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영혼으로 대하라 [신명기 42] - - YouTube
◈사람을 영혼으로 대하라 신16:18~20, 17:8~13
◑도입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새로워지는 것인데. 두 가지 면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이고,
-이웃과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의 본질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두 번째 변화가 뭐냐하면 이웃과 관계에서 변화가 오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모세는
이웃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을 대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16: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 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오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공의로 사람을 대하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이웃을 대하는 성경의 큰 두 가지 명령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공의를 대하라는 거예요.
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들어왔죠.
사람을 대하는 것은 사랑으로 대해야 된다는 가르침은,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것 뿐만이 아니라 공의로 대해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은 특별히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웃을 공의 재판하라'고 말씀하죠.
그게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재판 판결에 대한 가르침 입니다.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사람이 많잖아요. 6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다툼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판결이 얼마나 많이 필요했겠어요?
그래서 모세가 판결에 대해서, '재판을 할 때는 이렇게 해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 꼭 재판에 관계된 것만이 아니고,
우리 각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거죠.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이 사람이 잘못됐어, 저 놈 나쁜 놈이야...'
우리 각 사람 안에 재판관이 한 사람씩 있습니다.
그래서 판단할 뿐만이 아니라, 형량도 내립니다.
'쟤는 손절해야 될 사람이야!' 이러기도 하고,
'내가 받은 대로 갚아줄 거야' 뭐 이러기도 하고...
하여간 우리 안에 나름 스스로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가르침은,
단순히 재판할 때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확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는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어떻게 분별하는가? 하는 것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어때야 되는지,
'공의로 이웃을 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문제 제기
◑신16: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 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오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여기에 사용된 이 '공의' 라는 단어를 보면, 특이하게 두 단어를 겹쳐서 사용했습니다.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두 가지 단어가 있거든요.
근데 둘 다 겹쳐서 동시에 사용했어요.
그래서 KJV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y shall judge the people with just(체데크) judgment.(미슈파트)
그냥 하나만 사용해서 쓰면 되는데,
여기는 하여간 두 단어를 동시에 썼어요. 강조한다는 뜻이겠죠.
▲두 단어 모두 '공의, 정의' 라는 뜻인데, 어원이 조금 달라요. 결이 약간 다릅니다.
1) 체데크 ... 공의인데, 창조주의 질서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공)의가 뭡니까? 질서 안에 머무는 게 (공)의라는 거예요.
한 나라 안에서도 공의가 뭐고, 불의가 뭡니까?
그 나라에서 정한 법이 있지요. 국회에서 만든 법이 있는데,
그 법 안에 머무르고 있으면.. 공의
그 법을 어기고 벗어나면.. 불의가 돼죠.
이렇듯이 공의/ 불의 하는 것은
질서가 있고 기준이 있으면,
그 질서와 기준 안에 머무르는 것이 공의 라는 거예요.
또한 체데크는.. 창조주의 질서 안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결정하는 분이세요. 무엇이 의롭다고 하는 걸 결정하는 기준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공)의이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게 불의인 거예요.
그래서 체데크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 머무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러시면 그게 불의인 거예요.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면 불의죠.
예를 들어, 동성애 같은 게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는 게 아니다, 자기들끼리 좋아서 하겠다는데... 그냥 허용해라
하는 주장이 있죠.
그럼에도 우리가 '그건 불의야!' 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 안 하셨다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도록 창조하셨고,
때문에 그 질서를 벗어났다 라는 측면에서는 이게 불의인 거지요.
2) 반면 미슈파트는 뭐냐 하면, '억울함이 없게 하는 걸' 미슈파트라 그래요.
그래서 평형저울(천칭)으로 달아서, 기울이지 않을 때, 그걸 미슈파트 (공평)이라고 합니다.
판결이 어느 한쪽으로 이렇게 기울어진다면, 그건 불공평한 거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미슈파트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 독특하게도 오늘 본문 말씀에
'공의로 재판하라' 할 때, 체데크와 미슈파트 두 단어를, 동시에 같이 사용합니다.
강력하게 강조한다는 뜻이 되겠죠. 개역에는 한 단어로만, '공의'로 번역되어 있어요.
신16:18 they shall judge the people with just(체데크) judgment.(미슈파트)
그러니까 사람을 대할 때는 공의로 대하는데,
그 공의는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거예요.
