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하나님의 선언,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LNCK 2025. 1. 14. 20:2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사랑

내일교회 2025-01-05 주일예배 // 하나님의 선언: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 YouTube


하나님의 선언,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말1:1~5      2025.01.05. 

새해 2025년에는 오늘부터 두 달 동안, 주일 낮예배 때 <말라기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8주 정도 말라기서를 살피면서, 2025년 워밍업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성경, 또한 마지막 선지서가 말라기서입니다. 
그런데 이 말라기서가, 제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지금 저희들이 처해 있는 현실 상황, 또 교회 상황과 잘 부합되는 면들이 있는 것 같아서
앞으로 두 달 동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말라기서의 배경

선지서를 대할 때 제일 어려운 거는 뭔가 하면,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선지서를 다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말라기서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가졌던 여러 가지 문제들,
그 문제들이 말라기서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제가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는데,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크게 세 차례 공격을 당합니다. 
그래서 세 번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마지막 최종적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때가 주전 586년 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때는, 그때로부터 한 50년이 지납니다.
 
첫 번째 바벨론 포로는 주전 605년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데, 
그때부터로 계산하면, 말라기 시대는, 1차포로 후 약 70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주전 535년 경에,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즉위하면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에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놀라운 일이 70년 만에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126:1 
그들은 너무 감격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놀라운 역사죠.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뭔가 하면,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텅빈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이나, 다른 이방인들이 
집요하게 반대를 해서 결국 좌절이 되고, 15년 동안 성전재건 공사가 진행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려하고 격려해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20년 만인, 주전 515년 경에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 완공됩니다.  *소위 스룹바벨 성전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고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한 20년의 시간은 (주전535~515)
어떤 시대였겠습니까? 

 

정말 포로귀환 후 처음에는 꿈과 열정이 넘쳐났던 시대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고, 마침내 온갖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그들은 건축을 했습니다. 재건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니까 꿈과  열정이 가득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면,  
이사야나 많은 선지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이 세상에 빛으로 세워질거다'라는 
그런 기대와 예언을 했는데,  그들이 현실의 삶에서 직면한 것은,  
그런 놀랍고 영광스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다에 (빈 땅에) 정착해서 살던 이방인들한테  집요하게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그런 싸움과 갈등들이, 그때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큰 경제적인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가뭄으로 대표되는 아주 극심한 경제적인 고난들이 찾아오게 되고,  *요엘서
그런 과정 속에서 그들이 가졌던 신앙의 열정과 뜨거움들은, 점점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예배가 형식적이 되고,  
성전에 나와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세상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게 되고,  

이런 영적인 침체와 타락에... 누가 또 가세했느냐?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이 타락의 흐름에 같이 동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무너지니까, 그 다음에 무엇도 무너지느냐? 
가정도 무너지게 됩니다. 이방인들과 결혼하기도 하고, 
또 가정을 이루었지만 이혼당하는 여인들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여인들이 정말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꿈과 열정이 아니라 점점 
절망, 냉소주의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뭐가 남느냐?' 

이런 냉소주의가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점점 만연하게 되고, 

그들은 교회(성전)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들 마음에는 환멸감이 막 생기게 되는... 이런 시대가 바로 말라기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 말라기서의 말씀을 주시는데, 말라기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뭔가 하면,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6번의 논쟁을 합니다. 

6번의 논쟁을 하고, 그 논쟁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
또한 그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그들 마음 깊숙한 곳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대한 잘못된 마음, 잘못된 생각을 
말라기는 다 드러내고, 그것을 바르게 잡아나갑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날을 준비하게 하시는 내용들이
이 말라기서의 줄거리 입니다.  

제가  간략하게 설명을 드렸지만, 이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하고, 
오늘날 한국교회 모습과 많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꿈과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 이 이루어지고
세계 속에 한국이 기독교 중심국가로 세워지는, 그런 놀라운 꿈과 비전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과 열정은, 그때로부터 한 20년이 지난 지금은.. 다 그냥 사라졌습니다. 
다 사라졌고, 하나님 백성들은 점점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 
'믿음대로 살다가는, 말씀대로 살다가는.. 쫄딱 망할 것 같아요.'
(*주식, 부동산, 코인, 환율 등이 한국사회를 강타하지 않았습니까) 

또 성도들의 삶의 여건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도 대구에서 산지 30년 되어가는데, 지난 30년 동안 한 번도 '경기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제가 봐도 경기가 최악인 거 같아요. 쓸 돈이 없다고들 하죠.
아 정말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이 너무 어렵습니다. 특히 자영업자들. 

