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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37장 여호와께로 받은 말씀이 있느냐

LNCK 2024. 12. 14. 06:33

https://blog.naver.com/karamos/80141961439

 

여호와께로 받은 말씀이 있느냐         렘37:16-21           2008년

 

서론

 

예레미야 37장을 주석한 어느 학자는, 그 시대를 묘사해 ‘진리를 땅에 내동댕이친 시대’라고

표현했습니다.

본문 37:2절에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시드기야 왕과 그 신하와 그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존립여부를 걱정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졌는데 언제 회복할 것이냐?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걱정했습니다.

 

또 노예 문제를 안고 있는데, 해방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를 걱정했습니다.

이처럼 국가 안보, 경제 발전, 그리고 노예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다 관심을 보이면서도

하나님 말씀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배려도 존중심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느브갓네살이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공격했던 주전 589년의 상황은

현대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과 비슷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21세기를 가리켜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세계사에서 17세기와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만연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의 이성과 능력과 잠재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되고, 과학이 신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과학이 마치 하나의 종교처럼 되어, 과학자들이 대제사장처럼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결과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산업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확신이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되고,

그 결과로 인간은 유토피아를 향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자신의 이성의 능력과 잠재력으로

충분히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성이 왕이 된 모더니즘 시대가

20세기에 들어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무참하게 무너져내리게 되었죠.

 

1차 세계대전은 1914년에 일어나서 1918년에 끝났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나라는 19193.1독립선언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에 시작해서 1945년에 끝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는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사회에는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우간다의 이디 아민,

쿠바의 카스트로, 우리와 언어를 같이 쓰는 김일성과 김정일과 같은 독재자가 등장했습니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20세기에는 무려 2억 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들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이상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더니즘 시대는 끝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반전노래가 유행했고, 서구의 대학가에서는 반전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더니 남는 것은 전쟁과 살인뿐이므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만

두드러진 것은 두 가지로 회의주의(skepticism), 상대주의(relativism)입니다.

 

회의주의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모두다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상대주의는 진리는 다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은 나한테만 진리이고 당신에게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는 각각 진리라고 믿는 여러 개가 존재하므로

다원주의(pluralism)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것입니다.

 

당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은 당신에게는 진리이지만, 나에게는 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게는 내 나름대로 진리라고 믿는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전도를 하면 당신이나 믿으라 하며

나는 나 나름대로 믿는 진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 줘야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이처럼 회의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가 21세기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미덕은 상대방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자는

관용심 (tolerance)입니다. 남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관용심이 부족한 부덕으로 인정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미국에서 일어난 교회 운동이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란 운동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떠오르는 교회입니다.

 

Emerge는 ‘물속에서 물 밖으로 나오다’, 혹은 ‘어두움에서 광명으로 나오다’는 의미이죠.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확정된 진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보다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정된 진리가 없기 때문에

조직신학같은 체계적인 교리는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교회는 대단히 위험한 종류의 교회인데,

앞으로 대한민국에도 이런 이름을 가진 교회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성행한 것은 보통 10여년 뒤에 한국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같던 주전 589년에

예레미야는 목숨 걸고 증거 한 것이 있습니다.

진리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시드기야 왕은 은밀한 중에 와서 예레미야에게 질문했습니다.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시드기야 왕의 질문은 “진리가 있느냐? 진리가 있다면 도대체 진리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조금도 타협없이 단호하게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내용이 뭐냐?”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여질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불타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백성은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항복하면 살 것이고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절대적인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유다왕국의 역사는 진리는 시간이 지나면 사실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실이 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며 지옥에 가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나게 되는 사실입니다.

 

◑1. 진리가 무엇이냐?