-첫째는 사람을 판단할 때 하나님의 잣대,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고, 체데크
-그 다음에 억울함이 없도록, 공평하게 대해야 된다는 거예요. 미슈파트
이 두 개가 '이웃을 공의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체데크와 미슈파트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주1)
둘 다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80% 있으니까, 둘을 호환해서 써도 큰 문제 안 됩니다만
성경을 더 자세히 분석하기 원하시는 분은, 구분해서 살피는 게 필요하죠.
▲1. 첫째로, 우리는 체데크(공의)로 이웃을 대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는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해야 됩니다.
그것이 체데크의 공의 입니다.
종종 우리는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까?
돈 많은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또 학벌 높은 사람들을 존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잣대, 하나님의 기준하고는 별 상관 없는 것들이에요.
그냥 세상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거죠.
그럼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을 높게 평가 하시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학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 있는 사람 편에 섰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잣대예요.
우리는 어떤 사람을 높게 평가하고, 어떤 사람을 존경합니까?
우리는 어떤 잣대로 사람들을 바라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잣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람으로 사람을 바라보라고 얘기합니다.
무엇을 높게 평가할 것인지, 무엇을 잘못됐다고 얘기할 것인지,
또 무엇을 존경할 만한 것인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잣대로 판단하라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의 기준이 아니라요!
그것은 타인에게도 그렇고, 나에게 적용할 때도 그래요.
나에게 적용할 때도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로' 스스로를 판단하고 분별해야 됩니다.
사실은 우리 잣대로 나를 재면.. 그러면 항상 완벽합니다. 하하하
여러분, 타락한 사람의 유일한 기준이 뭔줄 아세요?
'나는 항상 옳다' 예요.
그게 타락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잣대 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잣대로 자기를 재면, 절대로 객관적인 사실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옳다' 라는 잣대를 가지고 나를 재니까 옳게 여겨지지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몰라요.
그건 체데크가 아니에요.
체데크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잣대로 나를 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들이 아니죠.
구원이 필요한 자들, 은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하여간 자기를 바라볼 때도 그렇고, 이웃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고,
항상 하나님의 잣대를 가지고 보내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공의로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미슈파트의 공의입니다.
억울함이 없도록 공평하게 하라는 거예요.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자녀 라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육신의 자녀겠지만
'내 권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자녀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직장에서 이라는 부하 직원이 될 수도 있고,
하여간 권위 아래 두신 사람들을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첫째, 노엽게 하지 말라.. 이 말은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구약적 의미로 미슈파트 입니다.
둘째,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구약적 의미로 체데크 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법도로 양육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으로 훈육하고 양육하고...
그러니까 훈육하고 양육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잣대가 필요한 거죠. 하나님의 잣대로... 즉 체데크 를 뜻하는 거죠.
자녀 뿐만 아니라 부하 직원들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미슈파트(공평)
뭐 대우받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임금이라든지
어떤 부분에 있어서나 하여간 억울함이 없도록 공평하게(의롭게) 하십시오.
△만약 누구를 억울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억울함이 하늘에 상달된다고 성경을 얘기합니다.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하여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보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억울함이 있으면, 그 억울함은 하늘로 상달됩니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얘기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누군가가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하늘에 리포트(보고)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이 공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누군가 억울함이 있으면,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들으세요.
그래서 기독교의 성경적 리더십의 아주 중요한 파트는 뭐예요?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공정하고 공평하게 리더하는 거예요. *미슈파트
성경적 리더십은 물론 체데크 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기준을 분명히 세워야 되지만,
동시에 미슈파트가 함께 해야 됩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없도록, 공정하고 공평해야 돼요.
그것이 중요한 리더십 입니다.
◑신16:19 '너는 재판(미슈파트)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어근은 체데크)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사람을 공의로 대하는 두 번째 가르침은 뭐냐 하면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세는 두 가지를 주의라고 경계하는 데
-첫째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뇌물을 받지 말라는 겁니다.
아마 모세가 오늘날 살았다면 하나를 더 했을 거예요.
-유튜브 너무 믿지 말라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겁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그 아래 있는 진실이 뭔지, 진리가 뭔지, 사실이 뭔지를.. 정확하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판단은 팩트에 기초해야 된다는 거예요.