그래서 교회에 오면, 뭔가 마음의 희망과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되는데, 
많은 경우 일부 교회는, 교회대로 성도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부 교회는, 교회에 나오면 희망보다는, 오히려 분노와 절망을 느끼는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사라지니까, 이제는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 마음속에, 깊은 내면에는, 냉소주의... 
즉 '하나님을 잘 섬기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신앙에 대한 깊은 냉소주의가, 성도들의 마음에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말라기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이 6가지의 논쟁을 같이 한번 살펴보면서   

성도들이 먼저는 자기 모습도 한번 살피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해서 명확하게 밝혀주시는 말씀, 
그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한번 확인하고 붙잡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입니다. 

◑1. 첫 번째 논쟁인데,    1:1~5

말1:1절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말라기' 이름의 뜻이 재밌는데, 성경 하단 각주에 보면 '나의 사자 my messenger' 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 이 말라기 라는 이름이 
일반명사인가, 아니면 고유명사인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말라기 라는 어떤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냐?       *고유명사 
-아니면 '하나님의 사자'를 대표하는 사람의 글이냐? *일반명사 

전통적으로, 또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고유명사다, 말라기 라는 사람의 이름이다'
라고 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그런데 이렇게 한 번 해보겠습니다. 설교자인 제가 '말라기'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가정하고서, 본문을 한 번 교차로 낭독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거죠.

설교자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회중 :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설교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나머지 구절도 그렇게 읽어보시면,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2
그러면 이 말씀을 전달받는 여러분 마음에 기쁨이 넘치십니까?

'아멘, 맞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라고 반응하는 분들도 일부 계실 텐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2

이 말은 뭐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전혀 그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는 거죠. 

혹시 이런 백성들의 대답이, 오늘날 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응하는 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볼 때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자 백성들이 이렇게 반응을 보이니까,  
2절 마지막 부분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라는 것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다' 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시키는 내용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고요.   *1차 논쟁

그래서 오늘 제가 설교를 잘했나, 아니면 죽쑤었나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집에 돌아가실 때, 여러분의 마음에 
'아 그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어. 하나님은 나를 지금 사랑하고 계셔!' 
이런 마음이 들면, 제가 오늘 설교를 잘 한게 되고,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하나님은 역시 나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는 거 같아!'라고 생각하시면, 저는 죽쑨 겁니다.

▲그 하나님의 논지(내가 너희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첫 번째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2

그렇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은 누굽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야곱의 바뀐 이름이죠.
이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름이 나왔습니다.  

에서는 누구죠? 쌍둥이 형인데, 조금 있으면 등장할 에돔 족속의 조상입니다. 
에돔은 '붉다'는 뜻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은 치열한 앙숙간이었어요. 
 
요즘은 별로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장자들은, 그 다음 자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권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도 장남이거든요. 저도 할머니 밑에서 컸는데, 
제 동생이 한 번씩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형, 내가 장남으로 안 태어난게 서러울 때가 많아' 

정말  부모님들이 장남에게 (죄송한 표현이지만) 몰빵 하신 적이 많았잖아요. 
고대에는 더 심했죠. 장자는 두 배의 몫(유산)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야곱의 형이니까, 하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해야 됩니까? 
장자인 에서를 사랑해야 되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2~3

충격적으로 '내가 장자 에서는 미워했다'
근데  오해하면 안 되는 거는, 이거는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가 아닙니다.  

