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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LNCK 2024. 12. 2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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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19:27~30            2007.04.01.

 

※하나님께 자꾸 ‘뭘 더 안 주십니까?’ 하고 보채지 말고,

이미 하나님께 받은 것, 받은 은혜로 족하게 여기고 감사하라...는 주제!

 

 

목회 생활 중에는 때때로 참 어려운 상담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안양 교도소에서 방금 출소한 전과 7범 되는 청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제가 안양 교도소에 가서 예수 믿는 젊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줬는데

본인 말대로 제가 세례를 주었고, 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를 찾아와서 하는 말은 "이제 제게 직장을 소개해 주세요."

교도소에서 바로 나온 이 전과 7범, 저는 아무 것도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그저 제가 세례를 베풀었다는 그 하나뿐인데,

이제 제가 어떻게 그 누구에게 소개를 하겠습니까?

본래 목사가 그렇게 직업 소개하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난처해서 ‘그게 참 어렵겠다’고 얘길 했더니, 이 청년이 화를 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교회의 사랑이 어떻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고,

다 거짓말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제 아버지 어머니가 저를 낳아서, 제 어머니가 저를 고아원 앞에 갖다 버렸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는 이런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요, 아, 이거 큰일 났습니다. 사랑이 없다는 거죠.

 

14살 때에 고아원에서 담장을 넘어서 도망을 해서

지금 이 나이 되도록 그렇게 거리에서 방황하면서 살다보니

교도소에 7번이나 드나드는 사람이 됐더라는 그 말입니다.

 

자, ‘사랑이 없다...’ 그 청년의 눈으로 볼 때, 과연 그렇습니다.

“목사님, 세상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당장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참 생각하다가 "자네, 지금 거짓말을 하네. 사랑이 없다니...

자네는 남보다 더 특별한 사랑을 받았구만."

"어디요?"

 

"아니, 생각해 보라. 네가 언제 우유 타 먹었냐? 네가 기저귀 갈아 찼냐?

네가 목욕을 했냐? 네가 어렸을 때 누가 너를 먹여서 오늘까지 키운 거냐?

네가 언제 한번 농사지어 봤냐? 네가 한 번 돈 벌어본 일 있냐?

지금까지 먹고 살았는데...

 

자, 특별히 어렸을 때 4살까지 네가 지금 의식하지 못하는 그 세월에

많은 사랑을 받아서 네가 오늘까지 이렇게 어였하게 자랐다.

네 생명을 보존하고, 어려서 너를 키워준 누군가가 있지 않았겠느냐?” 했더니,

"그건 그렇지요."

 

"그걸 잊지 마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 사랑이 아니야.

네가 생각할 수 없는 것, 네 기억에도 없는 그 엄청난 사랑이 뒤에 있었어.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니까 키운다고 하자.

너는 너와 아무 상관도 없는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너를 키워주고, 길러주어서, 오늘의 네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

 

그건 맞다는 거예요.

그리고 고아원 원장 장로님이 자기를 극진히 사랑했던 생각을 하더라구요.

 

바로 그 때에 "자 어떡하면 좋겠냐?" 했더니,

"걱정 없습니다. 내가 사랑을 받은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사랑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저는 이제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목사님, 과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무실 문을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아는 것, 내가 기억하는 것, 내가 경험한 것...

뭐 그런 것 가지고 사랑이다 뭐다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사실로 엄청난 사랑은 내가 모르는 거예요. 내 기억에도 없는 거예요.

 

사람은 이상하게도, 네 살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데요.

진짜 사랑은 그 때 받은 거거든요.

 

그러고 보면 이것뿐이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엄청나고 놀라운 사랑을 받고,

또 받고 받아서 오늘 내가 있는 거예요.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사랑이 없다. 세상이 어둡다...’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요새 FTA(한미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온 국민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2007

자, 무려 14개월 동안 긴 장정을 지나도록 아직도 협상을 못해서

오늘 밤에 타결될 것 같다고 그러는데요. 빅딜을 하고 있습니다.

 

협상, 자, 이게 뭡니까?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까?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을까? 그렇습니다. 그럼 인생이 협상입니까?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는다는 얘깁니까?

그래, 적자입니까, 흑자입니까?

