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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존감의 치유

LNCK 2024. 12. 16. 17:5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내적 치유

낮은 자존감의 치유 | 삼상 18:6-12 | 24.12.6

낮은 자존감의 치유        삼상 18:6-12          2024.12.06.  

요즘 '마케팅'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쓰입니다. 
물건 상품 이런 것들을 많이 잘 만들어도 마케팅을 잘 해야 되죠. 그죠? 
'마케팅 시대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마케팅이 굉장히 중요해요. 

아무리 상품이 좋아도, 마케팅을 잘 해야 사람들이 그 물건을 사는 거거든요. 
광고도 마케팅의 일부예요. 그래서 사라는 거죠. 
이 상품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물건만 이렇게 마케팅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를 마케팅하는 시대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뭐가 나오느냐면, 자기 실현, 자아 실현, 자기 계발... 이런 게 나오는 거예요. 
서점에 가면 책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특히 <자기 계발 서적>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기도 하고요. 

그 자기 계발을 위해서 하는 게 냐면.. 스펙을 쌓는 거죠. 
또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고, 
그래서 어디에나 '당신의 잠재력을 계발 해라' 
'당신 안에 어마어마한 게 있다. 그걸 개발 해라' 그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이력서를 쓸 때 별 걸 다 적죠. 
자기에 관련된 모든 거를 다 써서 자기를 알리는 거잖아요. 자기를 어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기 이미지를 메이킹 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외모부터, 모든 어떤 경력들을, 이미지 메이킹을 해서 
뭔가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고, 자기를 마케팅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사라'는 거죠.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 현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요즘 많이  다루어 지는 주제 중에 하나가 
<자존감>이라는 단어입니다. 자존감! 

자존감에 대한 책이나 강의들이 굉장히 많이 쏟아지고 있어요. 
이것은  '에고 Ego, 자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이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옛날에는  국가, 민족, 나라, 인류, 이런 개념으로 봤다면 
오늘은 전부 다 트렌드가 냐면,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졌어요. 

그래서 '자아'라고 하는 부분에 굉장히 강조점이 생긴 거예요. 
이게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이라고 얘기를 해요. '자아 중심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존감이 굉장히 중요해진 거예요. 나라고 하는 존재감! 
그런 것들이 사회 현상화 되어 있습니다. 

'자존감'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 대한 평가'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 하느냐,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를 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병도 잘 안 걸린다 라고 그래요. 

자존감이 낮으면 왜 병에 잘 걸리느냐 하면, 스트레스를 잘 받아요. 
관계 속에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남이 스트레스를 안 줘도, 자기가 계속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 자존감이 낮으면, 모든 것에 자기가 스스로 이렇게 위축이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 한다'는 말을 종종 해요. 
이 자존감의 문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굉장히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하면.. 열등감에 시달려요. 열등감! 
열등감은 참 무서운 거죠. 여기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아요. 

열등감에 빠져 있으면, 인간 관계가 어려워지고, 사회 생활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자, 열등감이 뭡니까? 
자기 자신에게 점수를 낮게 주는 거예요. 아주 가혹한 점수를 줍니다. 

심하면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증오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굉장히 평가절하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나를 무시하면 길이 없죠. 스스로 불행의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낮은 자존감'이란, 자기를 낮추어 보는 일이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에 빠진 사람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의외의 결과가 나왔어요. 

그 결과가 뭐냐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낮은 평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서 과대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 거예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부풀려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를 낮게 보는 게 아니고, 자기를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기에 대한 과대 평가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한 어떤 (낮은) 평가를 하면, 그게 마음에 안 들게 되겠죠. 
상처를 받는 거죠.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알고 살아가는데, 
누군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면, 잠을 못 자잖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충분히 해주지 않으면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바른 평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어때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을 잘 알고 계세요? 

여러분! 자기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잘 몰라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는, 자기에 대해 과대한 평가를 하고 있고, 
오해를 하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를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낮게 평가하는 게 아니라, 높게 평가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해요.           

