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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괜찮습니다

LNCK 2024. 12. 24. 10:3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성탄

 

2024년 12월 22일 "주님, 괜찮습니다(마2:13~18)"  YouTube

주님, 괜찮습니다          마2:13~18, 렘33:1~8 

◑첫번 성탄절의 딜레마

 

제 혼자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받고 계실 때, 
그 십자가 아래에 모친 마리아가 서서, 아픈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 마리아 곁에 또 다른 여인 한 사람이 서서, 울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아드님도 죽어가시는 군요. 저는 벌써 오래 전에 아들을 잃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저희 집에, 영문도 모른 채 헤롯의 군사가 덮치면서 
우리 아들을 죽였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당신의 아드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베들레헴에 사내아이들을 죽였다고 하더군요. 

당신의 아드님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아들도 죽지 않았을 것이고, 
내 아들도 지금 저 십자가에 달린, 당신 아드님 나이 쯤 됐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드님이 왕으로 탄생했다고 하는데, 왕이 맞긴 맞습니까? 
세상에 무슨 왕이, 저렇게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겁니까?' 
그러면서 절규하는 모습을.. 제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분노한 나머지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참상이 벌어졌는데, 
그때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어머니들이 그렇게 탄식 하지 않았을까?' ...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베들레헴의 어린 사내아이들은 죽지 않았겠죠. 

예수님의 성탄 사건 중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전략적 미스(실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실수 아니죠)

보통 전투 할 때에, 비행기를 동원해서 적진을 폭격을 하죠. 
그래서 적을 무력화 시킨 다음에, 지상군이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전투의 모습인데, 

하나님께서도 그런 논리대로라면, 헤롯을 그냥 두시면 안 되고, 
그 포악한 왕을 끌어내려서 제거한 다음에, 그 지경을 안전하게 만들고,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어야 되는 게 아닐까? ...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헤롯 같은 폭군이 미리 제거되었다면, 베들레헴의 갓난아기들은 죽지 않았을 텐데... 
제가 좁은 소견으로 생각해 보는 아쉬움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또 그 베들레헴의 아기들의 죽음은, 천사들이 부른 노래와도 앞 뒤가 안 맞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렇게 노래 했는데, 

그 아기들의 죽음은 '평화' 와는 정반대 아닙니까? 
평화이기는 커녕, 참혹한 참상이 베들레헴 지경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노래' 하고도 안 맞는데... 
그러면 그 아기를 잃은 부모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가져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 뿐이 아니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우린 더 놀랄 수 밖에 없는데 
마10:34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4

'평화의 왕'이신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화평을 주러 온 게 아니라고, 
오히려 찔러 죽이는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면서 

이 갈등과 불화 라고 하는 것이, 
먼데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 그런 이들과의 갈등이 아니라 
심지어 가장 가까워야 될 부자, 모녀, 고부간의 갈등 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마10:35~36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으니까 얼마나 충격입니까! 
여러분, 이런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 맞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으면, 내가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나요? 
평화를 누릴 수 있긴 있는 것인가요? 

◑오늘날까지 반복되는 '어머니들의 울음과 통곡'

 

여러분 우린 그동안 주께서 가져오시는 평화, 화평, 평강 이런 것들을 
너무 동화 속 이야기처럼 단순하게 생각해 온 게 아닌지 
한 번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우선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가 그렇게 값싸게 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 해야만 됩니다. 

렘33:1~3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라... 그러면 아주 크고 은밀한 일, 
하나님이 준비하고 추진하시는 그 비밀스러운 일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선입견을 가지냐면,
'하나님이 보여주실 그 크고 은밀한 일이 뭘까?' 
'그건 내게 복이 되는 일일 거야, 나에게 아주 좋은 일일 거야' 라는 전제를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모두가 좋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실 크고 은밀한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들은 이어지는 4~5절을 정신차려 읽어 보십시오. 

렘33:4~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신다'고 할 때는, 
나를 행복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일 거라고 우리는 기대를 하는데, 

뚜껑을 열고 들여다 보니까, 그 크고 은밀한 일이라는 게, 그런 일이 아닌 거죠. 
그 일은 끔찍한 일인 거예요. 

'예루살렘이 다 무너져서 시체가 가득하게 될 거다'
그게 하나님이 보여 주신다는 '은밀한' 일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자에게 보여 주신다는 일이, 
우리가 기대하는 게 아니잖아요. 정반대잖아요. 