바로 이 인생관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인생은 협상인가? 정말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고, 얼마나 수고해서 얼마를 받고……,

유감스럽게도 상실뿐입니다.

 

다 잊혀질 명예, 그 명예라는 게 뭡니까?

어차피 다 잊혀질 건데 거기다가 열망을 거는 이 불쌍한 인생 참으로 헛것입니다.

육체의 쾌락처럼 허무한 게 없습니다. 잠시 지나갈뿐더러 언젠가는

다 한줌의 재로 바뀔 것인데 여기에 목숨을 거는 인간,

모든 것은 헛것이고, 상실뿐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읽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쯤은 꼭 볼 만한 책입니다.

「인생수업」 이라는 책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라는 심리학자가 쓴 책입니다.

 

이 분이 죽음 직전에 유작을 남겼습니다.

그 분은 작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작으로 남긴 것이

「On Grief and Grieving 」 책입니다. 우리말로 「상실수업」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상실수업. 자, 보세요. 전자의 인생 수업은 죽음을 맞는 인간으로부터 받는 메시지입니다.

방금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상실수업이라는 것은 남겨진 인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소중한 사람이 떠나갑니다. 얼마는 남겨집니다.

슬픔과 허무를 통틀어서 ‘Loss – 상실’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실, 그것은 후회로 끝납니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좋았을걸. 아니 여행을 떠나지 말아야 했을걸.

아니 건강 진단을 좀 더 일찍이 했으면 좋았을걸. 아니 좀 더 관심을 베풀었으면 좋았을걸.

껄껄 해봐야 별거 없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후회입니다. 상실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첫째, 쓰러질 만큼 우는 것처럼 최선은 없다. 후회하려거든 마음껏 울어라.

목이 터져나가게 울어라.

 

둘째, 절망 속에서 속히 빠져나오려고 하지 마라.

100% 절망하라. 어차피 절망이니까.

 

셋째, 후회의 감정, 상실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면 앞이 보인다. 숨기지 말고 절망하라. 완전히 절망하라.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아주 특별한 질문을 합니다.

굉장히 실제적인 사람이요 실용적인 인간의 질문입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우리는 다 버렸습니다. 예수님, 직업도 가정도 시간도 젊음도 다 버렸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다 버리고 주님만 따라가고 있는데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19:27-30

 

그는 빅딜을 말합니다.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만큼 버렸으면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다시 한 번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지식으로 판단해 보십시다.

정말 베드로가 과연 다 버렸습니까?

베드로가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다 버렸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왜, 왜 그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왜 벌벌 떨어야 하고, 비겁해져야 하고

마지막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역사에 나오는 비겁한 제자가 되었습니까?

왜 그랬을 것 같아요?

 

버렸다고 했는데 버린 것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다 버렸다고 스스로 속은 거죠.

 

여러분, 종종 우리는 생각해요.

'사랑한다. 너를 위해서다. 오로지 너를 위해서다. 뭐, 뭐 나는 다 없다.

나는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잘 하는데...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전부 자기 생각이에요.

 

자식 위한다 해도 나를 위하는 것,

세상 위한다 해도 나를 위한 거요.

 

뭐 어디까지나 당신을 위해서 하는 충고라고 그러는데... 새까만 거짓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내가 중심이더라 말입니다.

 

나를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버렸다고 속았던 겁니다.

후에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한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 때, 통곡을 합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버렸다.

그렇다면 왜 대가를 요구합니까?

, 그 뭘 버렸으면 '이제 뭘 얻겠습니까?' 라고 하는 그 생각까지 없애야지요.

뭘 얻을까요? 하는 생각 싹 지워버려야 되요. 그 생각이 있는 한 버린 거 아니죠.

 

우린 버린다는 걸 물질로만 생각하고 물리적으로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건 심리적이고 영적인 거예요.

깨끗하게 버렸으면 뭘 얻을까하고 묻는 것은 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얻기를 바라지 마세요. 철저하게 100% 부정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다음 세계가 보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는 얻으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얻으려고 하는 그 꿈이 있습니다. Dream이 있고, Desire가 있었어요.

길바닥에 깔려 있어요. 이게 꿈틀꿈틀하고 있어요.

아니 이게 동기요. 목적이었어요. 엄청난 것이죠.

