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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활력을 되찾으려면

LNCK 2024. 11. 28. 11:3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순종>

신앙의 활력을 되찾으려면 | | 금요철야 | 24.11.22

 

신앙의 활력을 되찾으려면         삼상15:22~23             

여러분 우리 신앙 생활의 핵심은 순종에 있습니다. 결국은 순종입니다. 
우리가 훈련, 다양한 훈련을 하죠. 
훈련을 하는데, 그 훈련의 핵심은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잘 알려져 있는 본문이죠. 
사울 왕의 불순종, 
순종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순종하지 않는 거죠.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는데, 사실은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죠.
'여호와는 번제와 다른 제사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삼상15:22

사울은 사무엘의 이 말을,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뭐야? 하나님이 제물이나 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매일 제사가 드려지던 그 시대에,
또 사울도 그렇게 제사를 드렸죠. 
'근데 하나님은 제사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면서 사무엘이 한 유명한 말이 나오죠.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삼상15:22

이게 어마어마한, 우리의 신앙을 바꾸는, 신앙의 핵심적인 대 주제요, 대 원칙이에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러니까 우리의 어떤 행위, 어떤 열심, 우리의 신앙적인 어떤 헌신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순종이 빠져버리면... 낫띵,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이 말씀은, 
불순종의 여지를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자기 욕심대로 살면서 
어떤 이런 제사, 예배, 이런 어떤 종교적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정당화 하려고 하는 모습, 
네, 그게 우리 안에 늘 찾아오는 유혹이에요. 

하나님은 제사나 제물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사울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도 두고두고 새겨야 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적 활동이나 열심들에 감동을 받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순종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순종이 없으면, 다른 것은 다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는 제물이 드려지는 건데,
그 의미, 그 핵심은 바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 거죠. 내가 재물이 되는 거, 그게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순종하는 곳 까지만 우리의 신앙이 가요. (성장해요)
순종이 멈추면, 신앙도 멈추는 것입니다. 
순종이 멈추면, 신앙은 활력을 잃습니다

언제부턴가 여러분 신앙이 멈추어 있다...
그러면 딴 게 아네요. 순종을 확인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문제는 이 순종이 참 어려운 거예요. 
다른 건 다 할 수 있는데, 이 순종이 어려운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에베소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단이 누구예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단이 늘 하는 일은, 사람들을 불순종의 길로 이끄는 거예요. 

여러분, 이 불순종의 역사는 오래됐죠. 인류 최초로 거슬러 가잖아요. 
불순한 아담의 후손들, 
뼈속 깊이까지 불순종의 영이,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귀는 하나님께 반역을 했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도록 이끄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을 보세요. 불순종의 영으로 가득합니다. 
대들고, 반역하는 역사의 연속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 불순종의 영으로, 우리 안에 꽉 차 있어요. 

여러분, 애들도 보면요. 신기해요. 
말도 배우기 전에, 부모에게 불순종합니다. 

영어로는 No죠. Yes 보다 No를 먼저 배워요.
우리나라에도 '도리도리'를 안 가르쳐야 돼요. No처럼 보이니까요.

사단의 왕국은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영이에요. 
항상 원망, 불평, 시비죠.

여러분 이 불순종의 역사를 뒤집어 엎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순종으로 완성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십자가를 통하여 완성된 겁니다. 
그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 거죠.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은, 그 아들의 순종이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 구원의 역사를 이뤄내시고 
불순종의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신 목적이 뭐냐면, 
"순종"하는 백성으로 만드시는 거예요.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주된 과목이 뭐에요? 순종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순종의 학교'예요. 
모세의 인도를 따라 묵묵히 광야를 통과하는 훈련!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어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순종의 훈련입니다.
'아무 소리를 내지 말고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아라' 이건 뭐예요? 순종 훈련입니다. 
이해는 안 되지만 그냥 돌아라는 거예요. 순종의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가나안도, 광야도 순종이 중요했어요.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의 믿음은 순종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 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순종의 훈련을 시키시죠. 
아담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펼쳐 나가시는 첫 부분에, 
아브라함에게 그 순종의 훈련을 시키신 겁니다. 

