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기적 거듭남 요3:1~8 -교정예정-
지난 한 주간 동안 (새생명 축제 기간에) 2천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새로운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것은 너무나 축복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같은 시대에...
강남이 아주 지성적인 곳이고 똑똑한 곳인데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전도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영혼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도입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구원받는 순간, 하늘의 새 예루살렘 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의 기쁨의 눈물이 강물처럼 되어 흘러넘칠 것이다.
천사들과 이미 앞서간 성도들은, 이 기쁨의 강물에서 헤엄치며 즐거워할 것이다.'
아마 너무나 놀라운 대잔치가, 천국에서 열린 것으로 확신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은 누구신가?" 시리즈 21번째 시간으로
<내 영혼의 기적 -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인, 소위 decisive한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거듭남에 대해서
좀 피상적으로 superficial 하게 껍데기만 아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오늘 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여러분들이 아시길 바라고,
또 지난주 '새생명축제'에 참여하여, 기독교 신앙을 가지셔서,
오늘 주일에 처음 오신 분도 이 자리에 계실 터인데
오늘 그분들에게, 또 이미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오늘 이 핵심 진리, The Born Again 거듭남의 진리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는 제자훈련하는 교회이고, 소그룹을 인도하는 순장님들이 계시는데,
소그룹에는 귀납법적 질문이 너무 중요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이제 한 가지 한 가지 질문을 드릴 때,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좀 확인(답변)해 주시면 좋겠어요.
여러분, 성경이 구약 신약 다 합해서 1189장인데
그 1,189장 31,102절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구절이 요3:16절이에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God so loved the world'
이렇게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나오게 된 배경이, 오늘 이 본문이에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어요. 요3:1
이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요?
1) 그는 유대교적으로는, 유대교의 지도자였어요.
소위 바리세인이고 경건한 사람이었어요.
2)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그는 사회 지도층이었어요.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어요. 70인밖에 안 되는, 국회의원이었어요.
3) 지성적으로는 그는 랍비였어요.
유대인의 랍비는 유대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사회 가운데서
최고의 지성인이었어요.
4)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그는 경제적으로도 큰 부자였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몰약과 침향을 백근이나 그냥 기부할 정도로
그 정도로 부자였어요.
한마디로 이 남자는 넘사벽 남자였어요.
아예 그냥 우리가 쳐다보지 못할 남자예요.
그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어요. 3:2
왜 밤에 찾아왔을까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분은 유대의 지도자였고 고위층이었어요.
근데 그 당시 예수님은 나이가 30대 초반에 목수 출신이고, 초라한 분이었어요.
유대인의 최고위층이, 아마 최소한 나이가 40대 중반은 넘었을 것이고,
그런 지도층이 젊은 목수 출신에 초라한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은,
대놓고 내가 간다고 크게 공포할 그런 일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밤에 조용히 찾아갔어요.
왜 찾아갔나요?
3:2절에 그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
우선 그가 찾아간 배경은, 자기 영적인 고뇌가 너무 큰 거예요.
겉으로는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고, 겉으로는 넘사벽 남자라도
그의 영혼은 핍절해 있었고, 그의 영혼의 마음은 처절했고,
그는 마음속에 텅 비었고, 공허했고,
소위 강남에 잘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겉으로는 다 잘 나갔지만, 속과 내면은 텅 빈 사람들이 많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지요.
자기 마음의 목마름과, 처절한 공허와, 절박한 심정이 너무 커가지고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그 일이었지만
영적으로는 그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내면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거예요.
마치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 사제였지만,
이 믿음의 문제, 거듭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그 계단에서 떼굴떼굴 구르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는가?'
나중에 마르틴 루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걸 말씀을 중심으로 깨닫게 되었지만,
그걸 깨닫기 전까지는 루터의 그 영적인 고뇌가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의 니고데모와 똑같았어요.
