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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이 된 종

LNCK 2024. 11. 2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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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7일 "자유인이 된 종(요한복음 8:31~36)"  - YouTube

자유인이 된 종                요8:31~36        

◑갇힌 자로 살아가는 현대인들

오늘은 글을 하나 읽어 드리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난 밤이면 잠을 설쳐.  
절벽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꾸지.  
겁에 질려 잠에서 깨. 

가끔 내가 어디 있는지 기억하는 데 시간이 걸려. 
총을 구해 식료품 점에서 강도질을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김에 지배인을 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보너스로 그런 바보 짓을 하기엔 난 너무 늙었어. 

난 여기가 싫어. 
항상 두려움 속에 사는 것에 지쳤어.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여기 있지 않기로 했어. 
나 같은 늙은 도둑놈 하나쯤 사라진다고, 소란을 피우지는 않겠지...」 

이것은 1995년에 만들어진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한 대사입니다. 
수감된 지 무려 50 년이나 지났을 때, 브룩스 노인은 가속 방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국가는 그에게 허름한 방 하나와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는데, 
그리고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50년 만에 만나는 바깥 세상에 질리게 되고, 
극복할 수 없는 더 큰 감옥 안에 갇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위에서 읽어드린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과 하직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가 마지막으로 머문 낡은 숙소의 대들보에 
자신이 이 땅에 존재 했었다는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 흔적은 '부룩스 여기 있었다'하는 짧은 문장 하나를 새겨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목을 매서 세상과 아직 하게 됩니다. 
몸은 자유를 얻은 것 같은데, 
그의 영혼은 여전히 더 큰 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브룩스의 슬픈 이야기는 
어떤 면으로 모든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남에 의해서 갇히고, 
어떤 때는 어리석게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둘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감옥이 되는 것이죠. 

▲이것을 깨달았던 유안진 교수는 '내가 나의 감옥이다' 라는 시에서 
그런 내용을 읊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앞 부분만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가) 한 눈 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 눈을 팔았는지 
무엇에 두 눈을 다 팔아 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 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이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자신이 자신을 가두며 살아온 나날을 탄식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다른 이에 의해서 갇히든지,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가두든지, 
갇힌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갇힌 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풀려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만 
"자유"라는 입장에서도 성경을 읽어 내려갈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애굽에서 430년을 살던, 
그러면서 노예로 전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보내셔서 풀어주시는 이야기, 그 출애굽의 이야기가 
구약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는, 출애굽을 근거로 한 것이고, 
무수한 선지자들이 등장해서 백성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그 출애굽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라는 이들의 정체성은 
노예로 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백성... 이게 그들의 정체성 입니다. 

▲신약성경에 오면, 예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자유'라는 주제로 읽어 내려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8장에도 그와 같은 (갇힘, 자유) 내용들이 나오고 있는데, 
본문 요8:31~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 주님의 말씀 속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알면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대학인 연세대학교는 요8:32절에 나오는 '진리와 자유'를 모토로 
학교를 건학한 대학이죠. 

그래서 1957년에 제정된 연세대학교 정관 제1조가 이렇습니다. 
'이 법인은 진리와 자유 정신을 체득한 기독교적 지도자의 양성을 위주하여 
기독교 교의에 조화하고 대한민국의 교육 이념에 의거하여 
고등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정관 맨 앞에 '진리와 자유'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게 1조입니다. 

교육을 하는 학교가 왜 진리와 자유를 모토로 내 세웠을까요? 
여러분 그것은,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고, 교육은 진리를 전달하는 것인데 
진리를 알면 자유를 얻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예전에 우리 나라가 어려웠을 때 
학교를 다니시지 못한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모르면 굉장히 불편 하시잖아요. 

길거리에 나가도 글을 몰라서 버스를 잘 타실 수가 없고,
자녀들이 편지를 보내도 읽으실 수가 없어서, 타인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귀로 들었습니다.

이게 모르면 불편한 것이고, 제약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교육을 받으셔서 글을 깨치면, 자유롭게 어디든지 가실 수도 있고, 
의사 소통을 하실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알면 그게 곧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찍부터 깨달으신 이 땅에 오신 많은 선교사님들께서는 
예배당을 짓고 예배만 드린 게 아니라, 많은 학교들을 세우셨습니다.
무수한 기독교 학교들이 이 땅에 세워졌죠. 
그래서 우리 민족의 문맹을 깨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사학들과 성경책, 
이것이 우리 민족의 문명을 깨뜨리는 데 얼마나 공로가 많은지... 
그에 대한 논문들이 벌써 많이 나와 있습니다. 

