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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기도하라 눅22:39~46 2004.03.21.
▲도입 예화
프랑스의 수사학자이며 유명한 수학자이며 종교철학자인 파스칼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을 두 가지로 비유해서 말하는데
1) 그 비유 중에 하나는,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하다... 그 말입니다.
그저 조금만 다치면 부러지고 깨지고 넘어지고 상처받고 그런 거예요.
그러나 갈대같이 약한 존재지만, 소중한 것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이에요.
그 속에 이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맑은 이성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
두 번째 비유는 아마 모르실거 같습니다.
전 종종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동물만 못한 게 너무 많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 옷을 입었어요. 우리는 옷을 입고 뭐 춥다 덥다 그러지만
동물은 옷 안 입고도 겨우내내 잘 살잖아요. 이 추운겨울을 나잖아요.
몽골에 가보니까 영하 40도가 되는데도, 동물은 밖에 서서 그 추위를 견딥니다.
모든 동물들이 말입니다.
사람은 참 미련해요. 또 하루에 세끼 먹으니 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 어떤 동물은 한번 먹고 1년 살아요. 그거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사람이 뭐 잘난척하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마는
그 영장됨은 결코 육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그 속사람에 있어요.
생각하는 갈대 많은 것을 담은 귀중한 비사라고 생각합니다.
2) 두 번째의 이야기는 '인간은 오르간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 오르간이란 바로 여기 교회에 있는 오르간을 말합니다.
이 오르간이 소리가 나려면 바람을 넣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기계로 하지만,
옛날에 오르간은 누가 곁에서 바람을 책임지고 넣는 사람이 있었어요.
옛날에 제가 평양 성밖교회에 갔을 때 그게 그렇게 신기했습니다.
누가 오르간을 치는데, 옆에서 한 사람이 계속 뭘 돌리고 있어요.
그거 돌리고 있는 동안만 오르간을 치는 거예요. 이게 바람통이거든요.
어쨌든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들어가지 않으면 오르간은 말짱 헛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생각합니다. ‘인간은 오르간과 같다’
하나님의 바람이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바람이 들어가서 소리를 내는 거는 거다,
그래야 비로소 참 인간이 되는 거다’
이런 영적 힘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네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르간으로 치면, 고철 덩어리와 같아요.
그렇게 해서 오르간이라고 이렇게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바람이,
인간에게 들어와서 계속 공급되고 역사될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의 자기모습을 찾아가는 것이고, 자기능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여러분 너무 잘 아시는 예수님이 거룩한 사역을 이루시기 직전,
즉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 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서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하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에, 오히려 그대로 간과하기가 쉽습니다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생애에 크라이막스는 십자가입니다.
오메가 포인트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베들레헴에서 시작해서 그 끝까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르치신 것이나, 이적을 행하신 것이나, 행적이나, 교훈 전부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가장 소중한 결정적인 시간이 눈앞에 왔을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하신일이 뭐냐는 거죠?
그때 예수님은 뭘 생각 했느냐? 그걸 알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지나갈 것은
‘그래 기도해서 어떻게 되었느냐? 세상을 바꿨느냐?
원수가 무릎을 꿇었느냐? 가야바가 죽었느냐? 로마 군병이 망해 없어졌느냐?’
그런 상황적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 위대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달라졌습니다.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라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이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 승리가 마침내 세상을 정복하는,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 파급되어 가는 것이올시다.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십자가를 안 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집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그 능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결국은 나 자신 내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끝을 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더라고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세상사, 엄청난 세상사건,
부딪치는 엄청난 이 일들, 무서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의 만나는 시간이 먼저임을 알아야합니다.
그 왜 <다니엘 학습법>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저자 김동환 선생이 자기 가정에 가정규칙을 말합니다.
딱 한마디 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밥을 먹지마라. 성경보지 않고는 공부하지 마라”.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걸 잊지말아야합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실패의 원인은 기도 없음에 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쓸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여러분 실패했을 때... 자본 때문이요 이웃 때문이요 정치 때문이요 경제 때문이요
기술 때문이요... 이런 이야기를 하지마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해보셨습니까?
기도 없이 한일은 반드시 실패로 끝나게 되어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으로 기우는 우리생각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거예요.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 바로 그게 기도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가톨릭 교회를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 회의에 끌려갔을 때, 생사의 기로에 서서 재판을 받습니다.
그는 재판관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유명한 외침이 있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그 루터가 서있던 바로 그 자리에 한번 제가 가봤습니다.
스트투가르트에 가면 그저 뭐 방치되었다시피 되었지만
누가 거기다 요만큼 표시해 놓았습니다.