고대 근동에서 '사랑과 미움'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많이 등장했느냐? 
외교 문서에도 많이 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동맹관계를 나타낼 때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썼고, 
동맹이 깨질 때는 '미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내가 야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두 가지를 하십니다. 
-하나는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고 
-또 하나는 그와 사랑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언약을, 하나님은 장자였던 에서와 맺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동생이었던 야곱과,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언약관계를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창25:23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쌍둥이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둘이 복중에서부터 치고받고 싸우니까 리브가가 너무 괴로운데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 족속이 저 족속 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25:23

지금 말라기를 통해 하신 말씀의 성경적인 배경입니다. 
어떻게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 라는 말씀을 할 수 있느냐?' 
이 창25:23절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말씀을 하셨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

에서가 야곱의 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야곱을 사랑했고,  
아무도 끊을 수 없는 그 언약관계, 사랑의 언약관계를 맺으셨다는 거죠. 

2) 두 번째는, 에서는 미워하신 (덜 사랑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야곱을 사랑하신 것

 

3절 후반부를 보면, 거기에 에서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뒤 부분은 에서의 자손, 에돔 족속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b절

 

1:3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은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에돔이 가장 자랑하는 게 뭔가 하면, 아주 높은 산에
천연 요새와 같은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지금도 요르단 지역에 가면, 에돔 사람들의 도시를 볼 수 있는데,  *페트라 등
지금도 기가 막히는... 그 높은 산지에 정말 난공불락과 같은 요새를 건설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산들을 하나님이 황폐하게 하셨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에돔은 누구한테 망했느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3절 후반부에 나와 있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경험'은  
에서, 즉 에돔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이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과거에 바벨론에게 처절하게 망했습니다. 
근데 그 경험을 에돔도 같이 했습니다. 에돔은 조금 늦게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자 이거는 공통의 경험입니다. 

1:4절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에돔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에) 무너뜨림을 당하였지만, 황폐된 곳을 다시 쌓을 거다'  :4
아주 불굴의 의지죠. 
이렇게 에돔은 이스라엘보다 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재건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나는 무너진 성읍을 다시 쌓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그들이 쌓은 것을) 허물어 버릴 거다'  :4

그래서 고대 근동 사람들이 그들 에돔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이냐?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4

무슨 뜻이냐면, 에돔은 재건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한 진노를 받는 백성으로 만들어 버릴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5절을 보시죠.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하나님은, 지금 이 말라기서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그분은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너희가 눈으로 보고, 생생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 말씀을 듣고 나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야, 하나님이 나를 무척 사랑하시는군요!' 이렇게 마음이 막 뜨거워나요? 
아직 아닐 것입니다. 

대신에 So what? '그래서 도대체 어쨌다는 겁니까?'  
이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4절 마지막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질문이 하나 담겨져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야, 에돔은 너희들보다 더 강력하고 
이렇게 재건에 대한 의지를 그들 스스로 불태웠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꺾어 버리셔서, 영원한 진노를 받게 하셨다'

그 다음에,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질문은 
'너희들은 어떠니?, 너희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니?' 라는 질문이 
이 4절 마지막에 담겨져 (숨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상태죠? 
그들도 에서의 동생으로서, 야곱의 후손들이고 
그들 역시도 에돔과 같은 처절한.. 소위 바벨론으로부터 멸망을 그들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이스라엘은 에돔만큼 강하지도 못했고, 
또 에돔만큼 강렬한 재건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던 것도 아니고,  
에돔과 비교했을 때 그들은 연약한 투성이었는데, 
그러면 그들 이스라엘은 어떤 현실을 맞아야 되나요? 
에돔보다도 더 절망적인 여건과 상황 속에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그들은 고된 삶이라고 원망하고 신앙의 냉소주의에 빠져 있지만 
그들은 에돔과는 달리, 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고된 삶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그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은 
'너희들은 에돔(에서)보다도 더 약한 민족이고, 더 처절하게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너희들이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살아있니?' (사실 에돔은 그 이후로 영원히 망했죠)  

라고 하나님이 질문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답변은 무엇이겠습니까? 
답변을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들은 아직 망하지 않고, 생존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적용

여러분, 어떻게 실감이 나실지 모르겠는데, 
이 말씀은, 제 개인적으로는 제 자아가 겪었던 갈등과 비슷합니다. 