그래서 4~5절을 읽으면 충격을 받게 되는 거죠. 
바벨론의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초토화 시키는..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물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근데 구원은 그 다음에 하시는 거예요. 
6절부터가 이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렘33: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렇게 용서도 하시고, 포로가 돌아오게 하기도 하시고, 
낫게 하시고, 회복시키는 구원을 주시기는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건 뭐냐 하면, 심판이 먼저 있다는 거예요. 
저지른 악행에 대한 심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구원이 오는 것이에요. 
이 순서를 잘 생각해야 되는 거죠.

구원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심판이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먼저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구원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게 바로 '크고 은밀한 일'의 내용인 것이죠. 

여러분, 아닌 게 아니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칼이, 남유다를 세 번이나 덮치고, 
마지막 세 번째는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얼마나 많은 어린 아이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때 통곡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을 텐데, 
그 내용이 예레미야 31:15절의 내용이죠. 

렘31: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통곡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근데 위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오늘 읽은 마2:17~18절에 인용되어 있는 겁니다. 

마2: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음으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렘31:15절을, 마태가 인용하면서,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어디서? 베들레헴에서 
어떻게?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이루어졌다... 

결국 그 라마에서 들리는 어머니들의 통곡소리, 이 말씀이 두 번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번은, 바벨론의 칼에 의해서, 예레미야가 살던 그때 한 번 있었고 
-또 한 번은, 수백 년 지난 다음에, 헤롯의 칼에 의해서, 베들레헴에서 
그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가 들릴 때... 또 한 번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어머니들이 통곡할 것이다' 하는 이 말씀이 
두 번만 이루어 졌을까요? 아닙니다. 
수도 없이 헤아릴 수 없이 그런 일들이 생겼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잖아요

 

-우크라이나 병사의 어머니들, 
-러시아 병사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가 지구촌을 진동하고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북한 병사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도 섞여서 들리는 현실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다시는 어머니들이 우는 일이 없을 까요? 
아닙니다. 앞으로도 무수하게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서 
탄식하고 우는 일은 반복될 것이에요. 

그런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반복될 건데, 
그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의 갓난 아기들이 죽은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면, 그날부터 모든 갈등, 미움이 다 사라지고 
정말 동화 속 이야기 같은 평화가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란과 통곡 가운데 주시는 평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화평을 주어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우리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평화를, 평안을, 평강을 계속 말씀 하신다는 거예요.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요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평강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평안'이,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약속들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근데 문제는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신 거, 
그리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죽는 것과 같은 그런 비극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하는 이 현실, 

그것과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는 말씀과
이게 어떻게 우리 속에서 조화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직접 예수님께 배웠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서 살아갔는지 
그걸 좀 우리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째는, 제자들은 평화가 유보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마13장에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나오죠.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짓는데, 거기다가 좋은 곡식 들을 심었는데, 
나쁜 사람이 와서 그 속에 가라지를 섞어 놓고 갔어요. 

나중에 보니까 가라지들이, 영양분을 빼먹으면서 밭에서 더 잘 자라고 있잖아요. 
그래서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하니까 
주인이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하거든요. 

마13: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셨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몇 절 더 읽어 내려가 보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예수님은 '추수 때는 세상 끝을 말하는 거다' 라고 직접 설명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존재하고 세상이 흘러가는 동안에는 
세상 끝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알곡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곁에 가라지 같은 세력이 가까이에 있고, 
그때까지는 참된 평화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진정한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는, 
세상의 종말, 그때까지는 뒤로 미루어져 있는, 
'평화가 유보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지금 이 세상은 온통 베들레헴 같아요. 
오늘날도 헤롯 같은 작자들이 많이 있어가지고, 악행을 일삼다 보니까 
그 속에서 알곡 같은 사람들이 치이고, 뺏기고, 상처받고... 
오늘날 이 세상에서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게,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게 "유보된 평화"입니다. 

▲2. 두 번째로,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평화를 누리는 법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쪽으로는 검에 찔리는 고통을 받으면서 
-헤롯의 칼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평화를 누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극복하거나, 누리는 법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웠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손님을 초청 할 땐 어떻게 합니까?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귀한 분을 모시잖아요. 