자, 이것이 오늘날 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죠.
왜냐면 점점 팩트가 사라지는 세상이 돼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과 SNS를 통한 1인 미디어 시대가 합쳐지면서
팩트가 중요하지 않은 이상한 시대가 돼 버렸습니다.
특별히 SNS 를 중심으로 한 1인 미디어는, 진짜 팩트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과거에는 과거에는 미디어라고 하는 게 정해져 있었어요. 신문사, 방송사 등
때문에 하여간 어떻게든지 팩트 체크를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게 공영방송, 공공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이게 잘못된 게 방송으로 나가면 심각하거든요.
그래서 뉴스가 잘못된 게 나갔으면, 그러면 이게 심각한 문제가 되니까
그 다음 날 당장 뉴스에 '정정 보도'를 했습니다.
오늘 날은 이제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뭐 유튜브라든지 이런 미디어는 '믿거나 말거나' 아무말 대잔치를 합니다.
아무런 책임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검증 시스템도 없어요.
그냥 '카더라' 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막 내 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뭐 그런 시대가 되어 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팩트, 사실에 대한 중요성들이 점점점 희석 되어가는 거죠.
거기에 대한 책임감도 없어지고... 뭐 이렇게 되어 갑니다.
또 퍼스트 모더니즘은 더욱더 그렇죠.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실이 뭔지, 팩트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내 느낌이 중요하다... 이게 이제 포스트 모더니즘 입니다.
뭐 이런 시대가 됐습니다. *실존주의
그리고 정치라든지, 미디어라든지, 기업들은
이런 현상을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사실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약을 팝니다. 그러면 약이 얼마나 효능이 있는지,
실제로 그것의 팩트는 뭔지.. 이런 건 중요하지 않고요.
그냥 '이 약은 잘 들을 것 같아' 하는 느낌만, 광고로 주면 된다는 거죠.
뭐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실제로 도둑질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런 거는 상관없어요.
'저 사람은 도둑놈이야' 라는 이미지만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면 성공입니다.
이걸 '프레임 씌운다' 라고 하죠.
대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사실 확인, 굳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이미지를 소비할 뿐입니다.
왜요? 남 욕하는 게 재밌거든요.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뭔 줄 아세요?
영화, 드라마가 아니에요. 남 욕하는 거예요.
야, 이건 이 시간 가는지 모릅니다. 정말 시간 가는 지 몰라요.
그러니까 특별히 그 사람 없는데서 뒷담화 하는 거,
비겁하게 앞에서는 얘기 못 하고 뒤에서...
이게 여러분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사람들도 굳이 뭐 사실 체크, 팩트 체크... 이런 거 귀찮고요.
그냥 그 이미지를, 내 감정(기분)을 위해서 소비하는 것 뿐이에요.
왜요? 남 욕 하면 재밌잖아요.
그 다음에 내가 의로워지잖아요.
그 사람은 도둑놈이고, 그럼 난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의 의로움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또 상대방에게 각인시키고,
그러면서 '저 놈은 나쁜 놈'을 만드는 거죠.
이게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일이거든요. 죄인들이 하는 게 이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진짜 도둑놈 인지, 나쁜 놈인지...
이런 거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냥 그 사람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 뿐입니다.
'저놈이 도둑놈이다' ... 그러면 난 재밌어요. 나는 의로워요. 뭐 그겁니다.
사실이 뭔지, 진실이 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게 아닙니까?
진짜 사실이 뭔지, 그 사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알아보지 않고, 그저 외부로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아니, 보여지는 것도 아니에요. 만들어(조작)지는 것으로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진실이 뭔지, 팩트가 뭔지, 사실이 뭔지 정확하게 그것에 기초해서
그 다음 뭔가를 하라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 입니다.
이게 뭐예요? '사람을 공의로 대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실 확인을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실 확인, 팩트 체크가 안 되면
'모르겠다' 하고 남겨두는 겸손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냥 사실 확인도 안 된 걸 가지고 '글쎄 이렇데.. 글쎄 저렇데..'
이러면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공의로 대하라고 얘기해요.
공평하고 의롭게 대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웃을 향한 우리의 판단은 항상 공정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확인이 안 된 건 어떻게 말해야 됩니까?
그냥 모르는 것으로 놔둬야 돼요. '무죄 추정 원칙'은 성경적입니다.