그래서 그가 찾아와 가지고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 그래, 너는 표적에 관심이 있구나. 그런데 표적이 아니야!'
니고데모가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
본문 요3장 앞에 2장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나오고
수많은 이적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오늘 니고데모의 시선을 완전히 새롭게 돌려주시는 거예요.
'너는 표적 보고 나왔냐? 그 표적은 이 땅의 육신의 차원이야.
표적은 이 땅의 차원이야. 표적은 이 땅의 현상적, 물리적인 것이야.
그게 아니라, 너는 영적인 눈을 떠야 돼, 영적인 시각을 새롭게 해야 돼!'
그러면서 3절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러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거듭남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 진실이지만
그러나 그 진리 가운데도 우리가 정말로 꼭 기억해야 할 진리들,
예수님은 그걸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원어로는 '아멘 아멘'입니다.
(*아멘은 히브리어죠. 신약을 기록한 저자가,
이 대목에서 히브리어를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아멘, 아멘' 그대로 음역한 거죠.
히브리어 아멘은, 헬라어는 물론, 라틴어, 영어, 한국어에 이르기까지 계속 '아멘'으로 쓰고 있죠)
'진실로, 진실로' 너무나 중요한 내용을 가르치실 때, 하시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본문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3절, 5절, 11절
그러니 본문 전체가 너무 중요하다는 뜻이죠. 마치 인증 마크와 같은 표현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5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고 그러지만, 교회안에 종교인들이 많아요.
그들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기독교를 문화처럼, 하나의 전통처럼 믿고 있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 (거듭나기 전까지) 하나의 과정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 '거듭난다'는 말이
오늘 이 본문에 헬라어로 '겐나오 아노센' 인데
겐나오(남).. '태어난다 born'
아노센(거듭) .. '다시 again'로 번역하는데,
아노센은 '위로부터 from above' 이런 뜻도 갖고 있어요. 주1)
여러분과 제가 실력이 있어가지고 이걸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태어다게 해 주셔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은
'너는 물리적인 것, 이 땅에 있는 어떤 현상적인 것, 땅의 일을 구하지만
이 거듭남에 관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이건 영적인 거야, 이거는 하늘의 일이야,
이거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야!' 이걸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일과 하늘의 일,
현상적인 것과 영적인 일,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
'이것의 차이를 네가 깨달아야 돼!'
니고데모는 이걸 못 깨달았어요.
땅의 일로, 현상적인 일로, 육신의 일로, 물리적인 일로 깨달으면서 살고 있었죠.
그래서 '아니 사람이 말이지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냐고?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날 수 있겠냐고?'
그렇게 니고데모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거듭남은 무슨 일이라고요?
거듭남은 전적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근데 니고데모는 이걸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거듭 나려면,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물었던 거죠.
수학에서 X가 있고 X3승이 있어요.
그런데 X와 X3승은 더할 수가 없어요. 왜 못 더하는가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땅의 일, 즉 1차원의 세계와
하늘의 일, 3차원의 세계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거듭남의 문제는, 철저하게 '영적인 차원'임을 믿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영의 눈을 떠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 거듭남은 전적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거듭남은 이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상식적으로,
돈이 많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억만금을 가지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금강산에 들어가고 도 닦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신학자였던 니고데모도,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학식이나 경륜이 높은 사람들도, 지성인들도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지 않고서는, 즉 육적 차원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영적 차원이고, 신비한 거예요.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 가운데서도 이 '거듭남'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분도 있어요.
육적 차원으로, 지성적 차원으로, 물리적 차원으로, 현상적 차원으로만 이해하니까요!
거듭남은 '겐나오 아노센' born above,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듭남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영적 눈을 갖는 것이고
거듭남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은 다 성경적 근거가 있어요.
거듭남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썩을 육신이 썩지 않을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에요.
◑자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나요?
거듭나는 길을 주님이 이렇게 제시해 주신다.
