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다 잘 되셨습니다

LNCK 2025. 1. 14. 11:58

설교본문 색인             <신년, 송구영신>            ▣성경적 성공

2024년 12월 29일 "‘다 잘 되셨습니다(요한삼서 1:1~4)"  - YouTube

다 잘 되셨습니다       요삼1:1~4    2024.12.29.        

※요한삼서1:2절의 해석을 눈여겨 보셔야 합니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때가 되면, 누구나 다 마음의 계산기를 꺼내놓고 
올 한 해가 흑자였는지, 적자였는지 결산을 하시죠. 

흑자이신 분들도 계실 텐데,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바라고요. 
혹시 나는 밑졌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낙심하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흑자 적자를 가지고 판단하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차원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송년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성도님들, 또 저 자신도 
크게 격려하고, 축복하고,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살아낸 것만 해도, 여러분 너무나도 수고하셨고요. 
또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존귀한 자 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 하시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는 맨날 적자 인생 아냐?' 
이렇게 꾸중하듯 나무라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조용한 시간에 여러분 자신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년 한 해 수고 많았어, 올 해도 잘 살았어, 너는 아주 멋져!' 
이렇게 우리 자신을 격려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인생을 흑자/ 적자를 따라서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속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삼서는 편지죠.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로 되어 있는데 
아주 짧아서 한 장 밖에는 없습니다. 

1절을 보면 편지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죠.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도요한은 가이오 라는 분을 정말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1a절에서 한 번 말했는데도, 
뒤에서 '참으로 사랑하는' 이라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있는 걸 보면,  :1b 
사도요한께서 이 가이오를 정말 소중하게 사랑하셨구나... 이걸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2절에서 가이오를 위한 간절한 기원을 적고 있는데,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요삼1: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사도께서 가이오를 위해서 간구했던 이 기도가 
오늘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루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해석합니다.
'영혼이 잘 된다' .. 하나님을 잘 믿고 그 심령이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범사가 잘 되고' .. 자녀를 잘 키우고, 가정도 편안하고, 사업도 잘 돼서 
모든 면으로 에 형통한 것을,

'강건하기를' .. 몸이 건강한 걸 말하는 것으로! 

그래서 '이 세 가지가 다 갖춰져 있으면 부러울 게 없겠다'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평생의 기도 제목으로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성도들이 사랑하는데, 조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영혼도 잘 되는 것 같고, 범사도 잘 되고, 몸도 강건하면 
정말 나는 복을 많이 받았어' 라고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이구나. 올해도 내가 많이 밑졌어. 
나는 잘 된 게 없어...' 이렇게 마음에 낙심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잘 살았는지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좋아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부분에서 오해하는 부분도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귀한 말씀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또한 우리의 삶을 격려 하기 위해서, 
이 시간에는 이 말씀을 좀 깊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잘 된다' 죠. 
이 말의 헬라어는 '유오도' 라는 동사입니다.          εοδω
 
'유오도'는 두 단어가 합성된 동사인데,  유 (좋다) + 호도스 (길)
그렇다면 '유오도' (잘 된다) 란.. '좋은 길로 간다' 하는 뜻이죠. 

그 다음 질문은 '좋은 길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잘 되고'를 해석하는 중
여러분, 좋은 길은 어떤 길을 말하는 것일까요? 

'좋은 길로 간다'는 말은, 
넓은 길, 쭉 뻗은 곧은 길, 울퉁불퉁 하지 않고, 포장이 잘된 길을 뜻하기도 하겠죠.
이건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잘 되고'의 뜻입니다. *prosper, go well

비포장 도로라서 흙먼지 날리던 길이, 아스팔트 포장을 쫙 해서 넓고 깨끗한 도로가 되면, 
다니기가 쉽고 편해서 '잘 된, 좋은 길'이 될 수도 있죠.

그런데 '좋은 길로 간다'는 말은, 좀 더 깊이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서울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시다가 정리를 하시고,
친척의 제안을 받아서, 경북 봉화에서 과수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사과 묘목을 구해서 심고, 과수원을 조그맣게 하셨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곳으로 접근하는 게 조금 불편했어요. 오지였던 거죠.

거기가 낙동강 상류인데, 그 과수원에 가려면 
강을 건너고, 산길을 걸어야 되는 그런 곳이었어요. 

제가 방학 때마다 어머니 아버지를 뵈러 그곳을 가게 됐는데, 가는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청량리 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가는데, 요즘 KTX같은 열차가 없을 때이고, 
얼마나 느리게 가는지요. 기차가 모든 역마다 다 서는 거죠. 

