해 지는 겁니다.
바울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 하여야 하리라'
23:11절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하나님이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에 가서 뭘 어떻게 해야하나요?
'예루살렘에서 한 것처럼 하면 돼!'
이게 굉장히 의아한 제목이에요.
왜냐면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자기 사역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로 괜히 온 것 아닌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군중들에게 자기 힘을 다하여 간증하면서 복음을 증거했어요.
근데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고, 폭력과 야유가 대신 돌아왔습니다.
한 번 더 기회가 있었죠. 공회에서 또 복음을 증거하려 했습니다.
근데 공회에서 괜히 자기 성질만 드러내고...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비참했겠어요. 개운치 않아요.
'내가 예루살렘에 왜 왔나, 뭐가 잘못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설교자들도, 설교하고 나서 개운치 않을 때가 있고,
때로 비참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디 가서 목사님들 대상으로 강의 하거나 설교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목사님들 모임에는 가급적 가려고 노력합니다.
목사님들 함께 교회를 세워 가는 게 중요하잖아요.
근데 제가 가서 강의나 설교를 하다 보면
'참 좋다. 여기 잘 왔다. 대박이다' 싶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힘들 때도 있어요.
당일 컨디션도 안 좋고, 뭔가 잘 안 맞는 것 같고,
막 말도 꼬이고요. '완전히 망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 제가 얼굴을 못 들 정도로 화끈거릴 때도 있습니다.
근데 언젠가 한 번은, 제가 그런 상태에 있는데
누가 와 가지고 '목사님 강의에 제가 정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노회에도 꼭 와 주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나는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저기서는 꼭 필요한 강의를 들었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망했다 생각하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사역을 오래 하다 보면,
그냥 아주 덤덤하고 그저 그렇고 매말랐던 사역인데,
그때 어떤 분들이 은혜 봤고, 삶이 변화되고, 인생이 변화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바울이 그랬다는 거예요.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사역이 완전 실패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바울한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 같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예루살렘 사역을 인정해 주신 겁니다.
이게 꼭 필요했던 일이라는 거죠. 참 잘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로마에 가서도 이렇게만 하라!' 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너 참 잘하고 있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사업을 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사업했는데 별 소득 없이 뭐 그냥 접었어요.
'내가 이거 왜 했냐?' 후회도 되고요, 때로 죽고 싶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때의 경험이 후에 발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별로 재미를 못 봤는데, 그 사업 통해서 누군가가 은혜를 입고,
누군가 도전을 받고요... 나도 그 때의 경험으로 큰 성장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요.
교회에서 뭘 섬기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뭐 사람들이 별로 알아 주지도 않고...
'야, 내가 이거 왜 하냐? 이 짓을 왜 하냐?' 힘 빠지고요.
근데 하나님은 '그거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야!' 하시는 겁니다.
'바울아, 로마에 가서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너처럼 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사도행전 성경이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은 '너희들도 바울 처럼 좀 해봐!' 이런 뜻도 있어요.
나는 스스로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너 참 귀하다!' 하실 때가 있습니다.
누가 맞아요? 물론 하나님이 맞습니다.
여러분, 사역의 의미, 내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내 느낌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의미 또한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때 세워집니다
권위는 헬라어로 엑소시아인데, 에크+우시아
즉 '본질로 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럼 그 본질이 어디 있는가? 입니다.
내가 가진 성품, 내가 가진 실력... 그게 본질이 아니에요.
본질은 하나님이시고, 권위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터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권위는 내가 가진 게 아니고, 내 스스로 세우는 것도 아니요,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되는 겁니다.
리더는... 자신이 스스로 목에 힘 준다고 세워 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일관성'이 거든요.
집의 가장도 마찬가지예요.
아빠가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아침 저녁으로 바뀌면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다?
물론 플렉스빌리티 flexability 바뀌어야 될 때도 있지만, 맨날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리더십 면에서 볼 때,
존경하는 대부분 인물들은 한결같습니다.
어려워도 타협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분은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을 한결 같이 살아오실 수 있었을까?'
'나는 저 분을 따를래!' 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그 분을 실제로 만나보세요.
그런 분들 만나서 실제로 깊이 이야기해 보세요.
쉽게 살아오신 게 아니에요. 그 분들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많았어요.
타협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근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개입 하셔서, 넘어가게 하시고, 넘어가게 하시고,
그래서 인내하며 온 것입니다.
그 존경받는 지도자들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크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랬어요. 포기할 뻔 했습니다. 넘어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밤에 나타나 그에게 말씀해 주신 것처럼' 23:11
하나님이 순간순간마다 나타나셔서, 바울을 격려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벼운 것으로 치면, 성질 급한 것으로 치면,
바울이나 대제사장 아나니아나 큰 차이 없어요.
본질은 Out of Essence,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줄 믿습니다.
모세가 백성의 지도자 잖아요. 모세는 아무 타이틀이 없습니다.
왕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세의 유일한 타이틀이 뭔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과 대면 하여 아시던 자요' 신34;10
하나님과의 관계가 리더십의 핵심인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고 이끌어 가시면서, 그를 리더로 세워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그랬잖아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겸손한 척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정말 절절히... 하나님이 그때 그때 그를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바울이 바울 될 수 없었습니다.
◑공회원들 중에도 복음이 파고들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어요.
씨앗이 깊이 파고 들 틈은 어디에나 있다는 겁니다.