어려워서 학교에 못 가셨던 어른들도,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성경을 접하게 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글을 깨친 그런 예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기독교 학교는 단지 지식만을 전달하지 않고, 
진리와 자유를 얘기할 때, 거기 '기독교적 진리'라고 하는, 
일반적 진리를 넘어서서, 왜 '기독교적 진리'라고 표현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그거보다 더 근본적인, 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그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 복음이 아니면, 
그 근본적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 앞에 '기독교적' 진리가 자유를 가져온다고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중략   '자유케하는 율법에 갇혀서 살았던 유대인들'       주1)

▲근데 여러분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이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이 
자신이 감옥에 갇힌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이 무지가 무서운 거겠죠.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무서운 것이고, 
갇혀 있는데도 '난 갇힌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 이 무지가, 
자기를 잘 모르는 이 무지가...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면,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언제 우리가 종이 된 적이 있습니까?' 

8: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여러분, 이 사람들은 굉장한 선민 의식에 사로 잡혀 있어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데 
아니 언제 우리가 누구의 종인 적이 있었느냐?' 

▲여러분, 이 사람들의 '우리는 종이 아니라'고 하는 자기 변명이 옳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건 무서운 착각이죠. 

왜 이들이 종이 된 적이 없습니까?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고, 그 대부분의 기간이 애굽 사람들의 종, 노예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북왕국, 남왕국으로 갈라져 있다가 
북왕국은 앗수르에, 남왕국은 바벨론에 멸망해서 포로가 돼서 다 끌려갔는데,
그게 종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린 종이 된 적이 없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저는 모르니 알려주세요' 라고 하면, 희망이 있고 
갇힌 사람이 '저를 좀 꺼내 주세요' 그러면 희망이 있는데, 

갇혀 있는 사람이 '우린 갇힌 적이 없어요' 
종인 사람이 '우린 종 된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하니까 
이 얼마나 이상한 왜곡된 편견의 감옥에 그들이 갇혀 있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왜곡된 선민 의식은, 그들을 옥죄는 감옥이었어요. 

△그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랍비가 어린 아이들을 불러놓고 
광주리 두 개에, 하나에는 아주 좋은 무화과가, 
또 다른 광주리에는 썩어서 못 먹는 무화과를 보여주면서 
'얘들아, 너희는 어떤 걸 선택 하겠느냐?' 

그러면 아이들이, 당연히 좋은 무화과에게로 손이 가겠지요. 
그러면 아이들을 칭찬해 줍니다. 
'맞아, 바로 그거다.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이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을 선택했느냐 하면, 
우리는 좋은 무화과와 같고, 
다른 민족은 다 썩은 무화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거다. 
우리 민족은 특별하다.' 

이렇게 왜곡된 선민의식을,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 속에 심어 준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까, 자기들은 종 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갇혀 있는데도 
자신이 갇혀 있는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거, 
이게 얼마나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사람에게 있는 6가지 감옥
심리학자 케이치프 노이드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힘들다고 하네요.

첫째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주변의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신 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즘은 '연예인 병'이라고 새로 생겼습니다. 정말 못 말리겠지요?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친구가 없습니다. 이거 거의 습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와 대화하는 말을, 스스로 녹음을 해서 한 번 들어보십시오.
거의 비판, 비난, 가십, 흠집내기, 돌려까기, '카더라' 일 것입니다.
제일 피해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 말을 하는 자기 스스로 결코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감옥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도 
의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즉, 이들은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현재가 더 좋은데 말이지요. 
이렇게 과거에만 연연하다 보니 현재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가 없지요.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이 속담이 꼭 들어맞는 감옥입니다. 
즉, 내 떡의 소중함을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감옥들에서 탈출할 수가 있겠지요.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34절에서 하십니다.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여러분 아까 제가 '더 근본적인 인생의 감옥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걸 말씀하시죠.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너희들은 너희가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너희 속에 있는 그 죄가, 이미 너희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가두고 있고, 
묶어놓고 있어서... 너희들은 죄의 감옥에 갇힌 죄의 종이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세상의 고통은 다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 죄성은 우리 안에 '욕망'이란 모습으로 고개를 듭니다. 

