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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렘30:4-17
렘30장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회복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처해 있는 언약백성들이 미래에 특정한 시기가 되면
바벨론 포로에서 본토로 돌아올 것이라는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을 담은
희망적인 메시지입니다.
※맨 아래 단락 <절별 해석>을 먼저 읽고서, 본문의 내용과 문맥을 파악한 후에
‘서론’으로부터 시작되는 설교문을 읽으시면 더 이해가 잘 됩니다.
◑서론
예레미야서를 설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예레미야서 설교를 위해 본문을 6시간 정도 묵상하면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많은 묵상을 요구하고 때로는 묵상을 해도
제 마음에 만족치 않은 설교 메시지가 구성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서 52장 중 벌써 절반을 넘게 설교했습니다.
저는 매 장(chapter)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믿고
말씀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30장은 별것 아닌 메시지 같지만
여기에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두 군데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30:21절 입니다.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그 왕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모든 축복이 회복될 것인데
그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메시지입니다. *아래 절별해석 참조 요
또 하나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30:9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이처럼 예레미야 30장은 우리가 그냥 지나가기 쉬운 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두 번이나 숨겨놓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하던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을 칼로 잘라 불 속에 던져버린 여호야김 같은 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30:2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말로만 하면 나중에 언제 그랬냐며 바꿀 수도 있으나, 책에 기록하면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이 과연 진리로다.
하나님 말씀은 과연 실현됐도다.”하며 깨달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글로 확실하게 남기라는 것입니다.
52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서 1장~29장까지는 주로 “심판과 경고와 권면”입니다.
죄로 인해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30장부터 논조가 조금 바뀝니다.
30장~33장까지 네 개의 장은, 구원과 회복과 위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0장~33장까지를 “위로의 책(the book of comfort)”이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30장 전반(1~17절)에는 죄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며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
명백한 네 가지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1.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단은 “고칠 수 없다(Incurable)” :6~7절, 12~15절
죄를 고칠 수 있는 약도 의사도 변호사도 없다는 말입니다.
죄는 고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단서인 것입니다.
본문 12~15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하는 그 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 것으로 너를 징계함이어늘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단서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길이 1,100Km입니다.
10Km만 걸어가도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픈 것인데
1,100Km를 포로의 몸이 되어 끌려갔고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서도 고통을 당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느냐?
그것은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하여 그랬다’는 것입니다.
죄가 분량으로 치면 큰 것이고, 숫자로 치면 많다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것을 ‘멍에’라고 표현했습니다. :8
‘나무 멍에를 꺾어 버리니까 철 멍에를 씌여 더 괴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8:13
유다백성들의 죄는 그 결과가 고칠 수 없는 상처요, 나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멍에를 꺾어버리시겠다, 즉 회복시켜 주겠다고 하십니다. 30장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 병원에 가 온갖 최신기계로 진찰을 다 받았는데,
의사가 불러다 말합니다.
“내가 보니 당신 병은 나을 수 없는 병이요. 고칠 수 없는 병이요.
당신을 고칠 수 있는 약은 세상에 없소. 그리고 당신을 고칠 수 있는 의사도 없소.
그러므로 돌아가서 장례 준비나 하시오.” 이런다면 얼마나 절망감이 크겠습니까?
"고칠 수 없다(Incurable). 너는 치료 불가능한 존재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인류를 대표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표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단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죄로 말미암아 치료할 수 없는 상처가 너희에게 임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반항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삶은 이처럼 두 가지로 끝납니다.
하나는 고통(pain)이요 또 하나는 비참함(misery)입니다.
▲본문 6절에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남자마다 해산하는 여인 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를 짚고
그 얼굴 빛이 창백하여 보임은 어찜이뇨”
제 처도 애를 낳고 난 다음날 허리를 짚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피를 많이 흘려 얼굴빛이 창백했습니다.
이처럼 여자가 애를 낳고 나서 허리를 짚고 얼굴빛이 창백해 나오면
‘애 낳느라고 고생했다’고 하지만,
6절에는 남자들이 다 허리를 짚고 나오면서 “아이고 허리야.”하면서
얼굴빛이 창백하여 나온다면, 그것은 애를 낳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인생에 고통이 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항하면 이처럼 우리의 삶에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본문 7절에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멀리 하란에 도망가서 외삼촌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환란 the trouble of Jacob’이라는 것은
야곱이 겪은 고통과 고난은 죄를 짓고 부모를 떠나 타향에서 20년 동안이나
종살이하고 노예 생활하는 비참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보시는 관점과 진단은 명확합니다.
