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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니이까

LNCK 2024. 12. 29. 06:1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삶의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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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니이까            행1:4-8             2007.04.22.

 

※우리는 항상 ‘때’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관심이 많습니다만,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때’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매일을 자기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라는 주제의 설교문.

 

▲도입

여러분, 프랑스의 화가 쟝 프랑소와 밀레를 아마 다 아실 겁니다.

밀레 하면 '만종'을 우리는 늘 생각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말씀입니다만 제 침실에도 비록 카피이지만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습니다.

 

‘만종’은 한자어로 ‘저녁 종’이란 뜻이지만

원 제목은 “The Angelus” 라틴어로 ‘천사’란 뜻입니다.

밀레는 처음에 이 작품에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The Angelus"으로 바꾸었다고 하죠.

 

그런고로 밀레의 만종을 보면서 종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실 자연을 그린 것이 아니라 종소리를 그린 겁니다.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이 그림을 바로 감상했다 할 것입니다.

 

두 내외가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고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

그들은 서서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엄숙한 그림입니다.

 

밀레는 1814년서 1875년까지 살았는데요, 그는 농가에 살았고 빈곤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그리기보다 오히려 일하는 농민, 일하는 농사꾼, 그 자신을 그린 겁니다.

농민 생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그림이 만종, 이삭줍기, 씨 뿌리는 사람 뭐 이런 등등의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밀레의 만종을 흔히들 해석하기를 3대 신성이 있다고 합니다.

‘가정 신성, 노동 신성, 사회 신성’ 이렇게 말해오고 있습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려워서 화방은 물론이고 화실도 없었고

조그만 집에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았답니다. 그래서 방안에서는 어림도 없고

부엌에서 이 그림을 그렸답니다. 그 부엌을 제가 얼마 전에 가 보았습니다.

 

만종을 그렸다고 하는 그 초라한 집 부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밀레가 그림을 그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들에 가서 일을 하는 한 사람의 농사꾼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기 내외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는 그림을 좀 그렸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활은 날로 어려웠습니다.

참으로 어려웠는데 어느 날엔가 그림 하나가 아주 고가에 팔렸습니다.

너무 감격했고 생활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친구 집에 놀러가 보니까, 친구 집에 그 고가에 팔린 그림이 거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친구 밀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의 후원금을 준 게 아니고, 자존심을 생각해서 그의 그림을 고가에 사 주었습니다.

 

▲밀레의 만종, 이 그림이 지금 한국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2007년

그런데 무려 보험금이 1천억 원 입니다. 도대체 이 그림이 얼마짜리라는 말입니까?

1천억 원의 보험을 들고, 지금 이 그림이 한국을 방문하고 이제 전시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150년을 기다렸습니다.

이 그림 한 폭이 이같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150년의 시간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성공을 이루기 위한 대체적인 4대 원리가 있습니다.

자본이 있고, 지식이 있고, 기술이 있고, 정열이 있어야 한다. 4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

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겁니다. *설교 제목이 ‘이 때니이까?’

 

◑오늘 본문에 보면, 초조한 한 제자의 질문이 있습니다.

아주 불안할 정도로 초조한 가운데서 끈질긴 질문을 합니다.

"주여, 이 때니이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묻습니다. :6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물론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당시에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정치․경제․문화․사회의 많은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당시 이스라엘이 자기들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뭐 도덕․정치․종교 할 것 없이 다 썩어빠져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대망사상입니다.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고, 메시아가 오기를 바랬습니다.

메시아가 오고야 메시아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학사상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Messianic Age,

메시아가 옴으로써 메시아의 나라가, ‘메시아의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늘을 향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묵상하면서 계속적으로

그 메시아를 간절히,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칩니다. 율법을 강론합니다.

아, 오천 명을 먹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립니다.

아, 굉장한 일이 있고, 갈릴리에서 강풍을 조용하게 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생길 때에 ‘이분이 메시아다, 확실히 이 분이 메시야이시다.’

깊은 감동과 함께 그 분이 메시아 됨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끈질긴 질문으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여러 정황을 봐서 '이 분이 메시아다. 이 분이 메시아다, 확실히 메시야다'

그런 생각으로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눈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메시아다. 이제 이 분이 왔으니

메시아의 시대가 올 것이다’ 하고 큰 기대감을 갖고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입니까?

 

아니 그 큰 능력은 다 어디가고, 그 권세는 어디가고, 십자가에 그대로 돌아가시고 맙니까?

그들의 절망감, 그들의 낙심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 오직 한 가닥의 희망도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눅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여실히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뭐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꿈같은 얘기이고,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기에

의심이 있지만, 그래도 부활하신 예수가 눈앞에 서 계신 것만은 분명하거든요.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때니이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행1:6절에만 나오지만, 다른 정황에서도 나왔다고 가정할 때)

 

정말 그 대망 사상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그 마음속에 깊이 깔려 있던 세속적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묻게 됩니다. 이 때가 그 때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기다렸던 바로 그 시간이 바로 이 시간입니까? 이 때니이까.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중략

 

여러분, 때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성령이 임할 때 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위로부터 오는 명령이 있을 때 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여러분,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응답은 무엇입니까? 기다림입니다.