여기에서 우리는 뭘 발견하느냐면, 인간의 죄성을 발견합니다. 
죄인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교만입니다. 

교만은 인간의 원초적인 죄죠. 자기를 높이는 거죠.
자기를 과대하게 확대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교만은, 아담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죄 예요. 
자기를 부풀리고, 자기를 확대하는 거예요. 
자기의 현재 모습 보다 훨씬 더 크게, 자기를 부각시키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 교만과 허영은, 인간의 죄성 중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교만과 허영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드러납니다. 

본래 나보다 나를 더 크게 확대 시키는 거죠. 
가장 많이 하는 우리의 실수는 '자기 착각'입니다. 

그래서 이 낮은 자존감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 가면 
우리의 죄성에서 시작이 돼요.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높이고자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일곱 가지 큰 죄'가 있는데요. 거기에 교만이 있어요. 
이 교만은 일곱 가지 큰 죄 중에서도 뿌리 부분에 있습니다. 
그 모든 죄의 뿌리, 즉 교만에서부터 모든 죄가 나온다는 거예요. 

근데 그게 뭐냐?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 그러면, 이 교만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의 실상을 보지 못해요. 
자기 착각에 빠지고, 자기를 과장하고, 자기 업적을 자꾸 포장하고 부풀리고... 

여러분 시중의 서적을 보면, 다 그런 거예요. 
'너의 본래 모습 보다 훨씬 더 멋있게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낮게 평가하면, 불만이 생기는 거예요. 우울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존재감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 목사님들이 자기 설교에 대해서 후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다고 그래요. 

'난 설교를 잘 하고 있어!' 이렇게들 생각 한다는 거죠.
은근히 평소에 자신은 설교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성도들이 자기 설교에 대한 칭찬을 기대한다고 해요. 
'오늘 목사님 설교에 너무 은혜 받았습니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건데 말이죠.
그럼 속으로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다는 거죠. 

그리고 누군가 좋은 평가를 해주지 않으면 갑자기 우울해 지는 거죠. 
나는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잘한다 라고 하는 그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동의해 주는 사람들만을 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대하는 만큼 반응이 오지 않으면, 실망이 크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그때 찾아오는 게 '낮은 자존감'입니다. 

그래서 낮은 자존감에 시달릴수록, 사람들의 말에 민감해 집니다. 
좋은 평가에 목말라 해지는 거죠. 

그래서 높은 지위를 갖추고 부족함이 없는데도,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게 돼요. 

◑낮은 자존감에 시달린 사울 왕

 

자 그래서 오늘은 구약의 대표적인 한 인물을 다루려고 그래요. 사울 왕입니다. 
여러분 사울 왕은 처음에 전쟁에 나가면 연승을 거둔 사람입니다. 
아주 우월 의식이 강한 사람이에요. 왕이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잖아요. 
키도 크고요. 잘 생기고요. 백성들이 그를 막 칭송을 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요. 다윗과 비교에 의해서요. 
삼상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 왕은 이 소리에 극도로 예민해져요. 급우울해져요.
여러분, 사실 왕인 사울과 다윗은 비교가 안 됩니다. 비교 자체가 안 되잖아요. 

여러분, 근데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줘요. 
아주 자존감이 확 떨어지는 겁니다. 

한 순간에 비교에 의해서, 여인들의 노래 소리 한 방에 
사울은 굉장히 예민해져 버린 거죠. 
백성들의 평가에 사울의 신경이 곤두서 버린 거죠. 

사울은 왕입니다. 오늘날 대통령하고 비교가 안 됩니다. 왕정 시대의 왕입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부족함이 없는데 
그는 지금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거예요. 자기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열등감은 사회적 지위와, 성공의 유무와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사회적인 지위로는, 탑에 있고, 성공하고, 모든 걸 가지고 있어도 
이 자존감이 무너지면, 왕이라도 견딜 수 없는 거예요. 
너무도 가련한 영혼이 되어버린 거죠.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인데, 실상은 불행한 거예요. 
남들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예요. 
자기가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낮은 자존감입니다. 

