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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질하며 사는 삶

LNCK 2024. 12. 3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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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질하며 사는 삶            빌3:10~14           2011.12.11.

 

빌립보서 3:14절에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쉬운성경에는 ‘힘껏 달리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려간다, 힘껏 달려간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발자국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좁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달려간다, 좇아간다’ 하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갇혀 있던 로마의 감옥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 모르지만

제가 옛날에 민주화운동 할 때 있었던 감옥은 0.7평으로 바로 누울 수조차 없어서

비스듬히 누워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달리기를 합니까?

세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는 곳이 감옥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좁은 감옥에 갇혀서 나는 지금 힘껏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좁은 감방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도 바울을 가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를 가두고 꼼짝 못하게 했던 감방의 벽도, 굳게 닫힌 철창문도

그를 가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현실적인 장벽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달려가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더 말할 것도 없이 바울 안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육신을 꼼짝 못하게 했던 모든 장벽을 넘어서서

그를 얽매고 있던 모든 것을 넘어서서, 달려갈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9~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 우리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조건과 제약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 옷에 매이고. 돈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돈에 매여서 살고,

어떤 집에서 사는가 하는 집에 매여서, 어떤 차를 타는가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현실적인 장벽에 얽매여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현실적 장벽을 뛰어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가 좁은 감방에 갇혀 있었지만,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했지만,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았습니다.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달려가는 삶을 산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

그런 모든 세상의 조건이 얽매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다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와 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서 달려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 바깥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든 세상의 일들에 얽매어 뒤뚱뒤뚱 다리를 질질 끌며 살아가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우리들은 모든 것에 얽매여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좁은 감옥에서 바울은 달려가는 삶이 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의 삶이어야 합니다.

근심 때문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돈 때문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저런 조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돈 때문에 매여서..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워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넘어서는 달려가는 인생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제약하는 모든 세상의 조건 가난이나 실패나 무능력이나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사는 삶이 예수를 믿는 삶입니다.

내가 지닌 세상적인 여러 조건들이 나를 얽매이지 않는 삶이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로 무엇을 향하여 그렇게 달려간 것입니까?

14절에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다’고 했고

12절에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달려간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달려간 것입니다.

우리가 축구 경기를 할 때도 그냥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골대를 향해서 찹니다.

분명한 목적 골문을 향하여 골을 차는 것이 축구입니다.

 

아무렇게나 공을 찬다고 하면 백전백패입니다. 하기야 자살골도 있습니다.

자살골을 넣은 선수는 평생의 불명예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도 자살골을 넣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하는 곳에다 골을 차는 자살골을 넣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년도 며칠 남지 않았지만 되돌아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분주하고 바쁜 나날을 살았습니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벌써 12월 1년이 다 지났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무엇을 위해 어디로 그렇게 열심히 달려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바쁘게 달려온 것입니까?

혹시 자살골을 넣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것은 아닙니까?

목적 없이 달려간 사람은 자살골을 넣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말을 합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관 30, 40대에 CEO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생은 100m달리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빨리 달린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톤 경기도 아닙니다.

인생의 성공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짧게 살아도 그럴듯한 목적, 영원히 가치가 있는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오래 살아도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역사에서 보는 대로 100세 살았다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이름이 남는 것이 아닙니다.

짧게 살아도 제대로 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산 사람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살았던 짧게 살았던 목적을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 주위에 생각밖에

목적없이 인생을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막상 ‘당신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질문을 하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저런 인생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목표,

어떤 사람은 자식을 잘 공부시켜서 출세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업의 성공이나 물질을 인생의 목표로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출세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창피하다는 것을,

부끄럽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되돌아보면 알게 됩니다.

사업의 성공, 아이들의 교육, 물질이나 출세를 인생의 목표로 살았던 사람은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어디에 내놓을 만한 목적도 없이 살다가, 죽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며

남겨놓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는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을 보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더라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았는가에 그 사람의 인생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치있는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인생의 목적을 목표로 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잘못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것 자체로 인생을 실패한 사람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제게 ‘제 인생이 성공할 것 같습니까? 실패할 것 같습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제대로 가진 사람은, 결과에 상관없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목적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고 열심히 살아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잘못된 목적을 가진 사람은, 그것 자체로 실패한 사람이고

제대로 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것 자체로 이미 성공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내 인생의 목적인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적을 가지는 순간 여러분의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인생의 목적이, 어떻게 내 인생의 목적이 되었는가?’

하는 과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 어떤 사람은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웬만한 사람입니다.

 

2) 그러나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정해준 대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이 정해준 대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간혹 아내에게 꼼짝 못하고 끌려다니고 아내가 정해준 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 부모들이 자녀들의 인생의 목적을 정해줍니다.

