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220063488748 정리
◈새해에는 푯대를 향하여 달립시다 빌3:12~14 2009.01.06.
우리는 새로운 한 해, 2009년을 맞이 했습니다.
새해가 되었다고 사람이 저절로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인데, 우리의 심령이 변하지 아니하면
새해가 되었다고 새롭게 되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매년 새해에 연두교서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연두교서 State of the Union Address 연설은
미합중국의 상태에 대한 진단과 보고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아주 중요한 연설입니다.
(이런 발표가 각 가정, 공동체에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2009 미국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의 상황에 대한 진단입니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지금의 미국의 경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미래를 알수 있겠는가? 아무도 알수 없습니다.
▲창세기에도 대단한 경제 위기가 있었는데,
요셉이 세상의 경제적인 위기를 잘 극복하였습니다.
“과연 흉년이 언제까지 갈 것이냐?”
요셉은 애굽의 흉년이 7년을 갈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생각해 보면 요셉이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어려운 국가의 난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 삶에 대한 진단.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느냐’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한해 주의 은혜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검진을 받아서 육신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것처럼,
2009년도 더욱 복되고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의 실상을 진단해 보고
삶의 궤도를 수정하면서 복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후회 없는, 만족한 한 해가 되려면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빌3: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의 삶속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푯대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었고, 하늘의 상급이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을 바라보았고, 천국에서의 상급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했지만
그의 심령은 언제나 주님을 만나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을 그의 목적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천국 목적’이 있는 삶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나아가는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보면, 장군이었던 맥베스가
자기가 섬기는 덩컨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릅니다.
왕이 되고 난 후에 이렇게 독백합니다.
“소원(욕망)은 이루었으나 만족은 못 했다.”
(욕망은 이루었지만 만족은 얻지 못했어. 살해를 하고 난 뒤의 이 불안한 기쁨,
이런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살해당하는 신세가 더 낫지 않을까)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 반역죄임을 알고 있고,
이 일로 인간적인 번민에 사로잡혀 참으로 불안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맥베스의 부인은 남편보다 더 야심이 컸던 인물이었죠.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꼬드겨) 덩컨 왕을 죽이게 만들고,
그로 인해 남편이 왕이 되자, 자신은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죄책감에 몽유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자살합니다.
그리고 맥베스 부인은 손을 계속 씻고 다닙니다.
아무리 씻어도 손에 묻은 피가 씻겨지지 아니합니다.
아라비아의 향수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지난날의 죄책감으로 정신적 병 증세를 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몽유병 환자가 되어 비참하게 죽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인간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해도
인생 목표가 바르지 아니하면, 의롭지 않으면,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임을 지적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는가요?
이 문제에 대하여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목표, 목적에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맥베스와 그의 부인의 목표는.. 완전히 엉뚱하고 잘못된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는 인생,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인생의 마지막은
반드시 후회와, 허무함 그리고 눈물입니다.
우리의 이민 생활도, American Dream이 아니라,
His Kingdom Dream을 바라보며 살아나가야
우리에게 진정한 미래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어떤 곳에서 큰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마치고 나서 숙소로 돌아갔을 때, 점잖은 손님이 하나 찾아와서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는 장차 올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의 끝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잘 들었습니다.
한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목사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 자신의 미래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나의 미래를 예수님께서 꼭 붙들고 계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을 주장하셨고, 지금도 주님께서 나의 인생을 주장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나의 미래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2009년도 여러분들의 인생을 주장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두지 아니하고,
우리의 인간적인 야심이나 소원에만 둔다면, 결국에는 허무함뿐이며, 실패입니다.
또 새롭게 주어지는 한 해,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나가는, 우리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현세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고, 영생을 바라보는 영안이 뜨인 자들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연말연시 시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지난날의 과거를 잘 정리해야, 미래지향적으로 살게 됩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앞만 바라보면서 달려야 합니다.
영어로 1월을 January인데
이 말은 그리스의 신 가운데 “야누스” 신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야누스는 얼굴을 2개를 가졌는데,
하나는 앞을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뒤를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1월은 지난날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는 시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를 생각하고, 참고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과거 지향적인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마무리 큰 영광을 누렸고, 옛날에 아무리 잘 나갔던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아니합니다. 단지 회상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옛날에는 큰 권력을 쥐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지금은 매우 외롭게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세상의 영광의 허무함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현재를 살면서, 과거에 붙잡혀 노예로 살아서는 아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와, 아픔 때문에
한평생 한 맺힌 삶을 살기도 합니다. 매우 불행한 인생이죠.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과거의 상처를 잘 치료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More Than A Carpenter>의
저자 조쉬 맥도웰은 미국에서 유명한 크리스천 작가이며
이분은 특히 대학생들, Campus 사역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자기의 인생을 괴롭혔던 마음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미시간 어느 시골에서 성장했는데, 자기 아버지는 지독한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집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학교에까지 와서 난동을 부려서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조쉬와 형, 누나들은 창피하여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누나는 아버지 때문에 자살, 형은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나중에 형은 정신쇠약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잘못된 행동으로, 너무나 비참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조쉬 맥도웰도, 그의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조쉬는 대학 캠퍼스에 다니면서 강의와 연설을 하면서
매우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책도 수없이 지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골 고향에 사는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늙어 병들어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아들 조쉬를 매우 보고싶어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고향으로 가면서 조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버지를 안고 울면서,
“아버지 나는 오랜 시간동안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아버지도 저를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쉬는 주님을 영접하고 평안히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던
분노의 사슬이 저절로 풀려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상처를 믿음으로 잘 정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복을 주십니다.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미래의 길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라” 할때 과거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과거를 지울 수 있나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의미를 바꾸라는 말입니다.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조쉬 맥도웰 설교 모음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서 팔려 노예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과거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재해석 했습니다.
