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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과 정과 망치로 이루시다

LNCK 2024. 12. 2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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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5일 "끌과 정과 망치로 이루시다(마2:1~3) - YouTube

 

끌과 정과 망치로 이루시다        마2:1~3           

※개인이나 교회나, 자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까지는
망치로, 끌로, 정으로 깎이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다 통과하고 인내한 이후에
비로소 자기 사명을 이루게 된다는 주제의 설교. 그거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델이셨다는 거죠!
..................................................

얼마 전에 제가 나무로 조각하는 분을 알게 되어서, 
그 분의 작업실, 그리고 전시실을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큰 나무 덩어리를 자르기도 하고, 혹은 깎기도 하고 
다양한 노력을 통해서 작품을 만드는데, 
예수님 상 들도 많이 있었고, 12사도 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후의 만찬'을 표현한 내용도 있었고요. 
다양한 작품들을 거기서 볼 수 있었는데, 

제 마음에 가장 남은 것은, 그다지 크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못 박히신 거친 두 발을 표현한 것인데, 
한쪽 발은 발 전체가 있고, 한 쪽은 그 발이 한 절반만 있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근데 이 조각가가 그 작품을 언제 만들었는가 했더니, 17세 때에 만드셨다고 해요.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이라고 하면서, 
한 목사님께서도 그 예수님의 못 박히신 두 발, 그 작품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조각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이런 나무 덩어리가 그 작품이 되어서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마 그 작가는 그 나무를 여러 번 잘랐겠죠. 그리고 망치로 내려치기도 하고, 
톱으로 가끔은 썰기도 하고, 그리고 끌로 수도 없이... 수 만 번을 깎아 내기도 했을 겁니다. 
'나무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고 또 겪다 보니까, 어떤 모습을 이 세상에 비로소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위대함 이라는 것은, 모든 아름다움 이라는 것은 
즉흥적으로 금방 나타나지 않고, 
깎고, 다듬는 많은 과정을 통해서... 세상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예수님도 똑 같으시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되는 최적기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때가 찼다'고 했는데 
그 때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최적기, 그때는 어떤 때였는가 하면, 
-세계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어가 있어서, 복음 전파에 좋은 수단이 되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발달된 육상, 해상 교통로가 있어서 
복음 전도 자들이 빠르게 왕래할 수 있었고, 

-또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가 구축되어 있어서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복음을 가지고 오갈 수가 있었고,
 
-디아스포라 흩어진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 여러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전 이해를 가지게 되어서 
복음이 전파 되었을 때, 그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찼다'고 할 때,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들, 
그 모든 것이 갖추어 졌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셨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복음이 전파되기에는, 그 때가 최적기 였겠지만, 
예수님 그 분에게는, 그 때가 아주 어렵고 힘든 최악의 때였습니다. 

예수님에게, 그 시기가 견딜 수 없는 힘든 때였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말씀이 본문 마2:1절입니다. 

마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바로 이 짧은 구절 속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그 시대가 어떤 시대 였는가?,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는가? ...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 대왕 때에 태어나셨습니다. 
헤롯 대왕은, 로마의 도움을 받아서 그 지역을 장악했던, 
그래서 로마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죠. 그는 로마에 충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이었는지... 
역사가 그 모든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무려 10 명의 아내를 얻었는데, 그 궁중에서 온갖 음모와 암투가 심하다 보니까, 
이 해롯 대왕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의심이 많은 사람이 되었고, 
아주 잔혹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헤롯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는데, 
자기 10 명의 아내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마리암네 1세 왕비 였는데, 

헤롯은 마리암네 1세, 자기 아내를 죽이고 
그리고 그녀가 낳은 두 아들까지 죽일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그 당시 로마 사회에는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돼지로 태어나는 게 더 낫다' 하는 말이 떠 돌 정도였죠.

그런 잔인한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하고 동방에 박사들이 찾아와서 물었을 때,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갓난아기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 정도는 
아무런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워낙 포악해서 ..자기 처자식까지 죽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여러분! 그런 사람이 유대 왕으로 다스리고 있는 그 때, 
그 때가 예수님께서 나신 때였어요. 

