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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의 풀과 같은 핍박자들

LNCK 2025. 1.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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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ramos/80049081138

 

지붕의 풀과 같은 핍박자들            시129:1~8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들 가운데 열 번째 노래로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 129편은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는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괴롭힘을 당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129:1~2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초기부터 애굽, 모압,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암몬, 불레셋, 시리아, 앗수르,

바벨론, 이런 여러 나라, 또는 부족들의 발에 계속해서 짓밟히면서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중근동 지역 열강의 입구에 놓인 흙털이개"라고 합니다.

강대국이 일어설 때마다 이스라엘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면 그 흙털이개는

닳아 없어져야 하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신기한 흙털이개는 닳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출3:4). 떨기나무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불이 붙었으니 타 없어져야 할 터인데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의 거센 불길들 속에서도 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납게 타오르던 불길들은 연기를 내고 꺼져 버렸는데 이스라엘이라는 떨기나무는 의연하게 서 있습니다.

 

이것을 시편의 신앙시인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2

 

여기서 "내가" 하는 것은 먼저 이스라엘을 말하지만, 그 다음에는 교회를 말하고,

나가서는 예수를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발생 초기부터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이 아무리 교회를 없애려고 해도 교회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약한 듯하면서 강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지는 듯 하면서 끝에 가서는 이기는 것이 교회입니다.

 

없어질 듯하면서 뒤에 가서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랬습니다.

청교도들이 그랬습니다.

 

일제 시대 때 한국의 교회가 그랬습니다.

중국의 교회가 그랬습니다.

북한의 교회도 그런 것이 증명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목양교회도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알고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이 시편 129편이 알려주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들은 아주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네로 황제는, 기독교를 잔혹하게 박해한 임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치세 때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처음으로 박해하기 시작했고,

AD 67년경,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비슷한 시기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동시에 네로는, 가장 비참하게 죽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서 어느 해방된 노예의 별장에 피해 있다가    *AD 37~68

31의 젊은 나이로 자살했습니다. 자기 목을 자기가 찌를 용기가 없어서

칼을 목에 대고 에파프로디투스라는 시종을 시켜서 자기 목숨을 끊게 만들었습니다.

 

네로라는 이름은 지금도 매우 비참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적 그리스도나 흉악한 짐승들이 많은 경우 네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계13:18절에 나오는 짐승의 숫자 666도 네로라는 이름의 알파벳을

숫자로 환산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네로는 왕이 되어 처음 5년 동안은 좋은 정치를 했는데,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다가, 얼마 못 가서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네로보다 기독교를 더 심하게 박해한 황제가 있었는데, 도미티아누스입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기를 신으로 부르게 하고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도미티아누스 때 체포되어, 밧모섬에서 유배당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에 시달리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왕비가 근위대장과 결탁하고 반역을 꾀했고, 황제는 암살당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도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하던 임금이었습니다. AD 51~96 (45세)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면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세력 치고 비참하게 되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유대나라에서 최초의 박해자라고 할 수 있는 헤롯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잘 된 경우가 있는지 역사와 현실 속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현실 속에서 찾았다면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얼마 있지 않아 어렵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들은 비참하게 됩니다. 수치를 당하여 물러가게 됩니다.

 

일본 사람들이 남산에 신사를 지어 놓고 기독교인들을 강제 참배시켰습니다.

몇 해 전에 남산에 있는 미션 스쿨인 숭의여자고등학교를 방문했더니

교목이 학교의 여러 곳을 안내하면서

여기 학생 화장실이 바로 그 신사가 있던 자리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시129: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은, 비참하게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지붕 위의 마른 풀처럼 말입니다. :6

 

당시 중근동 지방에서는 사람끼리 만나면, 반드시 축복을 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샬롬이라고 축복하지요. 요즘에도 아랍인들은 ‘살라말리쿰’ 하지 않습니까.    주1)

 

이제 곧 가을이 되어, 논밭에 곡식이 익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들녘을 지낼 때는 반드시 한마디 찬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8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또는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 지나갈 때는,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지나갑니다.

 

거리에서 걸인들이 구걸을 하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면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런 축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은 이렇게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가) 대치동 강남사회복지학교 임시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릴 때

교회 건축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시위가 격렬했습니다.

4층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에 상처도 되고, 화도 났습니다.