창1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건 뭡니까? 이 아브라함에게 맡겨진 역할이 매우 중요하죠. 
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냥 순종하라는 거예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인도 하겠으니 순종하라'는 거예요. 

'어디로 가라'는 말씀은 하지 않아요.
이 명령의 특징은, 어디로 가야 되는지 모르는데, 일단 떠나라는 거예요. 
선 순종, 후 인도! 일단 떠나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쉬운 것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묻지 말라는 거예요. 

떠나라는 이 명령 앞에서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그때는 묵상하고 있으면 안 돼요. 그냥 순종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떠나라'는 명령에 우리가 순종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침묵 하십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떠남 이라는 순종을 한 사람에게만 알려주는 거예요. 
순종한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음성이 따로 있습니다. 

떠나야 말씀하십니다. 떠나야 인도하십니다. 
이게 우리에게 어려운 거예요.       

여러분은 다 성경을 읽습니다. 설교도 다 듣습니다. 묵상도 다 같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을 구별해 내기 어렵습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그 다음에는 행동하는 사람!
발 걸을 내딛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

여러분, 믿음은 행동이에요. 움직이는 거예요. 발을 내딛는 거예요. 
떠나라니까 집을 떠나는 이 발걸음을 내딛는 훈련... 

신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는 단계까지는 다 하지만 
행동에 옮겨놓는 것까지는... 안 하는 거죠. 
순종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말씀을 완전히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창12:4 '이의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아브라함이 집을 떠난 거죠. 근데 어떻게요? 


'그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떠났는데,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거예요. 

그건 뭘 얘기하죠? 
그가 말씀에 순종하고 집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그가 말씀을 따라 가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신자는 따라가는 사람이에요.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이에요. 
누구에게 말씀하시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이게 믿음이고 순종이 결합된 모습입니다. 

신자는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찬송가)

여러분, 믿음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동사입니다. 걸어가는 것이죠.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성경에 '걷는다 walk'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이 말은 '살아간다'는 의미의 관용어입니다. 진짜 걷는게 아니라요.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인은
생각하는 사람, 고민하는 사람, 의논하는 사람, 논리적인 사람,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계속 '걸어가는' 사람, 즉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게 믿음의 삶입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성경은 믿음을 행동화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매우 경계해야 될 것은 신앙의 사변화입니다.
'사변화'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사변화 되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 말씀은 모호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깊이 와닿는 이유는, 
믿음을 행동으로 행했을 때 경험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성경 이야기는 역사잖아요. 
스토리들이란 말이죠. 이 역사 안에 숱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거죠. 

그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 하셨는가를, 우리가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스토리입니다. 스토리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행동을 옮겼을 때, 그게 스토리가 되고, 
스토리가 쌓이니까 역사가 된 거고, 
그 역사 안에는, 하나님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이루어 내시고자 하는 일들, 그를 이끌어 가시는 걸 보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이 라는 한 인물을, 성경을 통해 더듬어 가면서 무엇을 봅니까? 
믿음의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죽은 얘기가 아니예요.
아브라함의 스토리는 지금도 살아있고,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그처럼 오늘날에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나의 이야기가 계속 되게 만드는 겁니다. 

단절된 이야기, 오늘과 끊어져 버린, 
과거의 히 스토리로 그냥 냉동고 속에 집어넣어 버린, 죽어버린 메시지가 아니고, 
오늘도 여전히 아브라함의 얘기는 재생되고 있고, 
우리의 삶에 반복되어 역사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OOO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형의 하나님 이시죠.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죠. 
오늘 우리 가운데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미래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과 얽혀져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게 뭘까요?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호한 게 아닙니다. 성경은 철학책이 아닙니다. 역사책입니다. 
이야기책이란 뜻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께 반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얘기는 죽은 얘기로, 과거 역사로 끝난 게 아니라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우리의 얘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박제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액자에 그냥 전시해 놓고, 그냥 뭐 한 번씩 추억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믿음은 모호한 게 아닙니다. 사변적인 게 아니에요.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예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지 않으면 
계속 신앙은 추상화, 사변적이 되는 거죠. 