'너는 지금 표적을 보고, 현상적인 거, 물리적인 거, 이 땅의 일만 생각하는데
아니야 이거는 하늘의 일, 영적인 일, 영원한 것이야!'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거듭나는 것일까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는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두 가지, 즉 물과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정통신학 해석은, 물은 회개를 말하고, 성령은 성령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에서 '성령'의 의미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고백하게 되죠.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아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진리로 받게 되고, 기적들도 믿게 되는 거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법칙을 만드신 분이라서, 법칙을 초월할 수 있으세요.
그래서 초자연(기적)적인 세계가, 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영으로 거듭나야 되는 거예요.
▲'물과 성령'에서 '물'의 의미
'물'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주2)
다음 주에 학습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세례의 핵심은 뭡니까?
세례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회개가 세례의 핵심이에요.
회개가 무슨 뜻인가요? 세례는 회개를 상징하는데,
회개는 뭐냐? '나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 나는 영적으로 행복하지 않다.
나는 너무 처절하다. 내 영혼은 너무 공허하다.
따라서 내 영혼의 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내 영혼의 문제는, 구원자가 오셔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가능하다'
그걸 깨닫는 것이 회개 예요.
그걸 깨닫고 나아가는 것이 세례를 받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파산자이고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내 힘으로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고
따라서 나는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 상태이기 때문에,
'주여 내가 파산 상태인 걸 고백합니다' 라는 그것이 회개인 것이에요.
내 힘으로는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마치 큰 낭떠러지 절벽에서 아래로 떨어졌는데
죽지는 않고 절벽 나뭇가지에 내 몸이 걸려있는 거예요.
지금 떨어져 죽기 직전이에요.
지금 내 힘으로는 안 돼요. 누군가가 위에서 와서
그 절벽에 걸려있는 나를 딱 집어서 올려야 되는 거예요.
나는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나를 집어서 올려야만 내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그것이 회개입니다.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위로부터 손이 내려와가지고
번쩍 들어올려줘야 하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양심의 가책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양심의 가책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으로 끝납니다만
회개는 자신의 잘못이, '내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내가 뭘 잘못했다는 차원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를 깨닫고서,
그래서 회개는, 자기 절망과 자기 무력함을 선언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구원의 소망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영혼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세상적으로 아무리 잘 나가도, 늘 자기 영혼에 슬픔이 있어요.
뭔가 행복하지가 않아요.
세상에서 잘 나가도, 강남에서 잘 나가도.. 그 영혼이 주름져 있어요.
왜냐하면 영혼의 문제가 해결 안 되고 있으니까!
영혼의 문제는 내 힘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오늘 이 강남에 사는 수많은 영혼들, 주름져 있는 영혼들이,
성령의 다리미로 딱 반듯하게 펴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3:6~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너는 육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올라가라'
'네가 현상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올라가라'
'물리적 차원에서, 땅의 차원에서,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가라'
'그래서 너가 이렇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물질 세계와 영의 세계를 다시 확인하신 후에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의 역사도 마치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동일하다는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공간에,
마침 그때 바람이 불었던 것 같아요.
자, 바람 자체는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영적인 세계이기 때문이죠.
거듭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실체적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센스(감각) 하는 것처럼,
거듭남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중요한 결론이 있습니다. 이게 제일 소중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거듭남이라는 것은, 회개를 통하여 거듭난다고 했는데
참된 회개는 어떻게 하는가요?
회개는 내 몸을 불사르고, 내가 엉엉 울고... 그런 과정도 있겠지만
저도 그런 과정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진짜 거듭났다고 느껴졌을 때가 언젠가요?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신실한 주의 종들,
지난 200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거듭났을 때
거듭난 사람들이 가졌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가요?
'아!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내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구나!' 라고 회개할 때
그것이 거듭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달아야, 참된 회개를 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뭘 깨달아야 된다고요?