“너의 죄의 큼과 너의 죄악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징계를 내리겠고
그 징계의 상처는 너무 커서 네 스스로 고칠 수 없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약도 없느니라.”
죄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는 네 죄를 벗어나리라 해도 되지 않습니다.
◑2. 유다백성들이 “사랑하던 것들”은 죄의 불치병을 치료하는데 전혀 무기력했습니다. :14절
본문 14절에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일 년 뒤에 애인을 만나 ‘잘 지냈냐?’고 하니까
그대가 누구냐 하면서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혀 진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그 사랑하던 자에게 잊혀짐을 당하고 또한 버림을 받았습니다.
▲1. ‘유다 백성들이 사랑하던 자’란 영적인 면으로는 우상을 말합니다.
원래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자기 남편을 싫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법으로 사랑하는 불륜의 애인들을 쫓아갔습니다.
바알신, 아세라신, 몰렉신, 금송아지신, 태양신, 일월성신의신, 이런 우상들은 쫓아갔습니다...
우상들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자들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우상을 사랑했지만 우상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에
아무것도 해주질 못했습니다. 단 한사람도 건져주지 못했습니다.
▲2. 또 ‘유다백성들이 사랑하던 자’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애굽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에서 우리를 건져줄 자는 애굽밖에 없다.”라며 애굽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애굽은 이미 바벨론에 멸망당했고 바벨론에 눌려서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런 불륜의 애인들은 유다가 불치병에 걸리자
모두 유다를 잊어버립니다. 유다를 찾아와 도와주질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잔뜩 받아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돈이 많으니 술집 여기저기서 환영했으나 돈이 떨어지자
불륜의 애인들은 탕자를 차버립니다.
그래서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를 주서 먹고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한 가지 잘 한 것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를 배반하고 유산을 받아서 나왔어도
우리 아버지는 내가 돌아가면 날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멀리서 탕자가 거지꼴을 하고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그 아들의 입에 입을 맞추고 새 신을 신기며 손에 반지를 끼어줬습니다.
너는 내 자식이라며 잔치를 열어 주었습니다.
우상을 따르고 죄를 짓게 되면 결국 오는 것은 고통과 비참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돌아갈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삶에 고통이 오고 비참이 오면 뭔가 다른 대용물로 고쳐보려고 합니다.
쾌락을 추구하고 돈을 벌며 성공을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도 안되면 마약 같은 것을 먹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대용물은 잠시 증세는 완화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스스로도 고칠 수 없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 신뢰하던 것들, 의존하던 우상들은 다 어디 갔느냐?
네가 그렇게 추구했던 돈, 명예, 권력은 어디 갔느냐?
너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기에 능하더냐?” 물으시면
우리는 “아니올시다. 나의 구원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오직 하나님만이 치료자요, 구원자이십니다. (11절, 17절)
그런데 탕자에게는 그래도 돌아갈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죄라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치료자요 구원자가 되십니다.
인간 스스로 불가능하고 세상의 어떤 것도 불가능해도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시오
불치병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일만 명이 강대국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데
거기서 빠져나와 구원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도 내가 하면 가능하게 되느니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찌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17절에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저 사람은 너무 강퍅해서 정말 예수 안 믿을 거야’ 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러나 누가복음 18:27절에서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히틀러 같은 죄인도 구원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가 회개하기만 하면!
사람도 약도 사람의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죄의 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불치병을 능히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0:10절에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포로의 땅에서 구원하리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해도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8~9절
본문 8절로 9절이 그 답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하나님은 다윗 왕을 통하여 죄의 병,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백성을 건지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주전 1010년에 즉위했습니다.
다윗의 전왕인 사울은 그보다 40년 전인 주전 1050년에 즉위했고
다윗의 다음왕인 솔로몬 왕은 그보다 40년 후인 주전 970년에 즉위했습니다.
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즉위 연대는 그로부터 40년 후인 주전 930년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예언하고 있는 시대는 주전 600년인데
어떻게 400년 전에 돌아가신 다윗 왕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이 왕이 누구시냐?