말씀을 듣고 순종으로 옮길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뚫고 들어오는 거죠. 

'철야'란 '밤을 뚫다' 이런 말인데,   徹夜
말씀이 우리의 삶에 뚫고 들어와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말씀이 되고, 
말씀이 우리 삶에 육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만지고, 느끼고, 온 삶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때로는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일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죠.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은 굉장히 위협적인 명령이죠. 
그 시대 속에 순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시대에 '옆집으로 옆동으로 이사가라, 이민 가라' 
그 정도와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부족 사회속에서 그 부족을 떠난다는 것은 
그건 상상할 수 없는 데요. 그건 그냥 자살 행위와 같은 거예요. 

주님의 말씀, 주님의 뜻은 우리의 삶에 위협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망할 것 같은 거죠. 
이 말씀이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먼 거죠. 격차가 있는 거죠. 

여러분, 익숙한 환경을 떠난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우리는 조금만 익숙해지면 엉덩이로 뭉게요. 

근데 그 익숙한 환경, 안정된 환경, 세이프 존, 
갑자기 여러분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라고 하면 
그 말보다 더 위협적인 게 어디 있겠어요? 

처자식이 다 딸려 있는데, 갑자기 직장을 옮겨라고 말씀하셨다면 
위험한 선택을 요구받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는, 위험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죠?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여기서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합니까?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죠. 

그러니까 결국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믿음의 삶은 충동적인 어떤 결단, 선택이 아닙니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 가보자' 그게 아니에요. 
그건 믿음이 아니고, 그건 만용입니다. 

믿음의 삶은 달라요.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 분에게 내 삶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순종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지금 창12장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확실하게 보이는 환경보다, 불확실해 보이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을 보면.. 알아요. 
눈에 보이는 확실함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고, 그의 안정된 그리고 매우 익숙한 환경을 떠나 
집을 나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항상 우리는 안전을 우리가 확보하려고 합니다. 

확실한 게 보장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려고 그래요. 
무엇을 하든지 완벽한 준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완벽주의는 불신앙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삶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힘들어했던 이유가 뭘까요? 
광야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들의 눈에 기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들의 눈에는 가나안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거죠. 

가나안을 볼 수 있는 눈, 그게 믿음이죠.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게 뭐죠? 바로 가나안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보다는,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거, 현찰, 현물, 그게 반역을 일으키는 거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저항을, 그들이 했습니다. 
그런 그들은 결코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것이죠. 

여러분, 안전을 우리가 확보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아브라함도 한 두 번 실패를 했죠.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고 하는 이 말씀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네가 가기만 하면, 내가 너의 길을 직접 인도하겠다'는 거잖아요. 
그 약속이 들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에 반드시 약속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명령 하시는 분이 그냥 막 막무가내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보다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을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명하세요. 그 명령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개런티(보증)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너희가 순종하면, 그 다음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도자가 되시겠다는 거요. 
여러분 성경에 끊임없이 말씀하는 게 '내가 너희들의 인도자가 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너를 인도 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건 달라요. 

그 분이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온 몸에 그냥 소름이 돋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신앙은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믿을 것 없고, 기댈 곳 없고, 안전히 확보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 딛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머리 좋은 사람을 쓰시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수하게 행동에 옮기는 사람을 쓰셨어요. 

그런 분들은 보면... 단순해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특징이 단순해요. 

다른 사람이 '저 친구 무뇌아 아냐?' 놀릴 정도로 단순해요. 
여러분,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지 않으면, 머리로 알고 있는 건 의미가 없어요. 

말씀을 듣고 즉시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쓰시는 거예요.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불순종하는 백성들이 잘 드러나죠. 
그러나 신명기는 순종의 책이잖아요. 
출애굽 2세대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요. 가나안은 순종의 세대들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공통점이 있어요.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데, 약간 부족해 보입니다. 약간 엉성해 보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것 같아 보여요. 일이 안 될 것 같아요. 
근데 그들은, 말씀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죠. 

