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임하다 | 요나 1:1-3 | 24.12.30 - YouTube
◈말씀이 임하다 요나1:1-3 2024.12.30
오늘 (24.12.30) 부터 3주동안 연말연초 특별새벽기도회를 시작합니다.
우리 오늘 아침에 참석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박수 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왔는데 뽑혀서 여기 강대상 바닥 방석 위에 앉았습니다.
3주간 연속 새벽기도이니까 만만치는 않죠. 2024.12.30~2025.01.17.
오늘 보니까 새벽 4시 부터도 막 오시고, 4시 반 정도에 이미 주차장이 꽉찬 것 같아요.
이렇게 굉장히 일찍 오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3주 동안 체력 관리를 잘 하시고, 영적으로 집중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좀 가지치기 하셔야 돼요. 최상의 컨디션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고
3주 동안에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십시오' 그런 갈망을 가지시고 귀를 기울이시면
틀림없이 그 소원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즘 나라가 뒤숭숭 합니다. 연말에 참 안타까운 소식들도 있고 *무안공항 참사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 믿음 에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 될 것 같아요.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나라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특새에는 <요나서>를 우리가 살펴 볼 텐데요. 요나서는 짧은 책입니다만,
요나서는 일단 재밌습니다. 이야기 전개가 아주 흥미롭고,
사건 구성이 아주 극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들려줄 만한.. 할아버지들이 옛날에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같은
얘기가 바로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내용이 아주 단순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만만하게 볼 쉬운 책은 아닙니다.
자칫하면 핵심을 비켜나서 주변만 다루다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만만한 책은 아닙니다.
<요나서>는 선지서로 분류되지만, 다른 선지서와는 다른 구성입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서는 선지자의 개인 얘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메시지 중심으로 다루죠.
그런데 요나서는 메세지 자체는 아주 짧아요.
근데 서사, 즉 이야기들이.. 요나 개인의 얘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서가 예언서인 이유는, 심판의 메시지를 이제 담고 있기 때문인데요.
요나서는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요나서에는 믿기 힘든 사건들도 일어나죠.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래입니까, 다른 물고기 입니까?
이번에 <요나서>를 강해한다니까
우리 준비 팀들이 '붕어빵을 간식으로 준비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 물고기가 무슨 물고기냐?'
'또 물고기 뱃속에 3일 동안 사람이 갇혀 있었는데, 생존이 가능하냐? 좀 비현실적이다.'
그런 얘기들을 하죠. 그러나 그런 것은 요나서의 초점은 아닙니다.
뭐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물고기 뱃속의 3일의 생존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나서 안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소 도구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풍랑, 고래, 박넝쿨 등
요나서의 역사적인 배경은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죠.
요나는 솔로몬이 죽은 지 150년 후, 기원전 784~753년까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 통치 기간에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시죠.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앗수르의 힘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보냄 받기 전에, 이미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초보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말씀이 임했다' 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욘1:1
▲자, 우리가 요나서를 읽다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3천 년 전 인물인데도, 오늘날 우리와 너무 닮아 있습니다.
처음에 요나 선지자를 보면 '무슨 이런 선지자가 있나? 좀 웃기는 선지자다'
하고 비난하고 싶은데... 어느 순간부터 요나의 행동에서 나의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서를, 이제 제가 3주 동안 설교할 텐데, 여러분이 좀 놀랄 수 있을 겁니다.
'어, 목사님이 왜 내 얘기를 저렇게 구체적으로 하지?'
저는 누군가를 저격하기 위해 설교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요나를 만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내 안에 거북해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근데 피하지 마십시오. 내가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에 당황스러워 질 수가 있어요.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좀 더 솔직해지고, 정직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화 하는데 굉장히 미숙합니다.
내가 나를 모릅니다.
어쩌면 일평생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모른다' .. 참 안타까운 얘기죠.
무지 중에 큰 무지는, '자기에 대한 무지' 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혼란은 거기에서부터 옵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결혼 관계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에서도 그렇고, 사실은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알아?'
자기를 아는 것, 이것이 요나서가 우리에게 주는 큰 은혜입니다.
나를 좀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특새에 나오다가 안 나오시면,
이제 설교가 듣기 싫어서 피하는 것으로 간주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노출되는 거에 대해서 ]
부담스러워 하지 마시고, 당황하지 마십시오.
이 요나서는 성경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음이 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1:1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이게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얘기만 하려고 하는 거예요.