여기 서서 루터가 "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있습니다" 하고 기도했던 자리였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어려운 시기를 이길 수 있었고요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위대한 각성을 가질 수 있었고요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타락한 영국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시간일수록 급한 일일수록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기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말씀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이 무슨 응답입니까? 이 십자가가 아버지가 내게 주는 거라고요.
빌라도도 아니고 가야바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내게 요구하시는 십자가라고 확실하게 사건을 정립했어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예요.
그 생각 그 결정적인 결론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한겁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현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거짓된 재판, 가야바의 음모, 가롯유다의 배반 아주 복잡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쳤지만 그 병자들 다 어디 갔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 일에 저들 아무 보탬도 되지 않았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살려주었는데도 단 한마디의 말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다가도 화가 납니다. 이 사람 지금 어디 갔나?
재판정에 나타나서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텐데... (대부분 갈릴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다 동요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보았습니다.
이 엄청난 모순 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통하여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넘어서 믿고 현실을 넘어서서 소망하고 현실을 넘어서서 사랑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말합니다.
“나의 당한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내가 로마 감옥으로 갑니다. 아주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 어정쩡한 일에 원인도 모르게 로마감옥까지 갔습니다마는
알고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 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축복 이였습니다.
나의 당한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이제서 안다고 간증하게 됩니다.
▲여러분. 현실이 막막합니까?
그 깊은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도 중에 깨닫는 것이올시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자기 이해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나약함이 그 휴머니즘이 그 인간적 모습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괴로워서 죽게 되었다”는 말까지 합니다. 마26:38
처절한 고뇌를 아주 생생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점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나도 귀합니다. 여러분 나의 나됨의 모습을..
내 나약한 모습을 기도 중에 바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만
그 어디까지나 하나의 시인의 시를 통해서 추리적으로 생각한겁니다만
큰 감동을 받은 작품이 있습니다.
“슈퍼스타”라는 하는 건데 요즘 다시 우리나라에서 공연된다고 합니다.
그 슈퍼스타 내용 중에 제가 제일 충격 받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의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일은 당신이 시작했습니다. 나는 따라왔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3년 동안 지내왔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십자가를 져야한다는데 should I die?
내일 아침에 제가 꼭 죽어야 하겠습니까?”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듣고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I will die. 죽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
나에 대한 죽음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선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합니다.
“나는 죽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그 작가의 상상력입니다마는
“Kill me take me now before I change my mind”
이 말 한마디가,
제가 그 작품을 볼 때, 가슴이 찡하고 막 가슴에, 뭐가 찔리는 거 같은 아픔을 느껴봤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생명을 취해주시옵소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하나님 당신이 죽여주세요. 내 마음 변하기 전에...”
인간고뇌를 여기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습니다마는 그건 뒤따른 사건뿐이요
결정적인 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난 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순간
모든 앞에 있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위탁해버렸습니다.
자기 생을 완전히 바쳐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되는 상황은 후속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서 엄청난 사랑을,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소망하고 믿기 때문에 그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재미있는 추리적인 수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맨 처음에 하신 말씀이 뭡니까?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한마디는 굉장한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일에, 이거 어디까지나 추리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이놈들 두고 보자” 그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놈들 심판 날에 두고 보자” 그랬다면
예수님의 3년 동안의 거룩한 역사가 다 망가지고 마는 거예요. 이 한마디에...
여러분 가장 위대한 능력은 용서하는 거요 가장 큰 사랑은 용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겁니다. 이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정황에 있더라도 높은 소망 중에 모든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다 용서합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메시야의 모습이 확증되는 시간입니다. 용서란 이처럼 위대합니다.
가장 큰 사랑이 용서요 가장 큰 능력이 용서요
또한 가장 신앙고백이 용서 속에 있는 겁니다.
자 이제 보세요. 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나처럼 기도하라.
기도해야 현실을 알고,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해야 나 자신을 알고, 기도해야 앞에 있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친히 기도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와함께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잠시도 깨어있지 못하느냐? 기도하라, 기도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저들은 어쩐 일인지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제 원수들이 찾아올 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나가서 십자가를 졌지만,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쓸데없이 한번 용기를 내서 만용을 부리면서
칼도 한번 빼보고 했습니다마는... 그는 어이 없게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하게 됩니다.
일생동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어찌 예수님을 모른다고...
왜요? 베드로의 실수가 어디 있었습니까?
예수를 모른다고 한데 있는 게 아니에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해요. 원인중의 깊은 원인, 결정적 원인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세상에 삽니다.
너무나 복잡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흑과 백을 분별할 수도 없고 의와 불의가 무엇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혼미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무너지는 것 같고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그런 절박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문제의 해답을 얻고 해결을 얻은 것 같이
하나님이여 이제는 기도하는 사람 되게 하시고
기도로서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