마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이라고 10번이나 증거합니다.
마1: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요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유다백성을 죄라고 하는 불치병에서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주전 538년에 고레스 칙령으로 유다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도
유다백성들에게는 다윗 왕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구원’의 예표
그들을 스룹바벨이라는 총독이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어도 그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0:9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다윗을 일으키리라.
다윗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구원하고 너희는 나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와 영원한 멸망과 지옥으로부터의 구원과 치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이 매 페이지마다 증거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죄와 악한 사단의 멍에를 벗고 이제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참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모세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소망이었습니다.
결론
사람은 오래 살아도 고통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는 고통과 비참함과 슬픔이 많고 결국 사망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죄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통과 사망이 다 찾아오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요 인간 전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단수의 sin이요 또 하나는 복수의 sins입니다.
단수의 sin은 원죄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도
내가 내 능력으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
죄의 근본입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마귀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의 근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원죄라고 합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서 비키십시오. 내가 내 힘으로 삽니다.
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습니까?”이것이 죄의 근본이요 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 살 수 없는 영원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 없이도 내가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살다보면 결국은 자범죄(sins)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온갖 자범죄가 다 쌓여 죄악이 수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죄와 자범죄는 결국 우리의 삶에 고통과 비참함을 가져다줍니다.
고통과 비참함을 이 세상의 일시적인 것으로 치료해 보고자 해도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근본치료는 불가능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치료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가능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와 사망을 치료하시고
예수 믿는 자에게 죄를 용서하시며
예수 믿는 자는 한번 사망해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부활해 영생을 얻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슬픔, 고통, 사망, 질병은 우리에게서 영원토록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2008년도를 지나기 전에 “예수님을 믿을까 안믿을까, 교회에 나올까 안나올까”
고민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주저 말고 믿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방황하고 주저하고 고민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내게는 영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지나가십시오.
또한 우리의 매일 매일 삶 가운데 고통과 슬픔이 찾아오면
우리는 수시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고 치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008년이 지나고 2009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님에게 연합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예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우상, 세상 쾌락과 같은 불륜의 애인들을 가까이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누구를 내가 가까이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시고 나의 구원자요 메시아요
다윗 왕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구원과 치료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08년도가 지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적인 죄의 병을 치료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또 육신의 치료하기 어려운 불치병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깨끗이 치료받고 회복되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30:1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며 이르시니라
이 예언은 바벨론의 2차 침입과 포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전달되었던 것 같다.
본 30장과 31장은 70년이 지난 후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될 것에 대한 예언을 싣고 있다,
그런데 블레이니 박사(Dr. Blayney)는 본장과 31장을
유다와 이스라엘의 복음 시대에서의 회복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를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예언함과 동시에
종말론적인 해방과 궁극적 회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30: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본절과 앞 구절은 한 단락에 대한 서론에 해당한다.
이 단락은 30-33장까지로서, 전체적으로는 갱신과 복구에 대한 메시지가 요약되어 있다.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는 위임 명령은 36장에서도 나타난다(36:2, 4, 17, 18, 28-32).
아마 예레미야는 그의 개인 서기 역할을 했던 바룩(36:4)에게 대필시켰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한 민족에게 있어서 그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심판에 관한 신탁의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30: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본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란 말로써 여호와의 백성을 이중적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곧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이 모두
여호와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을 보다 분명히 나타내는 표현이다.
실제로 본장의 많은 부분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30: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이 구절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5-24절의 운문 단락의 제목 역할을 하고 있다.
본서에는 이런 형태의 제목들이 빈번히 쓰인다(7:1, 11:1, 14:1, 18:1, 21:1 등).
30: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여기서 예레미야는 앞에서 언급된 회복의 약속이(3절) 성취되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중한 시련 속에서 연단되어질 것을 시사한다.
'떨리는 소리'(콜 하라다)란 극심한 환난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종종 등장한다(4:31, 6:24, 13:21, 22:23, 49:24, 50:43).
여기서는 바벨론 포로기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거나, 특히 고레스가 바벨론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 백성이 느끼게 될 공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30:6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어찌하여 모든 남자가 해산하는 여자 같이 손을 자기 허리에 대고 모든 얼굴이 겁에 질려 새파래졌는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에 대고'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사13:8에 언급되고 있다.