요나서에서 '여호와의 말씀'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서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근데 이 표현은 요나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렘33: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여 이르시되'
감옥에 있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에게 임하시는 거죠.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다'는 말은, 여호와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삼상3: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요나의 삶을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위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비밀을, 말씀을 통하여 땅에 드러내시는 거죠.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임하면, 그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모든 것은 여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 내가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느냐? 무엇을 하고 있느냐?' .. 는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한다는 거죠.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요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대조됩니다.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제 일하시겠다는 것이죠.
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끊겨 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닫히면, 말씀은 희귀해 집니다. 그때 영적 암흑기가 옵니다.
세상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기갈은, 말씀의 기갈입니다.
이스라엘의 암흑기는 언제였습니까? 말씀이 희귀한 때였습니다.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그 백성에게 평안이 있겠습니까? No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그 땅에 정의가 있겠습니까? No
여러분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경제적 이거나 정치적인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최악의 상황은, 온전한 말씀의 기갈이었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나 감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오감 중에 청각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뭘까요? 잠29:18
말씀이 안 들리니까, 자기 마음대로 방자하게 산다는 거예요.
귀의 용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들리지 않으면 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게 됩니다. 그게 감각적인 삶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운명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언제나 근본적인 문제는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1:1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되거든요.
근데 이게, 내 영이 깨어있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자, 욘1:1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요나의 존재가 살아나는 것은, 그에게 임한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면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곁길로 자주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방황을 합니까? 나의 삶을 견인해 줄 말씀이 없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누가 그걸 알려 줍니까? 세상의 어떤 도덕책이 그걸 알려 줍니까? No
답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길이 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나님이 소명을 주실 때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에게 권위가 주어집니다.
선지자라는 직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엘리 라는 제사장 시대에, 엘리 라는 제사장의 자리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말씀이 안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말씀을 받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 라는 말은
그가 실제적인 인물이고, 그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요나 라는 한 개인에게 다가 오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보여주죠.
하나님은 일 대 일의 관계에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요나 라는 한 사람을 지목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숫자나 기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좋아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목하십니다.
아브라함 개인에게 찾아가십니다.
'야곱아' 부르시며 야곱을 찾아가십니다.
감옥에 가면 이름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옷에 숫자만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겠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이 도시의 삶은 사람들을 수량화하고 물량화 하여 버립니다.
개개인의 이름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군중에게 흩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군중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이 설교가 군중에게 흩뿌리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한 사람을 주목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친밀하게 다가오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여러분, 말씀을 듣는 자는, 이 말씀이 나에게 말씀 하신다는 걸 알아요.
하나님은 흐릿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AI 음성과 같은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기계적인 말씀을 쏟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각 개인에게 친밀하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알고 계세요. 요나의 이름을 안다는 말은,
요나의 기질, 요나의 성향, 요나의 개성... 다 알고 계세요.
아마 여러분 요나서를 보는 내내 우리가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요나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요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오늘 나를 그렇게 잘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 채에 살고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소름이 돋을 만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무엇을 시사 합니까? 그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가정의 배경, 출생의 배경, 그가 살아온 삶의 스토리를 알고 계신다는 얘기예요.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 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익명의 사람에게 말씀을 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파트너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결혼이 왜 의미가 있습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삶이, 결혼의 관계를 통하여 깊이 엮여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파트너가 되느냐가 인생을 갈라 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요나의 삶과 얽히시겠다는 거예요. 파트너로 불러 주시겠다는 거예요.
이건 놀라운 일이죠. 이스라엘 땅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요나를 찾아 주셨습니다.
이건 특권 중에 특권입니다.
한 인간을 당신의 거대한 사역속으로 불러주신 거예요. 너무 영광,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냥 우리를 소모품으로 사용하시고 내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한 개인, 개인에게 매우 관심이 높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부르시고,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그 개인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는, 외면할 수가 없어요. 왜요?
그 말씀이 내 전 존재를 흔들어 놓기 때문이에요.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요.
하나님이 당신의 일에 강하게 나를 끌어 당기신단 말이에요.
여러분, 나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까? 로고스 만이 아니라, 레마의 말씀입니다.
한 개인에게 그 말씀이 임하는 순간, 그의 삶은 매우 중요해집니다.
