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세움을 받는 사무엘

LNCK 2024. 12. 9. 17:1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복된 회개,       ▣선지자론

https://blog.naver.com/kaikk/60017653336

 

세움을 받는 사무엘               삼상3:15-21

 

이미 어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엘리는 나이가 많아서 지금 잘 거동하기가 힘들고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여러 가지로 좀 어두워진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그런 상태에 있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생을 바쳐서 봉사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함에 충성과 정성과 거룩함이 없었다.

그래서 자식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속되게 갈취하고

성소를 어지럽히고 있을 때, 엘리는 이걸 막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경건의 부족이요 충성의 부족이요 믿음의 부족인 것이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같이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만큼 그는 벌써 하나님과 그 사이에 분명 관계가 멀어지고 있다.

 

◑삼상3: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엘리의 집에 심판을 내리게 된다.

엘리는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아직 아이인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사실을 엘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듣고, 그리고 그날은 편히 쉬었는데,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전의 문은 열었지만,

그러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들은 말을 엘리에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 내용이 사무엘에게 대해서는 선택적이지만

엘리 집에 대해서는 심판하시는 내용이니까, 그가 두려워서 말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는 이것을 꼭 알고자 했다.

이 관계를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

 

그러나 엘리는 듣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있지만

엘리는 사무엘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했다. 꼭 알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간절히 부탁한다.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고 말하라."

 

◑3:16~18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말하라.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그대로 말해 달라’고 한다.

 

거기에다 아주 좀 엄한 이야기까지 한다. 

‘만일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리라’  :17

그런고로 가감 없이 말하라고 한다. 

 

여기에 사무엘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진실한 용기다.

들은 대로 보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엘리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얼마나 분노할는지, 얼마나 슬퍼할는지, 또 이 말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아서 돌아가시게 될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말해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모습이다.

진실 그대로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가감 없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필요한 용기요 성실이요 진실이다.

 

▲그 다음에 이제 중요한 것은 엘리 입장에서 볼 때는

엘리는 지금 직접 듣지는 못하는 입장에 있지만

간접적으로 꼭 듣고자 하는 것이다.

 

‘네게 말씀하신 것을 내게 다 말하라.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말하라.’

이런 마음으로 지금 엘리가 나온다. 간접적으로 듣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때도 있지만,

또 그렇지 않아도 좋다. 간접으로 우리가 들어도 충분하다.

믿고 들으면 되니까요. 사무엘이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을 엘리가 사무엘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

여러분, 우리가 직접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지만,

이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직접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들은 분을 통해서 내가 진실한 말을 들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관계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직접 들을 수 있고,

내가 직접 듣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했다고 하는 사실만 바로 믿으면 된다.

 

그리고 이제 사무엘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그것만 엘리가 믿게 되면 자기가 직접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는 것,

그것에 대한 관계, 믿음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엘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듣고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 어떤 말씀이든지 말씀을 들었으면 이제는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너희 집에 이런 일이 있겠다 하면 이 집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이렇게 했다 하자. 엘리가 즉시 자기의 아들들을 다 모아 놓고

사무엘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알려주고

우리가 빨리 통회 자복해야 하겠다.’ 그리고 재를 뒤집어쓰고 무릎을 꿇고 금식을 하며

통회 자복하는 시간을 가져야 되겠다.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짐작컨대 한 사흘 동안 엎드려서 통회 자복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겠는가?

혹시 은총을 베풀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가 그렇게 응답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는 한 절반은 순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순종이 아니다.

다시 한번 성경 다른 곳으로 가서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자.

 

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사람이 있고 간접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 보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특별히 고넬료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서 들으라고 한다.

 

베드로가 오자마자 그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엎드려 절을 하고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랬지요.

 

지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시간이 아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듣는 시간이다.

베드로를 통해서 들었어요. 그래서 그 집은 구원을 받았다. 그걸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이 있다.

요나와 니느웨를 보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요나에게 니느웨 성은 40일 후에 망한다고 그러셨다.

 

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복음을 전한 게 아니고 심판을 선언한 것이다.

그 내용을 가만히 보라. 요나의 마음도 니느웨가 망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망하니 잘되었다. 그래서 신나게 달려가 전하는데,

'40일 후에는 망한다', 이렇게만 전했다.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 했겠는가? 그건 죽어도 안 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도망갔던 사람이다. 회개할까봐 걱정이다.

전하면서도 요나는 순전히 그 말만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40일 후에 망한다.

 

그런데 이 말을 니느웨 백성들이 듣고 만일에 화를 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주 역정을 일으켰다면 요나를 때려죽였을 것이다.

웬 이방인이 와서 재수 없게 돌아다니며 망한다는 망말을 하느냐고 돌로 쳤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대로 전하고 난 뒤 어떤 불이익이 내게 돌아올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이 좌우지간 말씀하라 했으니까 그대로 가서 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니느웨 성은 회개했다.

