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

LNCK 2024. 12. 1. 18:01

https://blog.naver.com/karamos/80140022379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      느12:27~44          2010년        <기쁨>

 

서론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종교가 유대교입니다.

이 유대교는 대체로 암울하고 어둡고 슬프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역, 진노, 심판.. 이런 단어가 종종 나오니까요.

 

그런데 느헤미야 12장은 다릅니다. 즐겁고, 행복하고, 기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종교라고 해서, 반드시 어둡고 슬픈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함으로 인해 어두움과 슬픔과 노예됨이 온 것이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면 이처럼 즐거움과 기쁨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본문 느헤미야 12장입니다.

 

43절 한 절만 봐도 알 수 있죠.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즐겁다’라는 단어가 몇 번 나왔습니까? 43절에만 4번 나오고 있습니다.

44절 후반에 보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43절에 4번, 44절에 한번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5번이나 “즐거워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즐거움의 축복은 구약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이 아닙니다.

즐거움(joy)의 축복은 모든 시대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되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33:29

우리는 행복한 백성이요, 우리는 즐거워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줄로 마땅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해 보시죠. “나는 행복자로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해 주시는 일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 피를 흘려 그 피 값으로 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옮겨 주셨으니

우리는 언제 죽어도 천국 갈 사람이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잠깐 살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영혼안에 성령을 두셔서 가끔은

‘내가 너 안에 있다’하고 은사도 주시고, 기적도 주시지만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행복해야 될 이유는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수 없이 많습니다.

본문 느12장에서 유다 백성이 누리는 기쁨, 즐거움의 세 가지 특징을 생각해 보면서,

느헤미야 12장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기쁨이다

 

“너희는 신실한 사람들이요, 너희는 천국에 와야 될 사람들이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본문 느헤미야 12:1~26절을 보면 이름만 나옵니다. 읽기에 지루한 내용입니다.

 

1절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를 좇아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이러하니라

제사장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26절까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1~11절까지는 B.C 538년에 스룹바벨과 귀환한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의 명단이고,

12~26절까지는 그로부터 94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 에스라와 함께 활동한

제사장, 레위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거주하면서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해 왔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어려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성벽재건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을 눈으로 못보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을 못 받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오랫동안 지연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 전통을 이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은 잊어버리기 쉬웠습니다.

 

사람이 헤어지는 건 슬프지 않아도, 잊혀지는 것은 슬프다고 합니다.

잊혀지기 쉬운 이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기억해 주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름을 읽어 봐도 누군지 알 수 없고 지루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이름들을 잊지 않고 낙성식 할 때,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수고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어려운 시대에 수고 많이 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수고로 인해서 성벽의 재건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벽 낙성식을 하면서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후손들은 이 사람들을 존경해야만 한다.

이들은 사회가 영적으로 어렵고, 어두운 때에도

나를 향한 예배의 전통을 신실하게 지켜 온 사람들이다.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고, 기억하고, 인정 해주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까?

우리 모두는 영원 전부터 “내 백성이다”라고 택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기본적으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 인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기본 인정에다 특별히 잘 했다고 하는 인정을 받게 되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우리가 천국가서 베드로가 여러분에게 물어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는 하나님이 인정해 줄만한 것 하나라도 있으면 얘기해 봐라”

하나님께 갈 때 인정받을 만한 기록을 가지고 가는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인정받고 기억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1536년 존 칼빈이 기독교를 완성하고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교리적인 정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만 교회 역사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중세 천년을 암흑기라 합니다. 중세 천년, 이 암흑기에 교회가 교리적으로 부패하고

윤리적으로 부패할 때에도 대항해서 투쟁하여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카다리파(Cathari), 왈도파(Waldenses) 이런 사람들도 있고,

14기 말에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다시 일으킨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체코슬로바키아의 존 후스(John Huss)가 있습니다.

 

체코 프라하 광장에 가면 후스 선생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리기 쉬워도, 하나님은 존후스, 존 위클리프에게 고생 많이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존 후스는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교황이 “안 죽일테니까 와라”했습니다.