삼상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사울은 심히 노했다고 했어요. 
여러분,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분노가 잦아요.

여러분,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 '너 돌대가리지?' 그러면 전혀 화를 안 냅니다. 
근데 진짜 머리가 나쁜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게 되죠.

여러분! 사울 왕은 감정이 컨트롤이 지금 안 되는 거예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거죠. 
여러분, 분노는 누구나 합니다. 분노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근데 문제는, 이게 조절이 안 되는 거예요. 갑자기 자존심이 팍 상하는 거에요. 
여러분, 감정의 통제력이 참 중요합니다. 이게 쉽지 않은 문제예요. 

근데 이게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지금 이 사울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자, 보십시오.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해요.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18:9
무엇을 주목하고 있습니까? 왜 주목하고 있죠? 

이것은 사울의 병적인 태도입니다. 다윗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일을 못 해요. 일상이 멈춰 버렸어요. 

여러분, 누가 나만 계속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와~ 무서운 일이죠. 
여러분, '나는 홀로 있을 때 무엇을 주목하고 있는가?' 하는 거죠. 

다윗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묵상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그의 내면이 풍성해 지죠. 

근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는 거예요. 다윗에게 사로 잡혀 있어요. 
시기와 증오와 살의로 가득해서, 다윗을 주목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왕이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국사를 돌봐야 되는데 
그러나 왕은 오직 다윗만 주목하는 거예요. 

다윗이라는 인물에게 시선을 다 빼앗겨 버려요. 
자기 모든 에너지가 다윗에게로 쏠리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거예요. 
사울은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 낮은 자존감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죠? 

18: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이게 점점 발전적이죠. 그렇죠? 악화되고 있는 모습이에요. 
악령이 사울에게 임해 버려요. 급기야 사울은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평일에 수금을 다윗이 타고 있는데, 그것도 사울을 위해서 타고 있는데, 
자기 손에 창이 들려 있는 거예요. 증오심의 불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열등감에 사로 잡히는 사람들, 이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 감정이 나중에 어디로 갈지,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라요. 

여러분, 자기가 자기를 품어 주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품어 줄 수가 없어요. 
왕이란 지위에 앉아 있는데, 자존감이 흔들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다윗을 무시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어림도 없습니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가 안 돼요. 
마음이 고장 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누가 그냥 툭 던진 말인데, 
그게 자기 가슴에 꽉 꽂히고, 분노가 일어나고, 살의가 가득해지고, 폭력을 드러내는 거예요. 

왜요? 자기의 전 존재가 흔들리기 때문에 그래요. 
낮은 자존감, Low self-esteem 이라고 그러죠. 

여러분 이 세상에는 그렇죠. 
내가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더 높은 곳에 누군가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어 낸, 내가 만들어서 내가 스스로 쌓은 그 자존감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어요. 

여러분 세상에 나가면, 얼마나 경쟁이 심합니까? 공부를 해도 그렇잖아요. 
아무리 내가 공부를 잘 해도, 따라 잡지 못할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을 보면, 차원이 좀 달라요. 
그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질려요. 그들은 공부를 즐겨요. 
할 게 공부밖에 없다고 그래요.  

심심하면 미분 적분 막 풀면서 놀고.. '세상에 쉬운 게 공부다' 이러면서 놀아요. 
노력도 하지만,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시험을 치기 전에 
이미 무슨 시험 문제가 나올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조금 안 되는 친구들은, 시험지를 받으면, 너무 낯설어요.
'이런 문제가 나올 줄 몰랐다'는 거죠. 그런 일이 항상 반복돼요.

근데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성적으로 평가하는 세상에서, 노력해도 안 되는 한계를 느끼는 사람은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세상의 구조가! 

성적 중심의 세상에서는, 경쟁에서 내 몰리면, 
낮은 자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문화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이 자존감이 굉장히 중요한 이슈가 되는 거죠. 

