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같은 진짜, 진짜 같은 가짜 렘28:1~17 여러 설교 정리
<렘28장의 개요>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논쟁(1-11절),
하나냐에 대한 예레미야의 메시지(12-17절)
본문 렘28장은, 가짜 같은 진짜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과
진짜 같은 가짜 선지자 하나냐가 대조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다는 표시로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어깨에 나무 멍에를 메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하나냐는 그의 나무 멍에를 뼤앗아 꺾습니다. :10
그리고 2차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2년만에 남유다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예언합니다. :2~3
자세한 절별 해석은 아래 ◑절별 해석을 참조하세요!
◑적용
▲1. 나는 진짜인가?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살 때 미국 사람들은 “이 물건 얼마냐?”고 가격부터 묻고,
영국 사람들은 “이 물건 얼마나 질기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거 최신 유행하는 것이냐?”하고 유행을 따지고,
일본 사람들은 “이것 가져다 팔면 얼마나 남느냐?”고 장사할 것 생각하며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가장 먼저 뭐라고 묻겠습니까? “이거 진짜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하도 가짜가 많으니까 진짜인지 묻는 것이지요.
“이거 진짜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나는 진짜인가?’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까? 진짜 신앙인입니까?
세상에 진짜 같은 가짜가 많은 것처럼,
혹 우리도 진짜 같은 가짜는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역사상 가짜는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진짜를 꼭 빼닮은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면
진짜보다 가짜가 더 인기를 누리고 더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가 싸우면 가짜가 이깁니다.
물론 결국에는 가짜가 가짜라는 것이 증명되고 진짜가 승리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선지자가 나옵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입니다. 둘 다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는 진짜이고 하나는 가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레미야와 하나냐 중에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이겠습니까?
당연히 예레미야가 진짜이고 하나냐가 가짜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가짜이고 하나냐가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11절, '내가 2년 안에 ... 꺾어 버리리라'
25:11, 29:10에는 70년간 유다가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냐는 이를 정면으로 공박하기 위해
자신도 2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까지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예언의 성취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칠게 행동하였습니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그 당시로서는 반바벨론 동맹과
반역을 꾀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앞에도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
위 구절이 8장의 메시지이고,
본문 28장의 거짓선지자의 메시지는 어떻습니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28:2
물론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하나냐가 거짓을 지어내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꺾어버렸습니다.
△에이든 토저가 쓴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That incredible Christian>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진짜와 가짜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워하지 않습니다.
- 진짜는 솜사탕 복음을 거부하고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습니다.
- 진짜는 주님의 ‘일’보다 ‘주님’에게 우선순위를 둡니다.
-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합니다.
-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합니다.
에이든 토저는 그 책에서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진단하는 자가 진단법’
7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조용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첫 번째는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세미한 욕구의 소리를 들으면서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삽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말고, 내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보물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 줍니다.
3) 세 번째는 나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거나 생필품을 사는 것과 같이 의무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것들 말고,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됩니다.
4) 네 번째로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녀와서, 혹은 주말에, 내가 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다섯째는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내가 의지적으로 찾아가는 곳, 또는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6) 여섯 번째로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누구이며, 또는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7) 일곱 번째로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 웃음의 대상이나 재료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습관, 다른 사람이 당한 고통을 웃음거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나 신앙적인 그 어떤 것도 웃음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좀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그것을 웃음거리로 여겨서는 안 되죠.
만약 그런 것을 웃음거리로 삼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가짜는 아닌가’ 하고 진실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나무 멍에를 꺾으면, 쇠멍에를 지게 된다
당시 예레미야는 목에 나무로 만든 멍에를 지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유다 백성에게 이렇게 멍에를 메워
바벨론으로 끌고 가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그 나무로 만든 멍에를 꺾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을 꺾으실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에 보면,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나무로 만든 멍에를 꺾어버리자
이번에는 쇠로 만든 멍에를 만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위 구절에, 누가 쇠 명에를 만들었는지가, 개역성경에는 불분명하게 나오지만,
영어성경이나 원어를 보면, 하나냐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진짜 쇠멍에를 만든 건 아니고)
한 마디로, 그가 일을 더 어렵게 하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길을 가니라' :11
앞서 예레미야는 하나냐와의 불필요한 언쟁을 피하고, ‘자기 길을 갔습니다.’