막상 오니깐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존 후스에게 “불에 탈 때 얼마나 힘들었느냐 고생했도다”하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 후스, 존 위클리프는 교회역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별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시1:6절에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신26:18절에도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아도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좋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눅26:1-4절을 보면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에게

“그는 구차한 중에도 자기의 모든 것을 넣었다”라고 하시면서

그 과부의 헌금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눅7장을 보면 로마의 백부장에게 “유다백성들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크게 칭찬하면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또 마15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딸이 즉시 나았도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여인을 칭찬하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 받아도 참 기쁩니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 꼭 제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이것은 빼고 더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아내에게서 칭찬만 받아도 용기가 생깁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이 없다” 인정해 주시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느헤미야 12장에는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는, 원수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기쁨이다

 

12:27절 이하에는 봉헌식을 준비하고, 봉헌식을 시행하는 장면입니다.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느헤미야가 봉헌식을 하는데 성가대를 먼저 모은 것입니다.

그리고 악기를 준비하고 몸을 정결케 하고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합니다.

정결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정결의식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장은 멍에를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잡고 그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불살라 재를 만들어 물에서 끈 후 재를 담은 물에 우슬초를 적셔

사람이나 혹은 부정해진 물건에 뿌리게 되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목욕도 하고 옷도 깨끗이 세탁해 입고 우슬초로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리고

성벽과 성문에도 우슬초로 정결케 하는 물을 뿌려 의식적으로 정결케 한 후에

느헤미야는 성가대와 모든 백성들을 두 팀으로 나눕니다.

 

시계를 보면 중앙 아래는 여섯시, 중앙 위는 열두시입니다.

여섯시에서 한 시간이 지나면 7시가 됩니다.

성벽의 일곱시 방향에 모여 두 팀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학사 에스라가 앞서가고, 하나는 총독 느헤미야가 앞서갑니다.

 

그리고 성가대가 가고, 백성 절반이 따라갑니다.

성벽의 일곱시 방향으로 시작해서 에스라팀은 동진하고, 느헤미야 팀은 서진해 나갑니다.

일곱 시 방향에서 행진하여, 성벽의 한시 방향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가대와 수많은 백성들이 악기 연주하면서 찬양을 합니다.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리고, 성가대의 노래가 어우러져 하나님께 올라가고,

한시 방향에 모두 모여 제사를 드리고, 크게 하나님을 찬양을 하니

온 백성이 다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성벽 낙성식입니다.

 

이 낙성식은 축사, 격려사, 기념사 이런 것이 없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벽 낙성식은 온 백성이 찬양을 하면서 두 팀으로 나뉘어 소리가 울리고

마주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움직이고 노래하고 역동적입니다.

 

이때에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앞서 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 성벽이 52일만에 완성되었고, 7월 1일에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7월 14일이 되었구나. 불과 세달전만 해도 유다 백성들은 절망했고,

낙심했고, 연약했고, 무기력했고, 원수들이 우리를 조롱했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 4:10~11절이 유다 백성들의 당시 생각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세 달 지나고 나니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원수를 향해서는 승리의 기쁨(Joy of Triumph)이며, 일에 관해서는

완성의 기쁨(Joy of Completion)입니다. 불과 세달 사이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백성들은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인생길은 나그네길입니다.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다가 본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연옥은 없습니다.

이 나그네는 세상을 살아 갈 때에 때로는 천국 갈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낙심의 때도 있고, 어둠, 절망의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행하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우리에게 기쁨의 때, 승리의 때,

완성의 때가 올 줄로 믿습니다.

 

잠언 4:18절을 보면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예수 믿고 의인된 사람의 인생은 돋는 햇볕 같습니다.

 

여러분, 어둠이 깔리고 칠흙 같은 어둠이라도 동해 앞바다의 태양이 떠오르고 서광이 비취고,

태양이 점점 떠올라 온 천지가 밝아지고, 햇빛을 비추어 온 천지 따뜻해 질 때에

얼마나 우리는 감격합니까?

 

우리의 인생은 돋는 햇볕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생이 슬프고 어두운 분이 계십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은 돋는 햇볕과 같습니다.

점점 광명한 곳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광명입니다. 천국이 기쁨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다 천국 갈 사람아닙니까? 빌1:6절을 보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는데 완성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은 완성의 기쁨, 승리의 기쁨의 장소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보은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기쁨을 맛보기로 조금씩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6년을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살 때에 배고프면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왜 갔냐면 맛보기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맛보기로 한 바퀴 돌면 위가 절반이 찹니다. 두 바퀴 돌면 꽉 찹니다.