◑신17:4 '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서' 17:4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그 범죄가 확실하게 드러났어요.
그러면 이제 형벌을 내리려고 할 때 조차도, 마지막에 뭐 하라는 거예요?
한 명의 증인만 가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적어도 두 세 사람이 증언을 하면, 그래서 그게 진짜로 확실하면, 17:6
증언한 사람의 그 증언이 사실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증언한 자가 먼저 손을 대라(돌로 쳐라)'는 거죠. 17:7
모든 판결은 공의에 기초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태도는 항상 공의에 기초해야 됩니다.
추측에 기초하지 마십시오.
확인 안 된 것은, 그냥 겸손하게 '나는 잘 모르겠다' 라고 놔 두셔야 돼요.
이게 참 어려워요. 이거 잘 하셔야 돼요.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정보를 받아들이는 원칙이 있어요.
제가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건데, '저는 1차정보만 믿겠습니다.'
그러니까 1차 정보란 뭐냐면,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이든지
-아니면 직접 본인한테 직접 들은 말, 그것만 믿겠습니다.
2차정보는 안 믿겠다는 거죠. 2차정보가 뭐죠?
'아휴 내가 들었는데... 카더라' 하는 거죠.
누가 받아서 전해주는 얘기들... 그건 제가 안 믿어요!
그건 벌써 한 사람 거쳐오면서, 뭐가 어떻게 왜곡 됐을런지 몰라요.
혹시 제가 그런 들은 말을 누군가에 꼭 해야 될 때는
'잘 모르겠습니다'를 항상 덧붙여야 돼요.
'그렇게 제가 듣긴 했는데,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항상 덧붙여야 돼요.
그래서 저는 1차정보만 믿습니다.
-제가 직접 직접 보고 경험한 거든지,
-아니면 그에게서 직접 들은 건지 (이거는 또 발설하면 안 되는 비밀인 경우가 많죠)
교회 내에서는 이런 문화가 있어야 돼요.
마치 모르는 것을, 뭐 어디서 주워들은 것을, 즉 2차정보, 3차정보를 가지고 와서
교회에 퍼트리면 안 됩니다.
이게 여러분, 교회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사람들을 상처주고 억울하게 하는 거예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을 옮기지 마십시오. '의롭게 재판하십시오!'
◑신16:19 '너는 재판(미슈파트)을 굽게 하지 말며 *여기서는 '판단'도 됨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어근은 체데크)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재판을 굽게 하지 않기 위해선 뇌물을 받지 말래요.
돈과 사람이 섞여 있으면, 그때부터 사람으로 안 보이고 돈으로 보여요.
예를 들어서 돈을 누구한테 꿔줬어요.
그럼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이 어떻게 보입니까?
'돈 받아야 될 존재'로 보이는 거죠.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 보이는 거예요.
'받아야 되는데 왜 안 주지?'
또 대접 받는 거,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판단을 굽게 합니다.
차라리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십시오. 과도한 선물도 사양하십시오.
정 선물을 받는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돌리십시오.
돈에 묶이면 지혜자의 눈도 어두워지고, 의인 말도 굽어집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때 왕에게 직언을 해야 했던 선지자들은, 왕의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왕이 주는 월급을 안 받았어요. 왜요? 그러면 말이 굽어지거든요.
그래서 왕의 녹을 받는 어용 선지자들은,
항상 말이 굽었습니다. 굽은 예언을 했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한 거죠.
왕이 주는 녹을 받았는데, 바른 소리 할 수 있겠나요?
△그래서 저희 교회는, 헌금은 무기명을 원칙으로 합니다.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누가 헌금을 얼마 했는지 알면, 아무래도 영향을 안 받기 어렵죠.
혹시 큰 액수를 헌금 한 사람이 있으면, 말이 굽습니다.
설교 하다가도 '어휴 이 설교 내용은 잘못하면 그 헌금 많이 한 장로님이
혹시 들으시고 노여워 하시겠지...' 그러면 그 말을 못 하는 거죠.
사람이 연약해서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헌금을 누가 얼마를 하는지, 아예 모르는 게 좋아요.
참 선지자는 왕의 녹을 받지 않아요. 그래야 말이 굽지 않습니다.
그래야 진리의 말씀을 타협 없이, 그대로 전할 수 있지요.