영주역에서 내려가지고, 거기서 또 버스를 타고 가는데, 털털거리는 비포장길이었어요.
한참 시골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이제는 산길을 걸어서 과수원까지 가야 되는데,
다리도 없는 강을, 신발 벗고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건너야 되는 거예요. 
여간 어려운 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부모님 집에 도착하면, 진짜 하루 종일 걸렸어요.
아침에 일찍 출발해 가지고 온 종일 가야, 거기 과수원에 저녁에 도착했어요. 
참 먼 길이었고, 험한 길이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면 '좋은 길'을 따질 때, 
넓고 평탄한 대로의 포장이 잘 된 길을 '좋은 길'이라고 한다면, 
제가 아버님의 과수원으로 가는 길은 그와 정반대죠. 
길이 불편하고, 오래 걸리고, 험한 길이니까요. 그건 아주 '나쁜 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제가 그 과수원으로 가는 길이, 제게 정말 '나쁜 길'이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하루 종일 걸려서 갔지만, 제게는 그 길이 '정말 좋은 길'이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뵙고 싶은 부모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길이거든요. 

제 부모님이 계신 과수원으로, 저를 정확하게 인도해 주는 길이거든요. 
그래서 그 길은, 제 마음에 소중한 길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가끔씩 그 길로 가본 적이 있고, 

아내에게 '그 길을 함께 가보자' 했을 만큼, 제 마음 속에 아주 '좋은 길', 
평생에 제가 걸어갔던 길 중에서, 정말 제 가슴 속 깊이 기억되고 있는 '좋은 길'로 
제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할 때, '좋은 길'에 대한 기준이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평탄한 대로, 쫙 뻗은 길이 좋은 길이 아니라, 
나를 올바른 목적지에 닫게 해주는 길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아무리 넓은 길, 포장이 잘 된 좋은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달려가면 갈수록,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진다거나
엉뚱한 길을 가거나, 죄악된 길을 평탄하게 달려간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 아니죠. 

험하고 구불구불하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나를 정확히 올바른 목적지에 닫게 해주는 길,
그 여정이 즐거운 길이.. '좋은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면, '좋은 길'의 평가 기준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럴 때 그 '좋음'을 평가하는 기준은, '넓으냐, 포장이 잘 됐느냐' 그런 게 아니라, 
'그 길이 나를 올바른 목적지로 정확하게 데려다 줄 수 있느냐' 하는, 
방향성이 문제가 된다는 걸 알게 돼요. 

목적지와 방향이 옳으면 좋은 길입니다. 
목적지와 방향이 틀렸으면 나쁜 길이 되는 거예요. 
도로의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목적지와 방향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에요. 

올바른 목적지, 옳은 방향 인가? 
그릇된 목적지, 틀린 방향 인가? .. 이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 이 좋은 길로 간다.고 얘기할 때 결국은 
그 내용은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추구해야 될 가치가 무엇인지가 여기서 나타나죠. 
여러분, 우리는 그저 평탄한 대로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의로운 목적지로 올바르게 데려다주는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돼야 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될 가치는 
편리한 거, 빨리 갈 수 있는 거, 평탄한 거, 좋은 거... 그런 게 아니라 옳음 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옳음 과 바름을 추구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죠.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될 가지예요.  *'잘 됨같이.. 잘 되고' 요삼1:2

그래서 여러분 내가 지금 옳은 길로 가고 있으면... 그게 잘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바른 인생을 살고 있으면... 그게 잘 되는 겁니다. 
그게 '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할 때의 '잘 되는' 길입니다.  *요삼1:2

내가 지금 아무리 평탄한 대로를 달려가고 있어도, 
내가 목적지나 방향이 틀린 길을 가고 있는 거라면, 
남들이 나를 부러워 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 잘 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잘 된다'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새롭게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2절에 두 번 나오죠. '잘 됨같이, 잘 되고' 두 단어는 같은 말입니다.  *유오도 

여러분,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평생을 옳음과 바름을 위해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될 가치입니다. 