'헤롯 왕 때'라고 하는 구절은, 다른 말로 환원 한다면 
'칠흑같이 어두운 때, 희망이라고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때, 
모든 사람에게 고통만 다가오는 아주 어려운 때'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때의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2:1
여러분, 그 유대 라고 하는 손바닥만 한 그 지역이, 그때 어떤 상태에 있었나요? 
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잔인한 헤롯 같은 사람이 통치 하던 유대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로마의 식민지로 신음하는 유대 였습니다. 가혹한 세금이 부과 되었고, 
그리고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져서,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 당하는... 
그런 억압 당하던 유대나라 이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다스리다가 죽은 이후에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얼마 동안 통치를 하다가 
아켈라오가 축출된 다음에는, 로마인 총독이 직접 파송을 받아서 다스리게 되었는데, 

몇 년마다 임무 교대를 하는 중에, 5번째 총독 으로 부임한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빌라도죠. 이게 당시 유다의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유랑민들이 많이 떠돌아다녔나... 하는 것을 또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데, 
그 당시 경제가 다 무너져서, 가난한 서민들이 정말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서 말씀을 읽을 때 익숙하게 접하는 내용이 
'예수님께서 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죠. 이것이 사복음서에 모두 다 나와 있는데, 

이 사건을 우리는 '예수님의 엄청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셨다'는데 초점을 맞춰서 
읽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 상황을 어떤 사회학적인 눈으로 들여다 보면,
당시 그 사회가 얼마나 어려운 사회였나... 하는 거를 알 수 있죠. 

여러분, 대낮에 남자들이 5천 명씩 모인다는 건 뭘 말해 주느냐 하면, 
일거리가 없는 불쌍한 남자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모두에게 일거리가 있어서, 바쁘게 일해야 된다면, 
그런 많은 사람이 모일 수가 없었을 텐데, 
할 일이 없이 빈둥거려야 되는... 직업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고, 

또 그들은 어린 아이가 내놓은 그 작은 도시락에서 시작된 주님의 능력으로 
떡과 생선을 먹었지, 자기들이 스스로 도시락을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 모두가 다 굶주리고 있었다는 거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게 그 시대의 참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유대인들에게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루살렘 성전 뿐이었겠죠. 
'그래도 성전이 우리에게 있으니, 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했을 텐데, 

이미 그 성전은, 땅바닥에 권위가 떨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헤롯 같은 사람이 제사장을 폐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는... 
대제사장이 헤롯의 판단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는 그런 시대니까 

정치 권력과 거룩한 성전이 결탁 할 수 밖에 없었고, 
성전은 이미 권력의 시녀처럼 전락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런 성전이 어떻게 백성들의 영혼을 위로할 수가 있었겠나요?

여러분 이런 것이 그 당시 유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 당시 상황, 삶의 공간은 
얼마나 갑갑한 곳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래서 마2:1절에서 '헤롯 왕 때 예수님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이 한 문장만 가지고도 
그 시대가 얼마나 어려운 시대였으며,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걸 단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배경에서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셨어요.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나서, 십자가에 달려 부활 승리 하시기까지 
그 30여년 동안, 얼마나 예수님의 인생이, 예수님의 그 사역이, 
고단하고 어려웠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의 그 삼십 여년의 그 모습이,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치 한 조각가가 큰 나무 덩어리를 가져다가 
사정 없이 자르고, 내리 치고, 그리고 깎아 내는... 
마치 그와 같은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수하게 망치질을 당하시고, 톱질 당하시고, 
정으로 쪼아냄을 당하시고, 끌질을 당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삶은 그토록 고단했다는 겁니다. 

우선 탄생 하실 때, 예수님은 잘 준비된 궁궐이나 부잣집에서 
호화롭게 탄생하신 게 아니고, 마굿간에 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열악한 곳에서 탄생 하셨어요. 

신분도 낮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양부는 요셉이었고, 
요셉의 직업은 목수 였는데, 여러 자료에 의하면, 
목수는, 목자, 무두장이와  함께 유대 사회에서 가장 하층민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당시 헤롯이 베들레헴의 갓난 아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을 가셔야만 했어요. 쿠션 좋은 승용차를 타시고 가신 게 아닙니다. 

그 먼 길을, 그 어머니가 안고, 보나마나 나귀 같은 것을 타고 흔들거리면서 가셨을 텐데, 
얼마나 예수님은 갓난아기 때부터 고통 받으셨을까요... 