고향으로 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를 따르는 대세 (역사상 항상 그랬죠)를 피해서,
예레미야는 잠시 사라졌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예레미야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왜냐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임무의 특성상..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면,
반드시 선포해야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걸 거부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면직 당하는 거죠.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자, 예레미야는 사라졌던 자리에서 다시 컴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합니다.
28: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28: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하나냐가 나무 멍에를 꺾은 사건 이후 오래지 않아 여호와께로부터 응답이 왔습니다.
즉 여태까지는 나무로 된 멍에를 상징으로 사용했으나
그것이 이제는 쇠로된 멍에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냐가 나무로 된 상징적 기구를 꺾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꺾여지지 않는 쇠 멍에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공박하고자 했던 하나냐의 상징적인 행동은
더 강한 멍에의 등장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 예레미야는 그 후로
‘쇠 멍에’를 메고 다녔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쇠멍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꺾을 수 없는 멍에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 왕의 세력은 유다나 애굽의 세력으로 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멍에를 메고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암5:1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사자를 피해서 도망을 쳤는데 곰을 만납니다.
가까스로 곰을 피해서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는데 뱀에게 물립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다 정하신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게 내가 피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우연히 당하는 사고나 불행이면, 그 고비만 넘기면 되겠죠.
그러나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멍에’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심판을 예언하는 것인데,
하나냐가 함부로 그 나무 멍에를 꺾었다가, 더 감당할 수 없는 쇠멍에가 오는 거죠.
△레위기 26장을 보면,
26:1~13절까지는 축복이 나오고, *신28장과 같은 구조
나머지 26:14~46절까지는 저주와 형벌의 언약이 나옵니다.
그런데 ‘일곱 배나 벌을 내리신다’는 말씀이 4번이나 거듭 반복해서 나옵니다.
레26:18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레26:21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레26:24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레26:27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레26:28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받게 되는
엄청난 저주와 형벌이 기록되어 있는데,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그 형벌이 점층법 적으로, 점점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징벌을 받으면 안 되지만,
부주의해서 받게 되었다 하더라도, 한 번 얻어맞고 돌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면 7배를 더 맞게 되고...
여전히 하나님께 버티면
또 7배를 더 얻어맞게 되고...
여전히 배신하고 버티면
4번이나 7배를 맞으면... 결국은 뭐 죽는 거죠.
하나님이 지우신 ‘나무 멍에를 꺾으면, 쇠멍에를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냐가 예언한 거짓은, 28:2~3절에 나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2년 안에 포로들이 돌아온다는 희망’의 예언이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반바벨론 정서’가 남유다 백성들의 대부분 정서였는데,
그 정서에 딱 부합하는, 아주 희망과 소망을 주는 예언의 메시지 였습니다.
그러니 가짜는 더욱 진짜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어처구니 없는 인생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지어내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이렇게 선포를 하는지요...
우리는 이 사람을 보면서 ’진짜 어처구니 없는 거짓 선지자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더더욱 ‘이 사람하고 나하고는 좀 다르다, 나는 하나냐 같지는 않다’고 여깁니다.
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구약성경 선지서에 가끔식 나오는 표현입니다.
하나냐는, 선지자였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자칭 선지자인 거죠.
제가 신학생 때, 신학생들끼리 서로 하던 농담이 있었습니다.
‘누가 너를 보냈는데?’, ‘누가 너를 보냈니?’
자기가 임의로 신학교에 지원해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농담이 섞인 뼈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냐는 ‘2년 만에 바벨론 포로가 돌아온다’고 예언했지만 28:2~3
그 자신이 2달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17
우리는 거짓 선지자가 됨을 극도로 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는 거짓 선지자는, 스스로 거짓 선지자 노릇 하다가
말로가 언제나 좋지 않습니다.
다음 장인 렘29장에도, 거짓선지자가 두 명 나오는데, 아합과 시드기야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이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해서, 당대에는 인기가 많지만,
결국은 그 말로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하나냐, 29장의 아합, 시드기야도!
오늘날 기복주의, 성공주의를 전하는 분들도, 경계심을 가져야 될 말입니다.
렘29: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 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도.. 백성들 앞에 나아갔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데도.. 자기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했던 자입니다.
29: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하나냐는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2
설교자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성경 본문을 읽어놓고는, 자기 생각과 자기 해석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하나냐처럼 되기 쉽다는 거죠.