그러면 옳음, 바름은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절대적 옳음과, 바름을 찾을 수가 없죠. 
옳음과 바름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옮음의 근원이시고, 모든 바름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옳음과 바름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만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만이 바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철저히 하나님께 맞출 때, 
그게 옳은 길이 되고, 바른 길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잘 되고 있다'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옳음과 바름을 빽빽하게 담아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게 있는데 그게 뭘까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성경은, 우리를 옳게 만들고, 바르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거죠.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이 성경말씀이, 우리를 편리하게 해준다, 우리를 풍요하게 해준다,
내가 원하는 걸 다 얻도록 해준다... 그게 아니라, 
우리를 바르게 해준다고, 옳게 해준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잘 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다 잘 되는 게' 
그게 복을 받은 삶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내가 그 옳음과 바름을 통해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그게 바로 진정으로 '잘 되는'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이처럼 중요하고, 
옳은 길을 가는 것, 그게 바로 잘 되는 거라고 한다면, 
이제는 생각을 좀 달리 해야 되는 것이죠. 

연말이 되어가지고 지난 한해를 결산해 볼 때, 
내가 금년에 뭐 하고 싶은 거 못한 게 많고, 얻은 것도 없고, 
심지어 가지고 있던 것도 많이 잃었네. 그래서 나는 실패자다.' 
이렇게 평가하면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옳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거는 지금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준이 달라져야 되는 거잖아요.            

여러분 이거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볼 수 있어요. 
마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제자들과 함께 가셔서 
그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시잖아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건 세상의 의견을 묻는 것이고,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은 두 번째 것인데, 
'너희는 제자로 나를 따라다니면서 이제까지 배웠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두 번째 질문이 중요한 거잖아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기가 막힌 대답을 했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짧지만 아주 정확한 대답을 예수님께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뻐 하시면서, 그를 칭찬 하셨어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에 권세가 이기지 못할지니라' 하면서 
베드로를 굉장히 칭찬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전까지 제자들에게 단 한 번도 말씀한 적이 없었던 
숨겨둔 비밀을 처음으로 꺼내셨는데, 그게 마16:21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16:21

'비로소 나타내신다'는 거는, '처음으로 말씀하신다' 그런 뜻이에요. 
당신이 죽으신다는 것, 그리고 부활하신다는 걸 처음으로 말씀했어요. 
그랬더니 제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죽으신다'는 소식이 너무 크게 충격이 되어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은 귓전에 닿지도 않았는지 
그들은 놀란 나머지 예수님을 가로막는 거죠. 
'절대로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베드로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가로막죠. 

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겉으로 보면, 그가 예수님 걱정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나 그게 주님을 걱정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자기들을 걱정하는 것이었어요. 

그가 이렇게 항변 하듯 예수님을 가로막았을 때, 
예수님은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방금 전에 그토록 칭찬했던 베드로를 가리켜서 '사탄' 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러분 왜 그를 '사탄'이라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사탄이 생각하는 걸 생각하니까!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건데, 
네가 지금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 너의 일만 생각하니까, 
사탄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니까, '사탄아' 라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 두 가지 일이 있잖아요. 하나는 사람의 일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뭡니까? 제자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일이죠. 

제자들은 배도 그물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그 목적이 뭡니까?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자기들의 욕망과 출세를 위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특별히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니까, 
예수님께서 큰 일을 하시고, 정말 왕이라도 되시면 
'우린 그 옆에 있다가 한 자리씩 하겠다'고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자기 욕망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신다고 하니까, 충격을 받은 거죠. 
'우리는 어떻게 되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뭘까요? 
그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거,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게 하나님의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 하시기로 작정 하시고, 
독생자 메시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 하실 계획을 다 세우시고, 

그걸 선지자들을 통해서 구약 시대 때에 여러 가지로 예언을 하셨고 
그 모든 예언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면서 때가 찼을 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여 오신 것이고 
이제 그분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실 것이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실 것이고, 

결국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활짝 열어서 
우리가 영생을 누리도록 하시는 이 계획,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 
이게 '하나님의 일'인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냥 너희들의 인간적 욕망을 달성하는 것만 생각하는구나 
그러니 사탄이 생각하는 걸 너희들도 생각하니까 
사탄과 다를 바가 뭐가 있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렇게 하신 것이에요. 

여러분 여기 대단히 중요한 게 있어요. '잘 되는' 게 뭡니까? 요삼1:2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는' 이라고 했을 때, '잘 되는' 것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게, 잘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그게 잘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잘 된다'고 하는 단어를, 
우린가 다시, 올바르게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된다'는 것을,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다' .. 라고 
내 입장에서 인간적인 해석을 해 왔기 때문에,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걸 얻고자 하는 기복적인 동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성경적 신앙이 사라지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속적인 그런 기준에 의해서 혼란을 겪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요삼2절에서 '잘 된다'고 하는 그 단어의 뜻을, 
우리가 새롭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던 밤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 예수님 앞에도,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딱 두 가지가 있었어요.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될 때까지 기도 하시는데, 처음에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아버지여,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그 처참한 고통이 내게 오지 않게 해주세요.' 