저는 이번 특새 중에, 그런 경험을 여러분들이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이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이 말씀이 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성도라면, 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수천 년 전에 기록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창세기를 통해 대하는데,
어느 날 그 말씀을 읽는데, 그 말씀이 그냥 살아서 꿈틀거리면서
그냥 내 영혼을 흔들어 놓는 말씀이 됩니다.
내가 전율할 정도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들려주실 때,
그 말씀이 나의 세계 안으로 우리를 밀고 들어옵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바로 나에게 들려 주시는 경험을 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로) '듣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기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일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져야 합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것이 부르심 입니다.
말씀을 받은 자가 소명(받은)자가 됩니다.
말씀이 임한 순간부터 요나는 공적인 삶이 됩니다.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 수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은, 임할 때 목적을 가지고 임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목적을 향해 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에요.
오늘 요나에게 말씀이 임하시면, 그 임한 말씀은
이제 요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모세! 고통받는 내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하는 그 말씀이,
모세를 바로 앞으로 가게 하는 거죠.
여러분,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요나는, 그런 대로 괜찮은 선지자예요.
무조건 요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버리면 안 돼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
최소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선지자 였습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 말씀을 거부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애매하게 돌려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추상적이라는 말은 뭘까요? 뭔가 알듯 모를 듯한 거예요.
여러분, 말씀을 추상화시키는 것을 굉장히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설교를 하면서, 이 말씀이 추상적인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들려지는 것을
굉장히 우려합니다.
신앙의 타락은, 말씀을 추상화 시킬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만큼
너무도 분명한 말씀으로 오기 때문에, 모호하지 않습니다.
별 뜻도 없는 말을 공허하게 내뱉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 말씀은 너무도 실제적이고, 너무도 명확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거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한 번 잘 살펴보면, 너무도 선명하고 너무도 현실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내 마음 안에 공명이 막 일어나는 거예요. 막 떨리는 거죠.
그 내게 임한 말씀을, 내가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는, 그 말씀을 받게 되어 되고,
그 말씀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을 거부하려면,
내가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려고 하면, 내 논리가 하나님의 논리 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근데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하기란... 어렵습니다. 불가항력 적입니다.
혹시 말씀을 거부한다면, 그 대가가 어떻게 돌아올지는 Nobody knows!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력이 있습니다. 강한 구속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위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깊이 파고 들어오고,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에 속한 자가 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깊이 박혀 버립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말씀하심으로 나타납니다. 삼상3:21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가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얘기입니다.
가볍게 들을 얘기가 아니죠.
여러분 회사의 상급자가 나에게, 긴히 개인적으로 중요한 말이라고 던져 줬는데
내가 그것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마치 안 들은 것처럼요. No
직속 상급자가 나에게 긴히 개인적으로 한 말인데, 그걸 내가 무시할 수 있습니까? No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거부하고 거부해도
다시 밀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런 걸 요나서에서 우리가 계속 그걸 보게 될 거예요.
하나님은 말씀을 계속하시는 분이고, 그 말씀을 듣지 않아도 계속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끝내는 분이 아닙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알겠지만, 하나님은 끈질기게 찾아 오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고집이 세죠.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보다 훨씬 더 고집이 셉니다.
요나는 경우의 수를 많이 세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요나의 수를 다 읽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게임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계속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이 능력이에요.
말씀이 임할 때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 존재를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죠.
'여호와께서 말씀 하시되' 하면, 그 말씀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의 행위를 바꿔 놓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그 말씀을 받는 대상이 바뀌게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받는 순간, 우리의 삶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내 삶이 관련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에 개입할 때,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거죠.
그 말씀이 요나라는 한 인물을, 독특한 삶을 살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닙니다.
단순히 이론이나 담론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창조와 구원을 이루는 능력!
말씀 안에, 하나님의 행동이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바꿀 능력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위기에 빠지고, 혼란에 빠지고, 우리 인생의 모든 게 다 뒤얽혀 있고,
내 삶이 그냥 궁지에 몰려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개입하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1: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행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세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머리에만 들어가고 끝나 버리는 게 아니고
말씀이 들어오면 그 말씀이 우리를 행동, 반응하게 한다, 리액트 react 하게 한다는 거죠.
움직이게 한다는 거예요.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거죠.
말씀은 하나님의 의지인데, 우리의 의지를 이끌어 내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명확해요.
'네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 앉아 있지 마, 할 일이 있어!'