그래도 모자라면 세 바퀴 돕니다. 맛보기만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조금씩 맛보기로 주시는 것입니다.

2010년도에는 천국의 기쁨을 많이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을 증거하는 기쁨이다

 

유다 백성들이 승리한 것은 원수들도 듣습니다. 이방나라 사람들도 모두 듣습니다.

12:43절 보면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 멀리 들리네” 들리잖아요! 종치면 들리지 그곳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 성벽을 방해를 했던 이 웬수들도 소식을 듣고,

“이제 우리는 망했도다. 우리가 한 것은 실패했도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성벽을 완성 했구나. 역시 유다 백성의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로다.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 와서 성벽까지 건설하고 살게 하셨도다”라고

이방 나라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교회 승리의 노래는 마귀에게는 멸망의 선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마귀의 머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성령이 임하여 부흥이 된다는 소식은

마귀의 진영에는 곡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가 부흥이 되었데. 우리는 망했구나”하는 것입니다.

이방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이 부흥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즐거움의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와 선교의 승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전도도 교회가 기뻐야 열매가 맺고, 선교도 우리가 기뻐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오면 뭐합니까?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예배에 왔는데

사람들마다 인상 쓰고 있으면 ‘행복한 교회가 아니구나’하고 돌아 가버립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예배 나올 때 윗 이빨을 내놓고 오시길 바랍니다.

 

부흥되는 교회들은 대부분 윗 이빨을 내놓고 다닙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의 열매를 맺는 것도 사영리를 외웠다고, 훈련을 받았다고,

프로그램을 했다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개개인의 영혼이

예수 믿어 성령받고 충만하고 기쁘면 전도도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예배에 참석하면 “여기로다”고 출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TV 설교 들으신 권사님들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부흥되는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얼굴이 밝고, 기쁨이 넘치고,

활력이 넘칩니다. 그러나 부흥이 안되는 교회를 보면 어둡고, 기쁨이 없고 활력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26편은 학사 에스라가 기록한 것입니다.

시126: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 된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무너진 성벽을 세우셨습니다.

대사(큰 일)를 행하신 것입니다.

열방 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대사를 행하셨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2010년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사를 행하시고

이런 기쁨이 넘치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 영혼마다, 가정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대사를 행하시고

우리는 기쁨의 해, 즐거움의 해, 천국의 즐거움 맛보는 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2010년도 강남중앙침례교회는 하나님께서 대사를 행하시고 성령을 폭발적으로 부으시고,

부흥이 일어나서 우리 가운데 기쁨이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어느 집에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용신 할 수 (예수님을 뵐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사람들이 용신 할 수 없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 2010년에는 대한민국에 승리의 소식, 기쁨의 소식이 들려야 합니다.

별볼 일 없는 것 가지고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아랍의 원전을 수출하는 나라가 돼서 감사합니다.

아랍 뿐만 아니라 미국도 우리나라에서 원전을 사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삼성, 엘지, 대우가 세계만방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골프선수, 야구선수, 축구선수등 모두 가서 우승하기를 바랍니다.

 

최경주 선수 우승하시고, 박지성 선수 100골 넣으시고, 김연아 선수도 금메달 따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소식, 기쁨의 소식 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복음으로 돕고, 물질로 돕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치하는 분들도 힘이나고, 재미나고, 살맛나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느헤미야 12장은 기쁨의 장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기쁨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처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느12장 절별 해석

 

느12:1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러하니라 제사장들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인구 재정착 작업을 마친후 (11장),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인 여호와 신앙의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한다.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

이들은 바벨론으로 부터의 제1차 귀환을 주도했던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였다(스 2:2).

따라서 본절부터 7절까지에 언급되는 제사장 가문은, 모두 최초의 귀환 대열에 속했었다.

 

한편, 1-7절 외에

12-21절과(느헤미야 초기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

10:2-8(느헤미야후기 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에도 제사장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학자들은 이 '에스라'가 10:2의 '아사랴'의 축약형이라고 주장한다.

 

느12:2 아마랴와 말룩과 핫두스와

느12:3 스가냐와 르훔과 므레못과

느12:4 잇도와 긴느도이와 아비야와

 

'잇도'

10:5의 '오바댜'(*)의 바른 이름이다. 보다 후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12-21절)에도

'잇도'(16절)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오바댜'는 필사자의 잘못인 것 같다.

 

'아비야'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바로 이 제사장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다(눅 1:5).