 

먼저 시드기야 왕이 질문한 것처럼 ‘진리가 있느냐? 있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시드기야 왕보다 630년 후에 나타난 본디오 빌라도의 질문과 똑같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18:38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강남구 논현동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와서 간판을 보면서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어디냐?’고 묻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종로5가에서 ‘종로5가가 어디냐?’라고 묻는 것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오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요18:37

 

또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1:17

 

그러므로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이고,

“진리는 어디 있느냐? 어디서 오느냐?”가 더 바른 질문입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느냐?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오느냐?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다 진리냐? 아니면 진리는 어디 한군데 있고

어디 한군데서 나오느냐?” 이것이 바른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느니라. 내게서 나오는 것은 진리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8:44절을 보면 ‘진리는 마귀에게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진리는 마귀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관해 계속해서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17: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Your word is truth).’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를 통과하지 않고서 아버지께로 갈 자는 없다. 예수가 곧 진리다 말씀하셨습니다.

 

요16: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일5:7절에도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진리를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복음(Gospel)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단순히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복음 진리”라고 합니다.

 

골1:5절에도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라고 기록되었고,

갈2:5절에도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에게

“진리가 있습니까? 진리가 있으면 무엇입니까?”하고 은밀한 중에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예,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우리는 복음을 가르쳐줘야 됩니다.

 

▲복음은 첫째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인 신분인 인간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하면 천국, 악하면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에 갈 만큼 착한 인간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용서 받을 수 없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지옥에 보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보내셔도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지옥에 보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증거 해야 됩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전파한다 하면서,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을 다 구원하기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더 자비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무능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를 원하시는데

못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못하셨고 지금도 못하시며 앞으로도 못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한 존재가 아닌 무능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바른 신학도 복음도 진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지옥에 보내도 마땅하시지만 우리를 지옥 보낼 영혼들 가운데

영원 전 창세 전부터 택하셔서 예수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셋째로, 복음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하기로 계획하시고

택하신 사람들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염소를 위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의 죄 값을 갚기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택하신 자들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가 죄 값을 갚아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여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간 전도자가 증거 하는 말씀을 통하여 함께 우리의 영혼 가운데 증거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은 결국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획자요 사령관으로 택한 자의 영혼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구속자요 성취자로 택한 자의 죄 값을 갚아 구원을 성취하셨으며,

성령님은 그 구원을 적용하셔서 하나님의 택한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요 유일한 복음이요, 절대 진리요, 다른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2. 진리에 대한 세 종류의 반응

 

예레미야는 진리의 증거자였습니다.

왕이 위협을 해도 서기관들이 감옥에 넣어도, 방백들이 협박해도, 진리를 증거 했습니다.

조금도 타협 없이 가감 없이 진리를 증거 했습니다.

 

오늘날도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가 진리를 가감 없이 증거하고

복음의 절대성을 증거 합니다.

그러면 종교 다원론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든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가리켜 ‘교만한 교회, 배타적인 교회’ 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가 모하메드나 알라나 석가모니나 문선명에게 있지 않다고

타협 없이 증거 합니다. 천하 만민 중에 예수 이름 이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는 주신일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4:12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을 믿는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혹자는 “왜 그렇게 마음이 좁으십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마음을 넓힐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냐 거짓이냐? 진리냐 비진리냐?”가 중요한 것이지

마음을 넓히고 좁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든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증거하고 진리를 믿어야 됩니다. 순수복음을 증거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받은 말씀이 있느냐?”는 질문에 예레미야처럼

“예 있습니다.”라고 증거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7장과 38장에 보면 복음 증거에 대한 세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어느 시대나 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시드기야 왕 같은 반응입니다.

복음을 듣기는 들어도 믿지 않고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는 위기가 오면 예레미야에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본문 37:3절에도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려우니 선지자를 찾아가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 뭐냐고 물어보기까지는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어도, 신앙고백도 헌신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는 방백들을 무서워해 그들의 여론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유다의 방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혼자 바벨론에 항복해야 산다고 할뿐

세상 모든 여론은 다 항복하지 말라고 왕에게 압박을 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이냐? 세상 여론을 들을 것이냐?” 갈등하며

양다리를 걸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여론에 더 비중을 두고

하나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자신이 변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대로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말씀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이 인준해 주기를 구했을 뿐입니다.

 

그는 참된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기도를 요청하고 말씀을 듣고자 해도 그는 악인이었죠.

