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을 잃었을 때 삼상9:1~14 2024.12.29.설교녹취
오늘 사무엘상의 세 번째 주요 인물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엘리, 두 번째는 사무엘, 세번째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입니다.
◑삼상9:1절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워주시기 전에, 한 가문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를 소개해요.
그런데 기스가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
이 의미가 무엇인가요?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베냐민 지파는, 사사시대에 지파 자체가 완전히 소멸될 위기를
경험했었어요. 베냐민 지파 경내인 기브아 라는 도시에서
한 레위인의 첩을, 그곳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윤간해서 죽이는 대형사고를 쳤어요.
그것 때문에 나머지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를 징계하기 위해 모이게 되고
이 내전에서, 베냐민 지파 남자들은 거의 다 멸절이 될 정도까지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당시 상당히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부친 기스가 '유력한 인물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원어적으로 보면 '용맹한 전사'라는 뜻입니다. *a mighty man of valor
'용맹한 전사'라고 불리는 지도자였다는 거예요.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에도 보면, 강력한 용사들이 많은 전투력이 상당히 강한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상당한 용맹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사울의 집안 배경을 이렇게 출중한 집안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9:2절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그런 기스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사울입니다.
사울을 '준수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 '준수한'으로 표현했는데,
히브리 원문에는 young and handsome 이란 뜻이예요.
그야말로 외모로는 군계일학이었던 거죠. *닭무리들 중에 학(두루미) 한 마리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게다가 키도 굉장히 훤칠하게 커서, 모든 백성들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다는 거잖아요.
그럼 적어도 190~ 2미터는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인싸 중에서도 핵인싸 였습니다.
인사이더 중에서도 가장 핵심 인물이었다는 거죠.
외모로는, 딱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외모를 보는가 봐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고대 중군동에서는 왕의 신장과 외모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왜냐면 적국과 매년 정기전(전쟁)을 치르는 경우들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면, 자기의 백성들, 군인들을 다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는데
전장에서 왕이 키가 커서, 어디서나 잘 보여야 됩니다.
'우리 왕이 어디 계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왕이 훤칠하게 키가 크고, 사람들이 주목할 만하고, 신뢰할 만한 리더 역할을 해줘야 했어요.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아실 겁니다.
전설적인 왕이었죠. 그도 신장이 상당히 컸고 영웅적인 면모를 많이 보였던 인물로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고대 중군동의 왕들은, 대부분 이런 캐릭터였던 것이죠.
▲성도님들 중에 종종 이런 질문들을 하세요.
'하나님은 전지하시니까 사울이 실패할 걸 아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울을 굳이 왕으로 세우셨는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대답을 찾아본다면 이렇습니다.
1)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딱 원하던 그 사람이었어요.
이방나라의 왕들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와 멋있다' 이런 사람이었죠.
2)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장 못난 사람이 아니고,
가장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3) 사울은 외모도 출중하지만, 심성 또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나귀를 찾아오라고 할 때, 그는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처음에 왕으로 선택받았을 때도, 그는 쌓아놓은 물건들 뒤에 '숨는'
한때 겸손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실패할 사람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왕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세워주셨는데,
그 사울이 그 후에 스스로 실패의 길을 간 거예요.
성경은 운명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실패할 것이라는 운명론
성경은 '인격적 신앙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결과론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건강한 과정을 만들어 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정말 전도 유망한 청년을, 왕의 후보자로 세워주셨어요.
그리고 이 사울은, 정확하게 사람들의 기도의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는, 선왕이 될 수도 있었던 거죠. 하나님은 그의 실패를 예정하지 않으셨죠!
◑9:3~5절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
3~5절을 보면, 사울이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어요.
지도를 보면, 베냐민 지파 거주지가 중부 산악지대로서 험한 지형입니다.
거기서 북쪽 에브라임의 산지를 다 다니고,
베냐민 지파 땅도 다 다니며 찾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한 40여 킬로를, 이 중부 산악지대의 험한 지대를 돌아다녔다는 거예요.
