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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하는 소명자

LNCK 2025. 1. 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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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하는 소명자 |  화특새 | 24.12.31 - YouTube

◈도주하는 소명자         욘1:1~3            2024.12.31.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욘1:1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이 임하신 말씀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이끌어갑니다.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혼돈과 공허 속에서 삽니다. 
삶이 그 자체로 혼돈이고 공허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 될지, 무엇을 해야 될지, 왜 존재하는지, 왜 밥을 먹어야 되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말씀이 없으니까 삶이 공허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에게 말씀이 임해야 됩니다. 
그 임한 말씀이, 나의 삶을 견인해 주는 거죠. 이끌어 가 주는 겁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내게 말씀이 임하면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을 하시고도,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 라고 사단이 시험을 걸어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욘1: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에게 말씀이 임했는데, 그 임한 여호와의 말씀의 내용이 위 2절입니다.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요나가 어디로 가야 되는지를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이 니느웨는 이방 나라죠.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개인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성경이 모든 나라와 백성과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어번역 선교사들이 아주 작은.. 파푸아 뉴기니 같은 곳의 
아주 오지 부족에 가서, 그 부족의 언어를 배우고, 문자를 만들어 주고, 
그 문자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의 자기 생애를 바친 선교사들!
그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거죠. 

우리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나라와 민족과 부족이, 하나님께는 너무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요나의 생각 속에 니느웨가 없어요. 니느웨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의 명령이 너무 생소했습니다. 심정적으로도 너무 먼 나라예요.

왜 이방나라, 그것도 하필이면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 내가?' 
그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일에 적임자는 아닙니다. 나는 내가 해야 될 일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면...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나의 입장이 한 번 되어 보십시오. 
'왜 하필 나입니까?' 

누구라도 요나에게 일어났던 일이,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지목하실지, 
어떤 일에, 누구를, 언제 지목하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요나도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사용하실 수 있고, 누구라도 불러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서도 소리 지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권리보다. 하나님의 권리가 더 우위에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내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인생을 간섭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삶을 강제 구인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근데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하나님만이 나를 가장 복된 길로 이끄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자꾸 의심하는 겁니다. 이 의심의 뿌리는 죄입니다. 
오늘도 사단이 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불러, 어떻게 행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요나가 '왜 나를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가?' 

한국 선교 초기에,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이 
'하필 왜 나를 조선에 가라고 하시나?'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회심 전에, 자신이 예수의 종으로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꿈에도! 

근데 어느 순간에 보니, 자기가 예수를 믿고, 자기가 지금 예수를 전하며 다니고 있는 겁니다.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 보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인 거죠.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것은, 그냥 흘려들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지.. 그건 그냥 정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신 것은, 그냥 부르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 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은 것입니다.  사55:9
우리가 보는 세계는 너무 작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계는 온 열방입니다. 

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당시 니느웨는 이스라엘과 적대적 나라입니다. 

요나 시대에 앗수르는 매우 강성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잦은 (국지적) 침략에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거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보기에는 앞으로는 망해야 될 나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1:2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독함을 알고 계십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
그야말로 이 앗수르 나라는 매우 교만하고 잔인한 민족이 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애국자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애국이 너무 심하면,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심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어디에서 주로 일어납니까? 
민족주의 혹은 혈통주의에서 오는 거죠. 

요나가 보기에는 니느웨는 망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관계는 악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를 그 땅에 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
이것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니느웨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은..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드러나지 않는 게 무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드러 내실 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교묘히 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아무 일이 없이 넘어간다면, 그건 저주입니다. 

여기에서 처음부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살짝 내비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방 나라 니느웨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니느웨의 드러난 죄에 대해서 
재앙을 베풀기 보다,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복이지 화가 아닙니다. 
요나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보게 됩니다. 

그에 반해 요나는 매우 편협되고, 매우 시야가 좁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은 너무도 넓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속은 유치하기 그지 없을 정도로 좁습니다. 
그의 그릇은 니느웨를 담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요나서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강이 크고 길게 흐르고 있습니다. 
너무도 크신 하나님이, 좁디좁은 요나를 기어이 품고 가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임했습니다. 
니느웨냐 다시스냐? 