참 욕망은 무서운 겁니다. 
이 욕망이 성취되기까지, 그 욕망을 성취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개인과 개인이 충돌하는데, 심지어 가족끼리도 충돌하고, 
형제 자매끼리도 충돌하고, 사회가 갈라져서 충돌하고, 
국가 간의 충돌이 일어나면 우크라이나 같은 데서 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뒤섞여 살면서 명예와 권력과 부를 얻고 
뭔가 자신이 원하는 걸 쟁취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요. 
그게 다 우리들의 갇혀 있는 모습이죠. 
마치 갇혀 있는 감옥 안에서, 요만한 빵 하나를 더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나마도 얼마 안 있으면 병 들고... 
병든 몸으로 그나마도 얼마 안 있으면 죽는 거지요. 

롬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 이라고... 그래서 모두가 그 두려움 속에 사는데,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 떨면서, 
거기 또 갇혀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겹겹이 쌓인 감옥 안에서 
지금 갇힌 것처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거죠.  

어떻게 좀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을까요? 
거기서 좀 훨훨 털고 날아 오르는 방법이 없을까요? 

◑황금 새장 속에 갇혀사는 새

여러분 어떤 왕자가 아주 희귀하고 예쁜 새를 한 마리 선물 받았습니다. 
이 왕자는 새를 보고 너무 기쁜 나머지, 
새를 황금으로 만든 고급스런 새장 안에다 넣었습니다. 
'너는 행복할 거다. 이 세상에 황금 새장에서 사는 새는 너 밖에 없을 거다'

그러면서 새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트윗트위 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이 트윗트위는 황금 새장 속에 사는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날도 '황금 새장'이 많잖아요. 
굉장한 저택, 굉장한 부귀영화가 황금 새장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 안에 사는 데도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새는 애걸복걸 했습니다. '제발 나를 풀어 주십시오' 
그래도 이 왕자는 거절했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계속해서 거기 있으면 좋은 먹거리를 주겠다' 

그래서 새는 이렇게 애원합니다. 
'저에게 그러면 마지막 소원 하나가 있는데 그거라도 들어주세요' 

'그게 뭐냐?' 
'우리 가족들이 제가 없어진 걸 알고 굉장히 마음을 졸일 텐데, 
왕자께서 숲속에 가셔서 제 가족들을 찾아서 
제가 황금 새장 안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 한 마디만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왕자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거는 내가 해줄 수 있다'고... 
그래서 왕자는 숲에 가서 트윗트위의 가족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 가족들이 나무 가지에 이렇게 줄지어 앉아 있는데 
'내가 잘 돌보고 있고, 으리으리한 황금 새장 안에 모셔 놨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트윗트위의 언니가, 높은 가지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꼼짝도 하지 않아요. 

그걸 보고, 이 왕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죽었구나!' 
그래서 왕궁으로 돌아가서 새장 안에 있는 트윗트위에게 
'내가 네 안부 소식을 전했더니, 어찌 된 일인지 
언니가 글쎄 땅에 떨어져 죽었단다' 

이렇게 말을 전하는 순간 트윗트위도 새장 바닥으로 툭 떨어지더니,
꼼짝을 안 하는 거예요. 

왕자는 '아이고, 내가 괜히 언니가 죽었다고 말했나?
얘가 충격을 받아서 죽었나 보네...'하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땅에 묻어 주기 위해서 
트윗트위를 새장에서 꺼내서, 두 손으로 받들어 들고가는 순간
트윗트위는 파다닥 하면서 날아 올랐습니다. 날아 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자님, 감사합니다. 제 언니는 죽은 게 아니라 
이렇게 하면 살 수 있다는 길을 제게 알려준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새 장을 벗어난 새 이야기>라는 
책 속에 나오는 한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리처드 범버란트 목사님은 나치와 루마니아의 공산주의자들 밑에서 
14년을 고통받은, 20세기의 살아있는 순교자 라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말해주는데 
"죽으면 산다"고 하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툭 떨어져서 죽은 것처럼 되니까, 새장 문이 열리게 되었잖아요. 