여러분, 세상은 성적 중심적으로 돌아갑니다. 성적 중심의 세상은 어떤 것입니까? 
경쟁에서 이겨낸 사람들에게만 와~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진 사람은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1등과 2등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집 안에서도 마찬가지죠. 여러분, 일정한 기준에 들어가지 않으면 
집에서 밥은 주지만, 눈치 밥을 먹어야 됩니다.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그렇다는 거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시선이 싸늘한 거죠. 

'너 누구를 닮았니?' 
아빠는 엄마 닮았다고 그러고, 엄마는 아빠 닮았다 하고... 
반대로 좋은 성적을 얻은 자녀는 '너는 내 닮았다'고 그러고요. 

부모들 까지도 그러면, 아이들이 갈 곳이 없는 거죠. 
이런 세상은 정신 질환자를 만들어내요. 

학부모들끼리도 경쟁 하잖아요. 아이들을 두고 어른들의 자존심의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아이들의 미래도 있지만, 부모의 자존심이 걸려 있거든요. 
와 대단하더라고요. 그런 자존심!

그 부모가 세운 기준에, 그리고 그 사회가 세운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자녀가 사랑과 인정을 받기 어려운 거죠. 그 정도로 냉혹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자녀가 원수가 되는 거예요. 
창피스럽다는 거죠. 그 기준은 어디에 있어요? 성적에 있는 거예요. 

오직 일등만 인정하는 사회 구조 속에, 우리 아이들은 상처 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 거죠.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근데 오늘 날 우리 세상은, 아이들을, 부모들이 숨이 막히도록 몰아가는 거거든요. 
그러면 아이들은 어리기 때문에, 부모가 뭐라 그럴 때 말은 안 하지만,
자꾸 분노심이 있는 거예요. 화가 나 있는 거예요. 
막 학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학원으로 다니면... 화가 나 있는 거예요. 

호주에 제가 있을 때는, 호주는 고3까지 거의 놀려요. 
아주 열심히 노니까 체력들이 다 좋아요. 
이게 뭐냐하면, 대학 들어가서 공부를 해 낼 체력을 준비하는 게, 고3까지 예요. 
진짜 공부는 '대학 가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가방에 들어 있는 게 없어요. 
도시락 통만 큰 게 있고... 그리고 물어보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우리 한국 학생들은 나이팅게일, 슈바이처는 일반 상식으로 아는데, 
그 애들은 통 몰라요. 

그러니까 공부는 누가 하느냐? 대학 갈 사람만 하는 거예요. 
다 대학에 가지 않아요. 대학 안 갈 사람은 9학년 까지만 공부해요. 

모두 대학 가야 되느냐? 그러지 않아요. 
대학에 안 가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가? 그러지 않아요. 
대학에 안 가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사회죠. (좋은 점이 많다고 봐요)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 그 기준 안으로 몰아가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람을 무시하고... 
그러니까 이런 사회는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고, 
분노가 있게 되고, 화가 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상처투성이죠. 폭탄이 되는 거예요. 

지금 사울을 보십시오.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 이 말에 미쳐버려요. 
사울은 이스라엘의 부동의 1인자입니다. 근데 갑자기 2인자 취급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일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에요. 
직장에서 일이 힘든 게 아닙니다. '누가 더 인정을 받을 것인가? 
누가 더 빨리 진급할 건가? 누가 더 스펙이 좋은가?' 
아무리 내가 스펙을 쌓아도, 또 더 잘 난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지 않으면, 삶이 불행해 지거든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건강한 관점을 가져야 되는데, 
누군가 자기를 치켜세워주고, 인정해줘야 자존감이 높아진다면...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유치원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유치원에 가면 계속 칭찬만 해줍니다. 
'참 잘했어요!' 하고 도장을 막 찍어 주거든요.  

정말 잘한 게 아니라도,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참 잘했어요!' 
넘어져서 안 울어도 '참 잘했어요!' 
화장실 갔다 와도 '참 잘했어요!'
밥 안 흘리고 잘 먹어서 '참 잘했어요!'
그림도 막 엉망진창으로 그려도 '참 잘했어요!' 