 

이게 요나에게만 주어진 과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일평생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가기 싫은 곳이 니느웨입니다. 
'니느웨에 갈 사람은 나 말고 따로 있다'고 여깁니다. 
자기는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한 거죠. 

'나와 상관 없어! 나는 니느웨와 엮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자기가 외친들, 니느웨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가 말씀을 외쳐서 그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와도... 그건 큰 일입니다. 
그것 역시 요나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요나가 생각하는 것은, 니느웨는 그냥 망해야 됩니다. 
그래서 요나는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지 만이 아니고, 그 메시지를 주신 분에 대한 거부감 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의 마음을 모르고 말씀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하면, 요나가 도망 갈 줄도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거두어 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공은 요나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러나 요나가'
'그러나' 에 주목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요나의 반작용 입니다. 
그리고 이 반작용은 매우 노골적입니다. 
요나의 강한 의지가 여기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이 말씀이 3절에 두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강조하고 있는 거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한다'는 것은 매우 익숙한 장면입니다.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입니다. 임마누엘의 복이죠.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거부입니다. 
인간 스스로 복을 걷어 차는 행위죠. 가장 결정적인 실수 입니다. 

인간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살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온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대하16:9, 잠15:3
지구가 태양을 피할 수 있습니까? 어린 자녀가 엄마의 눈길을 피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닥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 사춘기 때 자녀가 어느 순간 부모의 얼굴을 피합니다. 반란이 시작된 거죠. 
의도적으로 눈길을 피합니다. 

자녀들이 엄마의 눈길을 피하면, 사고 친 겁니다. 
다른 세계에 눈을 뜬 거죠.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자기의 길을 걸어갑니다. 
인간의 죄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죠. 

'얼굴'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흔히 '임재'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히브리 인들의 표현 방식입니다. 
'그 분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게 결정이 됩니다.  
우리의 얼굴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요? 
근데 요나는 그 임재를 피했습니다. 죄인의 특성입니다.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대개는 사람들이 자기 고집 대로 살다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은...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어떻게 요나를 그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는 가를, 이제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보게 되죠. 

▲'요나는 이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 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요나는 이제 다시스로 도망 합니다. 
여기 '도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선지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나옵니다. 도주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면, 그 다음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순간, 여호와로부터 도망을 갑니다. 

다시스는 니느웨와 정 반대 방향입니다. 역주행 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늘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역사입니다. 
가능하면 멀리, 가능한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곳, 
그래야 자기가 자유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 요나에게서 탕자의 이미지가 겹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항상 도피극을 꿈꿉니다. 
결국은 다시 올 수밖에 없음에도 가출합니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거죠. 

여러분, 도망을 치면 우선은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도망자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도망자의 삶은 피곤합니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하면, 도망자는 계속 도망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도망을 치려고 하면, 많은 걸 가지고 도망을 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도망 칠 수가 있습니다. 

도망자는 늘 쫓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정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불안감,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애를 써도, 도망자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한 인간은 이렇게 불안합니다. 
그 불안을 우리는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그럽니다. 
인간의 힘으로 지울 수 없는 천형 과도 같은 형벌입니다. 

도망자의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여러분들 중에 도망 치며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어야 이 설교가 확 와닿는 데요... 

여러분, 빚에 시달려서 도망을 쳐 본 적이 있습니까? 
형사들이나 채권자들이 막 따라오는 데, 도망쳐 본 적이 있습니까? 
말이 아닙니다. 이건 삶이 아닙니다. 도망자의 삶은 삶이 아닙니다. 

도망자 들의 의식 안에는, 늘 누군가 자기를 쫓아오고 있다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요나는 누구를 등지고 도망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댜. 
추격 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요나서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추격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요나는 도망을 치긴 치는데, 매우 미숙 합니다. 

하나님이 잡으려고 하시면, 단숨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도 조절을 하십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요나의 학습 능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지만,
또한 동시에 선지자 요나를 구원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너무 사건이 빨리 마무리 되면, 요나는 전혀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빠른 사건 종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한 레슨 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와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자, 도망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계속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은 애당초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요나는 도망을 쳤지만,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죠. 