자식의 인생의 목적을 부모가 정하는 것은

자식의 장래를 망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3) 성경에는 자기가 정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정해준 것도 안 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만이 진정한 인생의 목표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해주신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이 정한 인생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잡아가는 것이 사도 바울이 스스로 정한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사도 바울의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인생의 목표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가 정해준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 바닷가에서 고기잡으며 지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목표를 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정한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평생 동안을 그 목표를 향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간 것입니다.

 

▲사실 지금 로마에서 감옥살이를 하는데 안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간다고 하니

에베소서의 장로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렸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고 로마로 가게 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이기 때문에

죽음의 유혹이 있지만, 인생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 것입니다.

 

모세나 베드로나 바울은 자신이 세운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평생을 통해 하나님이 세워주신 목적을 향하여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인생행적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 영화를 보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표를 목표로 삼고 사는 순간

결과와 관계없이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실패한 삶일지 모르지만 영원한 성공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 누가 베드로를 바울을, 모세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영원한 인생의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정한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목적으로 삼고 달려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목표를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하루를 살아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성공한 인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를 다른 사람이 정해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생의 목표를 목적으로 삼고 살 때,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결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 지내온 과정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성공여부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정한 목표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향하 달려가는 삶은 성공한 삶입니다.

 

물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때 장애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표대로 살아갈 때 돈을 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성공하지 못할 지도 모르고, 내 시간을 내놓을지도 모르고,

내 건강을 돌보지 못할지도 모르고, 내가 가족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목표대로 살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옆에서 지켜보면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목표가 있어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현실적인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건강도 허락하지 않고, 가족하고 지내는 시간도 없어지고,

육신이 지쳐 병들고, 취미생활 못할 것 같은 현실적 제약 때문에 주저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가둔 감옥의 벽을 넘어서 목표를 향해 날아가듯이

주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제약과 장벽을, 믿음으로 넘어서야 달려갈 수 있습니다.

내가 정한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상급, 베드로에게 주셨던 상급,

사도 바울에게 주셨던 상급을 여러분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한 면류관을 받을 일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귀한 인생의 삶 주님께서 상을 주시기에 아깝지 않은 귀한,

성공하는 인생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신 목적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헨리 마틴 선교사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선교사로 헨리 마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인도에서의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 많은 섬김의 삶을 산 뒤

그는 페르시아(오늘의 이란)로 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신약 성경과 시편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인도에 머물러 있으면 더위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페르시아는 인도보다 더 덥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페르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페르시아어를 배운 다음

9개월 만에 신약 성경 전체와 시편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 그는 페르시아 국왕의 재가를 받기 전에는

성경을 인쇄하거나 배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812년, 그는 인도에서 테헤란까지 960Km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왕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영국 대사를 찾기 위해 다시 640Km 를 여행했습니다.

대사는 그에게 소개장을 주며 다시 그를 640Km 떨어진 테헤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마틴은 이 긴 여정 내내 노새를 타고 다녔습니다.

밤에는 길을 떠나고 낮에는 겨우 삼베 한 조각으로

찌는 듯한 사막의 태양 빛을 피하며 휴식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테헤란으로 다시 돌아와 왕을 알현했고

페르시아에서 성경을 인쇄하고 배포할 수 있도록 왕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과수원에 앉아 감미로운 위로와 평안을 누리며 나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고독 속에서 나의 벗, 나의 친구, 나의 위로자이신 그분을 생각했다.”

 

제가 많이 사랑하는 John MacArthur (존 맥아더) 목사님의 책 『Hard to Believe』

(『값비싼 기독교』)에서 가져 왔습니다. 이 책의 일독을 강하게 권합니다.

 

헨리 마틴은 분명히 편안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헨리 마틴의 영혼은 진정한 제자도의 핵심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목표 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 가운데

편안한 삶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실 때는

분명히 우리를 편안한 삶으로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데, 고난 주간만이 아니라,

평생에 이 십자가 제자의 길을 기쁨으로 살아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0:38~39

 

♣분명한 권위의식이 필요합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막11:28)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시자 이를 본 대제사장들이 물었던 질문입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권위의 근거에 대하여 가장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임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갈1:15절, 하나님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떤 인간적인 권위나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도전이 있었습니다.

 

실제 그럴 것이, 바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임명한 열두 제자에 들지 못했으며,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대사도로부터 임명되거나 추천을 받은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3년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고,

이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임명되었습니다.

 

본인에게는 대단한 사건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객관성이 없는 한낱 신비 체험에 불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11)

 

성경적 권위는 학벌이나 외모로부터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며, 실제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이런 권위의식은 누구에게든 필요합니다.

거드름 피우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 확신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 일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라는 사명감입니다.

열정은 이처럼 그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그 권위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카리스마라는 능력 또한 하늘로부터, 권위와 함께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