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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와 겸손

LNCK 2024. 11. 27. 20:0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리더쉽, 목회자

[주일설교] "배려와 겸손" [사도행전 11:19-26] -  - YouTube

 

배려와 겸손        행11:19-26          

(교회 창립) 15주년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특별한 본문을 정할까도 생각했지만 
이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곧 우리 교회 스토리 일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되어서 
사도행전 11장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품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나바를 향해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착함이 그냥 착함이 아니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그러니까 그의 착함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를 믿는 그의 믿음을 통해서 주어진 성품입니다. 

중략

안디옥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있었던 평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인데, 
예루살렘 교회가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담임 목회자로 보낸 것입니다. 

11:22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섬겼고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함께 시작했던 성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런 공동체를 세운 것입니다. 

어떻게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을까요? 
어떻게 우리 교회가 세워졌을까요? 

◑1. 첫째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새 역사를 창조 하십니다.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환란' 이란 눌러서 압박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tribulation 인데, 라틴 트리블룸에서 나온 단어인데 
트리불룸은 곡식을 탈곡할 때 사용되는 탈곡기 입니다. 

이 도구는 곡식의 껍질을 벗기기 위하여 압박하고 마찰을 가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곡식의 껍질이 벗겨지고 알곡만 남게 됩니다. 

환란은 곡식의 껍질을 벗기는 것입니다. 
환란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 없는 껍질을 벗기는 것입니다. 

또 환란은 멀리 흩어지게 만듭니다. 
'흩어진다'는 헬라어 디아스페리오, 여기서 디아스포라 가 나오죠. 

이 단어는 흩트리다, 퍼트리다, 확산시키다.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씨를뿌리다' 라는 뜻이죠. 

씨를뿌린다는 것은, 흩어져서.. 버림 받는 게 아니라, 심겨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고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하지만, 고난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축복이고 역설입니다. 
고난은 안락한 곳을 떠나 모험을 하게 만듭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품이 안락했지만 
고난을 통해서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또 안디옥교회를 세운 분들도, 고난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고난은 새로운 세계로 뻗어 나가게 하죠. 
요셉이 애굽으로.. 그리고 성도들이 지금 수리아 안디옥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 
고난의 유익은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또 고난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변화하고 성숙하는 게 어렵잖아요. 

▲우리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뭘까요? 
저는 이 변화와 성숙에 관심이 참 많은데요. 

'또 제 삶을 통해서, 저를 변화시킨 게 뭘까? 
우리 교회를 변화시킨 게 뭘까?' 하고 생각해 볼 때,

1) 먼저는 꿈이죠. 꿈을 통해서 우린 변화가 되죠. 
저는 사람들에게 늘 물어봐요. '꿈이 무엇이냐고?' 

2) 또한 사랑을 받으면 변화 됩니다. 

3) 또 좋은 만남을 통해 변화가 됩니다. 
좋은 책을 통해 변화가 됩니다. 성경이 제일 좋은 책이죠. 

4) 때로는 고난만이 우리를 변화시킨 게 아닙니다. 
놀라운 은혜, 놀라운 복을 경험할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어, 이건 내가 한 게 아닌데...?' 
이게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5)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고난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깊이 있는 삶으로 만들죠. 

고난의 깊이가 성숙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의 언어는 다릅니다. 그리고 공감력이 다르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고난은 새 역사를 창조 합니다. 
모든 새로운 역사는 고난을 통해 창조되고, 
모든 새로운 생명은 산통, 어머니의 고통을 통해서 태어나죠. 
또는 씨앗이 깨어지는 아픔을 통해서 생명이 창조됩니다. 

우리 교회도 사실은 고난 중에 태어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도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었죠. 

유대인 크리스찬들과 이방인 크리스찬들이 하나가 되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연혁 15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성도들께 감사하고 
또 나름대로 우리가 (영상을 보시면 알겠지만) 참 자랑할 게 많죠. 

그러나 정말 제가 자랑할게 있다면, 
큰 땅도 그리고, 건축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된 다음에, 3년이 지난 다음에 
뉴호프 가족들과 함께 연합을 하게 됐는데, 
너무 아름다운 연합을 하게 된 거죠.   *교회를 통합

그때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우리가 다른 건 모르지만 
교회 땅을 구입하거나 건축한 일에는 반대할 수 있지만, 
연합하는 일에는 하나가 돼야 됩니다... 라고 했을 때 
교인 중 99%가 찬성을 해서 연합을 했고, 

그 다음에 또 새로운 분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섬기고, 
또 중직자가 되어서 교회가 정말 하나가 되는... 그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게 저는 너무 자랑스러워요. 

▲또 고난을 통해서 사명을 완수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은 
사실은 모든 세계의 열방 만민에게 나아가라는 명령인데, 
처음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죠. 
하나님의 역사로, 나중에는 사도들도 여러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이에요. 
우리 민족이 지금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이 
전 세계에 750만명 된다고 하죠.