 

여러분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저 사람들이 나중에 어떤 벌을 받으려고 저러나?'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느 기독교 기업의 노조가 두 달째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 경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기업입니다.

회사측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노조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한지

제 삼자로서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파업을 하고 있는 분들이 두 주일 전 월요일에 회사의 예배실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두 동강이 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보도를 대하면서도 마찬가지의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전쟁을 할 때도 종교시설과 문화재는 파괴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전쟁 사진 가운데 도시가 심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교회는 의연하게 서 있는 사진들이 있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학생 때 같은 교회에 다니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 때 그 친구가 목사님을 여러 가지로 많이 못 살게 굴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행복하다고 하기 어려운 삶을 내내 살고 있습니다.

그의 황폐한 삶을 볼 때, 저는 늘 옛적 그 일을 생각하곤 합니다.

 

▲본문 시편 129편은 아주 뒤늦게 지어진 시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지어진 성전에 올라가면서

시인은 자기 민족이 겪은 수많은 고통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3절의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이 말씀은 노예 생활을 하면서 채찍에 맞아, 등이 밭고랑처럼 된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심한 고생을 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은 저주를 받아 패망한 것을 생각하면서, 깨달은 진리를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이제 한 달 조금 있으면 우리는 새 성전의 교육관에 올라가게 됩니다.

교육관에 올라갈 때 우리도 마찬가지의 노래를 불러야합니다.

거의 완공 단계에 들어선 교육관에 올라갈 때마다

이미 이 노래가 마음속에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겪은 수많은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되 기억은 해야 합니다.

기억은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고 믿음에 유익을 줍니다.

망각은 우리를 안일에 빠뜨리고 다시 그런 고통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새 성전에 입당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 능력과 사랑에 힘입어, 나머지 공사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는다, 이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비참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 시편 129:1~4절까지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고,

5~9절까지는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시편 129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교회를 비난하던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지붕 위의 풀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붕 위의 풀’은 여름 한 때는 왕성한 것 같아 보이지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그대로 두었다가도 너무 보기 싫어지면,

또는 대청소를 할 때, 또는 건물을 수리할 때는 말끔하게 뽑아내고 거둬냅니다.

 

믿는 사람들은 ‘지붕 위의 풀’이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제(유관지 목사)가 설교 시간에, 참 교육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경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자기가 체험한 것이

가장 실감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어교사로 재직

 

이 학교는 6․25 사변 직후인 1953년에 세워진 학교인데 전영창 이란 분이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와서, 1956년에 이 학교 제 2대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분이 학생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불철주야 일하는데

교육위원회와 마음이 맞지 않아 마찰이 잦았습니다.

 

교육위원회에서 소집하는 교장회의에 딱 한 번 참석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가지 않았습니다.

교육위원회에서 괘씸하게 생각하고

(학생들이 삼선개헌 반대 데모를 한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몇 가지 행정적인 절차를 어겼다는 이유로

1970년 4월에 이 분의 교장임용승인 취소처분을 했습니다.

 

면직된 상태에서 졸업식이 다가왔는데, 이 분이 전임 교장의 자격으로

졸업생들에게 훈화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렇게 하면 불이익 받을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권면했는데,

내가 기른 학생들이 졸업하는데 가만있을 수 없다고, 정성을 다해서 훈화를 준비했습니다.

 

그 훈화 원고 전체를 학교 신문에 실어서,

졸업식 날 졸업생들과 학부형들과 손님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사실은 그 훈화를 나눠주기 위해서 학교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국어교사로서 그 신문을 편집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일이 급작스럽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제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250리 떨어진 대구의 인쇄소에 왔다 갔다 하면서 신문을 만들었는데,

훈화원고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정의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은 없습니다.

물론 얼른 보기에는 악의 세력이 언제나 강하고

의의 세력은 언제나 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좀더 상세히 보면, 악의 세력은 언제나 지고

의의 세력은 승리했습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일본이, 일시는 전 세계를 지배한 것 같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름날 지붕 위에 난 풀과 같습니다.」

 

그 졸업식날 훈화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훈화의 제목은 "새 역사를 창조하자"였는데,

이 대목을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큼직하게 뽑았습니다.

