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동영상 6분 경부터 녹취, 정리
◈경외 신16:21~17:7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본문은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경외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신16:21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22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고, 자기를 위해 주상을 세우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날 우상의 문제는 뭐냐하면 그것이 우상인지를 잘 모르고
그냥 섬긴다는 거예요. 그렇죠.
그게 우상을 섬기는 건지 잘 모르고, 그냥 그렇게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상의 문제점 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22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세운대요.
주상은, 기둥 주에, 형상 상입니다.
자기를 위해 세우는 것, 이게 우상의 본질 이에요.
우상의 본질은 '나를 위해, 자기를 위하는' 것이에요.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를 위하여 세우는 신은 우상 입니다.
아세라 여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아세라 상을 세웠겠어요?
풍요와 다산을 달라고 세운 겁니다.
오늘 날로 얘기하면 부를 달라고 아세라 상을 세웠다는 거예요.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우상은 나를 위해 세우는 신입니다. 근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21절에 보면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 옆에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라'고 했어요.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 옆에서 아세라 상을 세웠다는 걸 알 수 있죠.
무슨 얘기냐 하면,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아휴 이제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신 아니야,
이제부터는 아세라를 섬길거야' 이렇게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섬기는 제단은 그대로 있었어요. 하나님을 섬겼어요.
근데 그 바로 옆에다 아세라 상을 세웠다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날의 우상도 그와 비슷합니다.
신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고.. 이런 건 아닌데,
자기를 위하여 뭔가를 섬기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를 위한 새로운 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나를 보호해 줄 신,
나에게 부를 가져다 줄 신,
나의 질병을 고쳐줄 신,
나를 성공시켜 줄 신,
이렇게 자기를 위한 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이유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신관)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뭐가 왜곡이냐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으로 왜곡시켜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 옆에 아세라 상을 세워 놓음으로써
하나님도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축복 하신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뭐 성공시켜 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틀린 말은 아닌데, 그게 신앙의 주 목적이 아니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 구원이,
그리고 그 영생 구원의 부수효과로서 그런 '현실의 복'들이 따라올 수는 있어요.
(*물론 천국 가는데 더 유익하다면, 필요한 경우 그런 '현실의 복'들이 적게 올 수도 있죠)
어쨌든 하나님에 대한 생각, 신관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는 거예요.
즉 '하나님은 나를 위하는 신'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며 신앙생활 하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존재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거죠.
당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한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죠.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만들어낸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당신의 어떤 필요를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거죠.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창조해 낸 게 아니지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내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죠.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내 영광을 위하여 사람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필요가 있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필요였죠.
우리를 노예로 부려 먹거나... 이런 필요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그 필요를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거예요.
성도는 그 필요대로 신앙생활 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경외의 기본이고 신앙의 시작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거듭남의 시작이고,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의 의미라는 거예요.
이게 파운데이션입니다. (첫 단추라는 것입니다)
이게 결코 쉬운 얘기는 아니에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게 가장 기초가 되는 건 분명해요.
이 기반 위에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게 세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도 드리고, 우리가 찬양하고,
봉사도 하고, 성경도 묵상하고, 기도도 하고...
이것들이 우리가 크리스천 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기 전에,
이미 '내가 크리스천입니다' 라는 것을 규정하는 건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라는 것이
내가 크리스천 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 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초 위에,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고, 뭐도 하고 하는 거죠.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에서
'나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죄는 뭐냐?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간다는 생각이 죄 라는 거예요.
원래는 뭐예요? 하나님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거죠.
인간의 타락과 죄는, 그것을 '나 중심'으로 바꿔놓는 거예요.
나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고,
나 중심으로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타락한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나'예요.
뭐 아무리 세상에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으면... 별 관심 없는 거죠.
이게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죠.
그러니까 죄인은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마음이 편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추구하는 거죠.
자기 중심성! 이게 죄입니다.
자, 그래서 회개라는 건 뭐냐하면, 이 세계관이 바뀌는 거예요.
나 중심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는 것을 '회개' 라고 부릅니다.
'아, 내가 나 중심으로 살았던 죄인이었구나!'
이게 이제 회개 예요.
그런데 이런 회개를 거치지 않고, 자기 중심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채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면, <우상적 신관> 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거죠.
그게 우상적인 신에 대한 관념이지요.
엄밀하게 얘기하면 이거는 기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의 기초는 뭐예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게 기초인데,
이건 안 바뀌었어요. 여전히 내가 중심이에요.