진리에 대한 헌신이 없던 사람입니다. 아주 약한 사람으로 그의 연약함에서 사악함이 나온 것입니다.

진리를 들어도 믿지 아니한 거짓된 신앙인 이었습니다.

 

이런 거짓된 신앙은 자기를 망치고, 가정을 망치며,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 같은 이런 양다리 걸치는 신앙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둘째, 13절 이하에 나오는 “이리야”는 “사적인 감정”으로 진리를 적극 대적했습니다.

11~16절에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하여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두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가로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예레미야가 가로되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방백들에게로 끌어가매 방백들이 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으로 옥을 삼았음이더라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여러날 만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전 589년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서, 1년 6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해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쯤에 시드기야 왕이 애굽 왕 바로와 비밀 맹약을 맺었습니다.

뇌물을 주고 애굽이 와서 우리를 건져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 바로가 와 바벨론 군대에 대항하는 척하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애굽 바로 왕의 군대가 온다 하니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던 것을 잠시 철군했습니다.

 

바벨론이 철수한 사이에 예레미야는 고향인 베냐민 땅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리야 라는 문지기의 두목이 예레미야에게 간첩죄를 덮어씌우고

방백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방백들은 재판도 없이 주의 종인 예레미야를 때렸습니다.

 

이런 곳은 영어로 ‘prison’이 아니라 ‘dungeon’이라고 합니다.

빠삐용 영화에 나오는 그런 지하 감옥입니다. 햇빛도 신선한 공기도 깨끗한 물도 없고

음식도 더러워 얼마 안가서 병들어 죽게 되는 곳입니다.

 

이리야는 왜 그렇게 예레미야와 진리를 적극적으로 대적했는지

그의 족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하나냐”라는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목에 멍에를 메고 바벨론에 포로 되어 끌려갈 것이다 하니

하나냐는 멍에를 끊고 2년 만에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저 자는 거짓예언을 하기 때문에, 올해 안으로 죽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냐가 거짓 예언을 하다가 그 해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하나냐는 죽을 때

“예레미야라고 하는 자를 그냥 두지 마라.

너와 너의 자녀들은 대대로 예레미야에게 복수를 해라.”하고 유언을 남겼다 합니다.

 

그래서 그의 집안은 예레미야에 대한 사적인 복수감정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냐의 손자 이리야가 예레미야를 때려서 감옥에 가두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적인 감정 때문에, 복음을 대적하고 전도자를 핍박하는 사람은

이리야의 영적인 후손들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보면 그 교회 장로님의 잘못을 보고

혹은 그 교회 목사님의 정치적인 의견과 맞지 않아서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택한 자의 영혼에 은혜를 줍니다.

예레미야가 진리를 말하자 다른 사람은 안 믿어도 믿는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38:7절로 13절에 “왕궁 환관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의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고하여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왕이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는 여기서 삼십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 내라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서 헝겊과 낡은 옷을 취하고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줄로 내리우며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네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 대라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벳멜렉은 왕궁 환관이었습니다. 환관은 내시라고도 합니다.

에벳멜렉은 구스인 즉, 아프리카 사람이었습니다. 흑인으로서 이름도 자기 이름이 아닙니다.

에벳멜렉은 왕의 신하(The Servant of the King)라는 뜻입니다.

“야, 왕의 신하, 신하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레미야의 전한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의 고위관직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하는데

지위가 낮은 에벳멜렉이 왕에게 가서 “예레미야의 말이 진리입니다.

예레미야 살려야 됩니다.”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한 영혼은 어느 시대나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벤멜렉이 예레미야가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

밧줄을 내려 끌어올리는데, 밧줄로 옆구리를 묶어 끌어올리면,

옆구리가 피나고 다칠까봐 헝겊과 낡은 옷을 예레미야의 겨드랑이에 대고

밧줄을 묶어서 올라오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배려 깊은 사람입니까?

 

어떤 설교자는 예레미야 38장의 “에벳멜렉”을 가리켜

‘예상치 못했던 개종자(unexpected convert)’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전도를 할 때, 원래 집주인은 안 믿는데 조카가 믿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열심히 나오니, 그 다음에 주인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를 하면 예상치 않는 개종자를 이렇게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주전 6C나 현재 주후 21C나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진리를 상대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진리를 듣고, 믿고, 헌신합니다.

