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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알파의 신앙 요6:1~14 2012.12.02.
※크리스천은 1+1=2 라는 산술적 계산이 아니라, 믿음의 셈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주제.
특히 오늘날 나의 작은 헌신을, 무시할 게 아니라, 오병이어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냉엄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계산에 밝고 철저한 이해타산에 따라서 사는 것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통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어수룩하고 계산에 어두운 사람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철저한 수학적 공식이 적용되는 세상입니다.
1 + 1 = 2라는 공식만이 진리로 통하는 세상입니다.
자기에게 분명한 이익이 있다는 계산이 나와야 사람들은 움직입니다.
내가 투자하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분명한 계산이 있어야 일을 시작합니다.
일의 결과와 경제적 효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 기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현대인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 삶의 가치가 되어버린 ‘경제적 효용성’
다시 말해 자본주의 원리와는 거리가 먼,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18장의 예수님이 직접 들려주신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양 1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99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99:1입니다. 예수님께서는 99과 하나를 똑같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아니 하나를 99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계산으로는 99은, 하나의 99배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은, 남아있는 99마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적인 효용성에 익숙한 우리 현대인의 계산에 의하면
당연히 기왕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포기하고
남아 있는 99 마리의 양을 잘 지키는 것이, 합리적이고 계산에 맞는 행동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으려다 99 마리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99 마리를 지키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비정한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 잃은 양의 비유를 읽으면서도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님께서 99 마리의 양을 버릴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다고 믿기 보다는,
‘욕심이 많아서 한 마리도 포기할 수 없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2명이 같이 돌 볼 경우, 99마리를 다른 목자에게 맡겨놓고
잃어버린 1마리를 찾아나섰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마지막에,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와, 99 마리의 양을 똑같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아니 한 마리를 99 마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이 특별한 양도 아니고, 똑같은 양인데,
하나가 99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들의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계산 방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비유가 또 나오는데,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그 재능대로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1달란트 가진 사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꾸중을 들었고
5달란트 가진 사람은, 5달란트를 남기고,
2달란트 가진 사람은 2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의 내용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5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2달란트를 남긴 종에게나
주인의 칭찬이 똑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계산에 의하면
5달란트 남긴 사람과, 2달란트 남긴 사람의 보상이 달라야 합니다.
칭찬의 내용이 달라야 마땅합니다.
5 달란트와 2 달란트는 2배 반의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은 보상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자본주의적 계산방법이 아닙니다. 잘못된 계산입니다.
결과가 무엇인가, 성과가 무엇인가 효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계산입니다.
5 달란트와 2 달란트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사고에 익숙한 우리들의 계산 방법이 아닙니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마20장의 예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데
한 사람은 아침 9시에, 또 한 사람은 12시에, 또 한 사람은 오후 3시와, 오후 5시에
각각 사람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저녁 6시에 일을 마치고 품삯을 계산하는데
오전 9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5시에 일한 사람이나
네 사람 모두에게 똑 같이 1 데나리온의 임금을 주었습니다.
오후 6시까지 일했으니, 아침 9시부터 일한 사람은 그 날 9시간을 일한 것이고,
오후 5시에 일한 사람은 1시간 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품삯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인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계산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계산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계산 방법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고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계산 방법, 자본주의적 효용성과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계산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믿음 생활도
자본주의적 계산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가치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는 우리들은
신앙생활도 자본주의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고
자본주의적 계산이 아무 이유 없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보는 대로 교인의 수, 교회당의 크기, 헌금의 액수
이런 것들로 교회를 평가하고 목회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자본주의적 계산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본주의적 계산과 가치관, 효용성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 요6장은 이러한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예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성경에는 5천 명 가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식사가 문제였습니다.
수십 명도 아니고 ‘5천 명을 어떻게 먹이느냐’ 하는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고작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 뿐이었습니다.
5천 명과, 오병이어는 도무지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어림없는 계산입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이 예수님에게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빌립이 세상적으로 계산해 보니
‘5천 명이 먹으려면 적어도 2백 데나리온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2천만원
제자들의 정확하고 합리적인 계산입니다. *한 끼당 4천원, 빌립이 정확하네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계산은 달랐습니다.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를 가지고도
5천 명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계산이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계산입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계산입니다.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는..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가
5천 명의 식사로 충분하다고 계산하신 것입니다.
사고방식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보통 상식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있을 수 없는 계산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계산했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그 계산 방법이 옳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는 대로 5천 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우리들의 가정, 우리들의 삶은
기적이 없는 메마른 삶입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1 플러스 1은 2입니다.
아니 때로는 1 플러스 1이 1일 경우도, 마이너스 일 경우도 있습니다.