'거듭나려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달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오늘 여러분이 예배 마치고 나가면 식사하러 가실 거죠.
그건 육신의 양식을 드시는 것이고,
오늘 진짜 중요한 영의 양식을 드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달아야 거듭날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이걸 사도 바울은 깊이 깨닫고,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뭔가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 처절한 사랑을 내 것으로 깨달아야, 내 것으로 깨달아야,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날 수가 있다... 이 말이에요.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적당히 알면 안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누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는가? 누가 나를 사랑하시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거예요.
이해가 안 가지만, 죄인인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과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 십자가가 사랑과 고통이라는 걸,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우리는 밑천이 우리는 거듭나지 않으면, 육의 사람만으로 끝나면,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이거는 엄청난 문제예요. 여러분 기껏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육신의 삶만을 위하여, 그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겠어요?
나는 오늘 여기서 영적의 눈을 뜨게 된 거예요.
여러분 앞으로 30년 40년 더 살 수 있고,
어떤 젊은이들은 60, 70년 더 살 수가 있고, 인생은 길면 100년인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 100년만을 위하여
그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겠느냐? 이 말이에요.
오늘 우리는 개 돼지 같은 짐승이 아니에요.
여러분 개, 돼지는 이 땅의 삶으로 끝이 납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개, 돼지를 위하여
소나 양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말이 없어요.
성경은 우리, 영적 존재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해요.
육신의 표적(현상)과, 이 땅에 몰입되어 사는 우리를
영의 눈을 뜨게 하시사
'너희들은 육적인 존재가 아니야, 너희는 육신의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가 아니야,
허물과 죄로 가지고 그대로만 살면, 너희는 육신적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아!'
'너는 영원한 존재야, 인간만 그런 거야!'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기가 막히게도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는 백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받으신 것이에요.
난 여기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다시요. 30년, 40년, 50년, 100년을 위해 주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원을 위해 주님이 돌아가신 것이에요.
주님의 처절한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도 있다는 뜻이에요.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이 있다는 것은, 지옥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인간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에요.
십자가에 피 흘린 처절한 그 사랑은, 너무나 놀라운 거예요.
우리의 이 땅의 삶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에요.
영적인 눈이 열려 이 진리가 깨달아지는 순간, 우리는 회개하게 되는 거예요.
주님은, 그게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십자의 처절한 고통을 앞에 놓고
그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선언하셨습니다.
이걸 육신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으로 깨달아가지고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사건을,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가 비로소 '거듭났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죄를 지어가지고 범죄해가지고 형벌을 받는다' 그런 말도 맞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것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주님께서 처절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이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이에요.
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거부했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사랑에 무지하다든지
이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막 이렇게 접근하시는데
그걸 우리가 모르고, 그걸 거부하고, 그걸 반항하고,
그걸 무지해서 안 믿고 그럴 때...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는 것이에요.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이여, 제가 수많은 질문을 주고받고 싶은데
그러나 시간의 제한 때문에,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이 왜 그 처절한 사랑의 십자가를 지셨을까?'
'우리의 영원한 멸망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주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그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미천한 우리를 사랑하신 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만약 지옥이 없다면, 십자가는 그 의미를 잃는 거예요.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의 과잉 반응이 될 뿐이에요.
'이 땅이 삶의 전부인데, 그걸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
그건 너무나 아닌 거예요. 그건 너무나 과한 거예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는 것은, 지옥이 없다면, 아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하나님과 단절되는 십자가의 저주를
주님이 받으실 필요가 없는 거예요.
갈3장에 보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고 했어요. 갈3:13
그래서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이 있다는 증거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 땅에서 사랑의 십자가로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셨습니다.
3:16b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유명한 3:16절을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랑을 거절하면, 우리는 거듭나지 아니하고
이 사랑을 받으면, 이 사랑을 우리가 그대로 믿으면, 우리는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왜 멸망했습니까?