 

먼저는 생명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생명이라는 거 내가 그렇게 뭐 애쓴다고 구할 수 있는 겁니까?

하긴 건강만 해도 그렇지요. 건강해 보려고 몸부림을 칩디다만

대개 몸부림치는 사람이 조금 먼저 가더군요.

 

거, 대충해 두세요. 뭐 건강하려고 운동하다가 무릎 나가고, 허리 나가고, 다 그러더군요.

운동도 대충 해 두세요. 거, 별거 아니올시다.

그저 아무 때라도 좋으니까 주님이 오라면 갑시다.

연기 신청하지 말고 뭐 별로 신통치도 않게 살면서 뭘 더 살겠다고 그럽니까?

대충 하고 가지...

 

여러분, 꼭 잊지 마세요. 생명,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철저하게 부정을 해 버려야지.

 

'주여, 어느 때라도 좋습니다. 소환장만 내세요. 갑니다.' 그런 자세로 말이예요.

여유 있게. 아시겠습니까? 오늘 베드로가 그까짓 변변치 않은 생명,

그렇게 아까워 하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그는 명예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명예,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것, 천국열쇠를 주었다니까 우쭐했어요.

 

어쨌든 작으나 크나 많은 사람들이 명예, 이것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 또한 별거 아닙니다. 그냥 잊어버리세요.

 

좀 억울한 말 좀 들으면 어떻습니까? 변명하지 마세요. 좀 누명을 좀 쓰면 어떻습니까?

거 뭐 몸에 흔적이 납니까? 누명 쓰고 삽시다. 너무 그렇게 명예 챙기지 마세요.

그것도 역시 점점 더 어려워지는 얘기구요.

 

그리고 자기 가치관을 버려야 됩니다.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요. 그리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요. 이 메시아가 왔으니

예수는 나라를 회복할 것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때, 내가 옆에 앉을 것이고……'

여기까지 지금 그야말로 이스라엘 드림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꿈 때문에 베드로가 지금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버리지 못했습니다.

버려야 될 것을 철저하게 버리지 못한 탓에, 그는 부득불 비겁한 자가 됩니다.

 

예수를 쫓아가도 멀찍이 쫓아갑니다. 아니 누가 가서 뭐 창을 들어대고

'너 예수 믿는 사람이지? 그러면 죽인다.'

뭐 이런다면 또 목숨을 위해서 혹시 좀 뭐라고 해도 좀 봐주겠습니다만,

아 어린 여종 하나가 나와서 '당신 사투리를 쓰는 거 보니까 갈릴리 사람인데……'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에 벌써 "아니요" 하니 이게 뭡니까?

 

베드로가 초라하게 형편없게 된 거란 말이에요.

그것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 저주까지 하니 형편없이 됐습니다.

왜 이랬을 것 같아요? 깨끗이 비우지 못했어요. 자기 부정이 부족했던 거예요.

 

▲이제 보세요.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 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마20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노라(20)."

 

오신 목적부터 분명합니다. 나는 주려고 왔다. 끝. 받으려는 마음은 없어요.

그래서 주려고 왔어요. 그게 목적이에요. 그랬으면 주었으면 됐죠.

또 주는 것으로 끝났죠. 또한 더 놀랍고 신비로운 진리는 사랑하는 고로 같이 되었습니다.

 

같이 된다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저 사람으로 하여금

나 닮으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저를 닮는 겁니다.

나 있는 곳에 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저 있는 곳에 가는 겁니다.

내 처지와 같아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저와 같은 처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육신 - Incarnation 이라는 거예요.

 

작으나 크나 사랑은 Incarnation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개 모든 문제가 ‘나를 닮으라, 나같이 돼라, 내 생각처럼..,’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를 버리고 온전히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의 세상으로, 그 분의 가치관으로,

그 분의 것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좌를 내려놓고, 의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그가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 뿐입니까? '대속물'로 주었다. 대신 죽었습니다.

저가 맞을 걸 내가 맞고, 저가 당할 굴욕을 내가 당하고, 내가 죽어서 저가 산다면 죽죠.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누명을 써서 저 사람이 밝은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라도 좋아요.