이제 공회 사람들이 모였잖아요.
공회원 70명이 전부 다 모였잖아요.
전부 다 나를 대적하는 것 같아요.
말이 안 통하는 것 같고, 마음밭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소망' 한 마디를 말하니까, 공회원들이 쫙 둘로 나눕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아무리 모여 있어요. 똑같아 보여도,
그 안에 사람들의 생각은 전부 다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만, 그 중에 누군가가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살아 계실 때도, 그 바리새인 공의원 중에 니고데모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잖아요.
공회에 와서 앉아 있었지만, 그 마음에 갈급함이 있는 거예요.
아리마대 요셉, 예수님을 자기 무덤을 내어주어 장례 지내게 한 분도
부자이면서 공회원 이었습니다. 막15:43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혜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도매급으로 속단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은 다 이런 사람들이야, 포기해!'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퍅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생명의 씨앗이 심겨질 틈이 있는 줄 믿습니다.
공회원들이 다들 소리 지르고, 난장판인것 같지만
그래도 그 안에 새겨듣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다들 졸고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눈이 반짝하는 사람이 있고
가슴이 뛰는 사람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씨가 심겨지는 거예요.
오늘날 안티 크리스천 이라는 부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독한 안티스천들 중에서도, 그 안에 틈이 있고, 그 안에 고민이 있고,
복음의 씨가 심겨질 수 있습니다.
바울 스스로가 과거에 안티 크리스천 이었잖아요.
포스트 모더니즘도 그래요.
'아주 고약한 상대주의를, 우리가 조심해야 된다' 그 말이 맞지만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 일수록, 더욱 더 복음에 열릴 수 있는 이 오픈니스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페미니즘, 한국 교회안에 페미니즘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 페미니스트들 중에서 정말 험악한 주장, 너무 과격한 사람들 많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전부는 아니에요.
그 중에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있고요. 새겨 들어야 할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람들이 전도해야 될 대상인 줄 믿습니다.
바울도,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스토아파 사람들과 다같이 대화하고 전도했잖아요.
그들의 신념에 동의해서 대화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어떤 사람들이나 어떤 그룹을
도매급으로 매도해서는 안 돼요.
요즘 'MZ 세대' 라는 말이 있죠.
직장에서 MZ 세대라 하면, '자기 것만 챙기고, 조직을 위해서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여러분 자세히 보세요. MZ 라 해도 다 달라요.
그 중에 우리 어른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또 배려심 많은 친구들도 많이 있습니다.
혹 그런 태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 맥락을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MZ와 반대로 '꼰대' 라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꼰대' 라는 말 한 마디로, 어른들의 말에 다 귀닫아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너무 너무 괜찮은 어른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품었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수요일에 우리 교육부 미션 라이트 했습니다.
마지막에 '우리 오늘 눈물로 하나의 씨앗을 심는다' 함께 찬양부르는 가운데
하나님이 참 큰 은혜를 줄였습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린다'
여러분 교회 학교 교사 하는 거 쉽지 않잖아요.
특별히 요즘 아이들이 학교 선생님 말도 잘 안 듣는데...
여러분 교회학교, 교육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
한 나라의 내일을 보려면, 그 나라의 학교를 보면 됩니다.
한국이 지금 이만큼 성장했던 것,
저희들 어릴 때 그 시대에 정말 열심히 '교육 입국' 외치면서 했잖아요.
그 헌신적인 선생님들이 계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지금의 학교, 지금의 청소년들, 한국 사회의 미래 희망이 있을 것 같습니까?
이 황폐해진 교육, 너무 너무 심각합니다.
누군가는 희망의 씨를 심어야 될 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진정한 교육이 살아나는 자리는, 신앙 공동체 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자신이 품은 소망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8:20
여러분 사람이 희망이 생기면, 그 날부터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한 젊은이가 대충 살다가, 뭔가를 이루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십시다.
그날부터 삶이 힘들어지는 거예요.
일찍 일어나야 되고요. 친구들 놀러 갈 때 '나는 안 갈래' 해야 되고요.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고요. 시간도 돈도 아끼고 절제해야 돼요.
희망을 가졌다면 대가를 치를 줄 알아야 됩니다.
이제 곧 수능 시험 있잖아요. 대학 입시, 그리고 취업 준비하는 청소년들이
소망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순히 이번 시험에서 몇 점 더 받는 것,
이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한 발 앞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삶의 목표와 소망이 있을 때,
그들의 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가 가득할 줄 믿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바울이 사역이 실패한 것 같아서 고민할 때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11
그런데 디모데서에 보면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딤후4:17
딤4장은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하는 거예요.
'그때 그 날 밤 예루살렘에서, 내가 정말 인생의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던 날,
내가 눈물 짓던 그 날 밤에 하나님 나와 함께 하셔서
내 곁에 서서 담대하라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해 볼 때에, 23:11
그 후로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지금 내 인생의 마지막 시기인까지도
'주께서 내 곁에 서서 힘을 주고 계신다...' 딤후4:17
바울은 현재형으로 말씀하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나 복된 삶 입니까?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우리가 간증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 마지막에 증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내 삶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셔서' 23:11, 딤후4:17
여러분, 주님께 힘을 얻고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는 삶,
그래서 우리를 보고, 우리 자녀들도, 우리 후세들도
주님을 의지하는 삶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