그리고 그 요셉과 마리아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생활 기반이 전혀 없었던 
애굽에 내려가서 무수한 고통을 겪었으리라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서 이제 나사렛에 정착하시게 되는데 
여러분,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은 안락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목수의 아들이었고, 
아마 예수님 자신도 목수의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한 동네 나사렛이 보장해 줄 수 있는 삶이란, 
가난한 서민의 삶 뿐이었죠. 
예수님은 남루하셨고 볼품 없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당신을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서 이사야 53:2절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러분, 좋은 옷을 입으신 것도 아니고, 목수의 작업복 차림과 비슷하게 입으시고
아마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그게 예수님의 고통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셔서, 
이 마을 저 마을에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했나요? 아닙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백성의 장로들... 
그들은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고, 예수님을 심지어 죽이려고 했는지... 
복음서가 그대로 증언하고 있는 터이고, 그러면 일반 무리들은 어땠을까요? 

그 무리들은 열광하면서 달려왔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은 다음에는 
썰물 빠져나가 듯이 다 떠났을 뿐, 중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시고, 미움 받으시고, 손가락질 받으시고, 조롱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천대 받으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고단한 메시아 사역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마굿간에서 나신 그때부터 겪어 오신 이 많은 과정들이 
예수님의 몸이 잘려 나가고, 예수님께서 망치질을 당하시고, 끌질 당하시고, 
사정 없이 쪼아댐을 당하시는... 그런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조각작품처럼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죠. 
그 거친 십자가의 가시가 예수님의 온 몸을 찌르고, 
가시면류관이 예수님의 이마를 찢어서 피가 흘러내리는 겁니다. 

그리고 큰 못을 로마 병정이, 거친 망치질로 주님의 두 손과 두 발에 박아넣을 때,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그때가 "예수님" 이라고 하는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조각품에 비유

그 거친 로마 병정의 망치질이, 마치 그 조각가가 '다 됐어!' 그러면서 
마지막 망치질을 하는 순간과 같지 않았겠나? ...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거죠. 

어제 이 설교 원고를 작성을 해서 보내면서, 
예수님이 매달려 그 망치질 당하는 순간을 보면서 
그 조각가의 손에 들려 있는 나무 덩어리가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 예전에 우리가 많이 불렀던 찬양인데, 요즘은 잘 부르지 않는 찬양이 있죠. 
'세 개의 못' 이라는 찬양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 쓴 세계의 그 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 망치 소리가 예수님을 막 깎고 두드려서, 어떤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제 마음 속에 들렸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수많은 망치질, 끌질, 톱질을 참으심으로써) 예수님은 그 모습을 온 세상에, 
그 위대하심을,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구주이심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 보이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그 모든 과정이,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겪으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스스로 당신 자신을 조각하신 분입니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마치 조각가가 마지막에,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 '다 끝냈다'고 하듯이,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당신이 주도하셔서, 
그 모든 걸 이루시고, 온 세상 앞에 '다 이루었다(다 지불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각 당하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조각가가 되셔서 
당신 자신을 조각 하셨구나... 
세상 사람들이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구세주되심, 메시아 되심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의 모습을 알아보도록 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리치시고, 깎아내시고, 만드셔서 ...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 하셨구나' 

그래서 그 고통이 누적되면서, 조금씩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랍비'라고 그 분을 바라보더니, 
나중에는 '선지자인가?' 하면서 바라보다가 
어떤 사람들은 '능력 많은 치유자'로,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기도 했었죠.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그 망치 소리와 함께, 
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히는 그 순간, 
예수님은 생명의 구원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구원하신 유일한 메시아로 그 모습이 완성 되셔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온 세상 앞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게 되니까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보게 되었는데 

예를 한 사람 든다면,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도마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지만, 그걸 믿지 못했었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다음에, 그는 주님을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요20:27~28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오늘 성도님들도 눈이 열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 나무 덩어리네 (보통 사람이네)' 이렇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메시아 이셨는데 알아보지 못했던 이들의 눈이 열리면서 
'이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심을, 내가 뵙고 경배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보는 눈이 열려야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남루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셔서, 
사람들이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던 처음 이야기로 부터 시작을 해서, 
그 모습이 완성된 다음에 
만왕의 왕 이시고, 만주의 주 되심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삶은 그런 삶이었습니다. 
잘려 나가셨고, 또 깎이고, 또 망치질 당하셨고, 
아니 그분 스스로가 당신을 그렇게 조각하셔서 
'봐라 내가 너희들의 구원자가 아니냐?' 이렇게 나타내 보이신 삶이었습니다. 