어떤 부끄러움이라도 상관없어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건 빅딜이 아니에요. 엄청난 사랑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보세요. 살리고자 그는 죽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위하여 그는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는 대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아직도 흥정해야겠습니까?

아직도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오시자마자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거저 받았다는 감격, 그 이상을 넘어서면 안 됩니다.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면 거저 주는 일은 쉬워집니다.

 

자,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자체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순교합니다. 순교가 최고의 영광입니다.

 

순교는 희생이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순교 다음에 무엇을 얻을 것인가는

신경 쓰는 것 아니에요. 순교 자체가 영광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어린 애가 초등학교 다니는데 장난도 심하지만

어머니 생각에는 잘 가르칠 생각에서 가끔씩 심부름을 시켰어요.

심부름을 시키고 심부름을 잘 하면 그 대가로 돈을 천원 줬어요.

 

또 심부름을 시키면서 천원 주고, 어디 갔다 오라 그러면 얘가 그 천원 생각이 나서

심부름을 잘하는데, 어머니가 깜빡 잊어버리고 몇 번을 못 줬어요.

그랬더니 이 녀석이 학교 가면서 편지를 써 놓고 갔어요.

 

'엄마, 아무 때 안 줬어, 천원. 아무 때에 안 준 것, 천원.

아무 때에 심부름 시키고 안 준 것, 천원.' 그렇게 사천 원을 떡 써 놓고 나갔어요.

 

어머니가 이걸 보고 빙그레 웃다가 거기다가 회답을 썼어요.

백지에다 쓰면서 '네가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있던 거 공짜, 젖 먹인 거 공짜,

밥 먹인 거 공짜, 학교 보내는 거 공짜, 공짜.'

 

그렇게 딱 써놓고 나갔는데, 얘가 저녁에 들어와서 보니까

이거 참 잘못했다 생각하고 어머니 앞에

'다시는 용돈 달라고 안 할게요. 제가 잘못 했습니다.'

 

여러분, 그거 뭐 변변치도 않은 일 좀 해 놓고서 너무 대가 달라고 그러지 마세요.

주여, 무엇을 얻으리이까? 뭘 더 바랍니까? 그저 하나님의 자녀된 것,

죄 사함 받은 것, 오늘까지 받은 은혜 충만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해 주신 것,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성경에 짧게 나와 다 잘 알 수가 없지만, ‘슈퍼스타’(뮤지컬)에 보면,

어느 작가가 이걸 추리해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으로 추리한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What is going to reward for me on the cross?"

그럽니다. 주여, 내가 이제 십자가에 죽겠는데 보상이 뭡니까?

Reward, 십자가에 죽는 보상이 뭡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예수님은 대답을 얻지 못합니다.
맨 마지막에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주님은 스스로 대답합니다.

"All right, I will die. 주여, 그러시다면 내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보상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 보상 대가성에 매여 사는 것처럼 초라한 게 없습니다.

싹 지워 버리세요. 자, 이제는 나이도 이만큼 됐으니까 그냥, 그냥 주기만 하다 갑시다.

뭘 받으려고 합니까? 뭐 아들 딸 장가보내고 효도 받겠다구요? 그만하세요.

지금까지 키우면서 재미 다 봤는데 뭘 또 받아. 안 그렇습니까?

다 받았어요. 벌써. 더 받을 거 없어요.

 

죄송하지만 제 개인 이야기입니다. 제 아들이 목사가 되는 날,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목사가 된 것은, 내가 기도를 했고,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서

오늘 목사가 된 것이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너는 이제부터 효도 안 해도 된다."

 

왜요? 효도 다 했잖아요. 아무것도 바라지 마세요.

제발, '무엇을 얻으리이까?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만 하세요.

이 보상 심리로부터 자유하세요. 훨훨 나는 것처럼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거저 받은 것뿐이니까, 다만 얼마로도 가능하다면 거저, 거저 주면서 살겠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하여 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주를 믿고 주를 따르면서도

아직 우리는 무엇인가 얻고자하는 생각이 앞서서

살아가는 목적마저 흔들릴 때가 많은 저희들입니다.

 

그리고 늘 비겁하게 후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이제부터 남은 생은 아무 보상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런 깨끗한 마음으로,

'받은 바로 충분합니다, 받은 바로 만족합니다.' 하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모든 고난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사로 받을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