예수님 팔아먹은 가룟유다가 왜 망했습니까? 왜 영원한 행벌을 받았습니까?
가룟유다가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것도 물론 나쁜 거지만,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셔가지고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셨는데,
가룟유다는 자기의 의, 자기 판단, 자기 정죄감, 자기 죄의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가서
거기서 뱅뱅뱅 돌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영적인 문제를 못 본 것이에요.
가룟유다가 왜 지옥에 갔는가요? 회개를 못해서 정도가 아니에요.
그 앞서 그가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에요.
여러분 베드로는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베드로도 똑같이 예수님 부인했습니다.
아주 큰 잘못입니다. 그 베드로가 어떻게 회복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진짜로 사랑하느냐?
너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기가 막혀요. 주님이 베드로를 향한 그 사랑을,
다시 주님이 베드로를 향한 그 사랑을, 베드로가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는 구원 받은 것이에요.
오늘 이 자리에서, 혹시나 기독교의 깊은 진리를 모르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주님의 이 사랑을 거부하는 분이 아무도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의 눈이 열리면, 깨달아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날마다 울어요. 왜 우시는가요?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여 울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수많은 눈물이 있어요.
고통이나 상처, 질투나 수치, 절망과 서러움, 억울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어요.
기쁨과 감격의 눈물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언제 제일 섭섭한가요?
자기 자식을 아예 생명을 다해 사랑해 주는데도
자식이 고개 바짝 들고 '엄마가 뭐 날 사랑하냐?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자식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때, 엄마의 가슴은 무너지는 것이에요.
성경의 진리 중의 진리 중에 하나가
눅15장의 '돌아온 탕자의 얘기'인데
돌아온 탕자는, 자기 아버지 밑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자기 삶을 구속하고, 자유를 없애고, 아버지 밑에 있는 것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유산을 받아가지고 저 멀리 가서,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했어요.
그런데 보니까 자기의 삶이 엉망이에요.
오늘날도, 자기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인생은
그 누구도,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인간의 그 깊은 슬픔을, 그 공허함, 그 고뇌를
그 영적인 파산 상태를 누구도 해결할 수 없어요. 마치 탕자인 거죠.
그 어떤 부자도, 그 어떤 지식인도, 그 어떤 권력자도 절대로 해결 못해요.
그리스도의 처절한 사랑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나니까
'아이고 내가 이 아버지의 사랑을 왜 내가 몰랐지?'
'내가 이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왜 살았지?'
'나의 이제 남은 인생, 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야지!' 라는 그 순간,
그 돌아온 탕자는 거듭나게 된 것이에요.
오늘 우리는, 죄를 지어서 우리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이 처절한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하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것이에요.
▲이틀 전에 WEA 월드 이벤저리컬 얼라이언스, 세계복음주의연맹이
내년 10월 27일 날 총회를 하려고, 어제 출범 예배를 드렸는데
한국교회와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이 순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무장되어
성경의 절대적인 진리,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공산사회주의, 문화막시즘, 앤티기독교...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무슬림에게 우리가 곧 따라잡힐 판이에요.
이거 20~30년만 지나면 다 따라잡힐 판이에요.
공산주의, 문화막시즘, 앤티기독교, 포괄적 차별금지법, 동성애 확산,
이런 것을 이 순전한 복음으로 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의 수많은 과오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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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거듭난다' 헬라어로 두 단어죠. 겐나오 아노센
겐나오.. '태어난다 born'
아노센 .. '다시 again'
아노센은
1) '위로부터 from above' 이런 뜻도 갖고 있고,
2) '처음부터 from the first, from the beginning, from the very first' 라는 뜻,
3) '새롭게 anew' 등의 뜻이 있죠.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
-아예 처음부터 from the beginning 태어난다
-다시 새로 태어난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주2)
'물'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다른 단어를 가지고 하나를 강조한다' 이런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물도 성령이고, 성령도 성령이다'
크게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