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 빌2:5~11
어제 새벽에, 저희 교회 토요새벽예배는
'토요 새벽송 예배'라는 이름으로 드렸는데
그 새벽에 유치부 아이들이 20~30명이 나와가지고 이렇게 합창을 하는데
너무 예쁘게 찬양을 잘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성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있고
성탄 예배의 따뜻함을 경험한 사람은
은혜의 주류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우리 아이들도 평생 그 기억을 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이상한 판단, 이상한 행동, 신앙의 헛발질 등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입 /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어릴 때 이런 찬송을 배워서 불렀어요.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한 연못
달밤에 벌어지는 연꽃잎처럼
우리들을 다정히 불러주어요 (X2)"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 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찬455장
오늘 1부 예배 마치고 난 다음에
'목사님, 요즘 복잡한 일이 많고, 나라도 이런 힘들 일들이 많은데
오늘 이 메세지가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멈추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메세지인 줄 믿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빌2:5~11절인데,
이 말씀은, 성경 말씀 가운데 정말 원더풀한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성경 여러 군데에 나오지만
말씀의 봉우리들이 있잖아요.
모든 말씀이 다 귀하지만, 말씀의 봉우리도
예를 들어서 우면산 정도의 높이가 있고,
혹은 설악산 정도의 높이가 있다고 한다면,
오늘 이 본문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겸손과 낮아지심에 대해서
거의 알프스의 영봉(융프라우요흐)이요, 에베레스트의 최고 고봉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 장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창조주로서 영존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 가지고
시간을 초월하셔서 역사속으로 들어오셨는지,
하나님의 놀라운 마스터 플랜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조그만 도시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이 짧고도 소박한 이 서신 속에,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아주 깊고도 영광스러운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조직신학적으로도 놀랍고,
또 '기독론'에 관하여 *Christology
최고의 서술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걸 살펴볼 때에,
그 당대의 현실은, 그때 1차 수신자였던 빌립보 교회의
특별히 유오디아와 순두게 라는,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 당시에 그 교회의 중직 권사님들이
서로 다투고, 충돌하고, 파당을 짓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그래서 권사님들 스토리예요.
거기에 대한 답을 주시고자, 이 말씀을 바울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 생활의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가 '성령 안에서 하나됨' 인데,
하나됨을 위한 최고의 비밀이,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겸손 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교회도 다양한 어떤 배경을 갖고 있었어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간수가 있었고,
또 자주 장사 루디아 라는 여성 사업가도 있었고,
귀신 들렸다가 회심해서 변화된 그런 성도도 있었고,
여러 종류의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도, 수많은 분들이 예배를 드리시는 데
여러분 모두 다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잖아요.
근데 '우리가 하나 된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겠나요? 이것이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갈등과 다툼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가정적으로도 그렇고,
모두가 다 자기의 프라이드, 자기 의, 자기 주장이 있다는 것이에요.
즉, 교만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됨을 파괴하는 교만과 자기의 의를,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 어떻게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갈등과 다툼과 문제가 있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타협을 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서로 동의하는 수준까지 서로 타협을 하는데,
대신 자기 주장이나 자기 의, 자기 프라이드나, 자기 교만은 나름대로 유지하면서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소위 서로 체면치레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근데 세상적인 타협이라는 것은,
거룩함 이라든지, 영적인 깊은 차원, 영적인 능력, 예수님의 주님 되심,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함... 이런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나름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겉으로 봉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줄로 확신합니다.
그리스도 인들에게도 분쟁과 어려움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분쟁과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오늘 이 말씀이 잘 적용될 수만 있다면,
그 어려움과 분쟁은, 오히려 하나 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가 있어요.
이게 신앙의 비밀이고,
오히려 그리스도인 에게 있어서 갈등과 충돌도
오늘 이 내용이 잘 접목이 되면,
거룩한 전화위복의 역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1.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들으라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려움을 당해가지고, 누군가의 조언을 들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누구의 조언을 들어야 할 것인가요?