근데 예수님은 곧 기도를 바꾸잖아요. 뭐라고 바꾸셨어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즉 사람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졌죠.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요?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죽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잘 된 게 아니라, 최악으로 된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잘못 되셨나요? 아닙니다. 
그거야말로 예수님이 가장 '잘 되신' 길이에요.  *요삼1:2

예수님은 그 '비아 돌로로사' 그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을 걸으셨어요. 
그래서 채찍질 맞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피 흘리고 죽으신 그게 
예수님께는 제일 잘 된 길이에요. 

왜냐면 그 분이 그 길을 올라가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구원의 길을 이루셨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고, 
만왕의 왕이 되셨고, 만주의 주님이 되셨어요. 

주님은 얻어 맞으심으로 잘 되신 분이시고, 
피 흘리심으로 잘 되신 분이시고, 
죽으심으로 잘 되신 분이세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렇게 잘 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시고, 십자가 같은 건 지지 않는 것, 
그게 인간적으로 보면 '잘 되는' 건데, 
그건 주님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방법이 아니잖아요. 

비아 돌로로사, 그 길은 그래서 예수님에게 고통의 길이었지만, 
당신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올바른 목적지에 도달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길, 유오도' 였다 라는 것을   *εὐοδόω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죠. 
그 골고다의 길이, 가장 좋은 길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2절을 이렇게 우리가 새롭게 생각을 고쳐서 하고, 
그리고 나서는 3절과 4절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에요. 

◑요삼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여러분, 우리는 2절까지만 읽고, 2절을 암송하고 좋아하는데, 
3절 4절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요삼1:2~4절이 내용적으로 다 연결된 것이에요. 

2절에서 '잘 되는' 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 '잘 되는' 것이고, 
그 길이 구불구불하고 험한 길이라도, 올바른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이끌어 주면, 
그게 '좋은 길'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런 면에서 '가이오' 라는 분을 보면, 가이오는 '잘 되고' 있는 사람이에요., 
가이오에 대한 정보가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에 
그가 나이가 몇 살이고, 어떤지 정보가 우리에게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한삼서 전체를 읽어보면 '나이가 지긋한 분일 거다. 
그리고 초신자가 아니고, 그 지역 교회의 중심 인물이고, 
아주 너그러워서 순회전도자들도 잘 대접하는.. 잘 섬기는 분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근데 그는 2절 말씀대로 '잘 되고' 있어요. 
그가 힘이 있고, 재력이 있고, 그가 아주 대단해서 '잘 되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가 진리 가운데서 행하기 때문에' 그는 잘 되고 있는 거예요. :3

여러분 3절과 4절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뭡니까? '진리'입니다. 
'네게 있는 진리',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3
'내가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걸 듣는 것보다 더 기뻐하는 게 없도다' :4
이렇게 '진리'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죠. 

진리가 뭡니까? 진리가 다른 게 아니에요. 옮음과 바름.. 이게 진리예요. 
진리가 뭡니까? 올바른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하게 해주는 거, 그게 진리예요. 

잘 되려면 진리의 길을 가야 되는 거죠. 
근데 지금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가이오가, 잘 되고 있는' 겁니다.  :3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있는' 것은,
편지의 수신자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잘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좀 더 온전하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오늘 말씀을 묵상을 했으니,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차례입니다. 

아까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연말에 계산기를 꺼내 놓고 
'올해 흑자 였나, 적자 였나? 잘 살았나, 잘 못 살았나?' 이렇게 결산할 때, 
인간적,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내가 원하는 것도 얻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했으면, 
나는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금년에 나는 잘 못 살았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정확히 우리 자신을 다시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요. 

여러분이 진리 가운데 거하고 계시면, 
여러분은 혹시 경제적으로 잃은 게 많고, 고단하고 어려운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 할지라도,
잘 못 사신 게 아니라, 오히려 잘 되신 겁니다. 잘 되신 것이에요! 

제가 이 말씀을 정리하고, 원고를 타이핑 하면서 
제 마음 속에 감사한 생각도 있고, 눈물도 나고 그랬는데... 
'아, 우리는 다 잘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다 잘 되셨습니다" 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거거든요...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