여러분, 무모하게, 계획성 없이 행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핵심은, 말씀이 주어지면 
그리고 확신이 오면... 행동하라는 거예요. 

말씀이 분명히 주어졌는데, 그 말씀이 나에게 막 뚫고 들어와서 확신을 주는데도 
멈칫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행동에 옮기라는 거예요.

실천을 미루지 말라는 거예요. 미루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주어졌던 그 말씀도 사라져 버려요. 
그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져요. 촛대가 옮겨지듯이요.

말씀을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앞으로 내딛는 거예요. 
심플한 거잖아요. 

여러분, 저는 제 개인적인 삶의 터닝 포인트는 전부 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확신이 생기면... 행동 했을 때, 그것만 제 인생에 남아 있어요. 
고민했던 거는 다 사라져 버렸어요. 
주저 주저하고 멈칫거리고 했던 거는 다 사라져 버렸어요. 
아무것도 나에게 남지 않았어요.

역사는 순종하는 사람의 편으로 기웁니다. 
하나님이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비판 잘 하는 사람들을 쓰시지 않습니다. 

비판적인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행동에 잘 옮기지 않더라고요. 
늘 관전평을 하는 거죠. 근데 자기가 살아내는 것은 없어요. 
그냥 비판에서 시작해서 비판으로 일관합니다. 

여러분 문학가들 가운데서 비평가들이 있어요. 비평가들의 역할이 있죠. 
그 분들은 비평을 하는데, 직접 작품을 쓰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자기 작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비평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 분들이 글을 읽으면, 그 작가 보다 훨씬 더 깊이 해석을 해요. 멋있어요. 
근데 자기 작품은 없어요. 

여러분, 시인들을 보십시오. 
시인 들은 한 줄을 만들어 내는데, 며칠 ~ 몇 달이 걸리기도 해요. 
한 줄을 써 내는데...
몸살을 하기도 해요. 밤을 세우기도 해요.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살아내는 겁니다. 
믿음으로 살아낸 자기만의 이야기, 믿음과 순종의 스토리가 있어야 돼요. 

여러분, 오늘 날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설교에 대해서 비평하는 문화가 벌어졌습니다. 안 좋은 현상입니다. 
이 목사님 설교는 어떻고... 저 목사님 설교는 어떻고... 블라 블라 블라

여러분, 설교는 듣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이유는, 행동, 순종하기 위해서예요. 

말씀을 듣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듣는 순간 우리에게는 과제가 주어지는 거예요. 
반응하라는 거예요. 
말씀에 반응 하라는 거예요. 믿음에 반응을 해야 돼요. 
믿음에 반응을 하지 않고, 설교만 계속 들어서 무엇 하겠어요? 

말씀을 듣고 알고 깨달았다면, 그 다음에 반드시 따라와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하죠. 
적용, 순종이잖아요. 

말씀을 듣고 행동에 옮길 때 이야기, 스토리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하신 그 이야기는, 
내가 순종하고 행동에 옮길 때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이 쌓여져 갈 때, 그게 내 신앙의 커리어가  돼죠. 
그런 스토리가 많을수록 담력이 생기고, 더 순종할 수 있게 돼죠.
더 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 해 보세요. 순종하면, 하나님이 바짝 긴장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긴장하시는 사람이 되십시오. 왜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손종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되잖아요. 

그래서 긴장하시는 거예요. 책임지셔야 되니까! 그 말씀이 이루어져야 되니까! 

워낙 다들 말씀을 듣고 끝내버리고, 순종 안 하니까, 하나님이 긴장할 일이 없었는데, 
가끔 어떤 사람들이 순종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어, 갑자기 일이 생겼네?' 

여러분 순종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이 빠르죠. 
그냥 무턱대고 응답을 구하면, 대책이 없는 기도예요. 

여러분 요15:7절을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가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러분, 여기 이 구절에서 어디에 줄 긋고 싶으세요.
눈에 확 들어오는 데가 있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앞에는 읽지도 않는 거예요. 앞에는 이렇습니다.
'너희가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 뒷 부분(원하는 대로 구하라)은 잊어버리세요. 그거는 우리가 신경 안 써도 돼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즉 그 말씀에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하고, 즉 그 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삶... 이 약속은 조건절이에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왜 안 들어 주시겠느냐?'는 거예요. 