팔려온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믿음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의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과거의 아픔과 실패, 상처를
하나님의 은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어느 유대인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라, 용서하라. 그것은 독일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하는 일이다. 우리의 미래가 남을 미워하는 감정을 품고 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잘 사는 나라일수록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나라들은 앞으로 10, 50년 이후를 내다보면서
많은 투자를 하고 사람을 키웁니다. 언제나 현재보다 미래를 생각합니다.
건물을 지어도 100, 200년을 내다보면서 짓습니다.
▲이어령씨의 수필집에 보니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내일 이라는 말이 없다.
어제와 오늘은 있지만, 내일은 우리 말이 아니라 한자어이다.”
우리는 과거를 중시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가문을 따지고, 족보를 따집니다.
가정의례의 예법도 대단합니다. 가문을 모르고, 족보를 모르고 가정예법을 모르면 무시합니다.
신분이 천한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이 모든 것이, 과거 지향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면서,
교회와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내일’이라는 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 조선에 와서 내일의 바라보면서, 열심히 교육을 시켰고, 사람을 키웠습니다.
조선의 내일을 위하여 복음의 씨를 부지런히 뿌렸습니다.
여러분, 이 한해를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를 잘 정리하고,
이 한 해에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과거를 잘 정리해야, 진정 희망 찬 미래를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 적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의 치유를 위한 것 주1)
◑3.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나가야 합니다.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달려간다는 말을, 영어성경은 주로 ‘press on’으로 번역하는데, *헬, 디오코
뭘 붙잡으려고, 온 에너지를 다 짜내서, 달려가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달리기를 할 때, 결승 골인 지점을 향해, 막판 스퍼트 할 때를 뜻하지요.
어려움과 고통과 괴로움을 (쥐어짜며 press on) 참고 견디며 달려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 (달려가노라, 디오코)은, 신약성경에서
주로 ‘핍박, 박해 persecute’라는 말로 여러 번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핍박’도 다 ‘디오코’입니다.
교회를 ‘쥐어짰다’는 거죠. 행9:4, 5,
1) ‘달려가는’ 것은 핍박을 끝까지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달려가노라 (디오코) 와 같은 단어가 마5:10~11절에 이렇게 쓰였습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디오코
그러니 박해, 핍박을 받아도.. 견디면서 계속 달려가는 것입니다.
2) 괴로워도 쥐어짜며 press on 계속 달리는 것은,
곧 주어질 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디오코
빌3:14 ‘...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디오코
3) 성도들을 섬기며, 대접하는 것을 힘써야 달려가야 합니다.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디오코
이것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구체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어느 날 두 나무꾼이 백 년된 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자르고 나니 나이테가 보였습니다.
100년 된 나무이니 당연히 나이테가 100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는 다섯 개의 나이테가 거의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젊은 나무꾼이 말합니다. “5년 동안 가뭄이 들었나 봅니다.”
가뭄이 들었으니, 5개의 나이테가 거의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걸 보고 나이가 많은 나무꾼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가물었던 해는 실제로 그 나무의 생명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네.
가뭄 때문에 그 나무는 필요한 수분과 영양소를 얻기 위하여
땅 속으로 뿌리를 더 깊이 내려야만 했단다.
그리고 가뭄이 지나가고 난 후에, 나무는 튼튼해진 뿌리 덕분에,
더 크고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네.”
우리의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더욱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인생의 고난과 환란을 통하여 우리를 더욱 연단시켜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만드십니다.
“열심히 달린다, 최선을 다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집중하고,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전력으로 일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한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군병으로서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열심을 다해 신앙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이 신앙생활을 자전거에 비유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자전거를 잘 탈려면 계속 전진해야합니다. 조금만 중지하면 넘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일에도, 내가 기분이 좋으면 열심히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그만두면, 넘어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실패합니다.
로마서 12: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는 주님의 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열심으로 주님을 섬겨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
주1) 어릴 적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의 치유를 위한 것
2004년 북경 코스타를 갔을 때 한 자매와 상담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매에게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지시하시는데,
자기는 정말 그렇게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자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도 곁에서 보면서,
딸로서 아버지에게 배신감도 느끼고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아버지에게 마음을 닫아버렸어요.
그 아버지를 거의 잊고 지내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서
‘제가 아빠를 미워한 것을 용서해 달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싫은데
아버지에게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에요.
도무지 싫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아버지가 했는데,
왜 내가 아버지에게 오히려 잘못했다고 해야 하고,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 되느냐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꼭 그렇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 상담을 하면서 성령님께서 제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매에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위함이 아니고, 자매의 마음을 치유하려 하심이에요.
앞으로 한 형제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될 텐데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지고는 그 형제를 괴롭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모습을 남편에게 투사)
자매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그냥 가지고 결혼을 하면
남편에 대한 의심, 남자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어서
자매를 사랑하는 그 형제는 결혼생활이 그것보다 더한 지옥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자매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아버지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가 아버지의 허물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아버지 미워했던 것 고백하고, 아버지의 용서도 받고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성령님께서 하시라는 대로 순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