요나는 혹독한 대가를 치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순간부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의 관심을, 하나님의 눈을 벗어났다고 생각하죠. 
근데 그건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인간은 모릅니다. 

이게 인간의 우매함과 미련함이에요.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순간부터, 얼마나 위험한 삶이 시작되는가를, 사람은 모릅니다. 요나처럼요.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을 칠 수 있는가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 합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내가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모든 걸 아신다' ... 이건 매우 불편하죠. 
그러나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모였을 때, '하나님이 나의 모든 걸 아신다' 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 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시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도망을 쳤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곳에 이미 와 계세요.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와의 충돌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가급적이면, 니느웨와는 다른 방향으로,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다루심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죠. 

다시스로 가는 선택을 하는 순간, 하나님은 요나의 세계에서, 그의 우선순위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는 소명자의 길을 포기합니다. 
선지자의 호칭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껍데기일 뿐입니다. 

'신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어요. 그럴듯하게 자기를 포장 합니다. 
그때 그때마다 변신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미 사실상 모든 것은 끝이 났습니다.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3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욥바 항구로 갔는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마침'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요? 
이때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내 편으로 끌어당기면서 읽습니다. 
나를 지지해주는 말씀에 빨간 줄을 그어놓습니다. 

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 거죠. '오, 하나님이, 내가 그동안 수고했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준비시켜 주셨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네..'
하고 심하게 착각을 합니다. 

욥바 항구에는 여러 배들이 정박해 있습니다. 그 배들은 가는 방향이 다 다릅니다. 
그 배들은 태울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배를 타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중요한 선택이 욥바 항구에서 벌어주는 거예요. 
한 쪽으로만 틀면 니느웨, 반대쪽으로 틀면 다시스예요.

여러분 오늘 각자 우리 앞에도, 항상 니느웨 와 다시스가 있습니다. 선택은 내가 합니다. 
선택한 데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자의적 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근데 여러분, 인생이 어려운 것은, 올바른 선택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택을 할 때는 용기가 필요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준입니다. 
그 기준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으면, 선택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왜 자꾸 주저 주저하고, 선택이 힘들어지고, 갈등이 길어지는 걸까요?
말씀이 선명하게 안 보여서 그런 거예요.  

그 선택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말씀이 내 안에 닫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선택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합니다. 근데 선택을 하고 나면, 그 선택의 결과를 내가 받아들여야 돼요. 
선택하기 전에는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을 하고 나면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자,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 지불은, 의외로 혹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늘 경험하는 것들이죠. 

그러므로 무모한 선택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곳에 지금 다 모여 있지만 
선택한 배는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목적지로 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라고 모두가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라고, 같은 방향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 자기만의 배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가 욥바 항구에 도착했는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게 딜레마 입니다. 그 배는 아침 햇살에 유난히 빛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이것은 우연이 아니야, 내가 선택한 길이 맞아! 
어떻게 이 배가 이렇게 딱 준비되어 있지?' 
(*아마 그 배는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비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합리화의 고수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행동을 얼마든지 기막히게 포장하고 정당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죠. 
자기에게 스스로 설득하는 거예요.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밀고 올라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있는데, 
그 음성은 니느웨로 가라는 것인데,
근데 그 하나님의 음성, 그 임하신 그 말씀을 지긋이 눌러 버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묵살해 버리고, 자기의 논리를 내세웁니다. 
사람들은 죄를 그냥 짓지 않습니다. 자신을 먼저 속여야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거짓된 자기 확신,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고,
모든 환경과 상황이 자신을 밀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가끔 무엇인가 잘 풀리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뭐야, 잘 되잖아?'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요셉은 노예로 팔려 가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죠? 
왜냐면 그 길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가는 데도 잘 되고 있다면... 그건 형통이 아니죠. 
자기의 욕망이 강할수록, 눈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는 유난히 반짝입니다.
그 배를 타야 자신의 인생이 풀릴 것 같아 보입니다.

지금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이 다시스 행 배를, 
지금 놓치면, 자기 인생이 망가질 것 같아요. 
'바로 이 배야! 나는 이 배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나는 이 배를 타고 말 거야' 

유혹에 한 번 마음이 흔들리면, 겉잡을 수 없습니다. 
죄의 유혹에 한 번 무너지면, 그때부터 가속도가 붙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길에는 항상 다시스 행 배가 정박되어 있습니다
마침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탈래 말래? 이런 기회는 자주 찾아 오는 게 아니야, 이번에 놓치면 끝이야!' 