 

그 시대에도 에벳멜렉이 있었듯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택한 영혼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증거 하면 택한 자의 영혼에는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절대적인 진리라는 절대성을 확신하고 이 진리를 아시기 바랍니다.

강남 미니스트리 대학에 등록해서 구약의 파노라마, 신약의 파노라마 등 말씀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알아야 하고 진리를 믿어야 하며 진리에 순종해야 하고 진리를 거스리지 말아야 되며

진리에 서야하고 진리에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문제는 관심이 많아도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39장을 보면 예루살렘이 망해버릴 때도 하나님이 에벳멜렉을 지목해

“너는 내가 구원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흑인 한 사람을 지목해서

너는 내가 구원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아무리 진리를 흐리게 하고 상대주의를 주장해도

우리 성도들은 예레미야처럼 예수만이 진리요 천국의 길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고

진리에 헌신하여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37:1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유다 땅의 왕으로 삼음이었더라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본절과 다음 절은 본장과 38장의 제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앞장(36장)에서는 여호야김 시대의 사건들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는 다시 시드기야 재위 당시의 사건으로 넘어오고 있다.

 

37:2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유다가 민족적 파멸에 봉착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영적 차원의 것이었다.

 

한편 본문은 왕하 24:17-20에 언급되고 있는 시드기야에 대한 기사를 압축해서 옮겨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왕하에서의 주된 취지는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후, 그 역시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자기 신하들과 방백들이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배척했기 때문에

시드기야도 거기에 끌려다녔던 것이다.

 

37:3 시드기야 왕이 셀레마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시드기야는 다급한 상황에 처하자 예레미야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본절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보내진 제사장 스바냐는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도

시드기야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를 방문한 적이 있다(21:1-10).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스마야란 거짓 선지자로부터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라는 편지를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2:24-32). 그러나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 중에는 들지 않았다(38:1).

 

반면에 그의 동료 관계에 있던 여후갈과 바스훌(21:1)은

예레미야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20:1, 2, 38:1-6).

 

한편, 본절에 언급된 왕의 요구 사항은 아마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철수하였던 그런 기적을 여호와께서 다시 베풀어주시지나 않을까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왕하 19:32-37).

그러나 1-7절에서는 시드기야의 운명과 또한 포위 공격이 시작될 것에 관해 선언되어 있다.

 

37:4 그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출입하는 중' 이 표현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는데,

본절에서처럼 백성들 중에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녔다는 의미이다.

13, 14절에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로부터 그는 B.C. 586년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까지 옥에 갇혀 있어야했다.

 

37: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애굽군대가 팔레스틴 평원으로 들어온 것은 B.C.588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아마 시기드야의 응원 요청에 응답하여 출병하였을 가능성이 많지만

또한 바벨론군의 애굽 침입을 사전에 방어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라기스 서신(Lachish Letter)에는 유다군의 지휘관이 애굽에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어째든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풀고, 그들과 접전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

 

37:6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7: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를 보내어 내게 구하게 한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애굽 군대는 갈대아인의 군대에 패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그들이 출병한 것도 사실 유다를 진심으로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즉각 자기들 나라로 후퇴했으며, 이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는 데는

방해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37:8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갈대인이 다시 와서...불사르리라'

본 단락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21:1-7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여태까지 예고되고 경고되어 왔던 유다에 대한 심판의 불가피성이 이제 완전하게 실행되고

말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중단된 것은 단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 멸망을 방어해 줄 것이 없는 것이다.

 

37: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37:10 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

 

느부갓네살에게 비록 부상당한 병사만 있다고 해도 그가 승리할 것이므로

헛된 기대를 버리라는 내용이다. 이런 수사적 과장법은 예루살렘의 패망과 파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선지자의 대답은 그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분명하고도 단호하였다.

오히려 유다 멸망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 이전보다 더 강렬했다.