 

느12:5 미야민과 마아댜와 빌가와

느12:6 스마야와 요야립과 여다야와

 

'스마야' 18절과 10:8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요야립'

이 '요야립' 앞에만 '그리고'의 의미를 갖는 접속사 '와우'가 있다.

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의 '스마야'까지와

여기의 '요야립'부터를 확연히 구분하려고 시도한다(19절).

 

추측컨대 이는 '요야립' 가문부터, 어떤 원인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언약에 인을 치지 못했던 때문인 것 같다.

이와 같은 주장은, '요야립'이하의 가문명들이 10장의 인친 가문의 명단 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느12:7 살루와 아목과 힐기야와 여다야니 이상은 예수아 때에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이었느니라

 

'여다야' 6절의 '여다야'처럼 대제사장 가문 출신일 것이다.

한편, 다윗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24반차로 구분되어 번갈아가며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된 바 있으나(대상24:1-19),

 

1-7절에 열거된 제사장들의 수효는 22명이다.

그렇다고 느헤미야 시대에와서 22반차로 의도적으로 재구성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1-7절에서는 24반차 중 2개의 명단이 생략되었다고 본다.

 

느12:8 레위 사람들은 예수아와 빈누이와 갓미엘과 세레바와 유다와 맛다냐니

이 맛다냐는 그의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고

느12:9 또 그들의 형제 박부갸와 운노는 직무를 따라 그들의 맞은편에 있으며

 

본절의 명단들은 가계명 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비록 귀환 당시에는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밖에 없었지만(스 2:40)

1) 약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레위 사람들의 인구가 증가하였고,

2)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바벨론에서 데려왔기(스8:15-20) 때문에

이처럼 가문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다.

 

느12:10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고

 

본절과 다음 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활동했던 대제사장의 계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대상 6:3-15에 나타난

아론으로 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대제사장 족보의 연장이다.

물론 포로 기간, 즉 B.C. 586년부터 B.C. 538년까지는 대제사장이 없었다.

 

'예수아'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했던 인물이다(스 2:2).

그는 B.C. 520년 경의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는 데 참여했음이 분명하다(스 5:2).

그러나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살아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스 8:15-18).

 

'요야김' 예수아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역할을 했다(12, 26절).

 

'엘리아십' 이 사람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해인 B.C.458년 이전에

이미 대제사장이 되어 있었다(스 10:6).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적극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내통하는 등의

이적(利敵) 행위를 하기도 했다(13:4, 5, 28).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것이다'이다.

 

'요야다'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후기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됐었다(13;2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알고 계신다'이다.

한편,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월절 기략'(the Paschal Chronicle)이라는

유대 문헌에 따르면 그의 재직 기간은 삼십 육 년으로 되어있다.

 

느12:11 요야다는 요나단을 낳고 요나단은 얏두아를 낳았느니라

 

'요나단' 22, 23절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인 듯하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요하난'이 페르시아 총독 바고아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던 동생 예수아를 살해하였던 인물이라고 말한다.

 

또한 '요하난'은 애굽에서 발견된 B.C. 410년 경의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그 이름이 언급된다.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의 총애하심'이다.

 

'얏두아'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얏두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당시의 대제사장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입성이 B.C.332년이었으므로,

본서가 B.C.5세기 후반 (421-400년 경)에 기록됐었다는 입장은 손상을 입게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10, 11절의 족보가

후대의 어떤 인물에 의해 가필(加筆)되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느12:12 요야김 때에 제사장, 족장 된 자는 스라야 족속에는 므라야요 예레미야 족속에는 하나냐요

 

여기서부터 21절까지에서는 제사장 21반열의 이름 각각과 그 각각의 우두머리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이는 당시에 제사장 체계가 새로 정비되고, 성전 제사가 엄정히 드려졌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사실 요야김이 대제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기는,

성전이 재건된(B.C. 516년) 직후였으므로 당연히 성전 제사가 철저히 드려졌을 것이다.

 

'요야김 때' 에스라나 느혜미야가 귀환하기 얼마 전의 시기를 가리킬 것이다.

분명치는 않지만 예수아의 대제사장 재직이 B.C. 490년까지였다면.

요야김은 에스라의 도착(B. C. 458년)직전까지 대제사장에 있었을 것이다.