이런 유혹은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 벌어집니다. 
'쉽게 살고 싶어.. 어려운 길 니느웨는 아닌 거 같다. 
성공하고 싶어, 일단 돈을 벌어야 돼.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면 폭망이야!
나는 내 길을 가고 싶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때 다시스로 가는 배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다시스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록 니느웨는 더 꼴보기 싫어 졌습니다. 
반대로 니느웨로 가는 길은 위험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요나 자신의 착각입니다. 
막연한 희망.. 이번에는 성공할 것 같아요... 

여러분, 욥바 항구에는 호객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을 거예요. 
그럴 듯한 광고 깃발들이 펄럭였을 거예요. 
'이 배를 타라고, 이 배를 타면 당신의 인생이 대박을 만난다고!'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어디로 데려다 줄지는 아무도 몰라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여러분, 내가 스스로 추구한 삶은 안전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그 길이, 그 선택이..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말씀에 대한 태도가 느슨해집니다. 
한 때 성실하게 큐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쁜 일상의 쫓겨서, 큐티도 뒷전으로 밀립니다. 
성경 볼 틈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주일 성수도 느슨해지고, 예배의 감격도 식어 버립니다. 
영적으로 느슨해질 그때.. 분별력이 약해지죠. 

사명지 니느웨는 점점 멀어져 가고, 다시스로 가는 배는 유독 눈에 확 들어옵니다. 
각종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니느웨로 가는 배에는, 승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스로 가는 배는, 언제나 만석입니다.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다시스로 가는 배입니다. 

자기의 길, 자기가 스스로 이루고자 하는 성공의 길은 ... 언제나 그렇습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냥 적은 게 아닙니다. 아주 적습니다. 
좁은 길은, 그냥 좁은 길이 아닙니다. 아주 매우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적당한 종교 생활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면, 고민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길이 왜 외로운 길입니까? 
그쪽으로 가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여러분, 믿음의 길을 걷는데 외로우면.. 낙심하지 마세요.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면, 외롭지 않아도 됩니다. 
니느웨로 가는 배는 텅텅 비어 있습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어요. 
여기서 배삯을 줬다는 거예요. 다시스로 가는 배는 공짜는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부분을 특이하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배삯'은, '삯'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에 3인칭 여성 접미사가 붙어있습니다.  

이게 의미 하는 바는, 요나가 그 다시로 가는 배의 모든 경비를 
자기가 혼자서 다 지불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주1)

아마 요나는 자기 집을 팔았을 거예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재산을 다 정리해서, 마치 탕자와 비슷하게, 타국으로 도망가려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스라엘에 계속 살 수는 없었다는 거죠.
어디 타국에 도망가서 살아야 할 정도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대가가 큰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불순종의 대가는, 요나의 상상보다 더 컸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그 배를 전세 내어서 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예요. 
요나는 자신의 뜻을 실행에 옮기는 일에,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 
이제 다른 손님들이 다 탈 때까지, 배가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얹어 주면 언제든지 다시스로 가는 배는 출항합니다.
돈이면 어디든 간다는 것을, 욥바 항구에서 입증시켜주고 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탄 요나는 
이미 오래 전에 다시스 행 배를 타기를 마음 속으로 꿈꿔 왔을 거예요.

그렇다면,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는, 때마침 거기에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 배는 오래 전에, 이미 그가 욕망하고 있었던 것이예요.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 먼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특별새벽기도회 동안에도, 우리 자신을 자세히 살펴야 돼요. 
우리의 의식의 저편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는.. 유혹하는 그 무엇.. 숨어 있는 그 무엇..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지금 우연히 올라탄 게 아닙니다. 
요나의 마음 안에는, 이미 다시스로 가는 배는 정박해 있었습니다. 

오래 갈망해 왔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을 뿐입니다. 
요나는 아마 자기 집을 팔았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집 팔고 외국에 이민가듯이 한 거죠)
돈을 쓰는 걸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돈을 어디에 썼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곳에 썼습니다. 