근데 '헤롯 같은 포악한 군주를 제거한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 아기들이 안 죽었을 걸...' 한다면,
그건 우리의 오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손님 맞이하는 예를 들어보자면, 
집에 쓰레기가 가득 차 있고, 악취가 진동 하는데, 
아무것도 청소를 하지 않은 채로, 귀한 손님이 온 것과 같아요. 

이 귀한 손님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냥 쓰레기 위에 그대로 앉은 것이고 
쓰레기 더미의 냄새가 그 손님에게 베어드는 것과 비슷해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귀하디 귀한 우리 주님으로 탄생하여 오셨는데 
해롯 같은 쓰레기, 로마 제국, 타락한 제사장들... 
이런 악당들을 싹 치우고 깨끗하게 하신 다음에 오신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있어서 악취를 풍기는 그 한복판에 오셔서, 
그냥 그 쓰레기 위에 앉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래서 그 쓰레기로부터 고통을 받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서 그 많은 악한 사람들에게 
미움 당하시고, 시달리고, 고통을 받으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까지 달려 죽으시는... 그런 고통을 겪으셨다는 거예요. 

만약에 그 모든 걸 다 청소하듯 정리하셨다면, 
예수님은 조롱 받을 일도, 미움 받을 일도 없고, 십자가도 지실 필요도 없으셨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에요. 
세상이 있는 그대로... 그 예수님이 그냥 쓰레기 위에 앉듯 오셨다는 그 얘기는 
오늘 우리 상황과 똑같습니다

우리도 좀 악당들이 다 사라진 세상에 살고 싶은데, 
그냥 그대로 다 있는 채로, 그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에요. 

악취를 맡으면서, 고통스러워 하면서, 우리들은 오늘도 눈을 떴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겠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 속에 평화를 빼앗아 갈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속에 계시면서도 예수님은 평안 하셨는데, 상징적 사건이 있죠?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됐는데도 
예수님은 거기서 평안히 잠을 주무셨죠. 이 두 가지가 조화가 안 되잖아요. *풍랑, 잠

그런데 여러분, 그 속에 신비가 있는 거죠.
풍랑이 일어나도 잠잘 수 있는 평화! 
검에 찔릴 위험 그 속에서 찬송 할 수 있는 능력!
이걸 성도들에게 보여주신 것이에요. 

여러분, 제자들이 터득한 건 바로 그겁니다. 
'내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헤롯 같은 작자들이 많이 있는 세상인데 
그 속에 살면서 이리 찔리고, 저리 찔리는 세상이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처럼 통곡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 있는 평화를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이거를 잘 보여주신 분이, 사도 바울과 실라죠.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도하시다가 붙잡혀서 얻어 맞았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가지고, 덜그럭 거리는 쇠덩어리 차꼬에 발이 채워져서 
감옥에 던져졌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발목만 접질러도 붓고 밤에 잠을 못 자 정도로 아픈데, 
온 몸을 그냥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으니까, 이게 어떻게 그 밤을 견디겠어요? 

그런데도 바울과 실라는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한 밤 중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니 
그 분들의 마음 속에 평안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예수님의 평화를, 그 제자들이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는 지금 '헤롯'이 득실거리는 이 지구촌이라는 베들레헴에서, 
갓난아기를 데리고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와 같아요. 

많은 분들이 그 갓난아기를 뺏기기도 했어요. 
아들 때문에 통곡하듯이, 우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아요. 

근데 그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이게 이제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어려운 숙제요. 

많은 사람들이 헤롯에게 굴복합니다. 헤롯이 너무 무서워서 거의 굴종하거나 
아니면 헤롯이 던진 떡밥에, 그냥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뭐냐 하면, 
'검에 찔려서 피가 나고, 아들을 잃는 고통을 겪어도 
너는 내 뒤를 따르면서, 평화를 갈망하는 자의 삶을 살아라. 
너의 십자가를 져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에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숙제인 것이죠. 