아이들에게는 그게 필요해요. 아직 자기 존재감이 형성이 안 된 상태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어른이 되어도 칭찬과 인정에 목을 맨다면... 자존감의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게 낮을수록, 유치원 쪽으로 가야, 자기가 편안해지는 거예요. 

실제로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이 많아요. 
이게 해결이 안 된 거잖아요. 

근데 이 낮은 자존감을, 스스로의 힘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가요? 
사람들은 다양한 노력들을 하죠. 

세상의 방식은, 자기계발 류의 책들을 통해서 방법들을 배웁니다. 
근데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공부의 세계로 가면, 1등은 한 명 밖에 없습니다. 
콩쿠르도 1등 밖에 없습니다. 

2등이 1등 된다는 거는 어려운 겁니다. 1등이 2등에게 결코 자기 자리를 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2등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해도 열등감에 빠지게 만드는 게, 이 세상의 구조예요. 
세상의 방식이고, 세상의 문화고, 세상의 패턴이에요. 

그래서 2등 하는 학생이, 1등하는 친구를 미워하고, 
2등하고 있는 자신을 경멸하는 거예요.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여러분들, 서울대생들 중에 열등감이 많대요. 왜요? 
거기는 전국에서 다 톱하고 일등만 하는 학생들이 모였는데 
거기에 가 보니까, 너무 똑똑한 친구들이 많으니까, 자기는 명함도 못 내요.
그래서 열등감에 빠져요. 

여러분, 미스코리아들이 자신의 얼굴에 열등감이 많다고 그래요. 안 믿어 지죠? 
아마 우리처럼 대충 생기면, 얼굴에 별로 그렇게 신경 안 쓰고 살아요.  
아침에 부었으면 부은 거네...  이러고 살죠. 씩씩하게 지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평가하라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쉽게 얘기하면 자아 도취에 빠지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이 다 다르다는 거죠. 
주신 은사도 다르고요. 

중요한 것은, 자기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하라는 거예요. 
분수에 넘치는 생각으로 자기를 평가하면, (교만의)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위 말씀은 '자기에 대해서 과대 평가도 하지 말고, 과소 평가 해서도 안 되고 
자기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은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평가 기준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이제는, 세상적인 기준이나 세상적인 방식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아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서, 이제 평가의 모든 기준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거예요.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다'... 맞는 말입니다. 
또 '자기는 교회를 핍박한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도무지 사도라 칭함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누군가 '바울 사도님!' 이렇게 부르면, 막 부끄러워 지는 거예요.
자기가 실제로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니까,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자기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죠. 
바울의 본래 모습이 그랬다는 거예요. 

바울서신서를 보면, 바울이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의 행적으로 인해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그런 흔적들이 많아요. 

그래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이 말은, 엄청난 표현이에요. 
그냥 죄인도 아니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 표현만 해도 어마어마한 건데... 
우리 중에 누가 이렇게 솔직히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 하겠어요? 
근데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면, 후끈 얼굴이 달아오른 거죠. 
가끔 악몽으로 시달렸던 겁니다. 

근데 예수를 만나고 난 다음에, 삶의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니까 바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사도가 돼요?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의 존재 됨을 무엇으로 설명하느냐는 거죠. 
우리가 나의 존재 됨을 무엇으로 설명할 거냐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우리의 주제예요. 

▲어떤 사람은 자기의 존재 됨을, 직업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 직업이나 직급이 계속 됩니까? 언젠가는 거기서 내려 와야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소유로 자신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나의 나됨은 나의 은행 잔고야!' 
근데 여러분 돈이 많이 있을 때는 자존감이 올라가지만, 
돈이 떨어지면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자기의 존재가 어떤 조건에 의존 돼 있는 거예요. 이것은 불안한 것입니다. 