 

느12:13 에스라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아마랴 족속에는 여호하난이요

느12:14 말루기 족속에는 요나단이요 스바나 족속에는 요셉이요

느12:15 하림 족속에는 아드나요 므라욧 족속에는 헬개요

느12:16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느12:17 아비야 족속에는 시그리요 미냐민 곧 모아댜 족속에는 빌대요

느12:18 빌가 족속에는 삼무아요 스마야 족속에는 여호나단이요

느12:19 요야립 족속에는 맛드내요 여다야 족속에는 웃시요

 

'요야립 족속' 본 제사장 가문 명단중 유일하게 이 앞에만 '그리고'의 뜻인

접속사 '와우'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느12:20 살래 족속에 갈래요 아목 족속에는 에벨이요

느12:21 힐기야 족속에는 하사뱌요 여다야 족속에는 느다넬이었느니라

느12:22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

 

본절과 23절도 10, 11절처럼 후대의 삽입인 듯하다.

 

'바사 왕 다리오' 다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페르시아 역사상 세 명 등장한다.

그러나 문맥상 본문의 다리오는 유다의 대제사장 '얏두아'와 동시대 사람인

다리오 3(B.C. 335-331)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느12:23 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하난 때까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

 

'역대 지략' 여러 가지 명단과 기록을담은 공식적인 성전 연대기로 추측된다.

요하난은 B.C. 400년 경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최후의 선지자 말라기도 바로 이 시대에 활동했었다.

 

느12:24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들의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본절과 다음 절의 레위 사람들의 명단은, 개인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

 

'하사뱌' 포로 귀환 후 생긴 레위 사람의 가문일 것이다(8, 21절).

'세레뱌' '하사뱌'와 마찬가지이다.

 

'그 형제의 맞은 편에 있어'

레위 성가대가 교송(交頌) 형식으로 찬양을 드렸음을 의미한다(9, 3:11).

, 두 파트로 나뉘어 서로 마주보며 찬양하였던 셈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찬양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이 신정 왕국 이라엘의 예배 체계를 신실하게 확립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용어인 듯하다(대하 8:14).

다윗이 노래하는 자들의 반차를 정한 것은, 대상 25장에서 언급되고 있다.

 

느12:25 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다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은 다 문지기로서 순서대로 문 안의 곳간을 파수하였나니

 

'노래하는 자'(11:17)들이 '문지기기'의 역할도 병행했었다는 추측은 불필요한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오바댜' 까지의 세 사람을 24절의 후미에 붙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맛다냐'와 '박부갸' 사이에만 유일하게 있는 접속사 '와우'를

'오바댜'와 '므술람' 사이로 옮기면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 사이의 구별이 뚜렸해진다.

6절의 '요야립'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면, 이 같은 구별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 안의 곳간'

'문지기'들이 지켰던 '곳간'은 성전에 부속되어 있던 '곳간'들을 가리킨다(10:38, 39).

 

느12:26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요사닥의 마랴 족속에는 여호하난이요 손자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때에 있었느니라

 

'모든 사람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

'요사닥'은 바벨론에 붙들려간 '여호사닥'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이며(대상 6:15),

'예수아'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대제사장(스2:2)이다.

 

'요야김과...느헤미야와...에스라 때'

이것은 여기의 세 사람이 모두 동시대(同時代)의 사람들임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의 '요야김'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B.C.458년 이전에 죽었을 것이다.

즉, 에스라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요야김'의 아들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의 직책에 올라 있었다(스 10:6).

 

느12: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바는,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성곽 봉헌식 행사가 언제 실시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1) 성곽 공사가 준공된 직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

2) 예루살렘으로의 인구 재정착 사업을 끝마친 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

3)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온 직후인 B.C.432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 등이다.

 

원래 봉헌식이라는 것은 집이든 성곽이든 준공 직후에 시행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었으나(스 6: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시급한 예루살렘 성의 방비 문제(7:4)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기쁨으로 봉헌식을 실시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落成)되니.'

6:15에서 언급되고 있다.

 

'각처에서 레위 사람을 찾아'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혹은 내용상 당시에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의 징수 등의 목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각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11:36의내용과 바로 연결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에게 배당된 성읍에서 살았지만, 자신들의 봉사 순서가 돌아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야만 했다(대하 23:2).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봉헌식을 행하려'

이것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이 사용했던 방식의 답습이다(대하 5:12, 13).