제가 만약 여러분들이 얼마 헌금 했는지 다 알면,
지금 설교하면서 여러분 머리가 각각 다 돈으로 보일 거예요.
'저 분은 얼마, 저 분은 얼마, 저 분은 얼마... 저 분은 무임승차'
그래서 사람은 절대로 돈하고 같이 섞어 놓으면 안 돼요.
그냥 몰라야 돼요.
성경은 여러분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그러잖아요.
때문에 저는 헌금은 그냥 무기명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은행으로 송금하시는 분들, 이름이 찍히겠지만, 그건 제가 안 보거든요.
그러니까 상관 없어요...
이게 다 '판결(판단)을 의롭게 하기 위한' 조치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소중한 영혼'으로 대해야 돼요.
무슨 의미냐 하면, 그 사람 자체가 최종 목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돈을 얻는 게 목적이 아니고,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떤 만족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사람을 통해서 뭔가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사람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라는 거예요.
그게 '영혼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영혼 자체가 소중하고, 영혼 자체가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고,
온 우주를 다 줘도 그 영혼을 대체할 수 없고, 영혼 자체가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것,
그것이 영혼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실 때는,
길 가다 만난 사람 조차도, 허투루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존재로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 만나시는 거 보면,
뭐 별로 도움 안 되는 사람들하고, 그렇게 시간을 많이 보내세요.
뭐 세리들, 창기들... 뭐 이 사람들하고 교제해봐야 뭐가 나오겠어요?
그러니까 조금 머리가 돌아가고,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는 사람은
누구하고 사귀어야 될 지가 딱 보이잖아요?
'저 사람하고 가깝게 지내야 내게 유리하고... 내게 이익이 되고...'
근데 예수님은 그거하고 진짜 아무 상관 없이 교제했어요.
세리와 창기들, 이런 사람들하고 시간 보내 봐야 거기서 뭐가 나와요?
아무리 오래 시간을 같이 보낸다고 해서... 뭐 거기서 뭐가 생깁니까? 돈이 나옵니까?
오히려 마이너스죠.
그러나 그 영혼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에요.
이게 크리스천들이 사람을 대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사람을 영혼으로 대하는 것은
돈이나 어떤 성적 만족의 대상이 아니라
영혼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공의를 따르는 것인데
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신16: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하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우리가 공의를 따를 때, 성경은 두 가지 약속을 하는데
▲1. 첫째, '네가 살겠다'
히브리어로 '하야' 입니다. *to live, to have life
'하야'는 생명이라는 뜻인데, 구체적으로 하야 무슨 의미냐 하면
'생명이 소성되고, 살게 되고, 회복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공의로 대할 때, 내가 '하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난다는 거예요. 내 영혼이 살아난다는 거예요. 성령 충만해 진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웃을 공의로 대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과,
성령 충만한 것을 자꾸 분리시키려 합니다.
뭐 성령충만한 것은.. 뭐 방언을 하고, 은사를 나타내고, 뭐 기도를 뜨겁게 하고...
이런 걸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고,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그냥 타고난 성품 정도를 치부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영혼으로 대할 때, 우리 영이 '하야한다'는 거예요.
우리 영이 살아난다는 거예요.
이웃을, 공의로, 영혼으로 대할 때
내가 성령 충만 해지고, 내 혼이 평강을 누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성경의 약속입니다.
왜 이옷을 공의로 대하는 것이 예수의 영이 소원이고, 갈망이거든요.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가 행하길 원하시거든요.
그래서 이웃을 그렇게 대할 때, 우리 안의 예수의 영이 살아 나세요.
그래서 성령충만해 집니다. 아멘!
▲2. 둘째,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16:20
이웃을 영혼으로 대할 때, 즉 공의로 대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땅, 즉 유업을 받게 된대요.
여러분, 유업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영원한 유업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는데,
영원한 유업이 무엇일 것 같으세요?
천국에 갈 때 여러분, 돈을 가져 가시겠습니까? 당연히 못 가져 갑니다.
돈은 이 땅에서 다 끝납니다.
집 가져 가시겠어요? 집도 못 가져 갑니다.
그럼 뭐만 가지고 갈까요? 사람만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사람만 가는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 뭐겠어요? 사람인 거죠.