근데 바울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의 은혜에 둔다는 거예요. 
이 은혜는 조건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비교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존재가 새로워진 것이죠. 
이전에 율법을 좇았을 때는, 그도 경쟁심을 가지고 그랬던 거죠.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가두고, 죽이고, 살기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갔던 사울은,
그 바리새파 속에서도 인정받는 어떤 위치에 올라서고자 하는 경쟁심, 
그 종교 안에도 경쟁심이 있었던 거거든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위에 올라 서려고 하는 그런 노력, 
남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 흔적들이... 살기등등함 이에요. 
또한 분노, 살의에 가득한 모습들...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기의 그런 업적을 통하여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살벌한 거죠. 

여러분, 이 세상 속에 들어가 보세요. 
자기의 존재를 강화하기 위해서, 자아를 성취하고 실현해 내기 위해서 
피비린내가 나는 거잖아요. 

근데 바울은 복음안에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됐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나의 어떤 상태나 조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재평가된 나 자신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는, 한 사람의 존재를 새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꺼이 자신에 대해서 '나는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 
죄인 중의 괴수였다.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다'

여러분, 이것은  더 이상 자기를 경멸하는 말이 아니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강조하는 거예요. 

아무리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 해도,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살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누가 나에게 대해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것과 상관 없고,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내 존재감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가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바울은, 이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겼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발견되고 
그 복음이,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그 자존감이 회복될 때, 우리 안에 내적인 안정감이 생기는 거예요. 
사람들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의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거기에 흔들리지 않아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인정!
그리스도 안에서 평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 받아주신다는 거죠.
'너는 내 아들이라!' 이런 새로운 정체성, 존재감! 

마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하나님의 인정!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인물입니댜.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여러분, 백성들이 모두가 '다윗은 만만이요' 노래를 불러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 한 분이 나를 향해 뭐라고 하시느냐는 거죠. 

천천 만만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 서서 칭찬과 인정과 박수를 보내어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불안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그 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들을 통하여 우리게 부어주신 그 사랑에 흠뻑 젖는 거예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충분히 사랑하셨어요. 그 사랑으로 충분해요. 

그 십자가는, 우리의 존재감을 한껏 끌어 올려줘요. 무엇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여러분 가끔 살다 보면, 자존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뭐냐 하면, 
세상적인 방식으로 인정을, 사랑을, 존경을 더 끌어 모으려고 하면
그러면 병들어요. 해결이 안 됩니다. 거기서 빠져나가야 돼요. 

여러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사랑! 
여러분, 물 속에 빠졌는데, 내 몸이 물에 안 젖는 게 말이 돼요. 안 돼요!
여러분, 하나님 사랑을 빼고,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고 
신자가 된다는 게 가능해요? No! 

우리가 찬양 많이 하잖아요. '주 사랑이 나를 숨 쉬게 해!' 
너무 멋있는 대목이에요. 그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숨도 못 쉬어요.

여러분,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마세요. 
그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고 누리는 거,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안 돼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누리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게 말씀하시는 거, 
'너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라'는 거, 그 관계는 끊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점이에요. 
'난 너를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너를 바라보고 너를 평가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아야 돼요.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가?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올라가는 일에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어요. 

왕의 자리에 가도, 낮은 자존감이나 열등감에 시달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뭘까요? 
우리는 더 올라가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가져야 될 초점은, 이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에요. 

 

섬김에 여러분의 초점을 맞춰 보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경쟁의 상대로 보는 게 아니라, 섬김의 상대로 보는 거예요. 

섬김의 관점으로 보는 순간부터, 더 이상 올라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늘 누구와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올라가기 위해 경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이 그래요. 
'너는 부하직원이 몇 명이냐?' 
'누가 너의 경쟁 상대냐?' 
'너는 나보다 더 잘 났느냐? 너는 무슨 직함이냐?' 따지잖아요.

그러나 더 이상 여러분, 그런 것이 우리의 주제가 되지 않아요. 
사회적 신분, 지위, 획득했던 어떤 성취,
인간들이 자랑하는 어떤 그런 포지션들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비교 경쟁하고, 우위에 빠지고, 열등감에 빠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주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신분이,
이제 더 이상 승진이 필요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아들과 자녀들로 인정받는...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우리는 경쟁의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섬길까?' 
'내가 다스리고 부리는 사람이 몇 명인가?'가 아니라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이 몇 사람인가?' 이렇게 섬기는 자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섬김의 대상이 늘어나야 돼요. 
이게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거죠. 