 

'제금'(메칠타임)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가 잘 보여주듯이,

마치 솥뚜껑처럼 생긴 한 쌍의 금속을 부딪혀 소리내는 악기로서 현대의 심벌즈와 유사하다.

 

'비파(네벨)' 요세푸스는 이 악기의 현(絃)이 열 둘임을 중언하고 있다.

 

'수금(키누르)' 현이 셋 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열 둘 되는 것까지 다양했었다.

특별히 귀족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된 고급 악기였던 관계로, 은 혹은 상아,

심지어는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앞의 비파 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느12: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예루살렘 사방 들' 여기의'들'(키카르)은 때때로 평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둘레에는 말 그대로의 '들'은 없다는 점에서.

본 문구는 다만 '예루살렘 일대의 주변'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느도바 사람의 동네'

베들레헴의 동남쪽 가까이 위치했던 작은 마을인 것 같다.

 

느12: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벧길갈' 예루살렘 동북쪽 약 26km지점의 '길갈'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

 

'노래하는 자들은...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노래하는 자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봉사에 쉽사리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이 문구는 '노래하는 자들'이 앞절과 본절의 전반부처럼

쉽사리 예루살렘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느12: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정결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추는 내용이다.

 

'정결케 하다'의 뜻인 히브리어 '타헤르'는 구약 성경에서 94회 나오며

거의 의식적 혹은 윤리적 정결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특히 부정했던 자를 다시 회복시켜 의식 절차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정결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흔히 사용되었다 (레 22:4-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하고'

금식, 성적 욕구의 절제, 속죄제를 드리는것 등을 가리킨다.

 

'백성...정결케 하니라' 일반 백성들은 옷의 세탁(출 19:10, 14),

목욕 및 물을 뿌림(민 8:7;19:12) 등을 통해 정결케했을 것이다.

 

'성문과 성' 이것들 또한 '정결케'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는 성벽 재건 도중 성벽에 부정한 것들이 접촉되었거나

혹은 거기서 부정한 일들이 저질러졌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신 23:14).

 

그것들을 정결케 하는 방법은, 개인의 가옥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우슬초로 새의 피를 거기에 뿌리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하다(레 14:49-53).

 

느12: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 벽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서쪽 성곽의 중앙부 곧 골짜기 문(2:13)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온 직후 성벽의 파괴

정도를 관찰하기 위한 경로를 바로 이 '골짜기 문'부터 잡았기 때문이다.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

레위 사람들 중 아삽 자손들을 가리킨다(27-29절, 11:17).

 

'성 위로 행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이러한 독특한 의식적 행동은,

그 성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인도에 따라서 재건되었음을 감사 및 고백하는 데(27절)

그 목적이 있었다(시 48:12-14).

물론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糞門)을 향하여 가게 하니'

이 대열은 '골짜기 문'(2:13)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약 450km 떨어져 있던

'분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서론의 '성벽모형도' 참조)

이 대열의 인도자는 '학사 에스라'였고(36절). 선두에는 찬송하는 레위인들이 위치했다.

 

느12:32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호세야와 유다 방백의 절반' '호세야'가 '유다 방백'의 선두에 섰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여기의 유다 방백'은 반드시 유다 지파의 방백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지파를 막론한 '이스라렘 백성'들의 방백을 가리킬 것이다.

 

느12:33 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 이들을 방백들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성벽 봉헌식에 있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본문 전후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레위인 혹은 제사장의 명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느12:34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이며

 

'유다와 베냐민' 이것은 평민들의 집단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스마야와 예레미야' 두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다(12, 18절).

 

느12:35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잡았고’)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 손 아삽의 육대 손 스가랴와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나팔'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간혹 사용되었을 뿐(대상 16:42),

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다뤼지던 악기였다.

이 악기는 특별한 종교적 행사 혹은 사건의 축하를 위하여 사용되었다(삼하6:15, 대하 7:6, 29:26-28).

 

한편, '잡았으니'라는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 다음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팔'을 잡은 사람의 구체적 명단인 양 착각케 한다는 점에서.

'잡았고'라고 해야 보다 타당하다.

 

물론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은, 원문상 본 문구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인

'스가랴' 사이에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와우'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본 문구 뒤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레위 사람들이 분명한 이상,

'잡았고'로 고쳐 번역함이 보다 자연스럽다.

