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8 주일 2부 말씀 / 사도행전 강해 (8) / 바람 같은 소리와 불 같은 혀
◈바람 같은 소리와 불 같은 혀 행2:1~4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지난 시간 복습)
우리는 계속해서 오순절에 오신 성령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어떠한 분이셨죠?
1) 그 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닮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영돈 교수는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라는 책에서
성령을 '수줍은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수줍은 분, 겸손한 분'이라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성령충만의 첫 번째 열매가
바로 겸손의 열매 입니다.
2) 두 번째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어떠한 분이셨죠.
그 분은 진리의 영, 말씀의 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말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갈망하고, 말씀 앞에 서고자 하고요,
말씀대로 타협 없이 순종 하려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내 뜻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 말씀의 영' 이기 때문이죠.
가끔 보면, 성령충만 하다고 하는 분들이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분들, 말씀을 매우 등한시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특히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서 교제해 보면, 안하무인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기는 성령님께서 직접 알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여러분, 이건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성령을 많이 언급한다 할지라도,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 말씀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는, 성령충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건 누군가의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신앙의 체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 되는 체험은, 언제나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말씀의 영이기 때문이죠.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재미있게 표현한 적이 있는데요.
'성령님은 언제나 말씀의 수레를 타고 오신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언제나 말씀과 함께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두 주간 동안 살펴본 성령님에 관한 건강한 내용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은 말씀의 영이시다.
................................................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두 가지의 상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오늘 설교 제목처럼, '바람 같은 소리' 와 '불 같은 혀' 입니다.
오순절 날 기도하는 제자들 가운데 이제 성령이 오십니다.
이때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죠.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요.
'바람 같은 소리' 와 '불 같은 혀' 입니다.
2절의 '강한 바람 같은 소리' .. 오디오 버전 이죠.
3절의 '불의 혀 처럼 갈라지는 것들' .. 비디오 버전 이죠.
이 두 가지 버전이 성령님을 알려주는 너무나 중요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출19장 시내산의 오순절은 예표이고,
행2장 신약의 오순절은, 그 예표의 성취이다
출19장 시내산 사건이 왜 '첫 오순절'인지는, 지난 시간에 설명했습니다. 주1)
왜 하필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셨는가요?
다른 날이 아니라 왜 하필 오순절에 맞춰서 성령이 오셔야 했는가요?
그 답은, 신약의 오순절 사건이, 구약의 첫 오순절 사건의 성취 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첫 오순절 날, 어떤 일이 일어났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날 하나님의 말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이 대표하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일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였죠?
즉 구약의 첫 오순절의 장소가 어디였죠?
시내산 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은 영이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보일 수 있는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내 보셨는데요.
-하나는 '큰 소리'라는 청각적 현상이고요.
-하나는 '불'이라는 시각적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큰 소리와 불을 통해, 시내산에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증거가 출19:16절 인데요.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여러분, 시내산에서 무슨 소리가 있었죠?
우레와 번개, 나팔 소리... 한 마디로 '큰 소리'가 있었습니다.
출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불 가운데서 강림하십니다.
정리하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불과 큰 소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불과 큰 소리가, 본문 행2장에 그대로 재현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님께서 '바람 같은 소리' 와 '불의 혀'처럼 오십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오순절이, 지금 본문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입니다.
큰 소리와 불!
그러니까 구약의 첫 오순절이 신약의 첫 오순절에 그대로 재현 됩니다.
구약의 첫 오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강림하신 하나님이
신약의 첫 오순절에는 성령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 강림하십니다.
똑같이 큰 소리와 불을 통해서요.
그러니까 구약의 오순절과 *출19장, 예표
지금 신약의 오순절이 연결이 되는 거죠. *행2장, 성취
이러한 전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오순절 성령의 두 가지 현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과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나타내심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 두 가지 현상을 하나씩 각각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바람 같은 소리
첫 번째는요. 청각적인 현상입니다.
오순절의 제자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런데 2: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왜 성령님의 오심을 '바람'으로 표현하고 있는가요?
이 답을 우리는 구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성령님과 바람을 연결 짓는 장면이 있습니다.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마른 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마른 뼈처럼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른 뼈를 살리십니다.
그런데 이때 마른 뼈를 살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사방에서 생기를 불러 일으켜서, 그 생기로 마른 뼈를 살리는 것입니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러자 마른 뼈들이 살아납니다.
그 결과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걸 교리적인 용어로 '거듭남, 중생' 이라고 부릅니다.
풀어서 표현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죽은 영혼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셔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바로 생기를 통해서요.
그런데 여기 '생기'가 히브리어로 루아흐 라는 단어입니다.
루아흐는, 생기 말고도 '바람, 성령'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에스겔 37장의 약속이 어디서 성취 되었습니까?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생기, 루아흐, 성령, 바람으로 살리겠다는 이 약속이
어디서 성취 되었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 행2:2절입니다.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여기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표현되는 성령 입니다.