 

'악한 세력은 여름날 지붕 위의 풀과 같다' 이것 참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경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6

 

그 분이 성경을 많이 읽는 분이기 때문에

성경에 꼭 한 번 나오는 이 말을 찾아내서 적절하게 사용한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이렇게 지혜로워집니다.

 

이 설교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신문을 다시 찍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악한 세력은 여름날 지붕 위의 풀과 같다’는 말은

그 당시 학교 주변에서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사실 서슬이 퍼렇던 그 당시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 분은 행정소송을 통해서 그 다음 해에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런 처분을 했던 관리들은 잘못된 관료주의 교육행정의 표본으로 교육사에 기록되어있고,

큰 위기를 만났던 학교는 계속 발전해서 지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훈화에서 인용된 제임스 럿셀 로웰의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진리는 언제나 단두대 위에

불의는 항상 왕좌에

단두대가 미래를 지배하는 듯이 보이나

진리의 뒤에는 보이지 않게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느니라」

 

앞으로도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박해가 따를 것입니다.

전에는 보이는 세력이 박해를 했습니다. 앞으로도 보이는 박해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나 사고방식의 박해가

더 큰 어려움을 줄 것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면 되는 것이지

예수 믿는다고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그러면서 살 필요가 어디에 있나?'

 

'요즘은 레저 시대야. 일요일은 레저의 날로 주어진 것이야'

'종교란 것은 그저 하나의 교양과 같은 것이야.

문화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 가운데 하나야'

 

'기독교도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야! 예수님이나 부처나 같아!'

 

이런 생각들이 더 문제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는 것이 더 문제가 될 것입니다.

 

불교의 조계종에서 청소년의 종교의식조사를 했습니다.

청소년 가운데 종교를 가진 청소년의 비율은 전체의 65.1%로 높지만

신앙적 확신이나 열정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확실히 믿는 청소년 신자는

천주교의 경우는 18.9% 밖에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45.1%입니다.

 

이런 청소년들이 변화되지 않고 자라서 종교의 주류를 이룰 때

종교는 보이지 않는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한가지 감사한 것은

개신교를 믿는 청소년들이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경우가 그래도 높다는 것입니다.

 

이 조사는 불교계통 대학의 교수가 담담했는데

그 교수는 조사의 결론으로 "조사 결과 종교적 확신이 뚜렷한 학생이

개신교도 중에 일부 있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양교회는 청소년 신앙지도에 힘써서 이런 위기를 미리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보이는 박해는 오히려 믿음을 더 굳게 만들어 주고

믿는 사람들의 단결을 더 굳세게 해 줍니다. 보이지 않는 박해는 믿음을 썩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회에 어려움을 줍니다.

 

김구(金九) 선생의 수기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고문을 당하는데 때리는 것, 묶어서 공중에 달아놓은 것,

고추 가루 탄 물 먹이는 것, 이런 악형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굶기는 것이고,

굶기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것은, 환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찰 간부가 자기 방으로 불러다 놓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면서

"당신이 이 민족의 지도자인데 너무 대접을 잘못하는 것 같다. 미안하다, 협력해 다오",

이렇게 환대를 하면 그만 더 버티기 힘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박해와는 용기 있게 싸울 수 있으나

편안한 환경 앞에서 그만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세 부패한 로마교회의 이야기이고 1990년대 이후 중국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목양교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순교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이나 일제 때나 공산치하에서는 칼이나 총이나 밧줄이나 고문으로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 순교였습니다.

 

지금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지금은 증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자란 말과 증인이라는 말이 어원이 같습니다.

 

앞으로는 믿음을 안으로 좀 먹는 이런 풍조에 휩싸이지 않고 이기는 것이 순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현대판 순교자, 미래의 순교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난날의 많은 어려움을 이기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이 사실을 통해 악의 세력은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시다.

 

악의 세력은 지붕이 풀과 같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합시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길 준비를 합시다.

 

앞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은 보이는 어려움보다 더 무서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합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감리교 신앙고백은 마지막 여덟 번 째 고백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사용하던 감리교 교리적 선언은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고 간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의 중간 승리를 나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의의 최후 승리, 더 큰 승리, 영원한 승리를 바라보며 나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십자가의 승리로 모범을 보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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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살라말리쿰

원래는 ‘앗살라무 알라이쿰’ 평화가 당신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

보통 사람들 귀에는 ‘살라말리쿰’으로 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