 

'아삽의 6대 손 스가랴'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송의 책임을 부여받았던 레위 사람이었다(대상16:4-7, 대하 5:12).

한편, '스가랴'는 느헤미야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약 50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여기의 '6대손'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차라리 '자손'으로 번역함이 무리가 없다.

 

느12:36 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그 형제'

다음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앞절의 '스가랴'처럼 아삽 자손들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다윗의 악기'

레위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악기들, 곧 제금, 수금, 비파 등을 가리킨다(27절).

이처럼 '제금'. '수금', '비파'를 '다윗의 악기'라고 한 까닭은,

그 악기의 사용이 다윗에 의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이기 때문이었다(대상 15:16).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그 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에스라'라는 인물이 차지하던 비중을 잘 보여준다.

비록 그는 느헤미야와 같은 정치적 권세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각성이 그의 종교적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감안한다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8:1-12).

 

느12:37 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성벽을 타고 행진하던 에스라 일행이 일단 성벽에서 내려왔음을 전제로 한다.

사실 에스라의 일행은 '샘문'이 가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성벽에서 일단 내려왔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반대쪽의 성벽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이 '다윗 성의 층계'는 샘문을 통하여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었었다.

바로 이 계단을 통하여 에스라의 일행은 성의 안쪽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다윗의 궁 윗 길' 여기의 '길'(호마)은 잘못된 번역이다.

이 '호마'는 '성벽'의 뜻이 있을 뿐이다(출 14:22;신 3:5;렘 1:18).

 

'동향(東向)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이것은 에스라의 일행이 샘문 북쪽의 성벽 끝을 출발하여

그 성벽을 따라 계속 진행했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수문이 느헤미야 당시에 재건된 성벽의 바깥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이 문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1) 느헤미야가 포로 이전 시대의 수문과는 별도의 수문을 만들었으리라는 견해.

그러나 그러한 언급이 3장에 나오지 않으며 또 3:26의 수문과 본문의 수문이 동일한 지점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2) 에스라 일행이 새로 재건된 성벽을 벗어나 그 바깥쪽으로 돌았으리라는 견해.

하지만 에스라 일행은 특별한 경우만 성벽 안쪽으로 돈 것을 제외하면

줄곧 성벽 위로 돌았음에 분명하다.

 

3) 본문의 '수문'을 3:26에서처럼 '수문과 마주 대한 곳'으로 해석하는 견해.

여러 측면에서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느12:38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뒷길로 성 벽 넓은 곳에 이르고

 

'저희들 마주 진행하는데'

여기의 '마주'(레모올)는 '반대로'의 의미이다(NIV).

따라서 이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되는(36절) 한 대열이 성을 따라 우측으로 돈 데 반해,

또 다른 한 대열은 좌측, 즉 북쪽으로 돈 것을 가리킨다.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비록 느헤미야가 그 대열의 인도자였지만, 그 대열의 선두에는

아삽 자손의 노래하는 자들이 위치했었음을 말해준다.

이같은 순서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대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풀무 망대 윗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여기의 '풀무 망대 윗길'은 '다윗의 궁윗길'과 마찬가지로

'풀무 망대에 이르는 성벽'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이 '풀무 망대 윗길로'와 다음의 '성 넓은 곳에 이르고' 사이에는

'경유하여'(메알)라는 단어가 삽입되어야 한다. '성 넓은 곳'에 대해서는 3:8주석을 참조하라.

 

느12:39 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에브라임 문'

북쪽 성벽의 서쪽 부분에 있던 '하나넬 망대'(3:1)와 '함메아 망대 '사이의 '문'이다.

 

'어문' 3:3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양문' 3:1 주석을 참조하라.

 

'감옥문' 이것은 수문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어느 지점에 위치했을 것이다(Rawlinson).

 

느12:40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본절은 '감사 찬송하는 두 떼는 하나님의 전에 섰고

나를 포함한 민장(民長)의 반은 나와 함께 있었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성전에서의 봉헌식을 주관하던 성직 계급과 평신도들의 분리되는 모습이

생생히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과 느헤미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서 성전에서 서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민장' 32절에서 언급되는 '방백'과 본질상 동일할 것이다.

 

느12:41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본절부터 43절까지에서는 성벽 봉헌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본 절에 언급되는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 만일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라면

제사장 가문 목록에 실려있어야 했을 것이다(12-11절;10:2-8).