저는 자아상이 특별히 대학을 가면서 완전히 그냥 망가져 버렸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충격이었고, 어려웠던 순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저도 고등학생 때까지는, 저도 대구에서는 천재 중에 저도 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수학이나 과학 이런 쪽에서는, 저도 꽤 잘 하는 쪽에 들어갔었는데, 
근데  서울대 물리학과를 들어갔을 때, 정말 저한테는 충격이었어요. 

저 같은 애는 거기에 명함을 내지 못하겠더라고요. 
대구의 고등학교에서 1등, 이것 가지고는 명함을 낼 수도 없고, 
최소한 시, 도에서 1, 2등은 해야, '조금 머리가 좋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곳이었고,  

정말  저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진짜 천재들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게다가 그 친구들은 저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집안, 좋은 여건을 가졌고, 
저는 그때 비로소 '내가 정말 돌대가리구나. 내가 게으르구나. 나는 흙수저구나.. 
그리고 공부하는데 나는 의지가 약한 존재구나...' 

저는 거기에서 정말 제 인생에 가장 깊은 좌절을 맛봤고, 
'나는 지금 아무리 몸부림치고 노력을 해도, 이 동급생들은 못 따라갈 것 같아...' 
정말 열등감이 저를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근데 그때 제가 하나님과 말씀을 통해 교제를 했을 때, 
저는 항상 이 트라우마가 제 안에 있었어요. 

남들은 저를 볼 때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오고 공부를 잘 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내가 아는 나는 '돌대가리고, 게으르고, 의지가 박약하고,  
그리고 일어설 힘도 갖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짜 내 모습 안다면, 다 실망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 
저는 항상 저한테는 그게 트라우마와 같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말라기서를 묵상을 하다가 큰 은혜와 깨달음을 얻었는데,
바로 이 질문이었죠. 오늘 본문에 나온 질문!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이스라엘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죠. '하나님, 어떻게 저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 내가 공부 때문에 그렇게 좌절할 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한 번도 하나님은 저한테 공부에 대해서 도와준 적이 없지 않습니까?  

또 가정이 여러 가지로 어려웠을 때, 저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겠다고 
남들 다 하는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기회도 깨끗하게 포기하고 
내 경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았는데, 
하나님 섬기는 일을 첫자리 두면서 살았는데, (*대학부 봉사한다고 과외도 안 했는데)
하나님은 (저를 풍족히 채워주시기보다는) 정말 그때 저를 거지같이 살도록 만드셨지 않습니까?'   

'우리 집안도 정말, 그래도 하나님 첫자리 두려고 (할머니, 어머니가 기도하며) 몸부림쳤는데, 
우리 집이 하는 사업마다 족족 실패하게 만드셨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나를 사랑하셨다... 그런 말장난 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했던 적이 한때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한테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야, 나는 너를 사랑했어!' 

정말  만약에 대학 같으면 물리학과에 그 똑똑한 애들,  
또 같은 고등학교 졸업했던 동창 친구들 중에, 
대학졸업과 동시에 사법시험에 수석하고 정말 잘 나갔던 동창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 그 잘난 애들 내가 제쳐두고, 내가 너를 택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야, 나는 너보다 잘난 애들이 그렇게 많지만,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해서 너를 택했다'라고
제게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정말 그때 제 인생에 전율이 느껴지는 깨달음!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능력 있고 쓸모있었서가 아니라, 
나는 이유도 알 수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선택하셨구나'  

▲또 하나님은 제 인생을 쭉 한번 보여주셨어요. 
쭉 보여주시면서 계속 질문하셨습니다. 

'야 관형아, 그때 너 어떻게 이 (목회의) 길을 걷게 됐니?' 
그때 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항상 갈림길에 놓여 있었거든요. 

저쪽 길로 갔으면, 제 인생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졌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연약해서, 자꾸 내가 사는 (성공하는) 편으로 가려고 했어요.

 

망할 길, 죽을 길, 십자가 길로 가야 했었는데,  
저는 반대로, 살 길로 찾아서 저는 그쪽 길로 갔었어요. 