여러분, 설교를 들으면, 설교를 듣다가 벌떡 일어나고 싶어야 돼요. 그게 진짜 설교에요.
신앙은, 그냥 실로암 물가에 그냥 드러누워 있는 환자들 처럼이 아니라,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 가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구약은 '오라' 라고 한다면 Come
신약의 모든 핵심은 '가라'는 거예요. Go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가라는 거예요.
신앙은 그렇게 구체적 이라는 거예요.
가서 뭐해요? 외치라는 거예요.
여러분 누가 말하는 것입니까? 누가 전하는 것입니까? 누가 선포하는 것입니까?
말씀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를 하늘로부터 받은 사람이 전하는 거예요.
설교자는 뭐예요? 하나님의 임한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받은 게 없으면 전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불가항력 적입니다.
말씀을 받았는데 꼼짝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을 받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여기에는 뭐가 있습니까? 긴급성입니다.
다급성이 있는 거예요. 지체하지 말고 외치라는 거예요. 때를 놓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
이 말은 니느웨가 지금 끝 지점에 가 있다는 거죠.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하게 합니다. 심판의 직전에 있다!
그래서 여러분, 요나서에서 계속 우리가 느끼는 것은 긴박성입니다.
'지금 가라'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 안으로도 들어가 보세요. 긴박성이 있습니다.
내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지금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온 세계가 다 지금 한국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계엄, 대통령 탄핵, 무안공항 사고
한국이 잘 나가는 것 같았는데, 여러분 잘 나가는 게 아니에요.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고,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지금 뭐 비상 중에 비상이잖아요. 나라가 곤두박질을 치고 있는 거잖아요.
IMF 때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도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을 못 했어요.
갑자기 터져 버리잖아요.
우리 각자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가정도 들어다 보세요. 얼마나 벼랑 끝을 막 가고 있는지...
절망의 상태에서, 오늘이냐, 내일이냐?
그냥 긴박한 상태에서 하루도 편안하게 지낼 수 없을 만큼 살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은 끝 지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오늘 어쩌면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세요.
'일어나, 일어나! 지금 너가 그럴 때가 아니야!'
'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처음으로 돌아가, 빨리 일어나, 주저 앉아 있지 마!
네가 가야 될 곳이 있잖아? 그 가야 될 곳을 안 가니까 지금 뺑뺑이를 돌잖아?'
너에게 '외치라'고 하는 말씀을 주셨는데, 왜 침묵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왜 직장에서 침묵하고 있느냐? 왜 친구에게, 왜 부모에게 침묵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다 죽어가는데, 너만 평안하게 살면 되느냐?'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목적지를 지정하십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거죠. 정확한 방향!
요나가 가야 할 목적지를 알려주십니다.
왜 그곳으로 가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큽니다.
여러분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데, *오늘날의 이라크의 모술
앗수르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나라이고, 이스라엘과의 악연이 있었던 나라였어요.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그런 관계였죠. *국지전
근데 왜 하필이면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가?
아무래도 하나님의 판단에 오류가 있어 보이는 거죠.
'큰 성읍 니느웨'라고 했잖아요.
힘 있는 도시, 그 악독한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는 그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라고 하는데... 요나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죠.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합니다.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는 건 좋아요.
하나님은 그 갈망하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문제는, 그 말씀이, 내가 기다리고 있던 말씀이 아닌 거죠.
내가 원하는 말씀을 주시는 게 아니에요.
내가 듣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려 주시는 메시지가 있어요.
근데 문제는, 내가 듣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은, 다른 말씀이에요.
희한하게도 내가 듣고 싶은 말씀 보다,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을 하나님이 하실 때가 더 많아요.
그러면 뭔가 불편해지는 거죠.
말씀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기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이 충돌을 일으키는 거죠.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을 받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얹잖게 들려 진다면,
내가 바뀌어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수학 문제를 풀 때, 문제가 잘 안 풀리면
그때는 공식으로 돌아가야죠.
안 풀린다고 공식을 바꾸면 됩니까?
요나가 보기에는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은, 뭔가 자기 마음에 안 듭니다.
요나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는 것은
미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왜 거기 가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이 나하고 안 맞아요.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왜 자꾸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그러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오늘 찾아가라고 말씀하시지?
오랫 동안 소식을 끊고 살아왔던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희한하게 하나님은 내가 적금 탄 날만, 꼭 누구를 도와주라는 마음을 주세요.'
길어서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