 

느12:42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운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마아세야...에셀이 함께 있으며'

원문에는 '함께 있으며'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 아무튼 '마아세야...에셀' 등도

41절의 제사장처럼 나팔을 불던 제사장이었음이 분명하다.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노래만 했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이 '찬송'하는 무리 속에는 악기를 잡은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36절).

 

따라서 이 봉헌식에는 1) 느헤미야가 인도하던 대열만이 참여하였고,

2) 그래서 악기를 사용하는 레위인들은 없고

다만 '노래하는 자들'만이 있었다는 롤린슨의 주장은 결코 타당치 못하다.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이 '예스라히야'는 '노래하는 자'와 '악기를 잡은 자' 모두에 대한 지휘자였던 것 같다.

 

느12: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여기서'제사'(제바힘)는 주로 감사의 화목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출24:5, 29:28)

그때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불살라서 바친 후(레 3:11).

그 나머지의 부분 중 일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레 7:29-34),

그 잔여분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을 것이다(신 12:17,18).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성공적으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일(6:15,16)로 인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음을 가리킨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줄거워하였으므로'

성경은 여자들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으나

기뻐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본절의 언급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이 너무나도 컸음을 더욱 확연히 보여준다.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백성들이 기뻐 환호하는 소리가 매우 커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성전 지대가 놓여졌을 때도 백성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컸었지만,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별되지 못했었다(3:13).

 

느12:44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본절부터 47절까지에 언급된 사실은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된 이후 나타났던 바람직한 결과였다.

 

'그 날에' 봉헌식이 있었던 직후의 어느 시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헌물의 수령 및 관리를 담당할 사람을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전에 느헤미야는 '곳간'을 담당하는 레위 사람과 입회인 자격의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10:38).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제사장들'은 처음 난 가축이나 과일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 등을 백성들로부터 받았다(10:35-37).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며(10:38)

그 십일조의 십분지 일은 제사장에게 다시 돌려졌었다(민 18:26).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 10:35-47을 참조하라.

 

'유다 사람이...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이것은 백성들이 봉헌식을 통하여서 성직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연고일 것이다.

한편, '유다 사람'은 지파를 막론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곧 평민들을 가리킨다.

 

느12:45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본절에서는 희생 제사 등과 관련된 봉사를 하는 제사장 및 레위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자 및 문지기 모두 그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말할 나위없이 백성들이 성직자들을 물질로 뒷받침한 결과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섬기는 일'(미쉬메레트)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직무' 혹은 '직분'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담당하던 제반사를 가리킨다.

 

'결례(潔禮)의 일'

'결례'(타하라)는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부정(不淨)을 정결케 하는 노력을 가리킨다.

자신 뿐만 아니라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대상 23:28).

 

'다윗과...솔로몬의 명을 좇아'

이것은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 뿐만 아니라 앞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문구이다.

즉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봉사도 '다윗'과 '솔로몬'이 정한 규례대로 시행되어졌던 것이다.

 

느12:46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본절은 '노래하는 자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규례대로 봉사했다는

45절 후반부의 언급을 보충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기록된 듯하다.

본절 초두에 있는 '왜냐하면'의 뜻인 접속사 '키'는 본절이 45절 후반부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들'이 규례에 따라 봉사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합법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것이다.

 

'노래하는 자의 두목'

'두목'(라쉐이)은 복수이다. 이것은 다윗 당시에'아삽'을 포함한 세사람의 '두목'이 있었다는

사실과 잘 합치된다. 그 나머지 둘은 '헤만'과 '에단'이었다.

 

'찬송...감사하는 노래' '찬송'과 '감사'는 신구약을 막론한 모든 성도들의

찬양에 담겨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주제일 것이다.

 

느12:47 스룹바벨 때와 16느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본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성직자들이 특별히 존중되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 이것은 곧 포로 귀환 시대 전(全)기간을 가리킨다.

 

'날마다 쓸 것...그 구별한 것'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들은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일 뿐이다.

 

'노래하는 자들...문지기들...레위 사람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레위 지파의 후손, 즉 레위인들이었으며,

그래서 모두 기업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주는 십일조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십일조 제도가 세워진 모세 시대 심지어는 사울 시대까지 레위인들 중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은 구별되지 않았었다.

 

'레위 사람들은...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십일조 중 십분지 일을

'제사장'에게 준 것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