그리고 그 말로는 아주 비참합니다. 그렇게 거짓 예언을 하고는
2달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17
△권사님, 장로님도 거짓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회초리를 드셨으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건강에 문제가 생겼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겼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터졌거나... 이러한 문제들이 생겼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회초리를 드신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심방 가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냐처럼 ‘하나님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그에게로 찾아가서
하나님 말씀을 주시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는 식으로
‘잘 될 거예요. 회복될 거예요. 곧 병이 나을 거예요...’ 합니다.
물론 덕담 또는 격려의 말인데요,
그러나 ‘자기가 기도 중에 하나님께 받은 분명한 감동의 말씀’이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무 기도도 하지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나오는 입에 발린 소리,
‘잘 될 거예요. 경제가 곧 회복될 거예요. 곧 병이 나을 거예요...’ 하는 것은
본문의 하나냐와 같은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냐가 되어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더더욱 그렇게 행하기 쉽습니다.
사실 그렇죠. 새벽에 갑자기 안 나오시는 분이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세요.
그 말은 뭐죠? 문제가 터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근거 없는 소망을 주거나, 회개 없는 회복의 메시지를 주기 보다는,
차라리 ‘우는 자와 함께 옆에서 우는’ 게 맞습니다. 함께 울어주는 게 맞아요.
그리고 그에게 근거 없는 희망을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게 기도 중에, 그를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감동, 어떤 말씀이 생각나거나, 떠오릅니다.
성경은 그걸 가리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고전12:8
그게 희망의 메시지도 될 수 있고, 책망의 메시지도 될 수 있죠.
대개는 성경 말씀으로 떠오릅니다. 그런 말씀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책망의 메시지라 하더라도, 그 마지막은 항상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위시해서, 성경의 대부분 메시지가 그런 패턴이죠.
절망과 책망과 심판으로 시작했다가도, 끝은 회복과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런 ‘받은 말씀’을 전하면,
듣는 자가 반드시 ‘수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에 권위와 능력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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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28:1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본장의 사건은 예레미야가 주변 국가의 사실들과 조우한 지(27:3)
얼마 되지 않은 때인 B.C. 593년에 발생하였다.
10절에서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걸린 멍에를 빼앗아 꺾었던 것으로 보아
그 멍에는 여전히 예레미야의 목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본장은 27장의 계속으로서, 앞 예언의 정확한 연대를 제시해주고 있기도 하며
또한 27:1에 언급된 여호야김이란 표현이 잘못된 표기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8: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사용했던 비유를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예언과 반대되는 예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B.C.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을 고국으로 속히 돌려보내실 것이며
또한 바벨론인들에 의해 빼앗겼던 성전 기구들을 복수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3, 4절).
하나냐는 여기서보는 바와 같이 27장에 언급되어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28:3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28:4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여호와로부터 임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하나냐의 예언 내용은 두 해가 되기 전에
바벨론의 멍에가 꺾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예레미야가 그때까지 계속해서 걸고 있었던
그 멍에를 정면으로 반바한 것이었다.
하나냐는 그 결과, 성전의 신성한 기구들과 물건들이
왕을 위히한 포로민들과 함께 다시 복귀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은 여고니야 곧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희망사항은
그 당시 백성들이 아직도 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참고로 바벨론 성문에서 발견된 문헌 중 바벨론의 기름 수납 영수증을 보면
여호야긴이 유다의 왕으로 언급되고 있다. 한편, 하나냐는 두해가 차기 전이라고 말했는데
바벨론이 멸망되기는커녕, 두 달만에 하나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다(17절).
28:5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선지자 하나냐에게 말하니라
28:6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하나냐의 거짓 신탁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같은 반응과
응답이 단순히 빈정거리고 풍자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냐의 예언 내용대로 되기를 진정으로 바랐을 것이다.
28:7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힌다. 이는 곧 하나냐와 같은 자의 축복예언은
백성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달콤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뜻을 암시한다.
28:8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예언하였느니라'
선지자 하나냐와 선지자 예레미야가 맞서고 있는 이 당시에는
참 선지자가 누구이고 또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알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말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시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외형상으로는 이 둘 중에 누가 참 선지자인지 식별해낼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더 깊이 내려가서 살펴보면 그들 사이에는 분명하고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즉 한 사람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었던 *소드 야웨 (하나님의 어전회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그러하지 못하였다(23:18, 22).
또한 한 사람은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을 느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이 백성의 거룩하고 겸손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만 내세우고
그 특권이 왜 있는가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였다.