그때 내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강권해서, 나를 이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또 다른 갈림길이 나왔을 때, 
이번에는 '이 길로 가면 반드시 죽을 텐데, 망할 텐데', 
하지만 믿음으로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나를 살 길로 인도해 주셨어요. 

그래서 계속 하나님께서 저한테 질문을 하셨어요. 
'너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니? 이 길은 네가 원한 길이 아니잖아? 
너 어떻게 이 길로 여기까지 오게 됐어?'  

또 하나님이 마지막 저한테 하신 말씀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증거가 뭔 줄 알아? 
너 지금 살아 있잖아? 너 지금 살아있잖아?'  

제 친구들 중에, 저하고 비교할 수 없이 똑똑하고, 좋은 조건을 가진 친구들 중에
지금 이 땅에 없는 친구들이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근데 벌써 유명을 달리했던 친구들도 참 많습니다.  

저는 항상 그게 신기했어요. 
'어떻게 나같이 의지가 박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내가 어떻게 이 험한 세월을 견뎌내고, 지금 살아있는 것일까?' 

'아니 이 친구들은 지금 못 버텼는데, 나보다 더 탁월한 애들은 다 쓰러졌는데, 
어떻게 나 지금 살아있는 거지?' 항상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그림들을 보여주시면서 
'야, 나는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너는 지금 살아 있잖아, 너는 살아 있잖아?' 
(본문에 에돔은 망해서 없어졌지만, 이스라엘은 건재했습니다)

 

저는 그 음성 '너 살아있잖아, 네가 살아있는 이유가 뭔 줄 알아?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내일교회에 30년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계시는 분들 중에 
여러분의 인생을 조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인생을 관찰했듯이, 저도 여러분의 인생을 관찰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 항상 제 마음에 가졌던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어떻게 저 분이 살아 있나? 어떻게 저분이 저런 세월, 저런 고난들을 겪으면서도, 
아직 지금 살아 계신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분이 여러분을 불러 주셨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의 손으로 붙잡고 계시고, 
절대로 놓지 않기 때문에... 바로 여러분들이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요즘 나라 때문에 다 난리죠. 
저는 외국에서  한번씩 공부하는 동안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과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도 역시 세상은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그 친구들한테 
'우리나라가 시끄러워서, 내가 요즘 정말 머리 아프고 힘들다'

그러면 그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저한테 이야기 합니다.
'너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니? 
지금 너희들은 총싸움 안 하잖아? 납치 당하지 않잖아? 가족들이 사라지지 않잖아? 

너희 나라는, 우리가 볼 때는 기적의 나라야 기적의 나라! 
그런데 어떻게 우리 앞에서
내가 힘들다, 고통스럽다 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 

100년 전만 해도 우리와 똑같이 밑바닥에서 살았던 나라가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가 볼 때는 기적의 나라야, 기적의 나라!'

여러분, 저는 지금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그런 현실 앞에 서 있지만  
그러나 지난 경험들을 통해서 볼 때, 
과거에도 만만치 않은 아픔과 좌절을 우리는 겪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우리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바로 이런 일들이 있었던 거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었는데 어떠신가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에서를 미워하였고, 야곱을 사랑하였다' 

바로 이 믿음이, 이 말씀이, 우리 영혼에 확인 되어지면, 
우리 영혼에 불이 붙게 됩니다. 

저는 이 한 주간, 2025년 첫 번째 주간인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깨닫고, 
바로 성령이 주시는 그 불로, 우리 마음이 한번 뜨거워져서 
금년 한 해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내일부터  우리 특별새벽기도회 하는데, 우리 애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아빠, 특새 끝난지 얼마 안 됐는데, 뭐 또 해?'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야 아빠도 힘들다...'
그래서 제가 오늘 주제를 좀 세게 잡았어요. "인생의 구원자, 기적의 하나님" 

제가 이빨 깨물고.. 어차피 괴로우니까 주제라도 세게 잡자! 
우리 주님은 누구냐? "인생의 구원자, 기적의 하나님!"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을 살펴 보고, 
바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가  
우리 성도들의 삶에 나타나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같이 한번 찬양을 드리겠는데 '일어나 걸어라' 찬양드리겠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