1 플러스 1은 2라는 계산만이 통하고,
냉엄한 합리성과 이성적 사고가 절대적 가치로 생각되는 빈틈없는 사회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요, 우리의 가정이요, 우리의 삶입니다.
만약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바보 취급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바보 취급을 받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의 사회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삶에 기적이 없습니까?
왜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기적을 볼 수 없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일으키셨던 수많은 기적이
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에는 없는 것입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본주의적 효용성을 숭배하는 우리들의 계산방법 때문입니다.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로 5천 명을 먹일 수 있다는 하늘나라의 계산방법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자본주의적 계산방법으로 굳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자본주의의 효용성이라는 우상, 합리적 사고로 우쭐대는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합리적이라고 하는 비정한 효용성의 우상에 대해
‘아니다’ 라고 분연히 맞서서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계산, 자본주의의 효용성이 기초하는 철학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만을 신뢰하는 철학입니다.
인간만이 유능하며, 인간만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가치관이 바로 자본주의의 효용성을 우상화하는 철학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제 힘으로,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이 계획하고 시작은 하지만, 그 일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그 일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조차도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노력에 플러스알파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개입인 플러스알파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 인간의 능력으로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계산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플러스알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이며,
이런 이유로 우리의 사회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삶에.. 기적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나타납니다.
기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때 나타납니다.
기적이 없는 세상은 메마르기 짝이 없습니다.
기적이 없는 세상은 신나는 일이 없고 답답하고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맛이 나지 않는 것은, 신나지 않은 것은 기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 플러스 1은 2라는 냉엄한 계산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아니 조롱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없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실제로 몇 명의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토요일 아침마다 <사랑의 도시락>을 만들어서
우리 주위의 가난한 어르신들에게 배달합니다.
어제 아침에도 155개, 155명의 어르신에게 도시락을 배달했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155개의 도시락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한강에 돌 던지기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이 우리가 하는 외국인 노동자 선교가 2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수십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 중에
우리가 섬기고 있는 사람은 불과 100~200 명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는데
우리가 섬기는 1~2백 명의 노동자들이 당하는 아픔과 괴로움을 돌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겠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객기에 가깝습니다. 계산에 맞지 않는 합리성이 결여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겨울에 실내온도를 18도에 맞추어놓고 산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에너지 문제가 심각합니다.
원자력 발전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원자력발전소 재앙입니다.
만약 고장이 나고 터지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살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있는 낡은 원자력 발전소는 폐쇄하고, 다시 지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절약해야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없애면 어디서 전기가 생겨서 풍족하게 쓸 것 다 쓸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그 권사님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혼자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마다 5월이 되면 몽골에 나무를 심습니다.
몽골에 가보신 분을 알겠지만, 사막화가 무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넓은 초원이 해가 다르게 황막한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모래밭에 조그만 나무 한그루를 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다고 사막화가 방지되고 엄청난 재앙을 막아 푸르른 숲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객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터무니없는
바보스러운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예수님의 계산 방법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계산을 무시하고, 바보스럽지만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플러스알파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 혼자라도 실내온도를 18도로 줄이면
이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수십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 중에 우리가 단 몇 사람이라도 보살피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비웃든지 말든지 이 계산방법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예수님이 아직도 살아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만 있어도,
‘하나님의 도우심만 보태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플러스알파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기적이 없는 시대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아무 힘이 없는 무능력한 교회입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이면 무엇을 합니까?
이 땅에 아무런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는 무능한 교회입니다.
많은 교인을 모아야 많은 헌금을 모을 수 있고
그래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 계산으로 교회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적은 것이지만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개로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믿음과 신앙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계산, 자본주의의 효용성,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우상으로 섬기고 사는 사람들과 맞서서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5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을 믿고 내가 가진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를
선뜻 내어놓으면 놀라운 기적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를 내어놓았던 어린아이, 이 믿음으로
자리를 정돈하던 제자들이 있으면, 이 땅에는 다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갈릴리교회가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이지만
많은 교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진 아주 적은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를
예수님의 손에 들려드리는 한 사람,
그리고 이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으면
갈릴리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또다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난 26년 동안 우리 갈릴리교회의 모든 일들이 이와 같은 기적이 연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에서 그 옛날 벳세다 광야에서 일어났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이 가졌던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았던 어린아이가
우리 갈릴리교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을 믿고 자리를 정돈하던 겁 없이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이 교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 덩어리면 충분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드리고 자리를 정돈하고 앉으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것을 믿고, 자리를 정돈하고 앉는 사람들만 있으면 됩니다.
지난 날 갈릴리교회의 역사가 바로 이와 같은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제가 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와 같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믿는 알파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