◑적용

이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나눌 묵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헤롯 왕 때 유대 베들레헴 이라는 상황에 오신 것처럼, 
저는 오늘 우리도 헤롯 왕 때 유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지구촌은 헤롯 왕 때와 같아요. 
존경과 사랑이라든지, 양보와 배려 라든지, 
신뢰와 의리 라든지, 겸손과 정직 같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땅바닥에 다 떨어졌습니다.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을 때 
그래도 최소한 그들에게는 수치심이 있어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치부를 가리려고 했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는 수치심이 있었죠. 

그런데 오늘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포함해서, 그 수치심조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목소리가 더 크고, 
'내가 어때서?' 이러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최소한의 수치심도 없는 세상이죠. 

이 나라 저 나라...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인도하는 
그런 참된 지도자가 있나 하고 기웃 거려 보면, 
어느 나라도 그런 지도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동성애를 비롯한 온갖 부끄러운 일들이 
예전에는 몰래 숨어서 진행 되더니 
이제는 그게 무슨 대단한 문화 생활이라도 되는 것처럼 백주에 드러내놓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런 일들을 주장하고 있고 
그걸 심지어는 법으로 만들려고까지 획책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사회가 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고, 
부모를 존중하는 자녀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모든 사회가 무너지는 그런 시대에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헤롯의 시대고, 
그 유대와 똑같구나 ...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우리 대한민국은, 분단의 고통 가운데 
언제 도발될지 모르는 전쟁의 위험까지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또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여다 보면... 얼마나 힘든지요. 
'질병'이라는 끌로 매일 같이 깎이는 분들이 많아요. 
'가난'이라는 정에 쪼이는 분들도 많으세요. 
거기에다 '온갖 실패와 좌절' 이라는 그 상실감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망치질 당하는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그런 인생을 사는 분들도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아 예수님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한 평생이 
계속 얻어맞고.. 잘려 나가고.. 깎여 나가는.. 그런 고통의 나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당신이 살아가신 그 삶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나요?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질문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잘려 나가고, 깎여 나가고, 쪼이고, 망치질 당함으로 인해서
온 세상에 메시아 임을 드러내는 것처럼, 

너희들도 그 고통을 겪어 나가면서, 너희야말로 참된 내 사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 세상에 보여지게 될 것이다. 

지금 너희도 만들어져 가는 중이고, 조각 되고 있는 중이니, 
잘 참고 견뎌서, 내가 다 이룬 것처럼, 너희도 그리스도 인의 삶을 이루어라!' 
이렇게 말씀 하신다고 생각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라고 하는 우리의 시공, 우리 인생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 상황이 

우리를 다듬고, 우리를 끌질 하고, 우리를 잘라내고 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문제는 '그걸 견뎌낼 수 있나? 그걸 참아낼 수 있나?' 그것이 우리에게 문제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세월이 쌓이고 쌓이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 인으로, 제 모습을 가지기 원하고, 
우리 교회가 더 교회다운 교회로 그 모습을 드러 내어 
세상 속에서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위대함을 뽐낼 수 있는 
그런 자리에까지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저희 영락교회는 편안한 가운데 쉽게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극심한 혼란기에 저희 교회가 세워 졌습니다. 

지금부터 79년 전입니다. 38선을 목숨 걸고 넘은 많은 월남민 성도들이 모여서 
눈물 뿌려서 이 교회가 건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어깨로 돌 짐을 져나르고, 치마 폭에 돌을 싸서 나름으로써 
이 예배당을 건축했지만, 예배당을 다 짓고 나서 불과 한 달여 만에 
625전쟁으로 인해서 이걸 다 두고 피난 갈 수 밖에 없는 찢기는 아픔을 
우리 성도들이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응락 장로님 같은 순교자가 배출 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려고 남으셨다가 교회 마당에서 공산당에 피살되심)

1953년 휴전 이후에 교회로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우리나라는 다 페허가 되었고, 가난해 졌고, 
그 극심한 고통의 상황 속에서 한경직 목사님과 우리 선배들은 
눈물로 기도하면서, 그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늘까지 영락교회를 이어 내려왔습니다. 