이는 평화와 번영이 끝났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30:7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본절의 신탁은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로 끝난다.
그런데 이것이 희망에 대한 서술이냐 아니면 풍자적인 말이냐 하는 문제가 제시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본시의 서두에 묘사되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를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구두점들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희망을 나타내는 자료의 서두에 쓰이고 있기 때문에
절망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라고 보기는 무리일 것 같으며,
오히려 시련과 고난 끝에 마침내 도래하는 회복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로 봄이 더 타당하다.
30: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멍에(올)란 느부갓네살을 위시한 모든 이방의 압제자들로 인한 억압 상황을시사하는 말이다(27:2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자유와 해방을 노래하고 있다.
또 본절과 9절에는 메시야 시대에 있게 될 위대한 해방에 관한 암시가 매우 뚜렷이 나타난다.
본절에 언급된 바, 이방인의 모든 멍에를 꺾어버릴 분은 오직 메시야 한 분 밖에 없을 것이다(겔34:23, 호3:5).
이러한 압제의 멍에가 꺾어지면,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메시야의 은혜로운 멍에를 메게 될 것이다(마11:29, 30).
30:9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회복의 목적은 이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깨달아 경배하게 하는데 있었다.
‘너희 왕 다윗' 이는 대망의 메시야, 즉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겔 34:23, 24, 37:24, 25, 호 3:5 등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나타난다.
30: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 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본절과 다음절(11절)은 46:27, 28에서 반복되고 있다.
70인역에서는 이 구절들이 46장에서만 언급되나, 문맥상 여기서도 잘 어울리는 내용이다.
30:11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본절의 내용은 본서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발견된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다'란 표현은 1:8, 15:20에서, '너를 흩었던 그 열방’
이란 표현은 9:16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4:27, 5:10, 18, 46:28 등에서 나타난다.
30: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절망적인 상황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형태의 본 단락(12-17절)은
본절의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로 시작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는 말로 끝맺는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의 상처와 고통이 스스로 지은 바 죄악때문 임을 밝히며,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회복 불가한 그때에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 단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비슷한 말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본절의 '상처', '창상', '고칠 수 없고', '중하도다',
13절의 '송사', '상처','변호할 자가 없고', '약이 없도다',
15절의 '상처', '고통' 등을 들 수 있다.
본절의 '상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쉬브레크'란 말의 '레'는 다음에 이어지는 좋은 용례일 것이다.
이런 용례는 9:3에도 쓰이고 있는데, 거기서는 '레무나', 곧 '진실 그 자체'로 번역될 수 있다.
30:13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
'재판관이 없고‘는 ’변호할 자가 없고'인데, 모든 친구와 동맹자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다.
30:14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여기서 '사랑하던 자'란 유다와 정치적으로 동행을 맺었던 나라들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유다를 잊어버렸고 더 이상 돌보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 동맹국들 중의 대표적인 나라는 애굽과 애돔이었다(27:3, 옵 1:7-14).
애굽은 수차에 걸쳐서 바벨론에 대항하여 반역할 것을 부추겼다(37:5-7).
비록 애굽 군대가 B.C. 588년경에 예루살렘을 포위해 오는 바벨론 군대와 맞서서
싸우려고 하였던 적이 있으나 그들은 이내 철수해버렸으며,
결국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37:1 이하).
그러나 유다를 치신 분은 궁극적으로 여호와 자신이었다.
30:15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
본절과 유사한 내용이 14절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이를 여분으로 삽입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후렴구와 같은 것이었을 수 있다.
30:16 그러므로 너를 먹는 모든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네 모든 대적은 사로잡혀 갈 것이고 너에게서 탈취해 간 자는 탈취를 당할 것이며 너에게서 노략질한 모든 자는 노략물이 되리라
'무릇 너를 먹는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본절에서는 앞 단락의 장면과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이제 파국의 날이 지난 다음의 희망적인 장면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유다에 해(害)를 끼쳤던 자들은 심판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유다의 적들이 유다를 '먹어 버린다'는 표현은 2:3, 5:17, 8:16, 10:25등에서도 발견된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을 자신의 종으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한 다음,
그 후에는 친히 갈대아인들에 대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보다 한세기 이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에 대한 예언에서 이와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 바 있다(사 10장).