돈을 벌어서 욕심부리며 쌓기만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더 잘못되고 위험한 일은, 잘못된 방식으로 돈을 쓸 때에요. 그 돈이 폭탄이 되는 겁니다. 

타락이란 무엇입니까? 힘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곳의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자, 요나의 도피극에는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비밀이 많은 사람들은, 기밀 유지비가 많이 듭니다. 
쓰지 않아도 될 돈들이, 거기에 막대하게 들어갑니다. 

탕자가 오래 가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이 다 날라가 버립니다. 
요나가 막대하게 (배의 전세비를) 지불했지만, 그 배를 타고 목적지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다시스행 배에 올라탄 순간부터, 요나의 일탈은 가속화 됩니다. 
그는 소명자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갈 때까지 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세계의 막장 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을 다 포기 해도, 소명을 버리면 안 됩니다. 신자는 생존이 목적이 아닙니다. 
소명이 그 목적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소명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상은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의 비즈니스를 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타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버리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추락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길을 거부하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고집하면, 
그것이 타락입니다. 

여러분, 소명의 길은 우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소명의 길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핵심적인 주제는, '얼마나 어려운 가'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무엇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 인가? ... 이것의 차이입니다. 
인생에 어렵지 않은 게 어디 있습니까? 

요나는 기어이 니느웨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바가지의 물은 이미 엎지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의 도주 극이 시작됩니다. 
드라마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요나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도망자 요나는, 어디까지 도망을 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 혹시 지금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도망 중인 분이 계십니까? 
한 때는 열심히 했어요. 누구보다도 뜨거웠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겨우 교회 출석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좋은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남이 보기에는 주일을 잘 지켜요. 예배도 참여해요.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이곳저곳 참여도 하고, 선교도 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스로 가고 있는 배에 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그 말씀을 오래 전에 반납하신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유리할 때만 아멘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못 들은 척하고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딱히 나에게 임한 말씀이 없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쓴 경험도 
너무 오래 되었다면... 어쩌면 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다시스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다시스는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요나서를 살펴보는 내내, 우리는 우리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좀 무거울 수도 있고, 쉽지 않은 작업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겉으로는 우리는 니느웨로 가는 것 같이 보일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다시스 행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다시스 행은 만석입니다. 니느웨는 승선 인원이 매우 적습니다. 
여러분, 다시스는, 겉으로 보면 우리를 행복한 길로 이끌어 주고, 
내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줄 것 같지만, 
그리고 그 길이 가장 안전해 보이지만, 다시스로 가는 배는 매우 위험합니다. 

만약에 다시스 행 배를 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지금 바꾸어 타십시오. 
아주 은밀하고 위험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주극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추격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시스로 가고 있는가요, 아니면 니느웨로 가고 있는가요? 

나에게 임한 그 말씀,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내 삶의 가장 신앙의 절정기에 주셨던 그 말씀, 그 소명, 그 부르심, 
그 확실한 하나님의 음성 앞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의 기도는 
'나는 다시스로 가고 있는가? 니느웨로 가고 있는가?'
'나는 My Way로 가고 있는가? His Way로 가고 있는가?
'혹시 나는 하나님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내 얼굴을 들어, 그 분 여호와의 얼굴을 향하여 
우리의 시선을 다시 맞추는 이 새벽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한 번 크게 외치고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며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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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1:3

배삯에, 그냥 배의 삯이 아니라
‘삯’에 히브리어 여성형 접미사 ‘아’가 붙어있다.
이럴 경우 ‘그녀의 배삯’이 된다.

그럼 ‘그녀’가 누구인가?
배를 여성으로 볼 때, ‘배의 삯’을 준 것이 된다.
‘배 전체의 삯’을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여러 명이 타고 가는 배를, 
요나가 마음이 급했는지, 다른 사람 배삯까지 내고
배를 빨리 출항시킨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요나가 너무나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자기 집을 팔아서, 배삯을 지불했는데, 
아예 선원들의 비용까지 다 지불해서, 한 마디로 배를 전세 내었다고도 유추 가능하다.
그만큼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던 것이다.

이 내용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_M1r0G5Yo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