우리는 죄 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있고, 
그것이 욕망이 되어서 우리를 또 가두고 있고, 
그 욕망은 아집이 되기도 하고, 어떤 자기만의 주장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감옥 안에 우리를 가두고 있는데, 

그것(죄, 욕망, 아집, 주장)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안의 죄, 욕망, 잘못된 고집, 편견, 이상한 것들, 
그런 것들을 죽일 수 있으면... 그 순간 그 묶인 데서 풀려 져서 자유를 얻고 
살게 된다고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 자신의 얘기입니다. 
자신은 그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거기가 새장 같은 곳이죠.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자유를 잃었구나. 내가 여기서 설교를 못하고, 성도들을 돌아볼 수가 없고, 
내가 자유롭게 산책도 못하고, 도대체 이 지하 감방에, 빛도 없는 곳에 갇혀서 
앞으로 어떻게 계속 사나?'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은 자신의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그 욕망, 혹은 하고 싶은 거, 

또는 어떤 분노... 이걸 다 죽이기로, 자기 손에서 놓기로 결심했습니다. 

'괜찮아.. 여기도 괜찮은 곳이야..'하면서 모든 것을 이렇게 내려 놓았어요. 
가슴 속에 끓어오는 분노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더니, 놀랍게도 하나님의 빛이 그 가슴에 비취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그 캄캄한 감옥에서 경험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한 없는 자유를 경험하게 됐어요. 

그 작은 감방이, 주님을 모신 성소 바뀌는 것을 경험하였어요. 
그의 영혼이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그를 가둔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가 뭔지' 
이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죽으시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셨어요. 
'죽어야 산다'고 하는 걸,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 모습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과 같은데 
그렇게 되니까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이 땅에서 낮아지셨어요. 
그랬더니 다시 만 왕의 왕이 되셨어요. 
'낮아지면 높아진다'고 하는 역설적 진리가, 그 속에 있는 거죠. 
'버리면 얻는다'고 하는 역설적 진리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면 산다'고 하는 이 엄청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욕심,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주장들, 
내가 추구하던 그 뭔가 그걸 다 내 손에서 놓고 죽일 수만 있다면, 
우린 그 사슬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여러분을 몰아붙이는.. 여러분의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그게 도대체 뭘까요? 그게 바로 내 스스로 갇힌 '감옥'입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과감하게 그것을 손에서 놓아보시길 바랍니다. 
거룩한 포기를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순간,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속에서 끓어오르는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이 그리스도 인입니다. 

갈5:24절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다 내려놓고 못 박아 죽이고 나면, 창공을 날아 오르는 새처럼, 
그제야 우리 영혼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8:34절에서 '우리가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근원적으로 죄라고 하는 감옥에서 
그 묶인 것에서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죠. 

8:35~36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죄와 욕망과 온갖 것의 종처럼, 
감옥에 갇힌 죄수 처럼 살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해방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아들은, 종을 해방시켜 줄 권리가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풀어주시면, 우린 그 날 풀려날 수 있어요. 

가장 심각한 게 '죄'라는 건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풀어주시는 분이세요. 어떻게? 
당신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다 씻 쓰시는 그 순간!
우리는 해방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죄에서 풀려나는 그 순간, 더 이상 죽음이 우리 위에 왕 노릇 하지 못하니 
죽음에서 해방 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더러운 욕망의 삶에 묶이지 않고, 거기서 해방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종이었지만 이제는 자유인 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내 스스로 나를 가둔 그 사슬을 다 포기하고, 
이제는 우리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남은 인생, 나의 무거운 짐,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나오시면 
'수고하고 무거운 진진 자들'의 짐을, 벗겨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실 것이고, 자유롭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많은 세상에 살고는 있으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도 배우게 될 것이고, 
좋은 게 많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도 많으나, 
거기 메이지 않고 살아가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더 이상 종으로 살지 말고, 가장 자유로운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여러분들의 남은 인생을 살아 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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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속에서 자유한 사람

구엔 반 투안 베트남 추기경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성령께서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을 포함하여 많은 수인囚人들은

오로지 교도소에서 풀려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늘 언젠가 다가올 그날만 무작정 기다렸던 것입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구금당하셨던 존 월시는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르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된 뒤에 하신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삶의 반평생을 기다리는 데 소비했다.”