제가 이걸 보면서, '아니 그 나귀 몇 마리 찾느라고 이 난리를 쳐야 되는가?'
이런 질문이 드는 거죠.
물론 아버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귀였겠지만요.
약간 시대마다 변천사가 있긴 하지만,
고대 중근동 문화에서 '나귀'는 사람들이 아끼는 동물이었습니다.
나귀는 말에 비해서는 볼품도 없고, 크기도 작고, 송아지만 합니다.
그중에서도 암나귀는, 성격이 온순하기 때문에 훨씬 더 선호하고 고가였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끼던 암나귀들 몇 마리가 탈출했기 때문에
이걸 찾아야 된다고 아들 사울을 찾으러 보낸 거예요. 물론 재산이기도 했고요.
▲자 이 시점에 청년 사울은 정말 왕이 될 만한 제목이었느냐?
이것을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한 다섯 가지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청년 사울에 대해서 칭찬 일색입니다.
1) 막내 지파 베냐민 출신이지만 유력한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2) 전쟁을 이끌만한 수려한 외모,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그런 눈에 띄는 외모를 가졌죠.
인품도 이 당시에는 괜찮았습니다.
3) 사울은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최선을 다했어요.
4) 부친의 평안을 오히려 걱정을 하는 효심이 깊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씨도 좋았다 라는 거예요.
5) 뒷부분에 나오는 얘기인데, 사환의 조언도 경청하고 따를 줄 아는 겸손함까지 있었죠.
거의 완벽하지 않나요? 이런 남자를 만나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사울 청년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망가졌을까?
어떻게 이런 좋은 사람이, 폭군이 되고, 악인이 될 수 있었을까?'
여러분, 아무리 좋은 사람도, 정치판에 들어가면 변질된다고들 말하죠.
착한 사람들도 세상 풍파에 닳고 닳다 보면,
정말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더한 사람들이 되는 경우도 있죠.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초심을 지키게 되기를 바랍니다.
◑9:6~8절은 그냥 줄거리만 살핍니다.
사울과 사환은, 아버지의 나귀를 그렇게 열심히 찾아서 40여 킬로 돌아다녔는데
(오늘 본문에는) 못 찾았어요.
사울이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못 찾으니까
그 다음엔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하죠.
그때 사환이 주인 사울에게 '아니 이곳에 잘 알려진 하나님의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에게 우리의 갈 길을 물어보면 어떻겠습니까?'
사울이 먼저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환의 말을 듣고 '그럼 그렇게 하자'
그래서 은 1/4 세겔을 사례로 주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은 1/4세겔은 11.5그램인데, 현 시세로 18,000원 정도죠.
그래서 '이거라도 우리가 사례로 주고 길을 여쭤야되겠다'
◑9:9절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 이게 다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언이라고 하면 미래사를 얘기하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성경은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예언의 핵심은 '대언'입니다.
그것이 과거에 대한 해석이든, 현재에 대한 선포이든, 미래에 대한 예고이든 간에,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이것이 예언(대언)의 핵심이에요.
이들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대언자들이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칠 때,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고 기도할 때,
여러분 안에 그 말씀이 믿음으로 선포가 되어서,
대언과 예언의 세계가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때로 교회 안에서, 예언이 교회를 좀 어지럽게 하는 사건들이 가끔 있다 보니까,
현대교회에서는 예언 은사를 상당히 꺼려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누차 말씀드리지만,
'모든 참된 예배는 prophetic worship 예언적 예배로 가게 되어 있다'라고 봅니다.
대언자 내지 전언자라는 단어로 쓰이는 영어의 '헤럴드 Herald'라고 있죠.
이 헤럴드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 중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뭐냐면 '선포자'입니다.
선포한다는 거예요.
왕에게 들은 말씀, 왕에게 전달받은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선포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또한 그 기록된 말씀을 약속으로 받은 성도들이, 그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면
또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세 가지를 선포하고자 하는데요. 여러분 마음에 동의가 되시면
아멘으로 화답하시면 좋겠습니다.