앞뒤 문맥을 따져보면 이곳에 제시되고 있는 유다의 적들에 대한 심판의 약속은
분명 주제의 급전환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종종 심판 메시지에서 갑자기 구원 메시지로 주제를 옮겨가며 예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5절에서 본절로의 주제 변화와 진전은 결코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30: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때가 무르익게 되면 12, 15절에서 언급된 '고칠 수 없는'것이 '치유할 수 있게'될 것이다.
한편 본절의 '시온'이란 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북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유다의 상징인 '시온'이란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문은 남북 왕국의 백성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룬다는
포괄적 의미로 이해함이 더 자연스럽다.
30: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그 보루는 규정에 따라 사람이 살게 되리라
'내가 포로 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본절에는 갱신의 약속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제까지는 다소 일반적인 언급이었음에 비해
여기서는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킨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말로 표현되고 있다.
'장막'이란 말은 '족속'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장막에 사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야곱의 장막'이란 말은 출애굽 당시 발람이 예언하였던 신탁에서 쓰이고 있다(민 24:5).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자기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텔'은 '흙 무덤'으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파괴되고 내버려진 성읍의 폐허가 묻혀 있는 언덕'을 뜻한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지명에 이런 '텔'이란 말이 복합어로 종종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 때문이다.
또한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성읍'과 '궁궐'이란 말은 유다의 총체적 회복을 암시하는 집합적
의미를 띤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것이 단수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대표적인 의미에서 예루살렘과 왕궁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
30:19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웃는 자들의 소리'이다.
이제 포로 당시의 애가와 고통 대신에 평화와 번영으로 인한 즐거운 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다
(겔36:33-38, 암 9:11-15, 슥 8:4-13).
30:20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그를 압박하는 모든 사람은 내가 다 벌하리라
'그 자손은...굳게 설 것이며'
'그 자손'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앞으로 그들은 옛 상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회중'으로 번역되고 있는 히브리어 '에다'는 종교적 예배를 위해서나
또는 전쟁과 같은 어떤 정치적 목적에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12:20 참조).
따라서 이는 그들이 자주 독립 국가로서 정치적 제도를 완비하게 되며
아울러 민족 단위의 성전 예배를 회복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암시한다.
30:21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왕은 그 본족(本族)에게서 날 것이요...접근할 자가 누구뇨'
1) 브라이트는 이를 다윗 시대의 영광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2) 클라크는 느헤미야와 스룹바벨과 같은 후대의 통치자가 다름 아닌 그 족속 유다인임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3) 그러나 이를 다윗 계통에서 일어날 메시야적왕으로 한정시켜서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이 견해는 본절 하반절에 의해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구약적 용법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갖는다는 것은
제사장적 사역과 신분을 소유함을 의미한다(슥6:13).
본문의 왕은 아무 중보자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 멜기세덱처럼 제사장적 사역까지
담당하게 될 것이다(시 110:4, 히 5:4-10).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본절은 수사 의문문으로 끝나고 있다.
한편 탈굼 역은 '왕'을 아예 '메시야'로 의역해 놓고 있다.
30: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은 언약 체결 때에 흔히 나타나는 공식 문구이다.
이것은 회복 약속 전체에 대한 최종 목적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구절이다.
즉, 이스라엘은 마침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형태로 여호와와 결속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부르심의 참된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택된 백성이 되도록
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출 19:5,6).
언약 체결은 '너희 하나님'과 '내 백성'이라는 말로 압축된다(7:23, 11:4, 레 26:12등).
30:23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칠 것이라
'여호와의 노가...폭풍과 회리바람처럼'
본절과 다음절(24절)은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23:19, 20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현 문맥에서 이것은 다른 각도에 적용되고 있다.
이는 11절과 16절에 언급된 바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임할 심판 약속에 대한
강조적 의미에서 다시 덧붙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본절은 악인이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되며
오히려 심판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적, 윤리적 목적은 앞에 언급된 희망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30:24 여호와의 진노는 그의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돌이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이는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날이 올 때에 확연히 이해되어질 것이다.
여기서 '말일'을 굳이 종말론적 개념을 가진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된 후를 뜻하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