자기 의나, 자기 주장이나, 자기 명예나... 이런 어떤 자기 프라이드,
자기 똑똑함을 가지고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깨어지고, 은혜 받고,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해 본 사람, 자기 자아가 깨어져 본 사람,
자기 자아를 부인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들으라!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똑똑한 분들의 조언이
전혀 도움이 안 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욥의 세 친구들입니다.
욥이 세 친구들이 나름 똑똑하게 대단한 어떤 조언을 했지만,
그분들은 자아의 죽음을 통과한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욥에게 큰 도움이 안 되었고, 논쟁만 벌였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차원의 성령 충만한 조언을, 욥의 친구들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아의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듣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군가요? 멀리 갈 필요가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아의 죽음을 통과한 그런 은혜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마음에 결단하고... 이렇게 하면 그것이 큰 축복이 되는 겁니다.
▲제가 1990년대 중반에 남아공에서 있었던 정권교체를 지켜보았어요.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통해서 오래 고통을 받다가,
결국 백인 정권이 물러나고, 흑인 정권으로 교체되었는데,
제가 그때 그 상황 가운데 거기에 있었는데
그때 참 많은 걸 보고 배우고 은혜를 받았었어요.
1990 년대 중반에 남아공은, 인구가 4천만이 좀 넘었는데,
3,500백만이 흑인이었고, 5백만 정도가 백인이었고,
3백만 정도가 '칼라'라고 불리는 유색 인종이었죠. 뭐 아시안, 인도인...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절대 다수가 80% 이상, 3천5백만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근데 정부가 5백만 정도 되는 백인들이, 모든 정부의 모든 권세를 다 잡고 있었으니
그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니까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백인으로서,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데 클레르크 라는 분이
개혁파 교회의 장로님이셨어요.
이분이 은혜를 받은 분이에요. 이분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에 순종했어요.
'네가 낮은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네가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보라'
그래서 흑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 전임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 de Klerk 가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하고 난 다음에, 그 아래 부통령으로 들어갔어요.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제가 공부했던 학교에 그분이 챈슬러 (전임 총장) 였기 때문에 제가 그 얘기를 잘 알고 있어요.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Frederik Willem de Klerk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제7대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그와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하였으며,
인종 간 화합과 화해의 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현재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래가지고 그 피 흘릴 수밖에 없는 혁명적 상황에서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낮아져 가지고 문제의 방향을 들었고,
당시에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어요.
넬슨 만델라는 억울하게 27년 동안 열악한 감옥에서 고통스럽게 지냈지만,
감옥에서 나와서 발표한 일성이 뭐냐면
'내가 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그러셨습니다.
진짜 용서는, 강한 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약한 자의 특징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의 사슬에 매인 죄수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공은, 거의 유혈사태 없이 정권 교체가 일어났던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심정을 전임 대통령, 후임 대통령이 깨달아 가지고
서로 주님의 마음을 가졌을 때, 역사적인 평화의 레짐 체인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듣기 위하여, 본문을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의 낮아지심을 말씀하고 있는데
주님의 낮아지심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빌2:6
'본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처럼 영존하시고, 하나님처럼 완벽하시고,
하나님처럼 스스로 계시고... 그래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등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근데 6b절에 보니까 '본체시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동등한 분인데, 당연히 동등함을 취해야 되는데,
동등함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거죠.
이 말씀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인간의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데서부터
사람의 대부분의 문제가 출발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인데,
사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에요.
이사야14장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아지리라'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가지고 그랬고,
바벨탑을 쌓은 것도 하늘에 닿아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고,
지금도 21세기에 우리는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가지고,
하나님과 키높이를 맞추고 싶어하는 것이죠. *인간 복제, AI 기술 등으로
근데 주님은, 하나님과 키재기를 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과의 동등한 특권, 그걸 원치 않으시고,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 이 주님의 심정을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위와 권세와 특권의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21세기 오늘 이 시대에도, 극단적인 AI 인공지능 시대,
그 다음에 어떤 유전자 조작... 이런 것들이 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하려고 하는 데서 파생된 어려움 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동등 됨을 포기 하셨는가요?
오늘 말씀 본문을 보니까 성육신 하셨어요.
하늘의 황태자가 이 땅에 내려 오셨어요.