마20:27~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노력을 통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우위에 올라가고 
그 경쟁을 치러내서 얻어낸 대가를 가지고 
인생을 향유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목표예요. 그걸 성공이라고 말해요. 

근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목표는,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를 통하여 
다른 사람과 경쟁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소명으로 알고, 

사람들을 경쟁의 상대가 아니고 섬김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나누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비교하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여러분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사랑하고 싶어도 안 되죠. 

여러분, 이 세상의 구조에 어떻게 사랑이 가능해요? 
친구도 경쟁자가 되는데, 어떻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요? 

여러분 1등과 2등은, 페이퍼를 서로 나누어 갖지 않습니다. 살벌해지는 거예요. 
잔인해지는 거예요. 그 2등은 끊임없이 열등감에 빠져야 하고, 
1등은 끊임없이 우월감에, 그러면서도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삶의 구조가 아닌, 

이 세상의 문화 속에서 그런 방식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는 성공해서 군림하는 자가 되고, 
더 많은 걸 향유하는 자로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니에요. 

만약에 그런 위치로 간다면, 언젠간 또 다른 경쟁자에 의해서 내가 끌어내려지고, 
나는 또 다른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문화 안에서, 피흘리는 싸움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도, 복음이 없으면 
끊임없이 자녀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너 공부를 그렇게 못 하니' 하지 마시고,
'너는 공부를 못 해도 난 너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
남편이 돈을 좀 못 벌어와도 '당신의 존재를 사랑해요. 당신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예요'
그래서 가정 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환대하고 존중히 여깁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가 너무도 귀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버리실 만큼, 귀한 존재예요. 
'너무도 귀중한 나의 아들과 딸들이라' ... 거기엔 무슨 조건이 없어요. 

여러분, 이 세상이 잔인하게 몰아가는 그 평가 기준에, 나를 스스로 몰아 넣어서 
내가 나를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지 말고, 

거기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그 관점으로, 내가 나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시선이란 말이죠. 
그 사랑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재확인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거죠. 어떻게 나를 무시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존중히 여기셨는데 
어떻게 여러분 내가 나를 무시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십자가로 나를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바라봐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고, 너무도 존귀하게 여기시고, 
너무도 놀라운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나는 너를 받아준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스바냐3:17절 '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놀라운 거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의 그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되는 거예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한 마디가 예수님의 그 거친 공생애을 내내 살아내게 만드신 저력이거든요. 

이 세상의 잔인한 경쟁의 구조, 때로는 비교 우위에 의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이 구조 속에서 
스스로가 이렇게 자꾸 다운이 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십자가 앞으로 나가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롬8장 같은 걸 암송을 하셔야 돼요. 그리고 찬송을 불러서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너는 나의 신부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
그걸 재다짐, 재확신 하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가서가 그 얘기를 하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세상의 기준에 여러분들을 들이대지 마십시오. 
세상의 기준으로 여러분들이 자신을 보시면서 자학 하지 마세요.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들을 다시 바라 보시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되었음을 믿고, 여러분들을 스스로 환대하세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뭘까요? 
여러분! 내 몸을 사랑해 봤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가 있어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어느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요? 
못 하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때, 
거기에 푹 빠질 때...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그 가치를 깨달을 때, 
여러분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어요. 

내가 나를 환대하고, 하나님이 나를 환대하신 것처럼, 내가 나를 환대하고 
내가 나를 환대하는 사람은, 또 다른 이웃 사람을 환대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어린아이 하나라도, 우리의 주변의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을 어떤 경제적 수준이나, 그 사람의 학적 수준이나,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어떤 외적인 모습으로 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마시고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환대하고, 사랑하는... 
그때 우리 안의 아름다운 삶의 회복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