「2024년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실패와 상처와 절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씻겨질 지어다. 아멘!
2024년에 우리가 경험한 모든 승리와 성공과 영광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영광이 될지어다. 아멘!
2025년 새해에 개인과 기업과 나라가, 아무리 역경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가 경험될지어다. 아멘」
그래서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또 그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예언적 예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당이라든지, 하나님이 사실 함께 하시지 않는
그런 직업적인 예언자 일을 하시는 분들을, 여러분이 조심해야 되는 이유는 뭐냐면,
그들도 문의하러 찾아가는 사람들도, 자기 미래사가 궁금한 거예요.
그리고 이들 무당, 점쟁이들도 미래사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갖고
장난을 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예언은 대언이 그 핵심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전해지는가?
아니면 이 사람이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걱정과 갈망이 있어서
그 목마름을 갖고 사람을 심리조정을 하는 것인가?' 이건 다른 것이에요.
하나님 한 분만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점집에 안 찾아가도)
하나님은 책임지시고 그들을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사울입니다. 사울의 이름의 뜻은
'간구하다. 요청하다' 입니다. (*이 설교의 하이라이트 단락)
그러면 사울이 갓난아기로 태어났을 때, 부모가 하나님 앞에 간구해서 얻은 아들인 것 같아요.
와 놀랍게도 사무엘과 탄생이 거의 같은 거예요. 한나가 기도해서 얻었잖아요.
부모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요청해서 태어난 아들이었어요.
사무엘도 하나님께 인생의 길을 묻는 사람이었잖아요.
다윗도 하나님께 인생의 앞길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었다고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울도, 하나님께 자기 인생의 앞길을 물었어요. (나귀 건으로)
그와 사환은 사무엘이 있는 성읍 라마로 가서, 그에게 질문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사울의 인생 자체도, 부모의 기도 응답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기도 응답으로 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인생을 볼 때, 여러 가지 면모에서 하나도 문제가 될 게 없어요.
그런데 왜 그는 나중에 사고를 쳤을까요?
그리고 왜 자기 과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했을까요?
여러분 다 괜찮은데, 제가 본문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한 가지 우려되는 측면이 있더라고요.
그건 뭐냐면, 지금 그가 기브아에 있는 자기 집을 나와서
자기 집 주위 40KM를 돌아다녔잖아요.
그러다가 사무엘이 있는 라마 성읍을 지나가게 됐는데,
자기 사환도 알 정도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삼상3:20
사무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 인생의 진을 뺄 정도로 40KM를 헤매고 돌아다녔으면,
'여기 라마에 있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여쭤봐야 되지 않나?'
이 생각을 본인이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울은 그런 생각이 전혀 안중에 없었다는 거죠.
그것이 평소에 자신의 인생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는 거죠.
'하나님께 질문하자'고 사환이 이야기했을 때
비로소 사울이 동의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의 근간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결국에 그가 왕의 지위에 오르고, 여러 가지 죄악의 유혹들과 교만의 늪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시지 않는 한, 결국에는 아무도 왕을 건드릴 수가 없잖아요.
내 인생에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아니고, 하나님이 근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울은 왕이 되는 순간부터, 계속 하나님과 더 멀어져 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하세요. '저도 한때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새벽 기도도 했고, 철야 기도도 했습니다. 제가 청년부 회장도 했습니다.
여선교회 임원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했는데, 안 들어주셔서 너무나 실망했고,
나는 이제 기도도 포기하고, 열심히 믿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무당처럼 점괘를 그 자리에서 내주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라는 저자가 <제자입니까> 라는 책을 썼어요.
이게 굉장히 오래된 고전적인 책이에요.
지금 읽으셔도 물론 좋은 책인데, 이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하죠.
「하나님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내가 원하는 물건을 바로 내주시는
자판기가 아니시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자판기처럼 요구를 하는 건가요?
여러분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내가 부모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누차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만약에 내 부모님이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허락을 안 해주신다...