회개함으로 그만 하나님이 내렸던 진노를 거두게 되지요.

 

그러니 요나가 화가 나서 하나님께 대들지 않는가?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래서 내가 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 아닙니까?' 하고 반항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 이렇게 우리가 연결해 볼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어거스틴의 말대로 하나님도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지 못하고 회개하는 죄인을 벌하지 못하신다.’

 

엘리 집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더라면 틀림없이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를 취소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엘리는 이렇게 말한다.

'선하신 소견대로 할 것이니라.' 이게 끝이었다. 그런고로 망하는 것이다. :18

 

'선하신 소견대로' 까지는 좋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엎드려 회개하는 흔적이 없어요.

또 회개를 하든 안 하든 자식들을 불러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이러하더라.

그런고로 너희들은 이제 회개해야 되겠다고 그렇게 권고하고 있지도 아니한다.

그저 소견대로 하고는 끝났다. 이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말씀이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늦지 않다. 지금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약속과 진노를 거두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까 엘리로 말하면, 엘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심판적 하나님은 알고 있지만, ‘구원의 하나님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율법적 하나님은 알고 있지만, ‘은총의 하나님은 모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율법과 은혜에 있어서, 그는 율법은 알지만, 은혜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 하나님이 한 번 심판을 작정하시면, 변동이 없는 줄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엘리가 망하게 되는 이유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두지요. 그것은 심판이다.

그러나 회개할 때 그것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어찌하여 엘리는 ‘선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는 끝나고 말았느냐는 것이다. 삼상3:18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왜 생각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그 점이 얼마나 유감스러운지 몰라요.

 

그는 잘못한 것은 인정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회개가 되는 게 아니다.

뉘우친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잘못된 현실에서 잘못된 현실을 인정하는 그것만 가지고 회개가 될 수 없다.

, 지난날을 뉘우치고 눈물이나 흘리고, , 그런다고 회개가 되는 게 아니다.

용서의 하나님을 믿고 치유의 하나님을 믿고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심령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게 안 돌아온다면... 신학적으로 말하면 철저하게 율법주의적이다.

 

‘심은 대로 거둬야지 뭐. 정하신 소견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엘리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것은 절반의 믿음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대한 신앙은 없는 사람이다.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고 그랬다.

사무엘의 일생과 함께 하신다.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가 예언한 말씀은, 그대로 다 응했다는 뜻이다.

즉 말씀의 권세를 주셨다. 말씀만 주신 게 아니고 말씀의 권세를 주었다.

 

이제 사무엘은 대단히 중요한 자리에 있다.

왜냐면 그가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니까.

그가 입을 열어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가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아요.

이게 사무엘의 말이다. 그래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신다.

 

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라.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준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 아닌가?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9

네 말과 내가 함께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얼마나 중요한가?

 

또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다.’ 마10:40

바꾸어 말하면, ‘내 이름으로 가는 너희를 배척하는 자는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관계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엄청난 말씀의 권세를 사무엘에게 허락해 주신다.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사무엘의 말과 함께 하시겠다는 말이다.

 

이 사무엘이 어떻게 말하든지 말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건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사무엘의 말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백성들은 이제 사무엘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관계가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고

이제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 살아간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하셨다는 그것,

그것을 가지고 저들은 만족했다.

 

이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

사무엘이 어느 곳에 있기만 하면 온 백성들은 평안해요.

언제나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계시니까.

 

그 백성들은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니까.

또 계속 듣는 관계에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말씀하시고 말씀을 듣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3: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그래서 사무엘은 전국적인 지지를 얻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움을 입은 줄로 알았더라’고 그랬는데,

이점이 진정 중요한 것이다.

 

백성들이 이제 사무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므로

그가 말씀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무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거기에 구원이 있었다.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던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생각해야 될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들어야 한다. 그런데 직접 듣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듣기도 한다.

누구를 통해서, 내게 간접적으로 들려질 때,

성령으로 내게 감동해서 그 말씀이 내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언제나 사무엘처럼,

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세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요.

또 사무엘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저들은 안심해요.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또 말씀하시는 대로 들어서 순종한다.

 

◑3: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21절에 가서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는 사람이다. 또 들어서 전한다.

 

그러면 이제 백성들은 어떻게 되느냐?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에게 임하고 모세의 말을 백성들이 들었던 것과 같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고,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의 신학적 의미를 잘 생각해야 된다.

왜 전일에는 그랬지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려 할 때

백성들이 두려워서 ‘우리가 직접 듣지 못하겠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해 주세요.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듣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한 때도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맥락은 무엇인가 하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셔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또 사무엘이라는 이름 자체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해서 듣는 그런 사람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