내려 오시되, 모든 권한과 동등 됨을 포기하는 가장 취약한 곳으로 오셨어요.
여인의 태가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 여인의 태의 자궁 속으로 오셨어요.
또한 태어나신 곳이, 남들이 생각할 때
'메시아가 올 때 왕궁에 오실 것이 아니냐?'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처음에 헤롯 왕궁을 찾아갔어요.
근데 거기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요.
악한 폭군 헤롯 왕 치하의 땅에서 태어나셨어요.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특권과 권세를 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야말로 종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아를 죽이셨습니다.
◑2. 두 번째는, 진짜 겸손한 자에게는 적이 없고, 참 평안이 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니까, '사람으로 오셔 가지고 사람 같이 되셨고'
성육신을 입으셨어요. '사람 같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처럼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 인간,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거예요.
즉 인간의 감정, 수치, 고통, 절망, 인간의 분노, 인간의 부끄러움
이 모든 것을 다 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지위와 특권도 없이, 주님께서는 완전히 종이 되셨습니다.
이 종되심의 극치가 뭐냐?
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완전히 낮추고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스토리는 낮아진 스토리요, 어떻게 보면 망한 스토리에요.
믿지 않는 분들이 볼 때는 '이게 뭔가?' 하는 거죠.
오늘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잘 되고 성공한 스토리를 좋아하죠.
한국 사람이 미국에 이민 가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또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가지고 '코리안 드림을 이루었다'
또는 '개천에서 용이 났다' 이런 스토리를 우리가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근데 예수님은 완전히 반대로 오셨습니다.
유명에서 무명으로,
부자에서 가난한 자로,
하늘의 황태자에서 이 땅에 종이 되신 것이죠.
이런 스토리가 이 세상에서는 별로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독립적이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에게, 부모님들이
겸손을 가르치고, 낮아지는 것을 가르치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더더구나 예수님처럼, 그 겸손이
고통과 치욕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결과가 뭐냐? 9절에 보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그냥 극적으로 낮아 지셨는데, 극적으로 높아지신 것이에요.
신학적으로는, 자기 비움과 자기 비하를 하셨는데
하나님은 극적으로 예수님을 승귀시키셨습니다. *昇貴. Exaltation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죽음과 굴욕적인 자기 비하를 하셨는데
예수님을 높이시고,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게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자 여러분 한 번 물어 보십시다.
이 땅에서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진짜 순종하고, 진짜 낮아지고... 이렇게 살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몰라줘도,
나중에는 마음이 진지하게 통하면,
(주위 사람들이) 진짜 순종하고 진짜 낮아지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어떤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똑부러진 며느리가 들어왔어요.
그런 며느리가 영향력이 더 있겠습니까?
아니면 처음에는 좀 억울한 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참고 순종하고 겸손한 그 며느리가, 더 영향력이 있을까요?
겸손한 며느리로 자기 자세를 쭉 유지하면,
결국은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시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그 순종 잘 하는 겸손한 그 며느리의 눈치만 슬슬 살피게 되는 겁니다.
그가 진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 취급 한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우리가 오늘 이 주님의 깊은 진리와 신비를 깨달아 가지고
주님의 겸손과 주님의 거룩한 자기 비하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승귀시켜 주시는가? 이걸 제대로 깨닫게 되면,
우리가 이걸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이걸 잘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이에요.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 앞에서 낮추는 거예요.
주님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우리를 낮추면,
남들이 가마니 취급하든 말든 상관 없이
주님이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겸손한 자가 강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높여 주신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자성어로 인자무적 이라는 말이 있는데, *仁者無敵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다'
주님 앞에서 겸손하면, 우리는 겸자무적이 되는 것입니다. *謙者無敵
그래서 첫 번째 대지는,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들어보라'
두 번째 대지는, '진짜 겸손한 자에게는 적이 없고, 참 평안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시대의 시류는, 겸손을 싫어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요?
▲오늘 말씀한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의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걸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됨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예수님은 신성을 갖고 계셨어요.
물 위를 걸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바다와 자연도 잔잔케 하시고... 그 신성을 갖고 계셨어요.
신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마치 우리 인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린 다 연약한 존재 아닙니까?