그 상태로 기독교에 입문해서, 세례 받고,
이 자기 중심성이 종교의 껍데기를 뒤집어 써요.
그러면 뭐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고,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말도 하지만, 실제로는 뭐예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우상의 본질이 뭐라고요? "자기를 위하여!"
그게 우상의 본질이거든요.
교회에 나와 예배하면서도, 자기를 행복을 위한 예배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도, 자기를 위해주는 신을 찾습니다. 우상적 신관이죠.
성경이 얘기하는 신관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이라도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태도라는 거예요.
나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하나님 중심적 신관이죠.
보십시오,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드리고, 드리고, 또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고요.
다윗은 예배를 드리고,
솔로몬은 성전을 드립니다.
스데반은 자기 생명을 드리고,
사도들은 자기 인생 전체를 드렸고,
바울은 순교적인 헌신을 드립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관은, '우상적 신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에 기록된 어떤 하나님의 사람도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은 없어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드렸지요.
이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신관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이십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 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까?
이게 경외함의 시작이에요. 이게 경외함의 기초 예요.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웁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나를 위한 하나님을 찾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을 예배 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께 부르짓습니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서적인 것이든, 건강이든, 가족이든,
심지어 영적인 충만이든, 성령 충만이든 관계 없이
하여간 그 포커스가 '나'예요.
나를 위하여, 나의 무언가를 위하여, 나의 영성을 위하여,
나의 성령 충만을 위하여, 나의 평강을 위하여, 나의 뭐를 위하여...
교회를 나와서 예배하는데, 여전히 뭐예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찾아요.
여전히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기저를 깔고 있어요.
신앙 생활의 수많은 문제가.. 아니 사실 모든 문제가..
결국에 여기서부터 기인합니다.
우상적 신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불교나 샤머니즘의 우상처럼 믿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여러분, 아세라 상을 세운 거하고 본질적으로 뭐가 다르죠?
그 이름만 아세라 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뀐 것 뿐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구약의 모세 때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제단이 있으면, 그 옆에 아세라 상을 세웠다는 거예요. 신16:21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바로 옆에 아세라 상을 세워 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도 아세라 상처럼 섬기겠다는 거죠. '나를 위한 신!'
물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를 축복 하세요.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나를 축복) 안 하신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하나님 위에서 존재하는 거지,
하나님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참 불행하게도 이 파운데이션이 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해요.
교회를 나와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예배하고 다 하는데
여전히 부르는 이름만 '여호와 하나님' 이지
그 속 내용은 아세라 우상이에요. 자기를 위하여 신의 이름을 부르는 거죠!
진정 구원 받은 참 하나님의 백성은, 이 죄를 회개하는 거예요.
나 중심의 세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로!
▲2. 두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이에요. 이게 경외입니다.
신17:1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중요한 것은 '최고의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이라는 점이에요.
하나님께서 재물에 대해서 정해 주실 때
비둘기 부터 소나 양까지 다양하게 정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형편이 되는 사람은 소를 드릴 수도 있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비둘기를 드릴 수도 있고... 이렇게 다양하게 정하셨어요.
모든 사람이 소를 드려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기에 이 하나님께 최선을 드린다는 것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
그게 존경이고, 사랑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그냥 먹다 남은 거, 뭐 쓰다 남은 거,
'이거 어차피 안 쓸 것 같으니까 너 가져!' 이건 존중이나 사랑이 아니죠.
제가 예전에 한 번 아주 시골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었는데,
강사 대접을 한다고.. 신문지에다 고구마를 싸가지고 오셨어요.
제가 지금까지 받아본 것 중에, 가장 당황스러운 거였습니다.
또 옥수수를 낯선 다라이(대야, 함지박)에다가 담아 오셨어요.
근데 감동이 있더라고요. 감동이 뭐냐하면
'아 이분들은 자기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걸 주고 싶어 하시는구나'
우리가 최고의 것을 드리지 못할지라도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고 싶어 할 때,
그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지요.
뭐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면 오케이 입니다.
다른 사람이 소를 드린다고 해서, 나도 소를 드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비둘기 라도, 내가 드릴 수 있는 제일 좋은 비둘기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소나 비둘기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럴 때 하나님의 페이버(은총, 호의) 가 부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은혜 grace 하고 은총 favor 은 달라요.
은혜는 그냥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주시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어도, 그냥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주시는 게 은혜이에요.
그런데 은총 favor 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한 마디로 '잘 봐주시는' 거죠.