그리고 흩어진 나라는 180~190개국으로 나옵니다.
중국 분들이 160개국 정도로 흩어졌다는데 
가장 많이 흩어진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예배 처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만드신 것을 보게 됩니다. 
또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을 요긴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하나님은 <배려의 사람을 통해서> 새 역사를 창조 하십니다. 

배려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만나는 바나바입니다. 
제가 서울신학대학 다닐 적에 신약학 교수님 이었던 이상훈 교수님의 설교가 
제 가슴 속에 가장 깊이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교수님의 설교 중에 하나가 이 바나바에 관한 설교 였습니다. 
성경을 쭉 훑어가시면서, 바나바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물이었는지, 
얼마나 배려를 잘 하는 인물이었고, 위로자였는지를 설명했고, 

사도바울을 세운 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훌륭한 인물인 것을 증언했습니다. 
제 가슴 깊이 새겨진 인물 중의 한 분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곳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바나바가 섬겼던 안디옥 교회는 놀라운 교회 였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내려갔을 때,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본 게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곳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행11:2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바나바는 사람 많은 걸 보고 기뻐한 게 아니에요. 
무슨 건물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어요.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이게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가 본 것입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죠.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차별 없이 만날 수 있는 게 복음 인데 
바나바가 보니까, 
진짜 유대인 크리스찬과 이방인 크리스찬이 하나가 돼 있는 거죠. 
이게 큰 은혜인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죠. (마치 우리 교회가 뉴호프 교회와 병합한 것처럼요)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이건 놀라운 역사 죠.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하나님 은혜가 머무는 것, 
우리 교회에는 지난 15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렀습니다. 
지금도 하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영적 리더가 섬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영적 지도자에 의해 세워집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성도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죠. 

우리 몸은 건강하지만, 우리 몸 안에 면역력이 늘 질병과 싸우는 거죠. 
그렇지만 '건강하다'는 것은 폴 트루니에는
'건강하다는 것은 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구김살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죠.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죠. 
저는 '우리 교회가 완벽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 기적을 경험했고 
그리고 또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바나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또 지난 15년 동안에 우리 교회를 섬겨오신 성도님들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1) 바나바는 하나님의 착한 사람, 즉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2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착하다'는 말은 '선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거죠. 
이것은 자연적인 성품이 아니에요. 

'저 사람 착한 사람이야' 그런 수준이 아니라,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적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함으로, 착한 성품이 형성이 된 거죠. 
그것도 훈련을 통해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6번째 '양선'

2) 바나바는 하나님의 위로하는 성품을 닮은 사람이에요. 
행4:36절에 바나바가 등장하죠.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원래 본명은 요셉이나, 사도들이 별명을 붙여 줬습니다. 
요셉이 너무 위로, 격려를 잘하기 때문에 '위로의 아들(바나바)'라고 별명을 붙여주었죠.

그가 위로자였다는 거죠.
근데 위로자가 누구예요? 
성령님을 가리켜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라고 불리는데, '곁에서 위로하시는 분'이란
뜻이죠. 성령충만 하면, 바나바처럼 위로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님은 정죄하는 분이 아니세요. 판단하는 분도 아니세요.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호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죠. 
바나바가 성령충만해서 위로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성숙해 질까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근데 우리가 성숙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놀라운 게 있습니다. 
그분들은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가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굉장한 예술입니다. 

우리는 판단하기 쉽고, 쉽게 정죄하는데 
성숙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의 약점까지도 품을 줄 알고,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림자(부족한 점)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이게 성숙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위로자, 또는 격려자, 돕는 분... 이렇게 표현하죠.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시는 거예요. 

이거 쉽지 않아요. 유권사님 아드님이 갑자기 수천 받으셨는데, 
권사님께 찾아가서 예배드리는데, 무슨 말로 위로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사40:1절을 나눴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3) 셋째로,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에요.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성령충만 하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교회는 성품을 많이 강조하잖아요.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이 충만할 때, 또 지혜가 충만 하죠. 
분별을 잘 하게 되고요. 영향력을 끼치게 되죠. 

그래서 '바나바 때문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4 
그러니까 참 지도자도 중요하고,
또 바나바와 같은 성품을 가진 성도들이 있는 교회는 
이렇게 '큰 무리가 더하게' 된다는 거죠. 

4) 바나바는, 무대 뒤에 섬기는 겸손한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존귀히 여기십니다

누구나 다 무대 앞에 서고 싶죠. 그런데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 담임목회자로 부름 받았지만 
그는 사도 바울을 불러서 무대 앞에 세우고, 자기는 무대 뒤로 물러 섭니다. 

여러분, 지금 교회가 부흥하고 자기(바나바)가 인정을 받는데 
바나바가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죠? 사도바울 이죠.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아직 사울이죠. 그를 고향 다소에 가서 찾아서,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겸손하게 되면 그래요. 