그게 언제냐고 묻지 마세요. 어떤 방법으로냐고도 묻지 마세요.

약속을 그대로 받고 조용히 기다리는 겁니다.

 

기다리는 마음, 약속하신 것에 대한 바른 응답은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다림이 부족해요. 초조하고 불안해요.

아직도 내 뜻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내 때, 내 생각, 내 욕망, 내 계획, 내 지혜에다가

딱 맞추려고 하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기다리다 지쳐 버리는 거예요.

실망해 버리는 거예요. 이것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북한 선교를 위해서 일하다 보니까

이 주간에도 제가 주말에 한번 평양을 다녀오겠습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평양, 과학기술대학 설립을 위해서 여러모로 힘쓰다 보니까

가끔 본의 아니게 북한 문제, 북한 선교에 대한 내가 전문가가 됐단 말이에요.

 

그래서 가끔 엉뚱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생각에 언제 통일될까요? 통일은 언제 되는 겁니까?’

‘될까요? 안 될까요? 통일은 언제 되는 겁니까?’ 그런 다급한 질문을 받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분은 "아, 나 죽기 전에 될까요?"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런 분의 손을 잡고 저는 이렇게 다시 물어봅니다.

"당신이 통일을 위해서 한 일이 뭐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통일이 있느냐고, 지금 북한의 지하에서 고생하는 우리 성도들을

내 형제로 내 자매로 그렇게 영접하고 있냐고, 당신의 마음속에 통일이 있느냐 그거예요.

그것부터 물어보자고...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해야 할 일이 엄연히 있는데...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것 많이 보면서도...

여러분, 자신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통일은 왜 물어보는 겁니까?

이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제 : ‘때’에 관심을 갖기 이전에,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라)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을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권능을 주실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내 증인이 되는 것, 그건 너희가 할 일이요.

'이 때니이까? 하는 질문은 고만 해라.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장자(莊子)의 제1편은 소요유(逍遙遊)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장자는 절대적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정신과 인격이 완전히 자유로울 때 창의력이 있고,

완전히 자유로울 때 능력이 있는데 그 자유는 어디서 오느냐고?

그는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을 말합니다.

 

잘 들어 두세요. 무기 無己, 자기 아집을 버려야 된다.

자기 생각의 꽉 붙들려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무공 無功, 업적과 성과를 버려라 이거예요.

무슨 업적을 세우려고 큰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문제에요.

 

무명 無名, 명예를 버려라. 명예에 대한 욕심을 털어버려.

그러면 자유로울 것이고, 그래야 무엇인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여기에 붙들려서 오늘도 이 제자가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때니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 생각 다 버려. 그리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독교 출판계에서 지금 베스트셀러로 알려지고 있는

김두식 목사님의 「전도는 어명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중에 보면, 전도왕의 10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 이러 이러한 사람이라야 한다는 10가지를 말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째가 감사입니다.

 

초조한 마음이 아닙니다. 불안한 마음이 아닙니다. 될까 안 될까 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이래서 무슨 일이 이루어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녜요.

무슨 말을 할까 그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전도자의 제1조건은 감사입니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먼저 행복한 마음입니다.

 

어떤 여 집사님이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어요.

늘 교회에 나갔지만 은혜를 못 받다가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 받고 나니까 확 달라지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나는 행복하다.’ 남편은 교회 안 나와요. 그런데 집에 가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분이 영문과 나온 분이예요. 그래서 고상하게 말했어요.

"I am so happy because of you. I am so happy because of you."

 

그러니까 남편이 "너, 미쳤냐?" 그러더랍니다.

그러더니 또 행복하다고 그러니까 "고만해라" 그러더니,

"아니, 술망나니하고 살면서 뭘 행복하냐?" 그러니까

그 때는 아내가 정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다 건강하고,

당신이 술을 많이 먹지만 건강하니 행복하고,

항상 취해가지고 돌아오는데 제집 찾아오는 게 행복하고,

그리고 또 내가 예수 믿는 것 시비 걸지 않으니 행복하고,

이래 보아도 저래 보아도 행복합니다."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 들어보세요. "고만해라. 다음 주일날 교회 나가 줄께"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 보세요. 아니에요. 감사요, 감사합니다.

감사함만이 사람의 마음을 열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거예요.

 

짜증내봐야 안 됩니다. 사랑은 강탈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감사에서 오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이 때니이까',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할 게 아니에요.

'이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렇게 물었어야 했죠.

 

때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에 있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춰야지,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기한도 시간도 방법도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 원하는 뜻대로

완전히 Total Commitment, 완전히 위탁해 버립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며 십자가를 지십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권능에 붙들린 사람은 사람을 얻습니다.

사람을 감동케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His part, Our part.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저가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My part. 내가 할 일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됩니다.

(통일 문제를 포함해서) ‘이 때니이까?’ 이런 말은 이제 그만하십시다.

 

대신에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으십시다.

그리고 권능을 받아서 힘차게 부활의 증인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