우리가 이 인성을 포기할 수 없듯이,
주님은 주님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뭘 포기하셨는가요?
신성을 갖고 있는 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 되심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하나님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셨다... 이 말이에요.
스스로 신성의 위엄과 영광을 포기하신 것이에요.
자기 부인 하신 거예요.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를 받으실 필요가 없고,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는데,
불평 불만 없이 죽임을 당하시고, 십자가 수치를 당하시고,
오죽하면 8절에 보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신성을 가지셨지만, 신성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배척받으시고, 오해받으시고
친구들에게는 버림받으시고,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고
침뱉음과 조롱과 끔찍한 로마 군병의 채찍을 맞으시고
나중에는 처참하게 벌거벗기심 당하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것처럼 되셔가지고... 자기 권리를 포기하셨어요.
▲자, 이 말씀을 사도바울은 왜 본문의 편지에 쓰셨을까요?
권사님들끼리 서로 갈등하고, 힘들어하고, 서로 어려워하고,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는 것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여러분들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
가족들 간에 서로 주장이 강해서
가족들 간에 서로 싸우는 상황 때문에 화가 난 나머지,
어떤 사람들은 '에이, 집 나갈 거야'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에이, 교회 안 나가'
심지어는 '난 다락방에 안 나가' 그런 유혹에 빠졌다면,
오늘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이 말씀을 들어야 할 분은 이 자리에 없어요. 그게 참 시험이에요.
근데 이 말씀을 안 들어도 될 분들은, 또 듣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늘 말씀하시잖아요.
'있는 자는 더 부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꺼이 상처를 받고, 모욕을 참고,
자기 주장, 자기 의를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데,
'동등한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깜짝 놀랄 만한 진리를 하나 깨달아야 되는데 그것이 뭐냐?
예수님이 취하신 그 자리,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할 그 자리를 갖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수육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당하신 그 자리가
저와 여러분의 삶의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과,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에요.
▲저는 지난 40여 년이 넘는 목회생활 가운데서
수많은 아픔과 수많은 좌절들이 있었어요.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의 해결 방법은
내 주장과 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그 모욕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 예수님이 당하신 그 어려움의 자리,
그 자리가... 문제가 해결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의 모든 갈등과 충돌의 최선의 출발점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수치 자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주님이 당하신 그 수치의 자리가,
내가 출발해야 할 출발점이라니까요!
여러분 이것만 생각하면, 이 세상의 타협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은혜, 충만한 기적같은 해결 방법을 통해서,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신비한 비밀이 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그걸 목표로 한 건 아닌데, 극적으로 우리가 낮아질 때에,
주님이 극적으로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비우고 낮출 때,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Servant, 둘로스('종'의 헬라어)가 되니까
Servant King, Servant Lord 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을 경험하게 해주시고
하늘로 승귀하게 하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철저한 자기 비하가, 놀라운 거룩한 승귀가 되게 하시고
그야말로 Lord 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그 말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Lord 라는 뜻은, '권리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권리를 포기하고 Servant 가 되니까, Lord 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로드 Lord 가 되었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성 castle 을 소유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하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어떤 것이든 열 수 있는 키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성을 다스리는 권세와, 부요의 창고를 여는 키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웬만한 인생의 어려움을 맞딱뜨려도
여유가 생기고, 평안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자기 의와 자기 주장의 불순물을 처리하면,
하늘나라의 성의 부요를 주시고, 하늘나라의 부요의 창고의 문을 열 수 있는
영혼의 놀라운 극적인 부요함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어려움에 처해도,
우리의 프라이드가 상처받고, 자기 주장이 상처받는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 때문에 참으면,
하나님께서 희한하게도 여러분과 저에게 삶의 여유를 주시는 겁니다.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의 얼굴과,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안을 주는데,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여러분이 이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그림은 '이 평안과 이 여유와 이 하늘의 부요는
이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깨달을 수 없는...
타협하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신앙의 부요와 비밀이 되는 겁니다.
오늘 이 내용을, 여러분이 교리적으로만 알면 안 되고,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들이 체험하고, 적용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 설교 제목대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말씀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 가시겠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실력으로 일할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태도로 일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