여러분 영락교회가, 영락교회가 된 것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 
우리도 잘려나가고, 깎여 나가고, 
우리도 정으로, 끌로, 망치로 다듬어 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의 영락교회가 만들어져 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고, 
힘든 데도 불구하고 나와서 헌신하고 봉사 했으며, 
눈물을 뿌려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그래서 오늘의 영락교회가 만들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사건이었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로서
온 세상 앞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게 되기까지는 
날마다 잘리고, 깎이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제

여러분 영락교회가 영락교회 되는 것, 
우리가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의 사건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호흡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이어져 나가야 될 과정 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긴 과정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완성된 작품이 아닙니다. 
영락교회는, 아직도 주님이 원하는 완성된 작품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은 다듬어져야 되고, 
그때마다 잘려 나가는 아픔, 얻어 맞는 고통, 
그리고 끌질 당하는 통증이 따라올 텐데... 
그걸 감수할 수 있는 인내와, 우리 마음의 용기가 필요한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때를 잘 통과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유명한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의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에 보면, 
거기 산으로 숨은 신자들에게, 신부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냥꾼이 산에다 그물을 쳤습니다. 많은 산비둘기들이 그 안에 걸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냥꾼들이 잡은 산비둘기를 금방 시장에 내다 팔지 않고, 
오히려 먹을 것을 많이 던져주면서, 비둘기들이 살이 많이 찌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리석은 비둘기들은, 그물 안에 갇혔지만, 먹을 것이 계속 공급 되니까 
양껏 먹고 날마다 몸집이 커졌고 살이 통통 쪘습니다. 

드디어 사냥꾼들은 '이제는 값을 받을 수 있겠어!' 
그래서 시장에 내다 팔기로 마음을 정하고, 한 마리씩 시장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시장에서 팔려 나가면, 거기서 식탁에 튀겨진 요리가 될텐데 
그들에게 마지막 날이 온 겁니다. 

그런데 비둘기 한 마리, 한 마리들을 그물에서 빼내고 있을 때, 
그물 저쪽 구석에서 어떤 비둘기 한 마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자기 몸을 비틀더니 
그물 코 사이로 자기 몸을 빼내서, 하늘로 날아 오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비둘기 한 마리는, 자유를 얻고 살아남았습니다. 
어떻게 다 그물 안에 갇혔는데, 그 비둘기 한 마리는 몸을 빼내서 날아갈 수 있었나요? 

알고 보니, 다른 비둘기들이 눈 앞의 모이에 팔려서, 
그걸 있는 대로 먹고 살이 찌는 그 시간에, 
이 비둘기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기 몸을 점점 마르게, 점점 작게 만들어서 
그 그물 코 사이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이 산에 피신 했고, 고통을 받는 시간이지만 
이 시간을 잘 견디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내하고 견뎌야 됩니다.」   

여러분 저는 그 이야기를, 오늘 성도님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도 지금 계속 잘려 나가고, 정으로 쪼이고, 끌로 깎이면서 (비둘기가 몸을 홀쪽하게 해서)
인생의 여러 가지 아픔과 고난을 겪고 있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우리가 인내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 인 다운 그리스도 인으로, 교회 다운 
교회로 우리가 만들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보다 먼저 그 과정을 통과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잘 통과해 나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대한민국도 지금 잘리고, 찢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탄핵' 이라고 하는...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온 세계 사람들 앞에 우리가 다듬어지는 모습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데, 
이 과정을 우리가 잘 견딜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도 더 건강한 나라로 
깎여져서 작품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더 빛나는 나라가 될 줄로 믿고, 동방의 등불 같은 나라가 돼서 
전 세계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 날이 올 것을 희망합니다. 

여러분, 그때까지는 우리가 잘 견디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보다 먼저 그 지난한 고통의 삶을 통해서 *지극히 어려운
완벽한 메시아로 우리 앞에 등장 하신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고, 
이 성탄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러한 믿음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