겸손한 사람은, 자기 한계를 알고 인정할 줄 압니다. 
바나바는 자기 한계를 알았어요. 
그리고 사도 바울의 그 탁월한 능력을 알았기 때문에, 

또 안디옥 교회에, 지금 그의 탁월한 가르침이 필요한 줄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불러온 거죠. 

또 겸손한 사람은, 자기 한계를 알기에, 동역하기를 기뻐해요. 
하나님은 동역하시는 분이세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늘 동역하시죠.

또 성령님의 특징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세요.
늘 예수님을 높여드리고, 예수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분이시죠.
이런 성령님의 성품을, 바나바가 본 받은 것입니다.

소금처럼, 숨어서 맛을 내는 분이 성령님이시죠. 또한 바나바이고요.

우리 모두는 동역자가 필요해요. 저는 늘 동역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목회자들, 장로님들, 권사님들과 함께 동역을 해 왔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원해서 무대 뒤에서 섬길 줄 압니다. 
바울을 역사의 무대에 세운 사람이 바나바예요.

바나바 자기가 박수를 받고 있었잖아요. 
계속 좀 그렇게 지내면 될 텐데 그렇지 않아요. 바나바는 사도 바울을 세웁니다. 

나중에 이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세계 선교를 향해 나아가는데 
먼저 바나바의 이름이 사울보다 먼저 등장하죠.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여기 바나바가 먼저 나오잖아요. 
근데 1차선교여행 중 구브로에서,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뀌고 
그리고 이제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로 순서가 바뀝니다. 

참 대단한 거예요. 이게 누가가 성경을 기록하면서 
바나바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를 보여주죠. 

13: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여기부터 '바울'이 '바나바'보다 앞섭니다.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15장에 보면, 마가 요한의 문제로 서로 갈등과 대립이 있었지만 
바나바는 사도 바울의 뜻을 존중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게 옳다'
바나바는 '그래도 마가를 데려가자'
근데 바울은 반대하죠. 

근데 바나바가 바울의 뜻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나는데 
그러면서 바나바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 다음부터는 바나바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은, 적절한 때 조용히 물러설 줄 압니다. 
하나님은 때를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나서야 할 때가 있고, 물러설 때가 있는데 
바나바는 자기가 물러서야 할 때를 알았던 거죠.

세례 요한도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거의 예수님 급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여러분, 한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다' 하고 칭찬해 주셨죠. 
누가 큰 자입니까? 
큰 인물을 세우고, 자기는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 큰 사람이죠. 

리더십의 대가 로버트 클린턴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나바는 큰 사람이었다. 왜냐면 사도 바울도 품었고, 
사도 바울을 세우고 자기는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다.

바나바처럼 성공적으로 지도자의 위치를 바꾸려면 
은혜와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진정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경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그 이후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역할과 사명에 만족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만족해요. 바나바도 자기 역할에 만족했어요. 

구약의 갈렙도 질투심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15년 역사를 보면 
우리 교회 장로님, 권사님, 성도님들이 정말 바나바 처럼 섬겼어요. 

뉴호프 식구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교회를 합침)
뉴호프 가족들 가운데 장로님 세 분을, 운영위원회로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되고, 
또 중요한 중직들을 많이 맡김으로써 
먼저 된 장로님들이 양보할 줄 알았습니다. 성숙한 장로님들이었던 것입니다. 

건강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은 비교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대 위에 계속 서길 원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갈렙 같은 사람, 바나바같은 사람을 찾으시는데요. 

우리 교회가 이렇게 건강한 이유가 뭘까요? 
지난 15년 동안 제직회나 공동의회 때, 한 번도 큰 소리가 난 적이 없었어요. 
항상 축하 파티하듯이 회의를 했잖아요. 

여러분, 복음성가 <소원>이라는 찬양을 아시죠?
이게 바나바와 같은 노래예요.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마음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길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아래 구절이 우리 가슴을 때리죠)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나 그렇게 죽기원하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원하네...」
 
나중에 바나바는 마가를 키웠어요. 
나중에 바울이 마가를 자기 동역자로 받아들이죠. 

빌1:24절에는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했고, 
또 바울은 자기 생의 마지막 편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4:11 

무대 뒤에서 섬기는 사람은, 구속의 드라마의 비밀을 압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렇게 살았던 사람이 바울인데 
이런 바울을 세운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하나님이 누굴 더 귀히 여기실까요?
물론 바울이 귀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만이 아니시죠. 
하나님은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정말 귀히 여기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시잖아요. 
하나님은 모세나 여호수아를 귀히 여기셨지만,
무대 뒤에 가려져 있었던 갈렙도 귀히 여기셨잖아요.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장례를 예비했던 여인을 귀히 여기셨잖아요.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시잖아요. 이게 우리 하나님이시잖아요.

오늘 우리 교회가 창립 15년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같은 우리 장로님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과, 섬기는 모든 분들 때문에 
교회가 존립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15년을 또 기대하고 
우리 교회가 계속 성령충만하고, 성숙해지고, 그 수를 더해 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