 

바벨론군의 철수로 인해서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고조되어 있던 그 시점에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은 심각한 반발과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단락에서 그가 체포되고 투옥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 '스스로 속여 말하지 말라'고 하는 어구는 히브리어 관용적 표현인데,

'너희 영을 높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37:11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갈대인의 군대가...예루살렘에서 떠나매'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사건은

바벨론의 포위 공격이 중단되고 백성들이 성밖으로 다닐수 있던 그 어간에 발생했다.

본 절에서부터 15절까지는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37: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이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1)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세습 토지를 유산으로 분배받고자 했음을 가리킨다는 견해,

2) 32:1-15에 언급되어 있는 땅 구입 사건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

3)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아나돗으로 피신하고자 했다는 견해.

 

이 중 세 번째 견해는 유다 민족의 파멸을 선포하면서도

그 운명에 끝까지 동참하고자 했던 예레미야의 소신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연대기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만일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멜에게서 산 땅을 취하기 위해 아나돗으로 가고자 했다면,

이 때가 32장보다 이후의 시점이 되어야 하나, 사실은 그 이전이다.

 

왜냐하면 32장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힌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굳이 두 번재 견해를 취하려면,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미 사둔 땅을 보러갔던 것이 아니라

그 땅의 매매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아나돗으로 가고자 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7:13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마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네가 갈대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문지기 두목 이리야는 예레미야를 이탈자나 도망자로 보고 그를 체포하였다.

아마 그가 예레미야를 그렇게 오해한 데에는 몇가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즉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해 왔었으며(12:9, 38:2),

많은 유다인들은 실제로 적에게 투항하였었다(38:19, 52:15). 더군다나 바벨론이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었다.

 

37:14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망령되다...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망령되다'에 해당하는 '쉐케르'는 '허위', '거짓된',

'기만하다'는 뜻으로, 애매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피해를 입히려고 획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항복하려'의 히브리어 '나팔'은 원래 '떨어지다'는 뜻이며, 상징적으로 '배반하다',

'(다른 편으로) 기울어지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37:15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

 

서기관 요나단의 집을 왜 감옥으로 사용했는지 하는 점은 알 수가 없다.

아마 유다 관리인들의 집에는 임시로 죄수 등을 감금할 수 있는그런 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공정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레미야를 때리는 등 아예 흉악범 취급을 하였다.

 

37:16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이 구절의 해석이 다소 어렵긴 하지만, 예레미야가 갇힌 곳이 지하 감옥이었으라고 짐작된다.

'웅덩이'(하하누요트)은 우물과 흡사한 구덩이로서 그 바닥은 작은 방처럼 움푹 패인 형태이다.

 

38:6, 13을 보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지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예레미야는 이 집의 구덩이에 던져졌을 것이다. (빗물 받이용 웅덩이, 물저장소)

어쨌든 이곳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될 경우 결국 죽게 되고 말 비참한 장소였다(20절).

그는 시드기야가 그를 불러들였을 때까지 이곳에 상당 기간 동안 갇혀있었던 것 같다.

 

37:17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본절의 장면은 시드기야의 소심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왕이 자기 신하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밀히 자문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메세지는 이전과 같은 것이었다.

즉 왕의 운명이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감금된 상태에 있었으나 진실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37:18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37:19 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37:20 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켰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37:21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떡 한덩이씩'

이 비밀 회담은 결국 왕이 호의에 베푸는 것으로 끝났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구출되었으며, 시위대 마당으로 옮겨졌다.

 

아마 시위대 뜰은 요나단의 암굴보다는 상태가 휠씬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시위대 뜰은 왕궁 곁에 위치해 있었으며(32:2, 느3:25), 감옥과 같이 죄인들을 가두어

격리시킨 곳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행동이 제한당한 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그의 사촌 하나멜의 밭을 샀던 것도

바로 그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32:1-15).

 

더군다나, 이제는 식량 문제도 해결되었다. 물론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식량이 남아 있을 때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포위 공격이 점점 압박해 들어옴에 따라

지금까지 선지자가 예언하여 왔던 그 기근이 이제 실제로 닥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