그래서 마10:37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참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냥 싸구려 은혜와 값싼 평안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라 

거기(죄악 세상 속)에 온 우리의 존재를 다 던져놓고, 
눈물을 머금고 이를 꽉 깨물고 
십자가를 지고, 상실과 찔림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눈물 어린 찬송과 기도를 올리면서 예수님의 뒤를 하루하루 뒤따라가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 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까도 우리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불렀어요.
기쁘다 구주오셨네... 라고 찬송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기쁨, 구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 찬송은 어떻게 해서 부르나요? 
그걸 부르고 나면 모든 갈등과 상처가 사라지고, 세상의 평화가 바로 옵니까? 아니죠.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부르는 것은 
'무수한 고통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뒤를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세상이 빼앗아 가지 못할 평화를 저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추수 때가 오면, 세상 끝이 올 때, 참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 기쁨의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고통 중에도 찬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춤을 추고, 
소중한 것들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 보았지요. 
그게 그리스도 인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삶을 먼저 이 땅에서 사시면서, 
제자들과, 사도 바울과,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내가 어떻게 이 베들레헴에서의 삶을 지켜 나가야 될 것인지' 
그 해답을 발견했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도 
우리 인생에 추수 때가 올 때까지 
수많은 헤롯들이 우리 곁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살아있는 순교자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4년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 중에 몇 년은, 빛이라고 한 줄기도 없는 지하 독방에서 고통을 받으셨는데, 
그 분이 남긴 기도문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거기서 따온 건데 
"주님 괜찮습니다. 견딜만 합니다. 천천히 오세요. 
나보다 더 급한 형제 자매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먼저 가시고 
제게는 나중에 오셔도 됩니다. 
저 그때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 얼마나 그 고통이 느껴지는 기도입니까? 못 견디는 거죠. 
지금 못 견디는 데도, 견딜만 하다고 말하면서, 
주님에 대한 믿음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는 
그 목사님의 이 기도 속에서 모든 게 느껴지잖아요. 

범브란트 목사님은 사정 없이 검에 찔리면서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강을 누리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1부예배를 마치고 나서, 참 슬픔을 겪은 우리 권사님 한 분이 계시거든요. 
아마 견디기 힘든 고통일 텐데, 그 권사님은 나가면서 제 손을 꼭 잡고 
'목사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나가시는 그 모습에, 제가 눈물이 났습니다. 

여러분 현재 지구촌의 전쟁 상황,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여러 가지로 어려움 속에 많은 문제를 '노정'하고 있는 교회들,  *노출해 보임
우리 가정과 우리 개인의 삶이... 지금 그 베들레헴과 같아요. 

우리가 거기 속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마치 아들을 잃은 어머니처럼 소중한 걸 빼앗긴 이들의 통곡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고, 
우리도 그 통곡하는 사람 중에 하나일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헤롯 원망하는 거예요. 헤롯을 저주하기도 하고... 
'저 예수님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아들 안 죽었을 텐데...'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해 보기도 해요. 그런 게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을 져버릴 수는 없는 거죠. 
'평화가 어디 있느냐고? 
예수님, 당신이 평화의 왕이 맞으세요?' 이렇게 질문을 하지만,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견디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완전한 평화의 그 날이 오는 그날까지, 우리는 오늘도 걸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412장 4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이 땅 위에 함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무수하게 부르잖아요. 그 가사에 마음을 두어서 불러 보셨나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참된 평화가 도대체 있긴 있는 거야? 어디 있는 거야?' 

「우리 모두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주님 평안이 어디 있나요? 내 아들이 죽었어요.' 
이렇게 우는 우리에게, 그 어머니의 통곡을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실 그런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평화가 유보된 이 시간 동안에, 우리는 그렇게 견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추수 때가 옵니다. 추수 때! 
추수 때가 오면, 또 우리의 마지막 호흡이 멈추는 그때가 오면, 
우리는 정말 백 퍼센트 완벽한 평화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정말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말씀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우린 이렇게 말하길 원합니다. 
'주님, 찔려서 좀 아팠어요. 그러나 그래도 행복했어요.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이제 저를 평화의 나라에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때가 올 때까지, 대한민국 사회가 어지럽더라도 
여러분, 견디시고, 예배하시고, 기도하시고, 
세상이 요지경이라 할지라도,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고 
무릎 꿇는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거대한 베들레헴의 주민과 같습니다. 
헤롯의 칼날이 어린 아이들을 죽이 듯이, 
저희들도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며 만신창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통곡 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먼저 가셨고, 선배들도 앞서 걸어 가신 그 길을, 
저희도 믿음으로 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완전한 평화의 나라에 들어가는 세상 끝이 올 때까지, 
저희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가도록 
힘과 능력과 인내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