바로 구약의 마른 뼈를 살렸던 그 루아흐 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성령의 바람, 생기가 불어온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행2:41절에 보면, 3천명의 마른 뼈와 같이 생명 없던 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마치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가 일어난 것처럼,
오순절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의
신약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바로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마른 뼈와 같이, 스스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죽은 영혼을, 살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성령은 계속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바람을 일으키고 계시는 거죠.
예루살렘을 넘어 땅 끝까지,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백성들을 살리고 계십니다.
지금도 '강하고 급한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바람이, 140년 전에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땅에도 불어온 것 아닙니까.
그 바람 속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는 것 아닙니까.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생명을 넣어주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계십니다.
여기서도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죽은 자가 살아나고요,
저기서도 죽은 자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살아나고 있습니다.
곳곳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죽은 우리의 심령을 살리는 이 생명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당 집합 금지 제한이 풀려서
예배당에서 이렇게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적용 / 저는, 여러분이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예배를 드렸다는 것만으로, 저는 절대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제가 목회하며, 하나님 앞에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이 성령의 생명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은, 절대로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님만이, 오늘도 죽은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죽은 심령을 살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교를 열심히 준비한다 할지라도
오늘도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오늘도 우리는 풀이 죽은 심령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거듭남은 평생에 한 번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거듭남은 일생에 한 번 일어나는 단회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거듭났지만, 생명력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죽은 심령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죽은 심령에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매주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는, 아직 죽어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엡2:1절은, 그런 자를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 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영적으로 살리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 죽은 자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 가운데 이 성령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를
매주마다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우리의 죽은 심령을 살리는
이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성령 없이 예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 없이 봉사 하고, 성령 없이 기도 하고, 성령 없이 찬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A W 토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우리 교회에서 성령을 거두어 가셔도,
우리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계속 할 지 모른다'
여러분, 너무나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나 두려운 지적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우리 교회에서 성령을 거두어 가셔도,
우리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계속 신앙 생활할 지 모릅니다...
여러분, 너무나 두렵고, 또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무섭습니다.
이 두려운 지적이, 우리의 현실은 아닙니까?
성령의 은혜가 없어도, 얼마든지 우리의 육신적인 열심과 에너지로
신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생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주일에 신자처럼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마른 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죽은 시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건 죽은 심령, 죽은 예배, 죽은 교회에 불과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저는 이러한 일이, 우리 교회에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에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그저 똑같이 되풀이 되는
또 한 주의 예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기대와 갈망 없는.. 죽은 예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예배자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가, 집에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없이도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심령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영적으로 가난한 설교자로 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일하시지 않는... 메마른 설교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매주마다 성령의 역사를 충만히 경험하는,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이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이 거듭남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듭난 분들에게는, 계속해서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진실로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꼭 이것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또한 우리 교회 가운데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세계 기독교는 크게 4대 교단으로 나눕니다. (펀 글)
개신교 Protestant, 가톨릭 Roman Catholic,
성공회 Anglican, 정교회 Orthodox Church입니다.
그런데 해외 경험이 많은 분들의 말에 의하면
개신교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듯이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에도 똑같이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파, 교단에 독실한 신자들도 있고, 명목상의 신자들도 있습니다.
분포 비율은 좀 다를 수 있겠지요.
한국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이 주류인 나라에 가서 놀라는 것은
거기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독실한 신자가 있음을 볼 때 입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자체적인 부흥운동, 성령운동, 갱신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도 봅니다. 일종의 자체적 종교개혁 운동이죠.
또한 1965~2002년까지 한국기독교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대천덕 신부님도 *Reuben Archer Torrey Ⅲ
영국 성공회 신부님이십니다.
성공회 가운데도, 성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대표적으로 존 라일 입니다.
그리고 성공회 사람들도 해외 선교에 열심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했을 18세기 무렵에,
영국이 주도한 세계선교는, 주로 성공회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식민지에 세워진 교회들은, 대부분 성공회 교단입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아프리카, 말레이시아 등
그 다음 바턴을 이어받은 미국이 해외선교를 주도했을 때는,
주로 개신교 교회들이 세계 각처에 세워졌죠.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성령의 역사를 너무 몇몇 교단 안에 가두어두는 일에 주의를 요합니다.
지금 영국 성공회 교회는,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 신학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남은 자, 알곡'은 소수나마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다 역사하시거든요...
◑2.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성령
행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두 번째로 성령을 '불의 혀' 처럼 표현합니다.
여러분, 혀는 뭐 하는 데 쓰죠? 말하는 데 쓰죠.
그러니까 성령은 '말씀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 성령을 받고, '말씀 전파자'들이 되었죠.
그런데 그냥 혀가 아니라, '불 같은 혀' 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을 또 불로 표현하느냐?
사실 이 '불'도, 구약 성경에 많이 나타나는 '그림 언어' 중 하나입니다.
▲불은 구약에서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1) 하나는 '악을 소멸하는 하나님의 진노,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 예로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그러니까 불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도, 불의 심판을 받아서 망했죠.
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임하는 불은, 진노의 불, 소멸의 불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값 대로,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던지는 심판의 불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불'은, 다른 상징이 있습니다.