여러분들 어떤 기도를 드리십니까? 
순종을 위한 기도를 드리셔야 돼요. 
막연하게 '주십시오. 주실 줄 믿습니다!' 가 아니고, 

'하나님, 순종이 어려운데, 제가 순종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씀을 듣고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의 기도는 모호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두리뭉실 할 수가 없어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구체적 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순종하기 원하는데, 힘 주셔야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제가 용서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제가 섬기겠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

순종을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학습은 하지만, 훈련을 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십니다. 가끔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힘들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괜히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할 때, 제대로 레슨 받으셔야 됩니다. 
그 고난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제대로 감당해 내는가를 하나님 보십니다. 
순종을 보십니다.

그래서 고난속에서도 감사를 찾아내셔야 합니다.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셔야 돼요.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가 더 깊어져 가야 돼요. 
그 분을 더 신뢰하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 홀로 고난을 당하는 게 아닙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고난을 하나님과 함께 이겨내는 법을 배워야 돼요.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어가는 거죠. 

여러분, 말씀을 들은 대로 순종에 옮기는 사람은, 믿음이 폭풍 성장을 합니다. 
순종을 하는 사람은 순종을 즐거워합니다. 
순종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순종이 즐거워집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에 옮길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에 순종한 사람만 경험하는 세계가 따로 있어요.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즐겨 찾으시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은 능력입니다.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항복이에요. 
항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달라져요. 
순종은 하나님께 항복해야 가능한 거예요.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는 거예요. 

여러분 순종을 즐거워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게 원래 정상적인 삶이었어요. 

순종할 것에 대해서 순종하면, 우리의 가슴이 뛰어요. 
그 말씀의 약속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기대감이 쌓이니까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을 꿈꾸면, 심장 박동수가 그냥 막 빨라지는 거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까요? 
순종 잘 하는 사람, 그의 인생은 상상 초월입니다. 

 

순종의 가장 최고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죠. 
십자가는 순종의 완성이죠. 

여러분, 순종의 삶에,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디디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지체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에 옮길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최근에 어떤 제가 아는 분들이 생각났어요. 
너무 너무 평범한 분들인데, 그냥 작은 말씀에 도전을 받고, 순종에 옮겼는데,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벌어지고, 벌어지는데... 

그 분은 작은 순종을 했는데, 그 작은 순종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들이 드러나면서, 일이 퍼지게되고, 일어나면서 
하나님이 놀랍게 그 몇 사람을 사용하신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 가슴이 막 뛰는 거예요. 
'그래, 순종이 엄청난 거구나.. 우리 삶의 비밀이 여기에 있구나...' 

순종의 코드를 치고 들어가니, 그 속에 어마어마한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순종을 통해 새로운 문이 열리는 거예요. 인생의 문이 열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비밀 문이 열리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큐티를 통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말씀이 들려질 때마다, 그 말씀을 듣고 반응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오늘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일에 이 설교가 쓰여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젊은 목사님들 멘토링 하는 일을 하는데 
최근에 한 기수가 끝나는 지점에, 제게 이렇게 얘기예요. 
'목사님의 얘기를 들었더니, 우리 교회에 이런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문제만 생기면 
이규현 목사님은 이 시점에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라는 거예요. 제게 너무너무 황송한 얘기죠.
그 주제는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라'는 거죠.

하나님 말씀은, 우리 삶에 멘토와 같습니다.
그 멘토의 말만 잘 들으면, 우리 삶은 평안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멈추는 순간부터 신앙은 지루해져요. 재미가 없어져요. 
듣기만 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내가 듣고 순종할 때, 그래서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 삶은 흥분이 되죠. 

날마다 경이로움에 빠져요.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 말씀의 현실, 말씀의 능력을 
여러분 삶 속에 경험할 때, 내일 아침이 기대가 될 걸요? 
내가 그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는 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