천국에서 면류관이 뭐겠어요? 사람인 거죠.
즉, 나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
내가 사랑하고 섬겼던 사람,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유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욕심은 있습니다.
뭐 제가 저를 이렇게 보니까, 돈 욕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뭐 돈은 그냥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조금 있으면 되는데,
또 뭐 그렇게 목회 성공에 대해서도 크게 욕심이 있지도 않은 것 같아요.
뭐 '교회가 커져가지고 대형교회 목사가 돼야지' 그럴 거면 건축을 벌써 했겠죠.
뭐 그것도 그렇게 제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사람'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습니다. 왜요?
사람은 유업이거든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이거든요.
돈보다 사람이고요, 성공보다도 사람이에요.
이웃을 영혼으로 대할 때, 사람을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세요.
여러분, 이게 얼마나 축복인지는, 여러분들이 좀 누려 보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은, 정말 모든 축복은... 항상 관계를 통해서 와요.
항상 관계를 통해서 와요!
그리고 그 관계가,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업이라는 거예요.
'너를 축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게 우리의 유업이라는 거예요.
'너를, 네가 잘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 그게 유업이라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이 땅에서도 나를 축복하고 싶어 하고,
내가 잘 되는 걸 원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열 명, 스무 명... 그게 얼마나 축복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게 우리에게 주시는 유업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유업은, 이 땅 뿐만 아니라, 영원히 이어진다는 거예요.
이게 부유한 자입니다.
부유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17:8~10 '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1 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2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13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
21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22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판결 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17:8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뭐 쉬운 거는, 그냥 앞에 얘기했던 대로 하면 되는데, 판결이 어려운 일이 있어요.
분별이 어려워요. 이게 뭔지 잘 모르겠고, 어떻게 선택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럴 땐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근데 이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세 가지 단어가 눈에 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 가지 단어를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1)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이걸 두 번, 세 번 반복합니다.
'택하신 곳으로 가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2) 둘째, '레위인과 제사장과 재판장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말이 반복 되고요.
3) 마지막 세 번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우리가 판단하라는 거예요.
1) 하나님의 임재, 그러니까 기도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있는 기도,
2) 그리고 함께 할 사람들,
3) 말씀
이 세 가지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실수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은, 자기 혼자서 판단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반드시 실수 합니다.
뭐 작은 실수야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겠지만
치명적인 실수는 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호하는 장치를 두었어요.
그것이 사실은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랑하는 함께 하는 사람들, 또 영적인 권위들,
그 아래서 함께 의논하면서 결정하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말씀을 가지고 판단하라는 거죠.
그래서 내가 잘 모르겠는 게 있으면,
나보다 말씀에 더 깊이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런 경우에 성경에서 뭐라고 가르치죠?'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교회)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예배하는 가운데... 그렇게 결정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실수가 없을 거라는 거예요.
이 원칙을 잘 따르는. 그런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주1)
체데크와 미슈파트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이게 안 되면, 구약성경 이해가 항상 20% 부족하고, 답답하게 됩니다.
이게 구약성경 내내 나와서, 우리를 약간씩 괴롭히거든요.
체데크와 미슈파트의 번역이, 한글성경에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어성경도 그렇습니다. 왜냐면 둘은 비슷한 말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약간 차이가 있죠.
1) 체데크 : 의, 공의로 번역 *체다카와 같은 말
사56:1 '너희는 정의(미슈파트)를 지키며 의(체다카)를 행하라' : '의'로 번역
KJV Keep ye judgment(미슈파트), and do justice(체데크)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체데크)로 여기시고' : '의'로 번역
신6:26 '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체데크)이니라 할지니라' : '의로움'으로 번역
렘22:3 '너희가 공평(미슈파트)과 정의(체데크)를 행하여' : '공의'로 번역
겔45:9 '공평과 공의(체다크)를 행하여' : '공의'로 번역
2) 미슈파트 : 정의, 공의, 공평 등으로 각각 번역하는데, *미쉬파트 라고도 하죠.
또 '판단, 재판, 판결'로 해석될 때도 있습니다. '샤파트'가 동사로 '재판하다' 거든요.
사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미슈파트)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 '정의'로 번역
사1:21 '공의(미슈파트)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 '공의'로 번역
잠16:11 '공평(미슈파트)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 '공평'으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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