 

그러나 위 말을 깊이 묵상한 후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마음을 바꿔먹고 이렇게 다짐하셨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그러나 감옥에서 어떻게?

고뇌하던 그 순간 성령께서는 구엔 반 투안 추기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란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했던 것처럼 하여라.

다른 공동체들에 편지를 써서 보내라.”   - 지금 이 순간을 살며중에서

 

부모를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정신분석하자로서는 선구자적으로 사랑하는 법에 대해 집중했습니다.

 

그만큼 사랑을 많이 실패해 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사상을 공부했지만

모든 것을 성적인 충동으로 해석하려는 그와는 다르게

사랑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배우고 노력하면 습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부모를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 생각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지나치게 통제하려는 어머니와

약하고 죄책감이 많은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통제하려는 데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했고,

아버지는 자녀의 종교교육을 통해 자신의 죄책감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는 여러 번의 사랑과 결혼의 실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아버지는 유태인이었음에도 와인 장사를 하였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율법을 아버지가 스스로 어기면서도 술장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성경말씀과는 다르게 한 자녀만을 두었습니다.

그 죄책감으로 유일한 자녀인 에리히 프롬에게는

더욱 더 종교교육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에리히 프롬은 탈무드 학자가 될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나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묶여있음을 깨닫고

유대교에서 절대 금기시된 돼지고기를 먹는 예식을 통해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창의력이 솟아나기 시작했던 때는

바로 매우 엄격한 삶을 강조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였습니다.

 

어쩌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자녀에게서 자신의 영향력을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아버지로부터 떠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지만 그도 어려서부터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애정에 집착하고 어머니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삶 자체가 어머니를 만족시키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자랑이 유일하게 그 아들 하나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타인의 애정을, 타인의 욕구와 함께 받아들이기 때문에

애정을 받으면 반드시 타인의 욕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그 욕구를 채워주려 해도 상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랑은 부모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한풀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또 다른 엄마와 아빠를 찾는 과정이.. 결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연상의 여인들과 사귀고 결혼하고 또 실패하면서

결국 자신이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여인들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Erich Fromm - The Art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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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중략된 부분 '율법에 갇혀 있었던 유대인들'

요8장을 1절부터 읽어보면, 갇혀 있는 틀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이야기해 주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 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옵니다. 

이건 소문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잡힌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될지를 예수님께 질문 하죠.

이 사람들이 답을 몰라서 질문하는 것입니까? 
이미 그들 마음 속에는 여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요8:5절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것이 이미 그들 가슴 속에 박혀 있는 답이고, 
손에는 벌써 돌을 다 들고 모여든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묻거든요. 

여러분! 여기서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 들이 
얼마나 뛰어 넘기 어려운 '율법' 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읽었던 유안진 교수님의 시 속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한 눈만 파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두 눈을 다 어디에 팔았는지... 
자기 자신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는 보지 못하고, 
눈 앞에 있는 여인 만을 보면서 
이 여인은 무조건 돌로 쳐야 된다고 하는... 
도저히 후퇴가 없는 그런 답안을 가지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거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참 예수님의 답은 놀랍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친다'고 하는, 그들이 갇혀 있는 율법도 일부 인정하시면서, 
그 전에, 이 여인보다 사실은 더 더러운 죄를 짓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그들의 잃어버린 눈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그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깊은 죽은 양심을 찔러서 깨우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들은 자기를 보게 되었고, 양심의 찔림을 가지게 되었고, 
손에 들었던 돌을 다 바닥에 내려놓은 채, 한 명씩 한 명씩 돌아갔고 
맨 마지막에는 그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으니까 
죄 없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이 
그 땅바닥에 흩어진 돌을 다 들어 던질 자격이 있으신데,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감옥을 뛰어넘어 새로운 길을 말씀하시죠.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다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러분, 그 순간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음에도,
돌에 맞아 죽지 않는 최초의 여인이 등장하게 된 것이었어요. 

'용서' 라고 하는,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이고 
희망 없었던 인생에게, 새로운 삶이 열리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가 말씀에서 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그 이후에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오늘 본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 중에 일부가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을 하신 거죠.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