2) 여러분, 불은 태우는 데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태워서, 정결하게 하는 게 바로 '불'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약의 이사야서 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때 이사야의 반응이 무엇이었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사6:5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합니다.
이는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또한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으로 봅니다. 약3:2
우리가 짓는 모든 죄가, 입을 통해서, 또는 입과 함께 짓는다는 거죠.
자 그때 천사 중에 하나가 이사야에게 어떻게 하죠?
사6:6~7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네 천사 중에 하나가, 핀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갖다댑니다.
'피워진 불'을 가져와서, 이사야의 입에 댄 거죠.
그러자 어떻게 되었어요? 그 불이 이사야의 죄를 태웠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이렇게 말하는 거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그러니까 불은,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이미지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불'로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이죠?
성령은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부흥사 목사님들 보면, '성령의 불을 받아라'는 선포를 정말 많이 자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성령의 불'을
어떤 능력이나 신유의 은사로 이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어떤 뜨거운 체험으로 이해를 했었던 거죠.
그러나 성령의 불은, 성경에서 말하는 불은... 정결의 불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한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영어로는 홀리 스피릿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거룩한 영이라는 거죠.
우리를 죄로부터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제일 먼저 우리 안에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거룩에 대한 감각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령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성령이 언제 들어왔는지,
내 안에 계시는지 확인할 수가 없죠.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지...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성결)에 대한 감각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가
거룩입니다. 거룩에 대한 민감성이 생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아예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가 이제 나가게 된 케이스 아닙니까?
물론 어릴 때는 종종 나갔지만.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제 입술로 욕설을 해대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또 제가 노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그때는 술집에 가서 친구들과 흥청망청 노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부터는, 그런 짓을 하면 불편해 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술과 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거룩에 대한 감각이 저에게 생겼던 거죠.
그러니까 제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집에 앉아 있는 게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밤새 놀았던 술집이... 제게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여기가 아니라는 불편함,
영혼의 거룩함이 생겼던 거죠.
왜냐면 성령은 우리를 죄로 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한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쳐 준 성령> 이라는 책에서
안상혁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성령 집회에 참여하여 은사를 받고 특별한 체험을 했는데
여러분의 고질적인 죄 하나를 끊지 못했다면,
그것은 참된 성령 집회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서는, 반드시 우리의 죄를 지적 하시고,
회개로 이끄시는 사역이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이 부분이 생략된, 곧 거룩함이 없는 성령운동, 성령의 은혜는.. 다 거짓된 운동입니다."
왜 그렇죠? 성령은 불과 같이 우리의 죄를 반드시 태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부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면,
바로 그날부터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고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죄로 부터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일입니다.
죄를 짓도록 그냥 우리를 놔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 안에는,
태우는 듯한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죄와 싸우는 거룩한 변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교리적인 용어로 '성화' 라고 말합니다.
죄로 부터 점점 더 거룩해져 간다는 뜻입니다.
이 일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오늘도 하시는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이 이미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성령을 통해 이미 죄로 부터 거룩하게 된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향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죠?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해진 무리'라는 뜻이죠.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실제로 동시에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여러분이 죄를 이기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도와 주십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을 의지하고 구할 때,
죄를 이길 수 있는.. 죄를 미워하는.. 그런 실제적인 능력을 우리 안에 주십니다.
한 마디로 성령은, 성결의 영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안에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면,
나타나는 삶의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여러분이 죄로부터 날마다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짓고 있던 죄를, 합리화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엎드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은밀히 사랑하고 즐겼던 그 죄와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점점 더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한 은혜 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참된 은혜라면,
그 은혜의 끝에는 반드시 거룩함의 열매가 맺힙니다.
반대로 거룩함의 열매가 맺혀 지지 않는 성령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은 불과 같이 우리의 죄를, 반드시 태우는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가운데, 올바른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주시는 참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로 부터 멀어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성화의 흔적이
여러분의 걸음마다 확인되고 새겨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살아갈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오늘도 싸워야 할 신앙의 내용입니다.
♣관계에서 회개도 나온다. (펀 글)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런 대화를 합니다.
“문자를 받았는데, 미처 답을 못했어. 미안해.”
“어제 너무 바빠서 전화를 못했어, 미안해.”
“어, 내가 생일을 잊어버렸네. 정말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
그러나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문자에 답을 보내지 않았다거나,
전화를 안했다거나, 상대방의 생일을 잊은 것이.. 미안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그토록 거룩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늘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무엇이 성녀를 죄인으로 생각하게끔 하였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계명을 어겼다는 것보다,
그분의 크신 사랑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지은 죄는, 계명을 어겼다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주신 ‘문자’에 답하지 않고, ‘전화’를 드리지 않았던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무슨 사실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누구(하나님)를 믿고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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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출19장의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은 날이, 구약의 첫 오순절인 근처
1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은, 1월 14일이었습니다.
2 그들은 3월 1일에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세 번째 달에 출19:1
3 거기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에,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출19:16
돌판에 새긴 율법을 수여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1, 2, 3항의 날을 모두 더하면,
17일 + 30일 + 3일 = 50일이 되는 거죠. 이게 첫 번째 오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