이런 엄청난 잘못은 소위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범하여 왔던 비극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냐와 같이 자신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혼동해 버리곤하였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예레미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성이다.
한편 예레미야 이전의 선지자들이라고 함은 요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스바냐, 나훔, 하박국
등의 선지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 부패한 민족에 대한
회개의 촉구와 심판 선언에 관한 것이었다.
28: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리라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시간이 지나면 하나냐의 낙관적인 청사진이 거짓이고
예레미야가 제시한 청사진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부인할 수 없는 기준은 그의 예언 성취 여부에 달려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순종과 거룩한 행실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진실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세우다', '확고하게 하다'는
뜻인 '아만'(아멘)에서 유래한 말로서, '확실함', '진리', '진실로' 등으로 번역된다.
28: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선지자 하나냐가...멍에를 취하여 꺾고'
하나냐는 여태까지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로써 반박하고 있었으나
이제와서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내고
그것을 꺾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반박하고 나섰다.
즉 하나냐의 행위는 단지 예레미야 예언에 대한 모독과 멸시의 표현이었다기보다는
예레미야와 정반대되는 예언과 또 정반대되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28:11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꺾어 버리리라'
25:11, 29:10에는 70년간 유다가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냐는 이를 정면으로 공박하기 위해
자신도 2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까지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예언의 성취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칠게 행동하였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그 당시로서는 반바벨론 동맹과
반역을 꾀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길을 가니라'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심판 예언을 계속 선포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단순히 그곳을 피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가 아무런 변명도 없이 자리를 뜬 이유에 대해
혹자는 하나냐의 동조자들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혹은 하나냐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장래의 구체적 사건을 통해 예레미야 자신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28: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28: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하나냐의 대립된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없었으며,
그냥 침묵 속에서 자기 길을 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이 바벨론인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임을 다시 선언하러 돌아온다.
바벨론으로부터의 종속이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라는 내용이
이제는 보다 더 강조되어 표현된다.
즉 여태까지는 나무로 된 멍에를 상징으로 사용했으나
그것이 이제는 쇠로된 멍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하나냐가 나무 멍에를 꺾은 사건 이후 오래지 않아 여호와께로부터 응답이 왔다.
참선지자는 몽상가나 공상가가 아니다.
그는 재치가 넘치는 정치평론가도 아니며,
더군다나 자신 스스로의 생각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그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으며
전에 그가 전했던 것과 내용이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사용되는 어휘가 더 강경해졌다는 것뿐이다.
하나냐가 나무로 된 상징적 기구를 꺾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꺾여지지 않는 쇠 멍에가 주어진 것이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공박하고자 했던 하나냐의 상징적인 행동은
더 강한 멍에의 등장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28: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본절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예레미야는 쇠 멍에를 목에 걸고
꺾어진 그의 나무 멍에에 의한 상징적 행위를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냐의 방해 행위는 하나님의 계획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뿐이다.
28: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하나냐여 들으라...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냐의 거짓 예언을 선호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레미야의 이런 단호한 선포는 대단히 담대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하나냐가 거짓 선지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단죄한다.
하나냐는 백성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도록 하였으며
여호와의 뜻과 계획에 정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반역을 범하였다.
29장에는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동일한 단죄와
비난의 내용이 있는 것을 볼 수있다(29:32).
28: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였더니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리'
여호와는 하나냐를 예언하라고 보내지 않았으나 그는 여호와의 보내심을 빙자하였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를 죽음으로 보내실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하는 것은 죽을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이는 신 18:20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예레미야의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향해 거짓예언을 이유로 해서 죽이려고 했다
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26장등).
그러나 여기에 와서는 하나냐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직접 집행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끊어버리실 것이며, 이 예언은 2년 내도 아닌 바로 금년 내로 성취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사건이 있은지 두 달만에 그는 죽었다.
신13:5에는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는 자를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본절의 '패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라'는 신13:5의 '배반'과 같은 용어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저주가 두 달 후에 하나냐에게 발생하였다.(왕하 1:17, 7:19, 20, 8:10-15 참조).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 사건은 분명히 예레미야가 참선지자란 사실을
입증하는 데 일조(一助)하였을 것이다.
28: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그 해 칠 월에 죽었더라' 1절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하나냐에 대한 저주 예언이
5월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두 달만에 일어난 것이다.
하나냐는 2년 내로 유다가 회복되리라고 예언했으나 자신은 두 달 내로 죽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의 말을 성취시킨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레미야의
다른 예언들도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