그러면 횡하니 집에서 뛰쳐나와서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건달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에게 내 도움을 요청하겠냐고요?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을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한 해의 완성의 시간, 이 마지막 시간과 *2024년 연말
여러분의 또 한 해의 새로운 시작점의 시간에
하나님께 자기 인생의 시간을 구별해서 드리세요.
인생의 여지가 있어야만,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하나님께 음성을 듣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금 이 얘기를 왜 할까요? 특새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3주도 아니고 올해는 딱 2주간 이예요.
하나님께 2주간의 시간을 구별해서 드려보십시오.
솔로몬처럼 일천번째를 드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윗처럼 유대광야에서 10년을 헤매고 다니며 매일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지는 못할지라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일하실 수 있는 여지를 드리세요.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의 주권, 세상의 주권, 역사의 주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내 시간의 주권을, 내 시간의 우선순위를 그분께 드려보세요.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체험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런데 무관심하면, 사울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고도 결국 실패합니다.
◑9:10절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가니라
사울이 만약에 사환에게 '됐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
이랬다고 하면, 그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질문하기로 한 이 결정 때문에,
그의 인생에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 초대 왕이 되는
삶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 기도의 동역자들이 함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의 곁에, 하나님께 질문하고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감사한 거죠. *사환
◑9:11~14절 '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사울은 지금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성읍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초저녁에 (덥지 않을 때) 마을의 소녀들이 우물물을 길르러 다 같이 나오게 됐습니다.
근데 제가 이 장면을 보다가, 어제 새롭게 감동을 받은 것은,
'야 이 동네는 어린 소녀들도 예언적 선포를 하는구나'
소녀들이 사울에게 당연한 안내를 해 준 것 같지만,
여러분, 사고방식이 굳어지거나 감정선이 메마른 사람들은
이렇게 답변을 친절하게 해 주지 않거든요.
'난 모르는 일이라고.. 다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내 알 바 아니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그리고 '지금 올라가면 딱 만나게 될 거다'
어떻게 그런 예고를 했을까요?
그리고 소녀들이 말한 그대로 일어납니다.
사울이 올라가는데 사무엘이 마주 와서 서로가 딱 그 자리에서 만나는 장면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1516교회가 이런 긍정적이면서도 친절하고,
영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이 2024년 마지막 주일이기 때문에, 본문을 보통 새로운 다른 본문을 하는데,
제가 고민을 하다가.. 삼상 9장을 보니까, 이 내용이 딱 연말에 맞는 본문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을 나눴어요.
▲두 가지로 정리를 하겠는데요.
1) 첫 번째,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는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고, 영혼의 원점으로 돌아가셔야 돼요.
그런 경험이 있는지 모르시겠어요. 여러분, 산에서 등산을 하다가
등산로에서 이탈하고 길을 잃어버렸을 때, 사람들이 보통 당황하고, 빨리 길을 찾으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막 돌아다녀도 길을 못 찾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조난 신고하고, 그리고 주어진 디렉션대로 그다음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인생을 살아가다가 지금 방향 감각을 상실했는데, 길을 잃어버렸는데,
세상적인 방법을 계속 찾거나.. 사람들에게 연락하는 게 아니라..
딱 멈춰서서, 내 영혼의 원점,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오셔야 돼요.
기도하고... 내가 분주하게 방법을 찾는 것을 일단은 멈추고,
하나님께 질문하면서,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을 건강하게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나는 작은 것을 요청하려고 주님 앞에 나왔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인생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사울이 암나귀 몇 마리를 찾으려고 헤매다가, 결국엔 사무엘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왜 딱 그 타이밍에, 그 집에서 나귀를 잃어버리게 됐을까?'
자기 집을 나와서.. 자신의 안전지대를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잖아요.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 왜 내 인생에 이런 경제적인 문제가 생겼습니까?
왜 이렇게 자녀가 방황하는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왜 내 인생에서 이렇게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겼습니까?'
그게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러 나왔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계기로, 내 인생에 더 큰 그림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나는 그 작은 문제 하나를 해결하러 나왔지만,
하나님은 내 인생에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언제든지 손해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더 큰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