항상 하나님의 은총 favor 을 받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려면 내가 최선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돼요.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늘 힘에 지나도록 섬겼습니다.
다윗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일이라면, 늘 자기 힘에 지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 앞에, 생명을 담보로 나아갑니다.
이거 여러분, 굳이 자기가 나아갈 필요 없거든요.
그때 다윗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어요. 군대에 징집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전쟁은 군인들이 하는 거지, 내가 전쟁에 안 나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해요?
또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수백 명의 뮤지션 을 동원해서
24시간, 주 7일을 예배했습니다.
아마 다윗은, 하루가 36시간이라도 그랬을 것이고,
일주일이 8일이라면, 8일을 계속 했을 거예요.
24/7을 했지만, 36/8이라도 했을 거예요.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후에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지울 때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다윗은 자기가 구할 수 있는 최선의 재료를 사용합니다. 백향목과 은금과 놋들...
다윗은 그의 평생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항상 진심, 최선이었습니다.
제일 좋은 걸 드렸습니다.
이런 다윗을 향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십니까?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이 인정의 말씀을, 여러분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가진 자를 찾으신다고 믿습니다.
전 세계를 두루 다니시면서 '다윗의 마음'을 가진 자를 찾고 계세요.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으면, 그곳에 임재 하셔서, 그와 함께 거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행13:22
제게 있어서 복음은, 늘 향유를 드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복음은, 더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최고의 멋진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고 것이, 제 예배이고 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피 냄새 가득한 사람이라면,
저의 사랑은 향유 냄새가 가득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여러분의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최고를 드리고 싶은 마음...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그런 다윗과 같은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17:5~7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죄와 싸우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순종하기 위해 힘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으신다고 얘기합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여러분, 이 거룩함을 지키고 순종하고 위해서 힘쓰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사랑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맨날 부모님 말씀하신 건 모조리 다 반대로 해요.
그럼 부모님이 그걸 사랑이라고 느끼실까요? 아니잖아요.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악을 버릴 때는, 단호해야 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거룩함은, 단호해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죄와 싸움에 있어서 단호하라고 얘기하죠.
'우상숭배 하거나 악을 행한 사람이 있으면 돌로 쳐 죽이래요.' 신17:5
어휴, 이거 좀 과한 것 아닙니까?
용납 하고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단호함'이에요. 여지를 추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죄는 항상 어정쩡함을 틈타서 우리 삶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래요.
'뭐 이 정도쯤이야... 다들 그렇게 하는데 뭐...
이렇게 한다고 뭐 큰일 나겠어....? 이게 꼭 죄야?'
이런 어정쩡함이 있지요.
항상 죄는 이런 어정쩡함을 틈 탑니다.
단호하게 No 라고 말하지 못할 때,
단호하게 끊지 못하고 여지를 둘 때,
죄는 그 여지를 틈 타서 우리 삶 속에 들어옵니다.
이 죄가, 죄로 유혹하는 원수 마귀가 그렇게 미련하지 않아요.
굉장히 지혜롭고 똑똑한 녀석들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을, 이렇게 한 방에 끝내려고 하지 않아요.
한 방으로 내 인생을 날려 버리려고 하면, 우리가 당연히 그거 허용 안 하죠.
성도들은 큰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다 파괴할 만큼 큰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근데 문제는 작은 거, 작은 죄예요.
'뭐 그 정도쯤이야.. 뭐 다들 그렇게 하는 거 아냐?'
이런 어정쩡함, 그 작은 것 하나를, 마귀는 우리 삶 가운데 슬쩍 집어넣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죄가 들어오면, 죄는 어떤 죄 든지, 우리 영을 무뎌지게 해요.
여러분, 죄가 내 속에 들어왔는데,
막 영이 그냥 충만하고 날카롭고 이럴 리가 없잖아요.
영이 무뎌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더 큰 죄도, 아무 생각 없이 살면 허용하게 돼요.
그렇게 해서 자기 인생을 결국 파괴시키는 거예요.
어정쩡함을 여러분 주의하십시오. 마귀는 어정쩡함을 이용합니다.
그렇기에 죄는, 작은 것일 때, 단호하게 때려잡아야 돼요.
죄는 작은 것일 때 때려 잡아야지,
작은 것이라고 어정쩡하게 넘어가면,
그게 결국 우리 삶을 다 파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 번째 내용은.. 죄에 대해서 단호한 거예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단호한 거예요.
여지를 주지 않는 거예요. 틈을 주지 않는 거예요. 그것이 경외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